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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갈라디아서강해-MR디한

갈라디아서 강해(17)

by 복음과삶 2005. 7. 2.

 

갈라디아서 강해(17)

 

M.R 디한


 

죄의 정욕

 

갈라디아서 3:19에 기록된 바울의 말에 의하면, 율법은 모세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 율법의 목적은 구원에 있어서 은혜의 필요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이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음을 이미 살펴보았다.

1. 시대적인(세대적인) 특징
2. 민족적인 특징
3. 실험적인 특징
4. 시사적(示唆的)인 특징


우리는 이제 율법의 또다른 면, 즉 계시적인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율법은 타락한 인간 본성의 무시한 면을 계시의 빛을 통해 비춰주는 역할을 한다. 로마서 7:5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 구절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핵심적인 어구가 하나 있다. 특히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 이라는 말에 주목하기 바란다. 여기서 ‘죄의 정욕’ 이란 죄의 활동과 역사를 말한다. 바울은 “이러한 ‘죄의 정욕’ 이 율법으로 말미암았다” 고 했다. 죄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것은 아니었으나, 죄가 율법에 의해서 활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 하였지만, 죄를 없이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8절에 보면 “법(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죽었다는 것’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을 의미한다. 죄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나, 죽은 것 같았다. 그러다가 율법이 이르러서 지금까지 내내 있어 왔던 것을 요동시켰던 것이다. 즉 사람들이 죄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율법에 의해서 죄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예화를 들어보자. 내 앞에 한 병의 물이 놓여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그 물을 손대지 않고 몇 시간 동안, 혹은 며칠 동안 가만히 내버려두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물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가만히 있어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물은 죽어 있었다.” 그 물은 상당히 깨끗해 보였고, 마셔도 좋을 만한 물로 보였다.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그 유리병의 바닥에 침전되어 있는 미세한 앙금들을 탐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물은 죽어 있는 것같이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찻숟가락을 가지고 그 물을 휘젓기 시작하면, 금방 더럽고 뿌연 찌꺼기들이 물을 흐리게 만들고 그 유리병에서는 더러운 냄새가 풍겨 나오게 된다. 즉 그 고요한 물의 밑바닥에는 더러운 찌꺼기들이 발견되지 않은 채 있었으나, 찻숟가락으로 물을 휘젓게 되자, 드디어 밝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찻숟가락이 그 물을 더럽힌 것은 아니었다. 그 물은 원래 더러운 그대로 내내 있어 왔다. 단지, 찻숟가락으로 그 물을 휘저었을 때, 그 더러운 찌꺼기들이 드러난 것뿐이었다. 찻숟가락은 그 물을 깨끗케 할 수 없다. 그 물을 깨끗케 하기 위해서는 그 찻숟가락을 꺼내어 옆에 두어야 한다. 이제 찻숟가락의 역할(기능)은 끝났다. 이제 그 물병을 들어서, 그것을 여과기에 거른 다음, 불에 끓여 증류시킨다. 그러면 그 물이 깨끗케 된다. 그러므로 찻숟가락을 그냥 옆에 두고 그것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찻숟가락이 물을 직접 깨끗케 하지 못했으므로 무용한 것이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찻숟가락은 할 일을 다한 것이다. 즉 그것은 물병 안에 있는 앙금을 잘 보이도록 드러내는 일을 다 했기 때문에, 이제 옆에 놓아두게 된 것이다. 그 찻숟가락에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율법이라는 숟가락

이제,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활동, 역사)” 이란 본문의 말씀을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어떤 물건이 움직이게 되면, 그것은 눈에 띄게 되고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것이 가만히 있을 때에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일단 움직이게 되면 눈에 띄게 된다. 그런데 죄는 율법에 의해서 활동이 시작된다. 앞의 예화에서 사용된 물병은 이제 당신의 마음이다. 그것은 휘젓기 전에는 아주 깨끗한 것처럼 보인다. 숟가락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죄를 휘젓는 율법을 가리킨다. 율법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율법은 죄를 야기시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음을 정결케 하는 것도 아니다. 율법은 단지 ‘거듭남’이라는 증류가 필요하다는 위대한 사실을 드러내 보일 뿐이다. 율법은 숟가락과 같이 제 할 일을 완수했다. 이제 숟가락(율법)을 옆으로 제켜 놓는다는 것은, 이미 물(인간)이 깨끗케 될 필요를 드러냈기 때문에 율법이 전혀 쓸모가 없어졌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또 하나의 예화

또 하나의 예화를 들어보자. 나의 아내와 내가 결혼했을 때, 독신으로 살고 있는 한 아저씨께서 우리의 식욕을 돋구어 주기 위해 큰 과일 바구니를 선물하셨다. 그런데 그 바구니는 직경이 약 46센티미터나 되는, 너무나 크기 때문에 쓸 때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몇 년이 지나도록 선반 꼭대기에 얹어 놓고서 집안 청소할 때나 한 번씩 옮겨 놓곤 하였다. 나의 아들들은 그 바구니를 수백 번씩이나 바라보았어도 그들의 마음에 아무런 호기심도 갖지를 않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특별히 관심을 끌 만한 물건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느날, 내가 아들을 불러서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얘야, 너 저기 선반 위에 있는 큰 바구니 보이지?” “예, 아버지. 그런데 왜요?”
“너, 그 바구니 속을 절대 들여다보지 말아라. 만일 네가 그 바구니 속을 들여다보려고 하는 것이 내게 발각되기만 하면 넌 심하게 맞을 줄 알아라.”
이처럼 필자가 그 명령을 반복해서 말하고, 또한 그에 대한 형벌을 말했다고 하자.
그리고 나서, “이제 알아들었니?” “예, 아버지”

그런데, 보라! 나는 그 아이의 마음속에 이전에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그 아이는 제 아비인 나를 꼭 닮은 인간이었고, 나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을 꼭 닮은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 아이는 이제 ‘도대체 그 바구니 속을 왜 들여다보아서는 안되는거지’에 대한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내가 일하러 나가고 제 어머니가 장보러 간 것을 확인한 그 아이는 이전에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그 과일 바구니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는 키가 작기 때문에, 책상 위에 의자를 올려놓고, 또 그 위에 또 책을 올려놓은 다음, 왜 그 바구니를 들여다봐서는 안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그것을 살짝 들여다보려고 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발동한 것이다. 내가 아버지로서 나의 자녀에게 바구니를 들여다보지 말라고 말한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나는 아버지로서 그 아이에게 어떤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또 원하는 일을 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그 아이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원인을 제공한 사람도 아니다. 단지 그 아이가 이전에는 결코 갖고 있지 않았던 욕망을 그 아이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키게 했을 따름이다. 이제, 당신은 왜 율법이 주어졌는지 그 이유를 알겠는가? 그것은 죄를 충동질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부패했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고,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절대적으로 필요한가를 확실히 나타내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7:7)

율법이 할 수 없었던 일

찻숟가락은 물을 깨끗케 할 수 없었다. 또한, 내가 나의 아들에게 한 금지명령은 그를 더 낫게 만들 수 없었다. 나의 명령은 찻숟가락과 같이 육신의 연약함과 은혜의 필요성을 드러내 보였을 뿐이다. 찻숟가락은 그 물의 더러움을 나타내 보일 수 있었으나, 그 더러움을 깨끗케 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율법은 죄를 심히 죄되게 하였지만, 죄를 제거하는 일에는 무능하였다. 다음은 바울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말씀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율법이 할 수 없었던 일!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이 몇 가지 있다. 즉 율법이 결코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곧 의를 창출해내는 것이었다. 그와 반대로, 율법은 불의를 드러내고 육신의 죄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즉 인간이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율법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

다만 그것은 육신의 연약함 때문이었다. 율법은 육신에 있는 죄를 정죄하였는데, 이것은 율법의 요구, 즉 율법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Not the Law, but the Righteousness of the law)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오직 은혜만으로

말씀의 분명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단순성과 주 예수께서 이루신 일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이러한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여전히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어떤 사람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지키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만을 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말에 반대하면서, 자주 인용되는 말씀인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었다” 는 구절을 제시할는지도 모른다. 이 구절은 갈라디아서 3:24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제 성경을 펴서 갈라디아서 3:24을 정확히 읽어보기 바란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우리의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우리를’,’우리의’,’우리로’라는 단어에 주목하기 바란다. 바울은 이러한 ‘우리를’ ‘우리의’ ‘우리로’라는 인칭대명사들을 쓸 때마다, 바로 ‘이스라엘’을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를’이란 인칭대명사들을 쓸 때는 언제나 ‘이방인’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열쇠가 되고 있다. 그러면 이제 24절을 다시 읽어보라.

‘이같이 율법은 우리의 몽학선생이었다(wherefore the law WAS our schoolmaster)’ 바울은 말하기를, 그것은 우리의(즉, 유대인들의) 몽학선생이었다(과거시제)고 한다. 성경은 그 어디에도 “율법이 몽학선생이다(LAW IS a schoolmaster)”라고 되어 있지 않고, 과거형으로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의 몽학선생으로서의 역할은 끝났다. 그렇다면 이 구절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보자.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여기서
“우리를 인도하는(TO BRING US)” 이라는 세 단어는 영어성경(KJV 참조)에는 이탤릭체로 쓰여져 있는데, 이것은 그 단어들이 성경 원본에는 없는데 번역자가 보충하여 넣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우리를 인도하는’이란 단어들을 빼버리면 원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이같이 율법은 그리스도에게까지 우리의 몽학선생이었다(Wherefore the law WAS OUR schoolmaster UNTO CHRIST)’

즉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인들의 선생이었다는 뜻이다. 그 다음 구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이방인 그리스도인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5,26)

그리스도의 의

그러므로 율법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그리고 율법은 우리를 개선시킬 수도 없다. 율법은 오직 죄인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율법이 할 수 없었던 일은 예수님이 이루셨다. 즉 -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의)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4)

율법의 요구(혹은 율법의 의)가 우리에게 이루어졌다. 율법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율법의 의가 이루진 것이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율법에게서 고개를 돌려, 구원을 얻기 위해 갈보리 십자가의 예수님께로 돌아서는 자들에게 전가되고, 또한 그들에게서 이루어지게 된다. 예수님은 두 가지 일을 하셨다. 첫째로, 우리 주님은 지상 33년의 생애 동안에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셨다. 둘째로, 그는 자신이 친히 율법의 저주인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율법의 형벌(죄 값)을 치르셨다(지불하셨다). 주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율법의 의를 이루셨고, 자신의 죽음으로써 율법의 형벌(죄 값)을 치르셨다(지불하셨다). 그리하여 이제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얻는다. 첫째로, 그는 믿는 순간에 저주와 율법의 형벌에서 자유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 죄인의 범죄와 심판에 대한 완전한 지불로 간주하신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리고,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무죄한 삶을 통해 이루신 의(RIGHTEOUSNESS)를 그 용서받은 죄인에게 전가시키시며, 이로써 그 용서받은 죄인은 의로운 성도가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제 그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 즉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덧입은 자로 보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는 자는 모세의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었던 모든 일에 대해서도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하다. 왜냐하면,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영원토록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아, 친구여, 당신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었는가? 아니면, 자신의 노력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가?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려 하거나, 구원을 잃지 않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 애쓰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도저히 희망이 없는 사람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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