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강해(18)
M.R 디한
종노릇한데서 자유의
몸으로
From Bondage to Liberty
갈라디아 교회들은 바울의 1차
전도여행 중에 세워졌는데, 어떤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에 의해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은 이 이방인 회심자들에게 할례를 받고, 또한 모세
율법, 즉 레위적인 의식과 규례를 따름으로써 유대교 개종자들이 되도록 설파했으며,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린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서신은 이러한 오류를 바로 잡고, 오늘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모두 다 율법의 행위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한
은혜로써 구원받고, 또한 은혜로써 보존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쓰여졌다. 우리는 앞에서 율법이란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지적하였다.
1. 세대적인 특성 - 요
1:17
2. 민족적인 특성 - 롬 2:14,15
3. 실험적인 특성 - 롬 3:19
4. 시사적(示唆的)인 특성 - 롬
4:15
5. 계시적인 특성 - 롬 7:5
6. 불가능적인 특성 - 롬 8:3
이제 우리는 율법이 주어진 일곱 번째
이유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일컬어진다.
교육적인 특성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준비시키기 위해서 엄격한 훈련을 목적으로 일시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여기서 ‘몽학선생’이란 말은 ‘훈장’이나 ‘가정 교사’로
번역될 수 있다. 헬라인이나 로마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 특히(흔히) 교양을 갖춘 종들이 가정에서 주인집 자녀들을 돌보는 후견인이 되어, 그
자녀들이 가정에서 성숙한 아들로서 그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일을 담당했었다. 이러한 교육은 매우 엄격했는데, 이것은 그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자기의 책임을 다하고, 아들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아이가 어른이 되면,
그는 ‘가정교사’에게서 벗어나게 된다. 즉 그는 훈련과 교육기간이 끝나면, 이제 아들의 위치에서(형벌이나 징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꺼이) 자기 아버지를 섬긴다.
모세로부터 그리스도에 이르는 율법시대는 교육과 훈련의 시기로서,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써는
구원받을 수 없고, 오직 은혜로 구원받을 수밖에 없음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혹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있는 것으로, 이는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
3:25)
이 이상 더
분명한 말씀도 없을 것이다.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우리의 몽학선생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시자 우리는 더 이상 그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다른 선생, 즉 ‘진리의 성령’을 모시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2,13)
성령님께서는 오순절 사건 이전에는 사도들이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던 진리를 계시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이 일은 사도들, 특히 사도 바울에게 주어진 특별계시를 위해서 그때까지 보류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의 계시들은 모두 모형과 그림자였다. 구약시대 성도들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모세 이후의 구약시대
성도들은 모두 율법의 멍에 아래 있었지만, 신약시대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아래 있다. 구약시대 성도들은 비록 유업을 이을 후사였으나
‘어린아이’였고, 오늘날 우리는 성인이 된 아들들로서의 지위를 받아 가지고 있다. 바울은 이것을 갈라디아서 4장에서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유대인들)도 어렸을 때에(율법 아래 있었을 때)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갈 4:1-3)
구약시대 성도들은 성숙치 못한 어린아이로서 장차 자기가 받을 유업의 영광과 충만한
축복을 깨닫지 못했다. 비록 그는 그 아버지의 아들이기에 백만장자의 상속자였으나, 어린아이와 같았기 때문에 자기가 상속받게 될 어마 어마한
재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수천 억의 돈에 대한 약속보다는 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더 좋아한다. 어린아이는 ‘수천 억’이란 숫자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 아이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단지 백 원짜리나 오백 원짜리의 동전만이 의미가 있다.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은
오직 그러한 것들이다. 이와 같이 그림자 가운데 살았던 구약시대 성도들은 영적인 실상들을 흐릿하고 희미하게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은혜
아래서 그림자는 물러가고, 우리는 아들의 신분에 대한 완전한 계시를 보고 있다.
그 차이점은?
그러면
무엇이 그처럼 차이를 가져오게 하였는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오심에 있다. 따라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4:4,5에서 이렇게 계속 말하고
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는 율법과 은혜 사이에 서있다. 십자가 이전에는
죄를 ‘없이
하는 일’이 없었다. 그때에는,
하나님은 ‘구주의 오심을 예상하면서’ 믿는 자를 용서하셨고, 심판을 보류하셨으며, 그 죄들을 덮어두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임하심에 대한 약속에 근거하여 갈보리 십자가 이전에도 성도들의 죄를 용서하셨다. 갈보리 십자가 이전에는 죄인에 대한 완전한 용서란 없었으나,
비로소 갈보리 십자가 이후에 죄를 없이 하셨다. 그리고 갈보리 이전에는 죄인이 용서함을 받았을 뿐이지만, 갈보리 이후에는 죄인이 은혜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율법의 형벌에 대한 완전한 지불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갈보리
십자가 이전에는 아무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고, 죄가 제거되기까지 음부(스올)에 머물러 있었다(시 16:9,10). 그러나 갈보리
십자가 이후에는 신자가 죽어서 음부(스올)에 가지 않고, 곧바로 하늘나라 하나님의 존전 앞으로 가며, 육체를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게
된다.
때가 참
때가 차매,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기 위해서
오셨다. ‘때가
차다’란 표현은 2절에 설명되어
있는데, 곧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인들이 율법의 엄격한 규율 아래 있는 아직은 책임이 없는 어린아이에 비유된
반면에, 오늘날 신약시대 성도인 우리는 성인이 된 아들들이며,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우리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는 이제 성숙한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신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덧붙여 말해서 우리는 이 갈라디아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되는 다음 단어들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 바로 두 가지
인칭대명사들인데, ‘우리’ 혹은 ‘너희’이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들에게 이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다. 따라서 그가 ‘우리가’나
‘우리를’이란 대명사를 사용할 때, 그것은 언제나 ‘이스라엘인들’을 가리키고, ‘너희가’나 ‘너희를’이란 대명사를 사용할 때는 언제나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사실을 기억하게 되면, 갈라디아서 연구는 훨씬 더 쉬워질 것이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3:23을
생각해보자.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유대인들이)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 이같이 율법이
우리(유대인들)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유대인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유대인들이)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이방인들)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 너희가(이방인들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3-27,29)
이처럼, 바울이 ‘우리’라는 말로써 유대인을 가리키고, ‘너희’라는 말로써 ‘이방인’을
가리키고 있음을 기억하고, 이러한 규칙을 갈라디아서 모든 구절에 적용해 보라. 그리하면 당신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그리했던 것처럼 율법과
은혜를 혼합하는 일을 피하게 될 것이다.
갈보리 이전과 이후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에는 이스라엘인들은 율법이라는
몽학선생 아래 있었다. 이것을 바울은 갈라디아서 4:3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유대인들)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유대인들)로 아들(성숙한 자녀)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 이을 자니라”(갈
4:3-7)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종이고,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은 아들이다. 종은 품삯을
위하여 일하나, 아들은 사랑과 인격적인 관심 때문에 일한다. 이처럼 주인을 위해 일하는 것과 아버지를 위해 일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율법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 아래서 섬긴 것은 명령과 형벌의 위협 때문이었지만, 은혜 아래서 섬기는 것은 우리의 ‘아버지’께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와서 섬기는 것이다.
신약시대의 호칭
우리는 오직 은혜 아래서만 “우리 아버지”란 말의 의미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구약시대의 어떤 성도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버지로서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이었기 때문이다.
오순절 사건 이후에야 비로소 참 아들 됨의 의미가 깨달아지게 되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그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러나 제자들은 모두 오순절 사건이 있기까지는 단 한 번도 그러한 기도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서 1:7에서 처음으로 그러한 호칭을 사용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있는 것과 은혜 아래 있는 것의 차이는 종과 아들의 차이와 같다. 종은 그 주인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아버지”라는 호칭은 오직 그 자녀들에게만 허용된다. 그런데 바울은 그처럼 갈보리 십자가 이전까지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던 새로운 표현(호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바 아버지”라는 호칭이다. 여기서, ‘아바’라는 말의 참 뜻을 실제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그 말은 히브리어도 아니고, 아람어도 아니며, 헬라어도 아니다. 그 말은 아마도 친밀함과 사랑과 애정을 나타내 보이는 말로써, 아주
가까운 사이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호칭은 성경에 세 번 사용되었다. 그 중에 한 번은 마가복음 14:36에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 중에 계신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부르짖음 속에 나타나 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
두 번째는 로마서 8:15,16에 사용되었는데, 여기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즉, 율법에 대한 두려움)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세
번째로 “아바”란 단어가 사용된 곳은 이 갈라디아서 4:6이다. 이것은 오직 은혜 아래 있는 하나님의 자녀에 의해 사용되는 용어로써, 이들은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으로 일컬어지는 율법 아래 있는 종의 신분과 대조를 이루는 자들이다.
다시 율법 아래로
돌아감
그러므로 은혜로써 아들의 명분을 얻은 후에, 다시금 율법에로 돌아가 종노릇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이러한 일로 인해 바울은 대단히 놀라며 당황스러움을 느끼게 되었고, 따라서 놀란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갈
4:8,9)
너희는
이미 너희 이방의 종교적인 의식과 예식, 그리고 헛된 노력 등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유 속으로 들어왔거늘, 어찌하여 이미 성취된
유대교와 율법주의의 계명과 레위적인 의식과 예식 및 제도에 종살이하러 다시 들어갈 수 있단 말이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고
있구나!?” 도대체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전에 누리던)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갈
4:15)
너희가
처음에 가졌던 그 첫사랑과 기쁨이 어디 있으며, 나의 약한 눈 대신에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내게 주려고 했던, 나에 대한 너희의 그 큰 사랑도
지금 다 어디 갔느냐?(갈 4:15) 어찌하여 지금은 내가 너희의 원수가 되었느냐? 바울에 의해서 그리스도께로 인도된 이 사람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처럼 빨리 바울에게서 돌아서게 되고, 바울에 대한 사랑을 잃어 버렸다니, 이 얼마나 비극인가! 이것은 은혜에 대한 시험이자 시금석이다.
즉 율법을 전파하는 자들은 은혜를 전파하는 자들에 대하여 언제나 대항한다. 참된 은혜의 열매는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사랑과 온유로 대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릇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자기들의 기쁨과 승리의 생활을 다 잃어버리고 곁길로 나간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을
교정해주기 위해서 얼마나 온유하게 호소하고 있는가!
우리에 대한 적용
이와 같은 시금석을 당신 자신에게도
적용해보라. 당신은 당신이 믿고 있는 진리로 인하여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자가 되며, 믿지 않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열심을 갖게
되는가? 아니면, 당신은 당신이 믿고 있는 진리로 인하여 비판적이고, 남을 정죄하며, 편협하고, 또한 배타적인 사람이 되어 있는가? 당신은 믿지
않는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을 당신의 교파나 율법주의적 입장에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는가? 바울
시대의 거짓 선생들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고 애쓴 것이 아니라, 행위를 강조하는 자기들의 율법주의적 교리로써 신자들을 혼돈스럽게
만들려고만 하였던 것이다. 아, 그러므로 우리는 돌아다니면서 교리에 대해 논쟁하거나 종파나 교파를 만드는 것보다 잃어버린바 된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파하는데 더욱 관심을 갖도록 하자.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은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도록 도우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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