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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갈라디아서강해-MR디한

갈라디아서 강해(19)

by 복음과삶 2005. 7. 3.

 

갈라디아서 강해(19)

 

M.R 디한


 

두 성읍 이야기

The Tale of Two Cities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갈 4:21)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율법이냐, 아니면 은혜냐’에 관한 문제였다. 그것은 ‘율법과(AND) 은혜’의 문제가 아니고, ‘율법이냐, 아니면(OR) 은혜냐’의 문제였다. 그 양자일 수는 없다. 이것이든지 아니면 저것이든지 둘 중의 하나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은혜로써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우리 자신의 행위로(그 구원이) 보존된다고 말하는 것은 은혜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 왜냐하면, ‘은혜로 구원받았으나 행위로 보존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 대신에 우리의 행위와 노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율법이 무엇이며, 또 율법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한 결과이다. 일단 우리가 율법의 참된 목적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결코 다시는 율법 아래 들어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묻고 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너희가 율법이 무슨 일을 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리고 나서, 바울은 율법과 은혜에 관한 하나의 비유적인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이제 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2-26)

 

바울은 율법과 은혜 사이의 뚜렷한 차이점을 보여주고, 그 둘이 서로 혼합될 수 없음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역사적인 한 사건을, 아니 이스라엘 역사의 무수한 사건들을 언급하고 있다. 첫째로,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하나는 여종인 하갈과 영구한 아내인 사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다. 이어서 바울은 애굽인 여종 하갈과 약속의 아내 사라를 대조시키면서 하갈을 ‘율법’에, 사라는 ‘하나님의 은혜’에 비유하고 있다. 다음으로, 바울은 두 아들 - 인간의 뜻으로 육체를 따라 난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과, 약속에 의해서 초자연적으로 태어난 이삭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말하기를, 이 두 여인, 즉 하갈과 사라, 그리고 이 두 아들들, 즉 이스마엘과 이삭은 비유[allegory]라고 했다. 즉 그들은 각각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각각은 ‘율법’과 ‘은혜’에 대한 상징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알레고리를 사용하여,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여기서 알레고리(allegory)란 역사적인 사건을 들어서 어떤 영적인 진리에 대한 상징이나 비유, 또는 예표로 취급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하갈의 이야기나 육체를 따라서 출생한 이스마엘의 이야기는 단순히 아브라함에 관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보다 더 깊고, 또한 더욱 심오한 교훈을 가르쳐주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그 교훈은 이러하다. 즉 이스마엘은 육신의 뜻에 따라 태어났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철저한 실패와 그의 연약함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언약을 자신의 노력으로써 성취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자기에게 자손을 낳아주리라는 희망을 포기해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러한 약속을 자신의 노력으로써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여종인 하갈을 통해서 자손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 여종 하갈은 종노릇과 실패와 약속에 대한의심을 상징한다. 바울은 말하기를, 이러한 아브라함의 행동은 인간이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을 예시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하갈’은 ‘율법’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스마엘’은 ‘육신의 행위’를 나타내는데, 곧 율법과 육신의 행위로 인해 ‘종노릇’을 낳은 것을 가리킨다.

 

비유의 전개

 

그리고 나서, 바울은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스마엘’은 시내 산에서 주어진 ‘율법의 언약’을 상징한다. 다음과 같은 분명한 가르침에 주목하기 바란다.

 

‘이것(이스마엘과 이삭의 출생)은 비유니 이 여인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이스마엘의 어머니)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갈 4:24,25)

 

바울은 이미 이 두 여인 곧 하갈과 사라를 소개했고, 더하여 이스마엘과 이삭 두 아들을 소개했는데, 이제 여기서는 두 언약, 곧 시내 산에서 주신 ‘율법의 언약’과 갈보리산 위에서 확정된 ‘은혜의 언약’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두 성읍, 즉 바울 당시의 예루살렘과, 구속함을 받고 자유케 된 자들의 영원한 거처인 장래의 새 예루살렘을 더 언급하고 있다. 이제 이 알레고리를 주시해 보라. 우리는 이 비유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1. 두 여인 - 하갈과 사라

2. 두 아들 - 이스마엘과 이삭

3. 두 언약 - 율법과 은혜

4. 두 산 - 시내 산과 갈보리 산

5. 두 성읍 - 지상의 예루살렘과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

 

이 모든 세부적인 내용들은 모두 율법과 은혜의 차이점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들이다. 하갈, 이스마엘, 시내 산, 그리고 지상의 예루살렘은 모두 ‘율법’에 대한 모형이자 상징들이다. 하갈은 종이었고, 율법은 종을 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율법의 언약’에 대해 24절에서 바울이 한 말을 듣고서도 도움을 얻기 위해서 율법에 매달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는 말한다. 율법의 언약이란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갈 4:24)

 

바울은 이것을 더욱 확정하기 위해서 계속하여 말하기를, ‘시내 산에서 주어진 율법은 어느 누구도 자유케 할 수 없고, 오직 종노릇하게 만드는 것 뿐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라. 그 성의 상태가 어떠한가? 한때 예루살렘 성은 팔레스타인의 자랑스러운 수도로서, 위대한 다윗 왕의 보좌가 있던 곳이었고, 솔로몬 시대에는 열국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바울 당시) 예루살렘 성은 이방 나라에 종노릇하고 자유를 빼앗긴 곳이며, 이교도인 로마 총독의 보좌가 있지 않은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이스라엘인들이 율법에 의해서 보존받으려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에 다시금 귀를 기울여 보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갈 4:25)

 

하갈 - 이스마엘 - 시내 산 - 율법 - 지상의 예루살렘, 이 모두는 ‘율법’을 가리키고 있다. 율법은 하갈을 자유케 하거나, 이스마엘을 약속의 후사(상속자)로 만들 수 없었다. 그리고 시내 산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소망의 메시지가 선포되지 않았다. 또한 하나님의 이 행위 언약은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제공해 준 것이 아니라, 다만 정죄와 종노릇과 심판만을 가져다 주었다.

 

여기서 바울이 이 비유를 말하기 위해 제기했던 구절을 다시 반복해 보자.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율법이 실제로 하는 일에 대하여 말해 줄 터이니 들어보겠느냐?”

 

새 예루살렘

 

바울은 율법이란 오직 종삼는 일을 할 뿐이라는 사실을 나타내 보여주었는데, 이제는 은혜의 영광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6)

 

율법은 두려움을 주고, 은혜는 평안과 확신을 가져다 준다. 우리는 히브리서 12장에서 율법과 은혜에 대한 가장 뚜렷한 대조를 읽어볼 수 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18-24)

 

출애굽기 19:9-13과 20:1-18에 기록된 율법을 주신 일에 대한 기록을 주의깊게 읽어보라.

 

그 여종을 내어 쫓으라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매우 명확한 방식으로 비유를 결론짓고 있다.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갈 4:27)

 

하갈이 처음으로 낳은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처음으로 태어난 장자였다. 이처럼 율법도 은혜와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계시되기 전에, 먼저 주어진 것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먼저 태어난 이스마엘은 버린 바 되고, 나중에 태어난 이삭이 언약의 후사가 되었던 것처럼, 먼저 주어진 율법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으며, 구원과 칭의의 수단이 되지 못하고, 우리는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게 된 것이다. 이처럼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이것은 여종 하갈은 버림을 당한 반면에, 아이를 낳지 못한 아내 사라는 아이를 낳게 된데 대한 비유의 요점이다. 이와 같이 은혜가 율법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주목하기 바란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갈 4:28-31)

 

그런데, 이것들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바울 당시에 있었던 율법주의자들의 후손들이 오늘날에도 우리와 함께 살고 있으면서, 우리가 전하는 은혜의 메시지를 반대하며 우리를 핍박하고 있다. 우리가 사역을 하면서 받고 있는 가장 잔인하고 위협적으로 부딪히는 반대는 우리를 율법 아래로 이끌고 가려 하는 자들에게서 당하는 것이다. 그들은 은혜의 자녀들을 개종시켜서 악하고 천한 초등학문에로 다시 돌아가게 하고, 날과 달과 때와 절기를 지키게 하려 한다. 우리는 이 모든 자들에 대하여 바울이 골로새서 2장에서 말한 다음과 같은 말로써 대답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참된 신자는, 만일 자기가 주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구원을 잃어버릴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주님을 섬기는 자가 아니다.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받은데 대한 감사와 보답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섬긴다.

 

이처럼 구원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주님을 섬기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봉사도 자유가 아닌 종노릇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음 장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갈라디아서 5:1로 시작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러므로 우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갈 3:11) 라고 결론짓는 바이다.

 

율법이 사람을 구원치 못하는 것은 율법에 결점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즉 율법이 죄인을 의롭게 만들지 못하는 것은 율법이 연약한 것이거나 실패한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으며, 또한 기대할 수도 없다. 구원하는 일은 율법의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써는 구원받지 못함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또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해줌으로써,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키기 위함이었다. 율법은 완전하다. 그렇기 때문에, 불완전한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가 없는 것이다. 율법은 거룩하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들이 율법에 의해서 정죄를 받는다. 또한, 율법은 공의롭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범죄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수 없다. 만일 율법이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그것은 율법의 공정성과 공의를 어기는 것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완전한 율법은 죄의 속성을 드러내 보여줄 뿐이다.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여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1. 율법은 금지한다 - 은혜는 권하고 내어준다.

 

2. 율법은 죄인을 정죄한다 - 은혜는 죄인을 구속한다.

 

3. 율법은 행하라고 한다 - 은혜는 그것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4. 율법은 “항상 거룩하라”고 한다 - 은혜는 “다 이루었다”고 한다.

 

5. 율법은 저주한다 - 은혜는 축복한다.

 

6. 율법은 죄인을 죽게 한다 - 은혜는 죄인을 살게 한다.

 

7. 율법은 모든 사람의 입을 하나님 앞에서 닫게 한다 - 은혜는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케 한다.

 

8. 율법은 가장 선한 사람도 정죄한다 - 은혜는 가장 악한 사람도 구원한다.

 

9. 율법은 “네가 빚진 것을 갚아라”고 말한다 - 은혜는 “내가 네 진 모든 빚을 대신 갚았다”고 말한다.

 

10. 율법은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말한다 - 은혜는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다”라고 말한다.

 

11. 율법은 “범죄한 그 영혼은 죽으리라”고 말한다 - 은혜는 “믿으면 살리라”고 말한다.

 

12. 율법은 죄를 드러낸다 - 은혜는 죄를 속한다.

 

13.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다 - 은혜를 통해서 죄에서 속량을 받는다.

 

14. 율법은 모세에 의해서 주어졌다 -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다.

 

15. 율법은 순종을 요구한다 - 은혜는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

 

16. 율법은 돌판에 새겨졌다 - 은혜는 마음의 심비[心魂]에 새겨져 있다.

 

17.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됨으로써 끝났다 - 은혜는 영원히 지속한다.

 

18. 율법은 우리를 종노릇하게 만든다 - 은혜는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유 안에 거하게 한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에 이 두 가지(율법과 은혜)가 얼마나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는가를 계속해서 나타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12:1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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