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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교훈/축복의혁명 - 박철수

2장. 축복 논의의 중요성

by 복음과삶 2007. 5. 8.

<축복의 혁명>

2장. 축복논의의 중요성

박철수

 

모든 사람은 행복을 추고한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그 수단은 여러 가지이지만 모두 이 목적을 향하고 있다. 인간의 의지는 이 목적을 향하는 것이 아니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행복의 추구야말로 모든 사람 모든 행위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신앙 없이 행복에 도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 파스칼「팡세」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 시편 73편 23절

 

이 땅에 가장 먼저 들어온 종교는 단군 이전에 들어온 무당종교인데, 학자들은 이 무당종교가 우리 민족의 심성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신앙이라는 데 대체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당종교가 불교를 집어삼키고 유교를 집어삼키더니 이제는 우리 기독교까지 집어삼키려 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 기독교의 자체 정화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기독교도 무당종교로 바뀌어질 위험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천년대가 되면 지금 점쟁이집에 불상이 놓여 있는 것처럼 십자가가 놓여질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제 점쟁이집에도 십자가가 놓여지기 시작했고 예수 점쟁이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이 무당종교로부터 탈출하지 않는다면 겉으로는 기독교의 형태를 갖추고 십자가는 달고 있지만 기독교의 본질이 변질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무당종교는 복의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축복의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사람은 무엇이 축복이냐고 생각하는데 따라서 그의 발걸음을 움직입니다.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도무지 발걸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우리 사람인 것입니다. 죽음의 지경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좋은 것이고 축복이라고 생각하면 발걸음을 움직이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정성을 들이고 축복이 생기는 것에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에 시간을 바치고, 돈을 바치고, 정성을 바치고 있습니까? 진심으로 무엇 때문에 정성을 바치고 무엇을 위해서 시간을 바치는가에 따라 우리의 신앙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비록 그 사람이 겉으로는 기독교적일지 모르지만 그의 삶을 움직이는 기본적인 동기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우리의 삶과 신앙은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축복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왜 우리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가에 대해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신앙의 본질문제와 관련

첫 번째로 축복의 문제는 신앙의 본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복의 문제는 무엇보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왜 신앙을 가져야 되는가?’하는 문제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신앙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확신과 전제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최소한도 이 두 가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전제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확신이 없으면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첫 번째 확신은 우리 인간이 참으로 ‘허망한 존재’라는 확신입니다. 인간은 너무도 허망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단지 흙이요, 먼지요, 티끌입니다. 강한 것 같고 영원히 살 것 같은 우리 인간은 촛불에 3분을 견뎌낼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유리가 깨지기 쉽지만 우리 인간만큼 깨지기 쉬운 존재가 없습니다. 깨지기 쉬운 존재, 어느날 갑자기 이 세상으로부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허망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인간 실존 앞에 엄숙하게 서지 않고서 감히 신앙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의 두 번째 기본적인 확신은 인간은 참으로 ‘더러운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어느 인간도 여기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밖으로는 번지르르 하게 기름을 바르고, 넥타이를 매고 번쩍번쩍 빛나는 구두를 신었다 할지라도, 아무리 지성을 갖추고 점잖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내면은 누구나 똑같은 더러운 존재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경이 가지고 있는 확신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마치 난지도에 흩어져 있는 쓰레기보다도 더 더러운 오물 투성이 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더러운 시궁창과 같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성경신앙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얼마나 허망한 존재이며 동시에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가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 확신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기독교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이 허망하고 더러운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잘 먹고 잘살고 하는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이 허망하고 더러운 인간이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의미를 가지고 살며,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앙이 허망하고 더러운 인간의 욕심을 충족시키는 수단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진리의 종교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더럽고 허망한 존재가 잘 먹고 잘살기 위한 수단과 방편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존재 이유를 망각하는 것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 왜 지금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 만물의 영장으로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존재의 목적이 단지 잘 먹고 잘살고 무병장수하는 것이라면 동물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반역행위인 것입니다. 왜 헌금을 합니까? 헌금을 잘 내면 축복을 받기 때문입니까? 칼빈은 “하찮은 재물로 하나님을 회유하는 짓을 그만두라!”는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하찮은 재물로 하나님을 회유하려는 행위는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끗하고 살아있는 인간이라면 뇌물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간의 재물 앞에 넘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의 하나님은 그런 유치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찮은 재물로 하나님을 꼬시는 것이 헌금이 아닙니다. 헌금이란 내가 하나님을 발견했다는 사실, 내가 구원을 받은 놀라운 사실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심지어 장로가 되면 더 많은 축복을 받는다는 미신이 우리 한국 교회에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로가 되기를 더욱더 원한다고 합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축복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정돈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 중의 첫 번째는 이와 같이 복의 문제가 신앙의 본질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해석의 문제와 관련

두 번째로 축복에 대한 문제가 중요한 것은 성경해석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한국교회에서 축복의 문제는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와 매우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성경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자기가 좋아하는 생각을 얼마든지 마음대로 조립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편 14편 1절에 보면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라고 나옵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없다”는 말이 분명히 있습니다. 앞뒤를 읽어보지 않고 단지 “하나님이 없다”는 구절만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심지어 하나님이 없다는 말도 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자기가 원하 생각을 성경으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단들과 사이비 종파의 특징은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짜 맞추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과 대화해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아는 그들의 해박한 지식에 깜짝깜짝 놀랄 것입니다. 어디 어디를 찾아보라고 해서 찾아보면 딱딱 맞아 들어가는데 속으로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놀랄 일이 못됩니다. 왜냐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성경에 있다”는 말만큼 위험한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탄도 예수님을 시험할 때 “이 말은 성경에 있는데”라고 시작합니다. 말과 글이란 당시의 분위기와 이야기의 대상과 흐름과 억양, 또 언제 그 이야기가 언급되었는지 알고 나서야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집에 두 딸이 있는데 제가 큰애가 아플 때 “일찍 자거라”고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큰애가 다 낫고 난 다음에도 아빠가 일찍 자라고 했으니까 항상 일찍 자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몸이 아프고 피곤해서 자라고 한 것인데 몸이 다 나은 후에도 일찍 자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옆에서 듣고 있던 동생이 아빠가 “일찍 자라”고 했으니까 나도 일찍 자야겠다고 한다면 이것도 또한 잘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제가 우리 큰딸에게 몸이 안 좋을 때 일찍 자라고 하는 말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 버리거나 또 둘째 애가 언니에게 한 말을 자기에게도 적용시켜 매일 일찍 자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신명기 28장은 흔히들 축복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에는 놀라운 함정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28장에는 축복에 관한 내용 뿐만 아니라 저주에 관한 내용도 있기 때문에 저주장이라고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에는 사실 저주에 관한 내용이 훨씬 더 많습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집승의 새끼와 네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3).

이 말만 보면 하나님께서는 보글 구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무조건 다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앞뒤 없이 이 부분만 인용하고 강조한다면 마치 성경에도 “하나님이 없다”는 말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하나님만 믿으면, 들어가도 복 받고, 나가도 복 받고, 이래도 저래도 복 받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28장 1절에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말을 지켜 행하면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빼 버리고, 아무렇게나 살면서 교회에 나가고, 헌금을 내고 기도만 하면 복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도 보통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1절과 2절에서 못을 튼튼히 박아 놓았습니다,

“네가 순종하면 복을 주리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여기 순종하라는 말은 단지 헌금 잘 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헌금 얘기를 하는 것은 헌금을 가지고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헌금은 감사의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 버리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복과 성경해석에 관련된 설명은 4장에서 더욱 자세하게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축복의 문제는 성경해석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축복을 이야기하면서 성경해석을 자기 마음대로, 편의대로, 생각대로, 좋을 대로 변조시켜서 해석을 하고 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축복의 문제는 성경해석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바르게 하지 않고는 바른 신앙을 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문제와 관련

마지막으로 왜 우리가 축복의 문제를 거론해야 되고, 축복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개혁하고, 성경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축복의 문제는 인생의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사는 너무도 복잡하고, 복잡하다 못해 신비합니다. 우리 인간 세상이란 것이 너무도 신비합니다. 인간으로서는 인간사, 이 세계의 역사, 나의 삶, 내가 가고 있는 길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고 신앙을 잘하면 만사가 잘되고 복 받는다는 생각은 너무도 단순하고 유치한 생각입니다. 인간 세계와 인생의 가는 길은 너무도 복잡하고 신비하여서 간단하게 교회 다니고 예수님 믿으면 다 잘 된다고 단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인생의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저는 새벽기도회를 갔다 오다가 변을 당한 사람들의 기사가 가끔 신문에 나는 것을 보고 멈칫 놀랄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고 신앙을 잘하면 만사가 잘된다면 새벽기도 다녀오는 길에 변을 당할 턱이 없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다녀 올 정도면 대단한 정성을 가지고 기도를 한 사람이니까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할 것 같은데 변을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얼마 전 새벽기도에 갔다 오는 길에 인신매매단에 잡혀가기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기도만 하면 잘된다는데 거기다가 새벽기도회까지 갔다 왔는데 변을 당했다는 것은 뭐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예배당 건물이 어떨 때는 벼락을 맞습니다. 아니 어떻게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예배당이 벼락을 맞을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벼락 맞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보는 사람까지 죽는 일이 있습니다. 부산에서 제일 큰 교회의 백영희 목사라는 분이 얼마 전에 몇천 명이 모이는 새벽기도를 인도하다가 그 교회에 다니는 40대 청년에 의해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순교했다고 발표했었습니다만 새벽제단을 인도하시는 목사님이, 그것도 칼에 찔려 죽다니 이해가 안 가는 일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너무 신비합니다. 교회에 잘 다니고 예수님 잘 믿으면, 만사가 잘된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골치 아프고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최대의 문제 중의 하나는 “의인이 왜 고난을 받는가”하는 것입니다. 왜 의인이 고난을 받고 왜 악인이 형통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문제를 가지고 고심했습니다. 예레미야서 12장 1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야훼님 자게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그때마다 옳은 것은 하느님이셨기에 법 문제 하나를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나쁜 자들이 만사에 성공합니까? 사기밖에 칠 줄 모르는 자들이 잘되기만 합니까?”(공동번역)

이것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가지고 있는 고민이었습니다. 하나님만 믿으면 잘되어야 될 텐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찌 사기 치는 자들이 이토록 잘되고 있습니까? 이것은 예레미야만 고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박국은 온통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 책입니다. 1장 1절을 보겠습니다.

“야훼여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이 소리 언제 들어 주시렵니까? 호소하는 이 억울한 일 언제 풀어 주시렵니까? 어인 일로 이렇듯이 애매한 일을 당하게 하시고 이 고생살이를 못 본 체하십니까?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끝내 무너졌습니다. 못된 자들이 착한 사람들을 등쳐먹는 세상,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공동번역)

성경은 바로 이 문제를 고민하는 책이라고 할 만큼 곳곳마다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만 믿으면 모두 잘된다고 약속하는 책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 문제의 극치가 욥기에서 나타납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서 참으로 훌륭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욥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대의 고난을 겪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만 믿으면 잘된다고 하는데, 예수님을 믿으면 만사가 잘된다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것이 바로 성경에 나타난 고민입니다. 욥은 어찌하여 이토록 큰 고통을 주시느냐고 절규했습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성경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헌금 조금 내고, 십일조를 내고는 모든 일들이 자기 소원대로 되는 그런 유치한 것이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문제요, 신앙의 문제인 것입니다.

고난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신정론(神正論)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고심했는지 모릅니다. 신정론은 공의의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세상이 이럴 수가 있느냐는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토록 세상이 전쟁과 파괴와 부조리가 가득한 세계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렇게 어렵고도 어려운 문제를 교회에 잘 다니고 예수님 잘 믿으면 모든 것이 해결돼 버린다는 식으로 끝낼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교회를 다니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사업도 잘되고 병도 안 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참으로 존경하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께서 일찍 불러 가신 분이 많습니다.

신앙을 하면 모든 것이 잘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신입니다. 그럴 듯하게 들리고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거기에는 무서운 독이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생각은 인간과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를 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무당종교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신앙의 문제, 성경해석의 문제, 그리고 그 깊고 오묘한 인생의 문제를 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이것은 독입니다. 아무리 목사님이라도 성경적이 아닌 복을 말한다면 그것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독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신앙의 위인들, 아브라함, 모세, 요셉, 욥, 다윗은 모두 고난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결코 잘 먹고 잘사는 것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일생을 고난 속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집 한 채도 없이 이 세상을 어렵게 살다가 가셨습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이 잘 먹고 잘살았던 흔적이 있습니까? 물론 그들의 삶 가운데 일시적으로 좋은 시절이 없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윗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라고 한 말을 잘 보아야 됩니다. 이 말은 내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안 다닐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내가 사망과 같은 어려운 상황 속에 빠져 있을지라도 그 속에서 내가 든든히 설 수 있다는 확신이 우리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것이 성경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해서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 나를 믿으면 환난을 결코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가 이 세상에서 살아 갈 때 고난을 당할 것이지만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경의 메시지이고 복의 내용입니다.

이상에서 저는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축복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과 인격이 규정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축복 문제에 대한 성경적 확신 없이는 우리들은 감히 성경적 신앙을 가졌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치마를 입었다고 다 여자가 아니듯이 예배당을 다니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이 성도인 증거가 아닙니다. 종교적 열성을 가진 사람들을 얼마든지 다른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치마만 입으면 여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위대한 인간이 되고 위대한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미신 속에, 무당종교에 우리의 인생을 넘겨버릴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목적이 만사형통이라는 사탄의 마취제에 마취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사형통은 참으로 무서운 마취제입니다. 사탄의 장난입니다.

빌립보서 4장 11, 12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신앙을 갖도록 기도하고 애써야 될 것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것이 우리 성경이 가르쳐 준 기독교인의 복인 것입니다. 무당종교가 가르쳐 주는 복하고는 질이 다릅니다. 수준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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