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의 혁명> 4장. 구약과 신약 박철수 |
밤의 길목을 지나지 않고 새벽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 칼릴지브란 「모래․물거품」에서
너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 요한복음 8장 56절
앞에서 축복문제를 논의하는 중요성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축복이 무엇이며 또 축복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내용과 스타일이 전적으로 달라지게됩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축복의 문제는 첫째로 신앙의 본지로가 관계되고, 두 번째로는 인생의 문제와 관계있고, 세 번째로는 성경해석과 관계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축복과 관련하여 성경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은 한 사람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30여 명의 사람에 의해서 약 2천년 동안에 쓰여졌습니다. 몇 사람이 짧은 기간에 몇 십 년 동안에 쓴 것으로 알고 계시는 분도 있을지 모르지만, 성경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 어떤 사람은 왕이었고 어떤 사람은 목자였고, 어떤 사람은 군인이었던 사람들이 각자 다른 직업 속에서 2천 년의 오랜 세월 동안 그때 그때 쓴 것을 나중에 와서 집대성한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입니다. 한꺼번에 몇 사람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 의해서 오랜 기간 동안 여러 가지 다른 조건 아래에서 쓰여졌다는 것을 우리들이 먼저 알아야 되겠습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한다
기독교의 경전으로서 이 성경의 양이 적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들이 평소에 읽기에는 상당히 두꺼운, 양이 많은 책이기도 합니다. 또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에 이 책이 쉬운 책 같기도 하지만 사실 성경책은 매우 어려운 책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혼란과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 기독교회사가 보여 주었던 모습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한두 번이라도 진지하게 읽어본 분이라면 누구나 혼란을 겪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서로 다른 교훈들이 주어지는 것을 보고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인가?’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또 우리들이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교훈들도 성경 안에 많이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위대하다는 아브라함, 다윗, 솔로몬은 부인들이 여러 사람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면 ‘남자들은 여러 여자들과 같이 살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할 수도 있는 근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믿음의 조상이 아니고 믿음에 실패한 사람들이었다면 모르지만 우리들이 아는 대로 아브라함은 자기의 본부인 사라가 죽기 전에는 하갈과 결혼을 했고 죽은 뒤에도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성경을 어느 정도 주의 깊게 본 사람이라면 오늘의 시점에서 과연 일부다처의 문제를 어떻게 돌 것인가 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많은 혼란에 빠지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혼란을 느껴보지 못했다면 아직도 성경을 자세하게 읽어보지 못한 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저 그냥 좋은 말만 골라서 보고 이상한 말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고 보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의문점들을 가졌어야 성경을 깊이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이라는 특정한 나라에서 일어난 역사와 사건을 기록한 책입니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특정한, 그 조그마한 나라에서 일어난 몇천년 간의 사건을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구약성경입니다. 신약의 교훈은 겉으로 보기에는 이스라엘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야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에서 그토록 자주 이야기하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역사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또 구약시대에는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장면이 여기저기에 나옵니다. 대제사장이 등장하고, 성전에서 양과 염소를 잡아 제사를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신약에 들어오면 제사를 지내는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직접 제사를 지냈다는 말은 성경에 한 번도 없고 또 제자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말도 없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살아계실 당시에 성전에서 소란을 피우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제사를 지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란을 피우셨기 때문에 나중에는 잡혀가서 “이 사람은 성전을 모독한 죄를 지었다”고 하는 말까지 듣게 됩니다. 구약의 출애굽기, 민수기 등에 ‘너희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는 말들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그 말대로라면 오늘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다 이스라엘 땅, 가나안 땅으로 이주해 가야 합니다. 또 성경에 보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닥치는 대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 죽이라고 말합니다. 그 명령은 잔인할 정도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도 구약성경을 믿기 때문에 이 시대를 살면서 닥치는 대로 원수들을 죽여야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과연 무슨 뜻입니까? 문자대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면 문자 그대로 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모든 신상과 우상을 다 부숴버리라고 했으니 우리도 점쟁이 집 앞을 지나가게 되면 도끼를 들고 가서 시상을 부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말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어 보면 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이런 문제에 대하여 우리들이 어떤 형태로든지 분명한 해답을 갖지 않고는 성경을 보는 데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단도 나오고 삼단도 나오는 현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예를 들었지만 제가 두 딸에게 몸이 안 좋을 때라든지 아플 때, “빨리 자거라, 놀아라, 좀 쉬어라”고 말합니다. 또 시험기간을 앞두고 놀고 있으면 “야, 공부해라. 12시까지 공부해라”고 말합니다. 한 아버지가, 똑같은 아버지가 똑같은 딸에게 어떨 때는 잠자라고도 이야기하고 어떨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하라 하기도 하고 혼을 낼 때도 있고, 놀라고 할 때도 있고 함께 영화를 보러 갈 때도 있고, 한 아버지가 한 딸에게 이렇게 다양한 교훈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딸이 계속 논다고 합시다. 시시때때로 노니까 엄마가 “왜 그렇게 놀기만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딸이 “아빠가 놀라고 했어요”하고 이야기했다면 아빠가 가지고 있는 뜻을 매우 왜곡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아빠의 원래의 뜻이 무엇이었는가를 이 딸은 알았어야 되는 겁니다. 그 딸이 ‘놀아라’는 편한 말만 생각하고 놀아 버린다면 그건 잘못된 겁니다. 분명히 아빠는 ‘놀아라’는 말을 하기는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에도 가끔 앞 뒤가 다른 말이 나옵니다. 한 하나님이시지만 때와 장소와 여건과 사람에 따라서 어떨 때는 잠을 자거라, 어떨 때는 놀아라, 어떨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또 혼을 내기도 하십니다. 현명한 자녀는 시간이 가면서 점점 아버지의 뜻을 알고 스스로 문제에 대처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아버지의 뜻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약은 신약을 위한 모형
먼저 신구약 성경을 보는 데 유의할 점을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구약은 신약을 위한 모형입니다. 구약은 신약을 위한 그림책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집을 짓기 위해서 설계사에게 설계를 주문하면 몇 십 페이지 되는 설계도를 몽땅 그려옵니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은 도대체 이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보통사람들이 보면 하나도 모릅니다. 건축공학과를 졸업해도 경험이 없으면 모릅니다. 그래서 설계를 한 사람은 항상 제일 첫 페이지에 이 집이 다 지어졌을 때의 모양을, 즉 조감도를 그림으로 그려서 붙여 놓습니다. 그러면 복잡한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도 ‘아, 이 집이 다 지어지면 이렇게 되는구나’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큰 집을 짓는 곳을 보면 그 집을 다 지었을 때의 모형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 그림을 보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야, 그 집 참 멋있구나”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마치 이 그림책, 모형도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시청각 교육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보고, 듣고, 실물교육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한 사건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출애굽 사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서 출애굽 사건이 어떠한 뜻을 가지고 있는가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만큼 이 출애굽 사건은 아주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출애굽 사건은 마치 우리나라가 일본의 압박 아래 있다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으로부터 해방을 얻은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지금부터 약 3천 년 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한낱 이스라엘의 해방 사건일 뿐인 출애굽 사건이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으로부터 해방 받은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학생들이 시험보기 위해서 공부한다면 모르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이 우리들의 신앙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해방 기념이고 그들이 해방된 사건일 뿐인 출애굽 사건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사건은 하나님의 그림공부, 시청각 교육이라는 면에서 보지 않으면 우리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출애굽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아,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 이런 거구나’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지배하에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사탄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 주는 것이고 애굽의 속박 아래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죄 아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으로부터 나올 때, 유월절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압니다. 유월절 사건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으로 애굽의 장자들을 다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면 그 집에는 장자가 죽는 재앙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애굽의 장자들을 하나님께서 다 치셨지만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재앙을 내리시지 않았습니다. 양의 피를 바르면 죽지 않으리라는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으면,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문설주에 피를 바르면 하나님의 재앙을 피할 수 있었던 것처럼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약성경은 오늘 우리의 구원의 의미를 그림으로 보듯이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사실적이고 직접적인 사건이 많이 나옵니다. 이러한 사건은 단지 옛날 옛적에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사건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 와서 우리에게 구원의 의미와 내용을 알게 해줍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낸 것은 천국백성으로서의 삶, 안식의 삶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모형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볼 때에 구약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구약성경은 우리에게 전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또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성전에서 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지냅니다. 그러나 지금은 양을 잡아 제사를 지내는 대제사장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잘못 이해하여 목사님을 제사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제사를 지내지도 않는데 무슨 제사장이 나옵니까? 만약 목사를 제사장이라고 끝내 고집한다면 그것은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대제사장이 제물로 제사를 지냈던 것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신약성경에서는 대제사장이 예수님이시고 성전이 바로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이 바로 제물이시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 줍시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례 요한의 말은 구약을 알아야 그 뜻을 아는 것입니다. 신약만 있다면 어린양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어린양과 염소를 잡아서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아, 예수님이 마치 그 어린양처럼 십자가에 잡혀서 죽는 거구나’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수많은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표본적으로 택하셔서 복과 저주를 주시는 방법을 지상적이고, 가시적이고, 물질적이고 또 즉각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특징은 지상적이고 물질적이고 가시적이고 즉각적이었습니다. 구약에서의 구원은 애굽으로부터 나와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물질적이고 실질적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는 것입니다. 광야사막을 지나갈 때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처럼 직접적이고 물질적으로 우리들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지을 때, 아간이 죄를 지을 때, 즉각적으로 심판하셨습니다. 이렇게 구약은 물질적이고 가시적이고 지상적으로 구원의 모습을 직접 피부에 닿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 땅에서 일어나는 모양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보이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약을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은 신약을 보는 그림책이고, 모형이라는 시각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두 번째로 성경을 보는 데 유의할 점은 신약의 자리에서 구약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구약만 있으면 우리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구약만 읽고서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참고로 구약을 경전으로 하고 있는 종교가 기독교 이외에도 유대교와 마호멧트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교와 모호멧트교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구약의 일부를 현재에도 경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이유는 신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지금부터 7,8년 전까지만 해도 구약은 별로 재미도 없고 이런저런 교유명사도 많이 나와서 별로 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성숙해 가면서 구약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주 쉽게 그림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구약이 재미있는 수준이 돼야 성경을 어느 정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출애굽 사건, 성전의 제사가 구약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홍해를 건너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는 얘기가 몇 백번 나옵니다. 하지만 지금은 구원을 얻기 위해 이스라엘로 가서 홍해를 건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목사님을 제사장으로 보는 사람들이라든지 예배당을 성전으로 보는 사람은 바로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을 그렇게만 알고 있다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성지순례뿐만 아니라 전부 이스라엘 땅으로 가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 양을 잡아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 양을 잡아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집을 짓기 전의 그림을 보고 저 그림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앞으로 지어질 집의 그림을 보고 진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구약성경이 그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입니다. 구약성경을 모두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아마 그렇게 된다면 이스라엘로 이주할 사람이 많아 땅값이 엄청나게 오를 것이고 양 키우는 사업이 세계적으로 일어날 것이고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는 사람이 떼를 지어 나타날 것입니다. 창세기 12:1~3에는 복이라는 말이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복이 무엇이며 그에게 주신 복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원래는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신약성경을 통해 새롭게 큰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보겠습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 지어다”(갈3:7) 여기 보면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 오늘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다는 단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구약성경으로 끝나 버렸다면 아브라함은 우리하고는 사돈네 팔촌도 안 되는 관계지만 신약성경에 와서 보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갈 3:7~8)라고 나옵니다. 창세기 12:1~3에 나오는 축복은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사람들이 받는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9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족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14절).” 이런 말씀이 신약에 하나도 없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려 주신 축복은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아브라함의 축복에 대하여는 5장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히11:8),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히 11:11),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히 11:13).13절에서 다 믿음을 따라 죽었지만 약속을 실제적으로 받지는 못하고 멀리서밖에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2:1~3에서 말하는 그 복을 그가 살았을 때 받은 것이 아니라 그 복을 멀리서 보기만 하고 약속으로만 끝났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시 요한복음 8장 56절에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보다 2천 년 후에 오신 분이고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우리나라의 단군처럼 민족의 조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그의 생애를 보냈다는 말씀입니다. 또 누가복음 10장 23절, 24절에서는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이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들과 임금들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인데 너희들은 아브라함이 기다리던 그 분을 너희 눈으로 직접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에게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의 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신약성경을 통해서 그 뜻이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여기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보는 것, 보기만 하는 것도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를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구약은 씌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쓰여진 책이 구약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자리에서 구약을 보아야 한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구약을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우리는 성경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가 복을 받은 사람인가를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복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축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분명하게 알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에 대하여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구약이 무엇이며 신약이 무엇이며, 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데 그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으며, 온유한 자가 복이 있고, 마음이 깨끗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복에 대해서는 9, 10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신명기 28장의 해석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전제하면서 복과 관련된 유명한 신명기 28장과 말라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신명기 28장을 보겠습니다. 신명기 28장은 소위 ‘축복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나가도 복이요 들어가도 복이요 앉아도 복이요’하는 말을 하나님께서 어떠한 상황에서 어떤 조건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켜 행하면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고(28:1~14) 만약 그렇지 못할 때에는 저주를 받을 것(28:15~68)이라는 내용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신 28:1).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하면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합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 28:15, 16).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하면 저주를 약속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신명기 28장을 보면서 축복을 약속하신 부분만을 보고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면 무조건 축복이 보장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복을 주신다고 하셨지 무조건 복을 주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28장을 보면서 “율법을 지켜야 복 주신다”는 엄중한 단서조항과 28장 15절 이하의 저주의 내용을 쏙 빼고 축복만 이야기한다면 이거야말로 사탄의 장난임에 틀림없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신명기 28절 15절 이하에서 저주의 약속과 이어지면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이 나옵니다(신 28:45~48 참고). 그 예언은 다름 아니라 이스라엘이 결국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엄청난 저주와 시련을 당하고 멸망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고 네게 명하신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기 아니하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너를 따르고 네게 미쳐서 필경 너를 멸하리니(신 28:45).” 이 예언은 그대로 적중되어 이스라엘 민족은 실제로 역사 속에서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당하는 민족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신명기 28장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축복장’이라고 하기보다 ‘축복과 저주장’이라 해야 하고 역사적 결과를 고려한다면 ‘저주장’이라고 해야 더 옳을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은 단순히 축복을 약속하는 내용이 아니고 율법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설명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그림입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율법이란 무엇인가를 신명기 28~31장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신명기의 내용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율법을 잘 지켜 순종하면 복이 주어지고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주실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칼빈은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다음의 문제 곧 우리가 완전히 복종할 수 있는지와 그 공로로 상을 받을 수 있는지를 검토해야 될 것이다”고 말합니다. 즉 신명기 28장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수 있느냐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소위 축복장이라고 부르는 신명기를 통해서 율법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즉 율법이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동시에 어떤 인간도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율법을 몽학선생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몽학선생이란 집주인의 자녀를 학교에 데려다 주는 종입니다. 율법도 이와 같이 그것 자체가 우리에게 구원과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는 종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신명기 28장은 무조건 축복을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하고 더러운 존재인가를 알게 하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말라기 3장 해석
다음으로 말라기 3장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심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이 구절은 십일조를 내면 부자가 된다고 하는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아버지가 딸에게 어떨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해라, 어떨 때는 잠을 자거라, 어떨 때는 놀아라고 하는 예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신구약 성경을 따로 따로 떼놓고 본다든지 일부분만을 보게 되면 마치 그 딸이 아버지가 놀아라고 한 말만 붙잡고 놀기만 하는 것과 같은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구약을 따로 때놓고 보면 구원을 얻기 위해 가나안으로 가야 하듯이 우리는 지금 이스라엘의 성전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성전이 훼파되고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는 성전이 몇 백 개가 됩니다. 원래 성전은 예루살렘에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전이라면 거기에 법궤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당 건물이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을 단수하게 보아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의 교훈을 크게 왜곡시키고 무시해 버리는 아주 잘못된 해석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가 되면서 성전제사가 폐지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도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셔서 제사를 지냈다는 말은 없습니다. 성전제사가 그토록 중요하다면 예수님께서 한번 정도라는 제사를 집례 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약의 성전제사는 이미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 12). 구약시대에는 해마다 때마다 양을 잡아 제사를 지냈습니다. 수없이 많은 제사를 지내야 했는데 이제 그 제사가 폐해지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게 되었기 때문에 성전제사가 막이 내렸습니다. 성전제사와 구속의 진리에 대하여 더욱 알기를 원하시는 분은 제가 쓴 「성경의 제사」라는 책을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히 10:1). 여기 나오는 “율법”은 구약의 제사제도를 말하는데 그러한 제사제도는 장차 올 좋은 일, 즉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의 그림자일 뿐이지 진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제사로는 우리의 죄를 온전케 씻을 수가 없습니다. “구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 10:9). 여기 “첫것”이란 구약을 말하고 좁게는 율법서를 말하고 더 좁게는 성전제사를 말합니다. 또 “내가”는 메시야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첫 번째 성전제사는 폐하여지고 십자가에서 완전한 제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8).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뒤에는 우리가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완전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이제는 구약의 성전제사가 막을 내렸습니다. 집의 모형도는 집이 다 지은 후에는 그대로 두지 않고 폐기처분합니다. 진짜의 집이 없을 때는 그 그림을 보고 ‘이 집 멋있구나’ 했지만 진짜가 다 완성된 후에는 없애 버립니다. 이 사실이 구약의 성전제사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말라기 3장 1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여기 “나의 집”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전과 제사제도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 집이 지금은 없습니다. 있을 필요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십일조가 성전제사 제도와 관련해서 생기게 된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해 내시고 가나안 땅으로 보내시고 난 다음에 여호수아를 통해서 열두 지파에게 땅을 나누어 줍니다. 그런데 레위지파에게는 땅을 주는 대신 제사장 직분을 주셨습니다. 레위지파는 성전을 섬기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은 영광의 직분입니다. 여호수아서 18장 7절에 보면 레위 사람은 분깃이 없으나 제사장 직분이 그들의 기업(몫)이 되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지파 즉 제사장들은 직접 땅을 갖거나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고 성전에서 제사만을 전담하되 그 대신 다른 지파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도록 했습니다. 그것이 곧 십일조인 것입니다. 물론 가난한 자를 위한 또 한 가지 십일조가 있긴 합니다. 그러므로 성전제도의 폐지와 함께 제사장제도도, 십일조의 규례도 자동적으로 폐지된 것입니다. 뿌리가 없어졌으니 줄기와 잎은 자연히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십일조의 폐기를 말하면 이상하게 보거나 무슨 큰일 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체로 그런 분들은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는가 하면 목사님을 제사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라면 구원을 얻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서 성전을 짓고 동물제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는 십일조를 내고 성전에서 양을 잡아 제사지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십일조가 폐지되었으니 헌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약에 와서 십일조는 십분의 일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바치라는 것으로 바뀌어 집니다. 구약은 지금도 신약을 설명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아 있으며 무엇보다 구약의 정신은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1, 2). 신약성경에는 헌금을 얼마 바치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구약 전체를 볼 때 이제 구약의 십일조는 헌금 하한선(下限線)의 의미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구약성경에는 십분의 일만 내면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더 이상 내야 된다는 강조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십분의 일의 헌금은 최소한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신약성경에 들어와서 십일조의 의미가 내면화되고 더욱 강화된 것입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구후 8:3). “힘에 지나도록 자원한다”는 말은 십분의 일을 내는 것 때문에 힘에 겹다는 말이 아니고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 8:9). 여기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린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여기에 신약이 보여 주는 헌금정신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헌금을 드리기 전에 자신을 먼저 주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헌금의 가장 중요한 정신입니다. 십분의 일을 드리는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째로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고후 8:7). 다른 것들이 풍성한 것처럼 너희가 내는 연보에 대해서도 풍성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신약에서는 구약에서처럼 얼마를 정하여 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가난 가운데서도 힘에 지나도록 헌금을 바쳤다고 했습니다. 앞에서 본 예를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가 우리집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하거나, 잠자라고 또는 놀아라고 하는 말은 어렸을 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즉 성숙한 자녀에게는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아도 그 아버지의 뜻, 즉 하나님의 뜻을 간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다 자란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의 정신입니다. 이것이 신약성도와 구약성도의 차이입니다. 이 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이 또 신약에서 말하는 진정한 복의 의미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한국교회는 성경을 보는 데 너무 아전인수격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거리 식으로 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저희 교회 여집사님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옆집에서 싸움을 많이 하는 순복음교회 구역장 집사님이 자기 집에 놀러왔길래 예수 믿는 사람이 이웃끼리 싸워서 되겠느냐고 하면서 화해를 하라고 말했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순복음교회 구역장 집사님이 말하기를 “진주를 개에게 줄 수 없다”고 말하더란 것입니다. 싸움을 했으면 화해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어떻게 화해의 진리를 예수님을 모르는 개한테 줄 수 있느냐고 오히려 반문하더라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생명의 말씀이고 복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작은 예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는 예가 우리 주위에 너무도 허다합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복과 관련된 성경해석도 이런 예 중에 하나입니다. 이런 예가 오늘 교회 안에 비일비재하다는 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문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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