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의 혁명> 5장. 아브라함의 축복 박철수 |
포기는 참된 기쁨이다. - 간디 「간디어록」에서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 갈라디아서 3장 9절
아브라함은 모든 세대의 신앙인들에게 모범이 되는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어떠한 생애를 살았고 어떠한 믿음을 가졌기에 그렇게 많은 교훈들을 우리들에게 주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인 아브라함의 생애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교훈을 살펴볼 수 있겠지만 특별히 복이라는 측면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3절까지를 보면 축복이라는 말이 다섯 번 나오는데 과연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이 어떠한 복이었길래 신약에 들어오면 아브라함의 축복을 거론하게 되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파란만장한 아브라함의 생애
첫 번째, 아브라함의 생애는 우르라는 도시를 떠나면서 시작이 됩니다. 얼핏 보면 우르라는 도시를 떠나는 것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 것이냐고 생각할지 모릅니다만 그 배경을 살펴보면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벧엘 성경교재를 보면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난 것은 출애굽 사건보다 더 큰 사건”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물론 이 말은 조금은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난 것은 마치 우리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을 떠나는 사건과 버금가는,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난 것은 그냥 떠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 보면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는 말이 나옵니다. 부동산 투기가 만연해 있는 오늘과 같은 상황에 이 말을 적용시켜 본다면 네가 살고 있는, 그 땅값 비싸고 살기 좋은 곳을 버리고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가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 우르가 어떤 곳인가를 잠시 생각해 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그 때 당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가장 중심지역에 위치한 문명도시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서울과 같은 도시입니다. 사람이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이 있듯이 그만큼 사람들은 서울이라는 도시를 동경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거꾸로 그렇게 잘살고 좋은 도시인 우르라는 도시를 떠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중요한 하나님의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안정된 세계에서 불안정한 세계로, 정착된 세계에서 방황하는 세계로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칼빈은 바로 이 12장 1절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인간 생활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연으로부터 떠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본능적인, 아름다운 인연으로부터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가 우르에서의 탈출로부터 시작된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두 번째로 창세기 12장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마침내 가나안 땅, 즉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에 도착했다는 말입니다. 이 ‘마침내’라는 말 속에서 아브라함이 참으로 파란만장한, 수없이 많은 방황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알지 못하는 땅, 가나안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좋은 우르를 떠나게 하시고 가나안 땅에 도착하게 하셨으니 이제는 아브라함이 약속된 땅에서, 참으로 재미있고 아름답고 멋있게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창세기 12장 10절을 보면 그 땅에 기근이 있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단지 가나안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그 땅에 기근이 심하여 애굽에 우거하러 내려갔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으로 갔으면 거기서 잘 먹고 잘 살아야 할 텐데 여기서 또 하나의 어려움에 직면했다는 것입니다. 더 잘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땅이 농사가 잘 안 되는 땅이고 또 먹고 살기에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고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으로 가게 될 때 복을 주시리라는 약속을 생각하면서 많은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도착하여 직면한 어려움을 보고 마음 속에 많은 좌절감을 느꼈으리라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단지 애굽을 간 것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12절에 보면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가서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렸으면 좋을 텐데 오히려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기까지 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다른 남자에게 자기의 부인을 넘겨줘야 될 정도의 심각한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 부분을 설명하기를 “죽기보다 어려운 일을 아브라함은 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를 다른 사람의 시중을 들게 하고 먹고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의 아내를,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어떻게 보면 팔아먹고 살아야 되는 비참한 지경에까지 이른 사실을 보게 됩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한 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창세기 20장 1절 이하를 읽어 보면 또 한 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진 것을 알게 됩니다. 그토록 아브라함의 생애에는 어려움과 고통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3장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올 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아브라함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일생에서 최초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은금과 육축이 매우 많았던 사실을 봅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일 뿐입니다. 가나안 땅에 다시 돌아온 아브라함에게 비록 은금과 재산이 조금 생겼지만 자기와 함께 왔었던 조카 롯과의 재산문제로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12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할 때에 유일하게 함께 온 사람이 바로 롯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롯과 헤어져야 하는 또 하나의 아픔을 겪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핏 보면 이런 것들이 아브라함의 복과 아브라함이 행복하게 살았던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또는 그런 속에서도 아브라함은 행복하게 살지 않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은 자시글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백세가 될 때까지 자식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아브라함은 백세까지 자식이 없었고, 그 후에 하나님께서 주셔서 자식이 있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이 백 세 이지 백 세 때까지 자식이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동안 얼마나 기다리고 마음이 안타까웠을까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아브라함이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창 15:2)라고 하나님께 하소연을 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뭔가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창 12:1~3), 나에게 도대체 뭘 주시려고 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백세가 되도록 아들이 없자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 종으로 부리고 있는 사람 중에 똑똑한 사람 한 사람을 선택해서 상속자로 정하려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죽을 때가 됐는데 자식을 못 낳으면 상속자라도 만들어서 자기의 대를 이어야겠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거부하시자(창 15:4) 아브라함은 또 하나의 아이디어를 생각하는데 이것은 그 당시에는 흔히 있는 풍속이긴 했지만 자기의 종인 하갈을 첩으로 맞아들여서 아들을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데리고 있는 종 가운데서 상속자로 삼겠다고 하는 그 아픔, 그리고 그것도 안되니까 자기가 데리고 있는 여자 가운데서 첩을 삼아 아들을 보아야겠다고 하는 그 아픔이 얼마나 큰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첩인 하갈로부터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하갈이 임신할 때부터 가정에 불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본처와 후처와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삭이 태어난 후에는 결국 후처인 하갈과 맏아들인 이스마엘을 내보내야 되는 아픔을 또한 겪게 되었습니다. 그 아픔이 얼마나 컸던지 21장 11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을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라고 나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의 문제로 아브라함이 깊이 근심이 되었습니다. 이삭이 태어나면 그런대로 가정의 불화가 없어지리라고 생각했건만 오히려 이삭과 이스마엘의 관계 때문에 더욱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는 아픔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이것으로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좋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도 귀하게 얻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아브라함의 생애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질곡과 고통의 세계인 것을 보게 됩니다. 단지 구경꾼의 눈에는 아브라함이 위대한 신앙의 인물로 비칠지 모르지만 그의 생애를 하나 하나 짚어 보면 얼마나 가슴 아픈 삶으로 점철되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서 멋있고,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영위한 것 같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야말로 얼마나 실수가 많았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지 모릅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만큼 아브라함의 생애에 대하여 잘 설명하고 있는 곳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칼빈은 “아브라함은 일평생 세파에 시달렸으므로, 비극의 일생을 그리고 싶은 사람은 아브라함과 같은 적절한 모델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살다간 사람 중에서 비극적인 일생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브라함만큼 적절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칼빈은 계속해서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많은 폭풍을 겪으면서도 결국 안전하게 빠져 나갔다고 해서 그의 일생이 완전히 불행한 일생은 아니었다고 대꾸하지 말라. 무한히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 오랫동안 악전고투 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살았다고 우리는 말하지 않는다.” 구경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위대한 신앙 혹은 모범적인 신앙이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아브라함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아브라함이야말로 칼빈이 말한 대로 무한히 많은 고통을 당하면서 일생 악전고투한 불행한 사람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부자 되기를 거부하는 아브라함
우리가 또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은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그가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세 번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부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그것을 포기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로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실 때 우르라는 도시를 떠났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가 가지고 있는 토지와 친척과 아비의 집이 있었던 안정되고 살기좋은 고향에서 떠났다는 사실에서 아브라함은 부자가 될 수 있는 삶을 포기했던 것을 우리들이 알게 됩니다. 두 번째로 아브라함이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애굽에서 돌아온 후 롯과의 관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은 삼촌으로서 충분히 좋은 땅을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롯에게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좋은 땅이라는 것은 좋은 목초지로서 좋은 샘물을 가지고 있는 땅을 말합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란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더니”(13:9). 그 지역은 원래 물이 귀한 땅이었습니다. 물이 부족한 땅이기 때문에 물이 많다고 하는 것은 아주 좋은 땅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마치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 그곳은 아주 좋은 땅, 지금으로 말하면 금싸라기 땅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얼마든지 내가 갖겠다고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롯에게 “네가 그 땅을 갖고 싶으면 가져라”하고 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참으로 우리에게 도전하는 바가 큽니다. 아브라함이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는 한 번 더 있었습니다. 롯이 택한 그 땅은 너무도 좋은 땅이었기 때문에 많은 이웃 부족들이 연합하여 롯을 잡아가고 땅도 빼앗아 갔습니다. 의리 있는 아브라함은 롯이 잡혀간 사실을 알고 318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승리하게 되고 빼앗긴 재물과 롯을 데리고 옵니다(창 14:14).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마중 나온 소돔왕이 아브라함에게 빼앗긴 땅과 재산을 다 가지라고 이야기합니다. “소돔왕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l 아브라함이 소돔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라함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물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 14:21). 내가 만약 이것을 갖게 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고 네가 주었다는 말을 듣기 때문에 받지 않겠노라는 것입니다. 한 오라기 실이라도 신 한짝이라도 내가 안 받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왕이 주었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기 싫노라 하면서 거부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그 뒤로라도 부자가 되었습니까? 창세기 23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그의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죽을 당시에 땅 한 평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를 묻을 땅마저도 없었습니다. 또한 gpt 족속들이 아브라함에게 일부 땅을 기증하려고 했을 때도 아브라함은 무료로 받지 않겠다고 거부합니다(창 23:13).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 뒤에도 아브라함은 결코 큰 부자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복
지금까지 우리들은 그토록 위대하다는 아브라함의 생애와 아브라함의 믿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이 소위 잘 먹고 잘살고 만사형통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2장 1절에서부터 3절까지 나오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이 복은 과연 어떠한 복을 말하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고통과 좌절의 생애를 보면서, 아내가 죽어 묻을 땅도 갖지 못한 생이를 보면서, 부자가 될 기회가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부자가 됨을 거부했었던 이 아브라함의 생애를 우리들이 보면서, 과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아브라함의 복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신약의 말씀에 비추어 해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갈 3:6,7). 갈라디아서에서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도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고 만사형통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과 이것이 일반은총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 가운데서도 좋은 고등학교 들어가고, 좋은 대학교 들어가서 좋은 직장 얻어 예쁘고 부자인 아내를 만나서 큰 집에서 살고, 출세하여 늙을 때까지 아무 근심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수를 안 믿더라도, 똑똑한 사람들이 많고, 시도 잘 쓰는 사람도 많고,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도 많고, 공부도 잘하는 사람도 많고, 출세하는 사람도 많다고 하는 평범한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오직 그 이유만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목적으로 성도들에게 귀한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은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아 알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는 특별은총,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축복입니다. 이것을 작은 것으로 알면 안 됩니다. 우리 인간은 허망한 존재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어려움과 고통을 생각할 때마다 나 자신이 흙일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면서 위로를 얻습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삶인가를 인간은 단지 흙일뿐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 앞에서 깨닫고 위로를 얻고, 확신을 얻고, 감사를 합니다. 우리 인간은 허망한 존재입니다. 흙일뿐인 존재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은 너무도 더러운 존재입니다. 모든 사람은 별 차이 없이 모두 더러운 존재입니다. 얼마나 교만하고, 얼마나 이기심에 충만해 있는 존재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한마디로 인간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의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없는 존재, 하나님 앞에서 단지 흙일뿐인 존재,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설 수 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야말로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입니다. 저는 시편 23편을 사랑합니다. 시편 23편은 생각할 때마다 너무도 좋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나와 함께 동행하시기 때문에 내가 부족함이 없는 것이지 자신이 부자고 왕이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놀라운 확신 때문입니다. 이 축복보다 더한 축복이 무엇이겠습니까? 천국이 무엇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은 흔히 아무 일도 안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늦잠 자고, 또 말만 하면 밥이 생기고 무위도식하는 세계가 새 하늘과 새 땅 즉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은연중 많은 것 같습니다. 천국은 내 맘대로 하는 세계,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세계라고 보통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경이 말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은 그런 세계가 아닙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 21:3).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전체를 흐르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상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바로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서 그의 삶이 비록 고통과 좌절이 많은 삶이었지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서 복되고 승리의 삶을 산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별명 가운데 ‘하나님의 친구’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별명은 참으로 명예로운 이름입니다. 비록 그가 그런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친구로서 아브라함과 함께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축복을 말하는 책입니다. 그 축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축복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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