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하는 생활의 비결
3부 생활을 통해 나타나시는 그리스도
2장 성령 역사의 첫번째 통로
“개인 생활의 부흥” (1)
잭 R. 테일러 |
제 2 장 성령 역사의 첫 번째 통로 “개인 생활의 부흥”
성령은 부흥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영의 자유스러운 감동 없이는 부흥이 있을 수 없다. 성령은 먼저 개인의 마음 안에서부터 역사를 시작하신다. 성령께서는 개인의 마음속에서 자유를 발견할 때, 진정한 부흥을 일으킬 수 있는 요인들을 만들어 내신다. 그럴 경우 개인의 생활에 즉각적이고도 분명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미 본서에서도 소개한 바와 같이 몇 년 전에 내 생활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부흥에 대해서 듣기도 했고, 또 그것을 위하여 기도도 했지만 실재로 나는 그것이 일어났을 때 거기에 순응할 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나는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하신 말씀의 의미 이상의 것을 발견했다 :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나는 “성령의 바람”(Holy wind)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몰랐다. 나는 성령님의 감동을 통해서 내 생애에 일어난 보다 분명한 사실들을 말하려고 한다.
예수께서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사람이 되셨다.
이 사실을 어떻게 여러분께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예수께서는 내게 매우 귀중한 존재가 되셨다. 이 사실은 내가 어린 소년이었을 때부터 그러했다. 나는 예수께는 사랑 이외의 다른 감정을 느껴보지 못했다. 나는 나의 성경 이야기 책에서 그 분이 행하신 일을 읽고 그 분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오래 전에 그 분에게, 내 생활 가운데 들어오셔서 나의 구주가 되어달라고 간구하였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예수께서 결코 내 생활 가운데 실지로 존재하는 어떤 분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는 위대한 책에 기록된 한 사람의 위대한 영웅이었으며 그래서 나와 그를 존경하고 그를 위해 봉사하며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분은 내가 알고 있고 또 내가 원하는 만큼 내게 실재적인 분이 되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 내가 현실적인 여러 가지 문제들을 너무나 중요시했기 때문에, 이런 내 관념이 그로 하여금 내게 실재적 아픔이 되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다. 현실적인 일들은 다 실재적이었다. 교회 일은 실재적이었다. 여러 가지 곤란한 문제들은 다 실재적이었다. 목회적 야심은 실재적이었다. 내가 나의 성공을 확인하기 위해서 사용한 통계와 판단의 표준은 실재적인 것이었다. 그 외의 수 만 가지 다른 일들이 다 실재적인 것들이었으며, 이런 것들이 오랫동안 그리스도께서 내게 실재적인 분이 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저녁, 예수께서는 내게 실재적인 존재가 되셨으며 그 순간부터 오늘까지 그런 분으로 존재하시게 되었다. 나는 내가 이전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 일들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게 된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실재(實在)가 고민하던 내 영혼에 여명(黎明)을 발하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나는 예수께서는 여러분이 지금 이 페이지에서 읽고 있는 글의 내용보다 더 실재적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분은 내가 감사한 마음으로 봉사하고 있는 교회보다 더 실재적이시다. 그 분은 내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 보다 더 실재적이다. 그 분은 과거 어느 때보다 지금 이 순간에 내게 더욱 실재적이시다. 내가 나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를 가리고 있던 표면적 안전에 대한 여러 가지 일들이 다 공허한 일임을 발견했을 때, 그 분은 내 생활 가운데 위대한 실재자가 되셨다. 나는 내 마음에 넘쳐흐르는 이 영광스러운 실재자와 함께 잠자리에 들고 그를 생각하면서 아침에 일어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스럽고 영원한 실재가 되신 것이다!
성경이 새로운 책이 되었다. 이것은 최초이자 가장 주목 할 만 한 기적이었다. 그것은 마치 내가 눈을 껌벅거리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내 앞에서 책을 바꿔놓은 것 같았다. 이것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성경의 모든 구절둘이 다 새로운 의미(meaning)를 가졌으며 그 이야기들은 새로운 뜻(implications)을 가졌다. 그리고 그 통일성은 놀랄만한 것이었다. 전에는 설교 준비를 하기 위해서 성경을 대충 읽어보았지만 이제는 설교가 문자 그대로 성경의 각 페이지에서 내게로 뛰어 나왔다. 설교는 힘든 투쟁이 아니라 기쁨이 넘치는 일이 되었다. 나는 미처 내 안에서부터 밖으로 넘쳐흐르는 진리를 다 말하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의 체험이 둔해지고 성경이 의미를 잃게 되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수년 동안 이와 같은 나의 체험은 더 깊어지고 있다. 구약성경의 여러 구절은 그 의미가 불타는 것처럼 보였다. 성경 어디를 펴도 하나님의 역사(役事)의 거센 물결의 마개를 여는 것 같았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성경을 읽고 거기서 그가 내게 하시는 말씀을 찾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내 설교는 예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이야기일 것이며, 따라서 교인들은 내게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나를 좋아하는 그들은 진리를 필요로 하고 있었으며 또 그것에 의해서 축복을 받았다. 성경은 내게 살아 움직이는 책이 되었다!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내게 실재적인 분이되기 전에는, 기도와 성경 읽기가 나의 헌신(獻身) 그래프의 눈금을 하나하나 칠해 올라온 것에 불과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하지 못했으며, 단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ale고 실천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제가 되었다. 이제 기도는 삼위(三位)와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 나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그리스도이신 하나니모가 성령이신 하나니모가 더불어 각각 대화하고 찬양하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나는 이전에는 기도하는 법을 몰랐었다. 그러나 이제 기도는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으며 또 내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과거에는, 기도는 하나님께 내가 원하는 것을 구걸하는 수단이었다. 그 때의 기도는 일시적인 것이었고 요구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즉각적으로 구할 수 있을만큼 확실한 것이 되었다. 이사야 65:24와 같은 기도에 대한 성구는 내게 생생한 의미를 주고 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이 말씀 안에는 임시적 요소가 없다. 여기에는 단지 적극적인 확실성이 있을 뿐이다.
기도는 이미 요구가 아니라 감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다. 우리는 단지 기도를 퉁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응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해답이 되지 않은 기도는 생각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필요에 대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예스(Yes)”이다.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1). 시편은 하나의 효과적인 기도의 수단이 되었고 찬송가는 구주님께 대한 개인 예배의 수단이 되었다.
나의 예수여,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이 나의 것인 줄 압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모든 죄악의
어리석음을 다 버렸습니다.
당신은 나의 은혜로운 구속자요 나의 구주입니다.
내가 만약 전에 닷인을 사랑했다면, 내 예수여, 지금도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거룩한 직분을 가진 내가 사탄과 싸우는 전쟁이 되었다. 내가,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고 외칠 수 있을 때 내게 승리를 안겨준다.
증거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되었다. 과거에는 복음전도가 유쾌하지 않은 자일같이 생각되었으며 언제나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변화된 이후에 그것은 내게 안도감을 가져다주는 즐거운 의무가 되었다. 성령께서 나를 다스리실 때, 그것은 기쁨이 넘쳐 흐르는 일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전에 내가 의식적으로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던 때보다 지금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는 증거가 죄의식을 덜기 위한 수단이었으나 지금은 넘치는 기쁨이다. 과거에 나는 구령을 위한 연수과정을 많이 이수하고 사람을 인도하는 법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다 그러나 내가 내 안에 구령자가 살아 계셔서 내가 그에게 완전히 굴복할 때를 기다렸다가, 그럴 경우 그가 대신 증거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증거는 하나의 기쁨이 되었다.
나는 여기까지 글을 쓰고 있을 때 노크 소리를 들었다. 나는 어떤 모텔 방에서 글을 쓰고 있었는데, 그 때 방문한 사람은 모텔의 램프를 손질하는 종업원이었다. 나는 그 사람과 구세주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로 약속하였었다. 몇 분이 지난 후에 그 사람은 바닥에 무릎을 굻고 예수님께 자기의 마음속에 들어와 달라고 기도하였다. 루우벤은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전하기 위하여 밖으로 나갔다.
나를 괴롭히던 문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되었다.
처음 내게 찾아온 것이 우울증이었다. 나는 거의 조울병에 걸린 것 같았다. 나와 가끔 작은 문제 때문에도 영적으로 깊은 우울감과 패배감에 빠지곤 했다. 그런 때 나는 정상적인 일과도 거의 해낼 수 없었다. 내 마음에는 검은 구름이 떠 있었다. 미래도 암담해 보였다. 내게서 이 “우울증”을 제거하려는 모든 노력에 다 “어리석은 것” 같이 생각되었다. 어떤 영적 승리나 영적 축복이 있은 후에 이런 상태는 더 심각해졌다. 그것은 괴로워하고 짜증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성령께서 내 마음에 감동하셨을 때, 나는 주님께 나의 우울증에 대해서 말씀드렸다. 그때 나는 영광스러운 사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사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은 기쁨을 더해 주었다.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 “주님, 제가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당신에게.-예수님 오늘 당신이 내 안에 계셔서 내가 꼭 되어야 할 사람이 되게 해 주시고 또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내가 당신에게 ‘내 몸은 당신의 것입니다. 이 몸을 소유하시고 채우시고 활동하게 하시고 온전히 다스리셔서 당신의 사업을 하게 하소서.’하고 기도하게 하소서.” 이 후에 큰 변화가 일어났으니 하루 중 가장 괴로웠던 시간(아침에 잠이 깨는 시간)이 가장 좋은 시간이 되어버렸다. 그 이유는 그 시간이 내 생활을 변화시킨 첫 날이 시작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우울과 낙담에 대한 격려가 계속되었다. 그 응답은 각각 달랐으니, 일어났던 모든 변화에 부가하여, 사탄도 예수님 만큼 실재적 존재가 되었다. 우리에게 낙담을 주는 영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이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능력과 사랑과 근심하는 마음”(딤후 1:7)이었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사탄에게서 나온다. 이와 같은 은사의 근원을 아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은 근원을 찾아가게 한다. 우울증을 이길 수 있는 치료법 중에는 감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아래와 같은 훌륭한 말씀을 참고하기 바란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고 하는가 그렇다면, 감사하라. 우리가 감사의 치료요법을 실천할 때, 우리에게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어머니와 함께 그녀의 아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아들의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그 아들로 인해 여러 사람의 마음이 상했으며 수치와 마음 아픔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어따. 그 어머니가 울고 있는 중에 나는, “부인, 이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하고 말했다. 그 어머니는 안색이 바꾸어지면서 “목사님은 저를 바보라고 생각하세요?”하고 만문했다. 나는 그 질문을 다시 했으며 그 부인은 감사해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는 데살로니가 전서 1장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은 일차적으로 감사를 통해 나타난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할 때까지는 자기의 뜻을 나타내지 않으신다. 우리는 함께 기도했으며 그녀는 처음으로 그런 불행한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 후 즉각적인 응답이 왔으며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녀의 생활은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내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두 번째 문제는 재난(distress)이다. 재난은 우울증과는 다르며 이것은 갑자기 오는 것이며 그 반응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사람은 대개 재난을 거쳐서 우울증 혹은 죄의식에 이른다.
여러분이 일을 잘해내고 또 모든 일이 다 잘 진행될 때 비극이 닥쳐온다. 사람들은 이러쿵 저러쿵 말한다. 좋지 못한 소식이 들려온다. 해야 할 일이 쌓이기 시작한다. 그때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이 감사의 치료요법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기로 하겠다. 우리는 1967년에 새 차를 선물로 받았다. 그해 8월에 우리는 오랫동안 기다리던 캘리포니아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새 차와 충분한 돈, 그리고 오랫만의 휴가 등, 모든 일이 다 잘 진행되었다. 그러나 오후 2시 산 안토니오에서 120마일 쯤 떨어진 지점에서, 큰 서부 텍서스 사슴이 우리 차 앞에 뛰어 들었다. 충돌은 불가피했다. 사심은 헤드라이트 사이에 와서 부딪쳤다. 차의 덮개가 달아나고 에어컨디셔너가 우리의 휴가와 함께 달아나버렸다. 그 때 나는 몇 주일 전에 읽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생각했다. 우리는 그 때 비로소 그 말씀의 참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전과 같은 사람이었다면, 뒤로 돌아가서 불쌍히 죽은 사슴을 들어 한 두 번 발로 찬 후에 차에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화를 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생활을 비참하게 할 뿐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도 비참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우리가 어떻게 했는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마치 번갯불과 같이 내 머리 속에 어떤 말씀을 넣어 주셨으며 나는 가족들에게 그 말씀을 했다. “이건 하나님의 뜻이야. 나는 그의 뜻대로 행해야겠어.” 그 후에 나는 그러한 극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이 처한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어진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감사할 일을 보여주실 것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만 하면, 즉시로 우리가 전에는 알지 못했던 평화와 기쁨의 옷자락이 우리의 환경을 감싸 줄 것이다. 우리는 갑자기 태풍을 만난 격이었으나 웃고 놀고 농담하며 기도했다. 우리는 12시간 후에 다른 차로 목적지에 도착했으며 모든 일이 다 잘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재난이 닥칠 때, 그럴 경우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하실까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그들이 결정한 일을, 그리스도께서도 이렇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행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소극(笑劇)에 불과한 것이니, 그리스도께서는 그 때 그런 재난의 순간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왜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것을 하도록 허락해야 한다는 진리는 깨닫지 못하는가? 우리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하도록 하라! 우리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시며 자신으로 우리를 채우시고 우리의 모든 재난을 스스로 해결하신다.
세 번째 문제는 우리의 부족함에 관한 문제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부족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나는 부적당한 사람입니다.”라는 말은 수많은 사람들의 절망적 외침이다. 사탄은 우리가 패배감과 단념으로 인한 부족을 느끼기를 원한다. 어느 날 나는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교훈을 습득하였다 : 만약 내가 부적당한 사람이면 그렇게 느껴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또 그런 나는 실재로 부적당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사실을 직면하지 못하고 느낌으로 살아야 하는가? 우리의 죄는 부정당하는 느낌이 아니라 우리가 완전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실로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충만하심을 허락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완전해 질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나는 비로소 나의 부족함을 사실로 인정하고 내 안에 있는 완전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그가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이렇게 예비해 주신 것은 얼마나 훌륭한 배려인가! 우리의 부족함의 토대 위에서 그의 완전함이 입증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잘 나타날 수 있다. 우리의 무지(無知)는 그의 지혜가 입증되는 무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부정적(negatives)인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positives)이다 : 이러한 깨달음이 바울을 움직여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르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후 12:9).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의 부족함들이 치료될 수 있다.
성령의 감동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그의 열매이다. 성령의 열매는 조작될 수 없다. 성령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 “오직 성려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 5:22). 요한복음 7:37-39에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를 마시면 우리에게서 생수의 강이 흐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우리가 받게 될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찬양할 수 있다.
내 영혼에는 강같은 사랑이 넘치네… 내 영혼에는 강같은 기쁨이 넘치네… 내 영혼에는 강같은 평화가 넘치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곳에는 반드시 그 열매가 열려서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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