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생활의 원리 (NEW TESTAMENT LIVING)
6장.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해결이다
NORMAN B, HARRISON, 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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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만약 에베소서의 교훈대로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신약의 생활 표준에서 뒤떨어지고 있다. 이장에서 우리가 연구하려는 제목은 이것이다. 즉, 우리의 생활이 우리의 머리에 의해서 내적 지배를 받게 될 때까지 우리는 한결 같이 외형주의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에베소서는 우리의 정신이 바라볼 새로운 높이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 서한 가운데 전개되고 있는 무한히 높은 진리의 전모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울이 애용한 비유 :
여러 교회들에 보낸 바울의 모든 서한들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일관된 개념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곧 교회는 본질적으로 모든 조직체들이 그 한 곳으로 귀결되는 통일된 기관이라는 생각이다. 바울이 쓴 이 참된 비유는, 그 자신과 우리들과의 내적 관계를 지적한 그리스도의 교훈 --- 포도나무의 교훈을 더욱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연합(몸과 머리의)은 곧 통일을 의미한다. (연합과 통일에는 로마서인적 의견의 차이는 일어날 수 있으나 고린도적인 분열은 없다) 우리들 인간은 인간성의 바퀴 안에서 살고 있다. 인간의 생태에 있어 중요한 현상의 하나는 그의 신체가 그의 정신을 충실히 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몸은 마음과 생각의 명령에 항상 충실히 순종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
인간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구속받지 못한 인간들은 이 일을 행하지 않을뿐더러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은 구속의 가장 으뜸 된 목적이다. 성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려” (엡 1:6)성자께서는 우리를 사서 자기의 소유로 삼으셨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이는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2)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를 자기에 속한 사람으로 인치셨다. 무엇 때문에?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엡 1:14) 하시려고. 이와 같이 구속의 의의는 다만 인간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까지 미친다. 즉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평가하고, 찬미하는 일들을 우리들 인간에게 일임해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이루신 업적들은 모두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일들이었다. 이일을 위한 횃불을 이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넘겨주셨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생애의 전 목적이다. 이 밖에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왜 그렇게 해야만 되는가? 우리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들 인간이 새 언약에 의한 하나님의 성전이요, 이 땅에서 그 넘치는 생명을 재현시켜야 할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출 40:33) 그와 같이 성전에도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 하였었다. 그 다음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다”(요 1:4) 그의 지상의 임무가 끝나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시며 아버지에게 도고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나이다”라고 하셨다.(요 17:22) 우리에게 맡겨진 그의 영광이여!“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16:19-20) 이렇듯 우리의 부족한 인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아름다움과 존귀함을 나타내기로 부르심을 입은 우리가, 어떻게 악의의 행위와 혹은 이기적이며 참을성 없고, 그 밖에 모든 떳떳하지 못한 행위로서,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감히 흐리게 할 수 있을까? 우리의 현실은 비참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타나내기는 커녕 그것을 혹독하게 그르치고만 있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단념해 버릴 수는 없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대체 그 높디 높은 표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답해주는 것이 에베소서이다.
몸은 머리의 완성이다 :
에베소서 1장 20절 이하의 장엄하고도 힘찬 말씀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룬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우리의 마음 가운데 다시금 상기 시켜준다.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셔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던 것이다. 교회는 그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다. 얼마나 큰 우리의 영광인가?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놀라우신 분의 충만인 것이다. 즉 그의 원대한 경륜의 완성이요, 총결산이다. 그렇다. 동시에 머리는 그 자체의 완전한 표현을 통해서만 기대할 수 있다. 이렇듯 교회는 그의 머리된 그리스도의 충만 --- 그 뜻과 자기표현의 성취이다. 여기서 우리는 앞서 연구한바 포도나무 줄거리와 가지의 관계에서와 같은 상호 의존의 관계를 다시금 발견한다. 몸이 그 자신이 지니지 못한 지혜와 행동의 지침을 머리에 의존하는 한편, 머리는 그의 생각과 뜻과 지혜의 표현을 몸에 의존한다. 이 협동 관계 위에서 몸과 머리는 그의 제각기 맡은 바 직분을 다해 나가는 가운데 하나의 온전한 생명체를 완성한다. 이 온전한 생명체란 말할 것도 없이 “새 사람”, 즉 중생한 새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 밖에 살던 우리 :
에베소 2장 2절은 중생전의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의 옛 생활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무시한 생활이었다. “허물로 죽은 우리”(엡 2:5) 라는 말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대해서 죽은 우리라는 뜻이다. 우리를 지배한 것은 죄악이었고, 하나님이 아니었다. 우리는 세상의 풍속을 좇고 육과 악의 권세를 좇고 있었다. 에베소 2장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은 우리의 절망적인 처지를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
구속의 문제 :
이와 같은 인간의 처지는 구속이 맡은 바 사명의 성경을 분명히 말해준다. 인간의 죄악이 아직 사람에게 들어오지 않았던 창세 당시로 돌아가 보자. 에덴동산에서 무엇이 일어났던가? 마귀는 간사한 꾀를 부렸던 것이다. 그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쐐기를 박았다. 그는 인간의 안에 있던 하나님의 주권을 파괴해 버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자녀로 만들고 말았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는 이와 같이 하여 유린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손상 받은 주권을 바로 잡으시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들 인간을 선하게 만드시려는 것이 아니라, 옛날과 같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로 우리를 다시 돌이켜 가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이었다. 그는 인간을 다스리는 내적 지배력을, 그 자신의 내적 지배력으로 다시 돌이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의 공통된 요구를 율법이 감당할 수 있을까? 결코 없다. 율법의 어떠한 작용도 다 외부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생활 체제로서는 죽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고로, 율법을, 그리스도께서 그 마침이 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실 때까지의 임시적 방편으로 쓰셨다.
그리스도와 긴밀한 결합 :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준비하신 계획은 인간의 처지에 가장 부합되는 계획이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혼자서만 죽으시고 또한 살아나시게 하지 아니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그와 함께 하늘에 앉게 하셨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풍성한 은혜를 영원토록 우리의 위에 부어 주시려는 것이다. (에베소서 2:6, 7절을 각별히 숙독해서 그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할 것) 이것은 얼마나 은혜스러운 하나님의 뜻이냐? 이 은혜의 효능을 한 번 생각해 보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고” 그의 뜻을 받드는 그의 새로운 피조물들인 것이다. 우리가 하는 선행은 보통의 선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신” 일이다. (엡 2:10) 옛날의 우리는 세상의 풍속을 좇고 유게의 욕심과 마귀의 권세에 복종하는 진노의 자녀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생겼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신 것이다. 곧 머리가 다리를 지배하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배하고 인도하시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전진에 대한 최대의 보장이다. 우리의 길을 설정하신 하나님 자신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고 지혜가 되어 주셨기 때문이다. 이 심원한 신의에 우리는 그저 경탄할 뿐이다.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머리가 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이 시간 자문해 볼 일이다.
한 새 사람을 이루고, 화평케 됨 :
이 은혜는 어떠한 개인에게나 혹은 민족이나 계급에게도 한결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적대심을 제거 하시는 단 하나의 해결책은 십자가였다. 하나님의 계획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한 몸으로 만드신 후, 스스로 그 머리가 되시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세상의 죄악을 얼마나 완전히 고칠 수 있을까! 그러나 인간은 화평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 드리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 하나님을 맞아 드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다툼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다. 세상에 있는 싸움과 불화의 원인은 십자가를 거역한 데 있다.
하나님의 처소 :
혈육이 결합하여 인격의 처소로서의 온전한 유기체가 형성되는 것과 같이, 우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함께 지어감”을 받는다.(엡 2:22) 바울의 전도는 이 새 언약에 의한 하나님의 성전을 설립하는 일이었다. 그는 에베소서 3장 16절 이하에서 하나님께서 에베소의 성도들과 함께 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올렸다.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리고 이 모든 은혜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영원무궁한 영광이 돌려지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높은 절정이냐!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리는 것이 구속받은 성도들의 성스러운 사명이라는 문제로서 이 장의 연구를 시작했었다. 그리고 에베소서의 첫 장을 비롯한 뒤이은 두 장에 기록된 빛나는 말씀 가운데서, 이 사명에 대한 보장을, 교회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알았다. 한때 그리스도를 통하여 빛을 발하던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는 그의 신비스러운 몸을 통하여 나타나게 되었다.
발걸음은 머리의 뜻을 나타낸다 :
에베소서에 의해서 우리에게 부과된 의무는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사람의 발걸음은, 즉 행위는 그의 인격을 나타낸다. 발은 전적으로 머리의 지시를 받들어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발 자체는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는 문제를 스스로 지니지는 않는다. 발은 본능적으로 아무런 주저없이 머리의 지시대로 따라서 움직일 따름이다. 신약에서 가르치는 우리의 생활원리도 이와 같은 것이다. 조건은 단 하나뿐이다. 당신의 발로 하여금 당신이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된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도록 하라. 그러나 발은 원칙적으로 머리의 뜻을 나타내면서도 이따금 제 자신의 뜻을 고집할 때도 있다. 만일 발이 머리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의 고집을 피운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한 경우 당신은 발걸음마다 넘어지고 말 것이다. 일어날 시간이 되었는데 발이 말하기를 “아니 아직 일어날 준비가 못됐어”라든가, 일터로 나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니 오늘은 싫어”라는 식으로 발이 반대를 한다면 당신은 얼마나 딱할까?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된 교회 안에서 만일에라도 이러한 곤란을 당하신다면 될 말인가? 이 문제는 심히 중한 문제이다. 신약적 생활의 첫째 조건은, 순종이다. 그리고 손발의 순종은 수족이 먼저, 근육이나 혈관이나 신경 등을 통해서 머리에 틀림없이 연결되고 있음으로서 이루어질 수 있다. 곧 수족이 먼저 머리의 주권 안에 거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도 먼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순종함으로서 그의 온전한 지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조건에 조금이라도 미급한 생활은 어떠한 것이라도 신약정신에 일치된 생활이라고는 결코 부를 수 없다.
인생의 새로운 목적 :
우리의 몸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가? 오직 머리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있다. 그의 모든 동작이나 기능은 이 단일한 목적 위에 집중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쁘게 해 드릴 대상으로서 세상에 둘도 없이 놀라운 머리를 가진 자랑스러운 몸인 것이다. 인생의 모든 복잡성도 실상 이렇듯 단순한 것이다. 아니 단순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 이러한 생활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되고 사랑에 넘친 완전한 인도와 보호 아래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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