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생활의 원리 (NEW TESTAMENT LIVING)
5장.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생활
(갈라디아서의 진리)
NORMAN B, HARRISON, 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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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모든 신자들은 한 걸음 나아가, 은혜의 근원 안에서 사는 생활의 부요성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변된 생활 :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을 갖게 되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니라”(엡 2:8). 구원은 소위 종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은, 우리의 여러 가지 공력이나 행위만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외식주의와 은혜의 대조는 매우 선명하다. 은혜란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물리쳐 버리시고, 인간이 제 자신을 위하여 제 자신의 힘으로 추구하는 일들을 하나님 자신께서 손수 감당해 주시는 그의 섭리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은혜 아래 있는 모든 자녀들을 위하여 이일을 계속 감당해 주시는 것이다.
두 개의 판이한 지역 :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롬 6:14). 로마서에서는 이 말씀의 진실성이 이중으로 강조되고 있다. 이 서한의 전편을 통독하면 누구나 곧 율법 아래 있는 생활이 패배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율법에는 아무런 구원의 힘도 없다. 인간이 죄에서 구원을 얻으려면 먼저 새로운 지역으로 발을 옮겨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생활 방도로서의)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롬 7:4) 즉, 이 다른 이에게 우리들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함으로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새 생활의 중심과, 영감의 근원이 되어주시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제 자신에 대해서 지나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모처럼 은혜아래 들어서게 된 그들은, 마치 북쪽으로 되돌아가는 나침반의 표침처럼, 쉽사리 옛 생활로 뒷걸음질 치고 마는 것이 일수다.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 : 바울의 인도로서, 중생한 사람들 가운데는 차츰 유대교적 형식주의나 율법의 준수에 다시 정신을 빼앗긴 교사나 전도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바울은 즉시 이들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다른 복음이라고 비난 했다. 이것은 대단히 강한 어조의 말이다. 그러나 율법과 은혜의 혼동은 하나님께서 심히 미워하시는 바이며, 뿌리 채 제해버려야 할 그릇된 생각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 그리스도께서 그렇듯 막대한 대가로서 율법이라는 저주당한 장소로부터 우리를 구속해 주셨는데, 왜 그 주검의 장소로 우리는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가?
율법의 무력 :
법은 행동을 제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라. 우리는 그 준수가 백 퍼센트 보장될 법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도둑질을 금하는 법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도둑이 없단 말인가? 우리의 법은 살인을 금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도 살인을 안 하느냐 말이다. 참 기가 막히게 어리석은 일이다. 한 걸음 나아가, 만일 사람이 법을 지키기를 원치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만약 인간은 법이라는 것을 도대체 천성적으로 지킬 수 없이 되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데 이것이 바로 사실인 것이다. 인간은 죄인이다. 이 죄인이 하나님의 법도를 준행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극히 소극적인 목적으로 처음부터 그 의의가 한정 된 것이다. 즉, “율법으로는 다만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1)
율법의 일시성 :
율법의 치명적 결함은 그것이 인간의 근본 요구를 채워 줄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의 요구는 생명이다. 그런데 이 점에 있어 율법은 전적으로 무력한 것이다. 그런고로 율법에 대해서는 “까지”라는 시간적 제약을 나타내는 어휘가 사용되고 있다. 율법은 다만 하나님의 때가 올 때 까지, 그리스도의 완전한 경륜의 길잡이로서의 역할을 위해서 나타났음에 불과하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멀리 영광의 곳으로부터 이 땅에 오셨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던 죄의 울타리는 소멸되고 이제 그는 그 무한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가? 오직 전부를 그대로 우리에게 넘겨주심으로이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이 은혜를 알고서도 우리가 암흑에 갇힌 옛 생활로 되돌아 갈 수 있겠는가?
상반된 두 가지 체제 :
율법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이다. 반면에 은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베풀어 주시는 자비다. 율법은 인간중심의 생활체제,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무한한 생명 샘에 의존하는 생활이다. 율법 아래 있는 인간에게는 그 자신이 그의 유일한 원천이다. 그가 믿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뿐이다. 율법은 그에게 선량한 성품과 선량한 행위를 명한다. 그리하여 이 일을 위하여 그는 다만 제 자신의 보잘것없는 능력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기껏 자기의 인간적 최선을 다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 율법의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에게 자기의존을 강요한다. 이리하여 인간은 매양 실패를 거듭하고, 그 때 마다 재기해서는 또 다시 넘어지고, 이러한 과정을 일생 동안 무한히 되풀이 할 뿐이다. 그러나 은혜 안에 산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시원한 해방감을 우리에게 갖다 주는 것인가!
은혜의 원천 : 인간 생활에서 율법과 율법의 구속을 제거해 버린 갈라디아서는 비할 바 없는 대치물로서 그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다. 그것은 곧 다음에 말하는 두 가지의 은혜의 근원인데, 이 두 근원들은 신약적 생활의 특질을 나타내며, 또한 그 성공을 보장해 주고 있다.
1. 그리스도의 내재 :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이 말이 만일 사실이라면 이것은 인간의 체험 가운데 가장 놀라운 사실이다. 일찍이 이와 같은 사실조차 있어 본 적이 없었다. 만물을 창조 하셨고, 오늘날 그 피조된 만물들을 한 손에 다스리고 계시는 (골 1:7) 바로 그 주재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당신의 안에도 계신다는 것이다. 이 원자 시대에 있어서 이것은 의미심장한 말씀이다. 얼마나 놀랍고 경탄할 사실인가? 모름지기 지금 이 시간부터 우리는 일체의 외형주의를 청산하자. 그 무슨 변화가 분명 당신의 안에 일어난 것이다. 당신의 행동상의 변화는 다만 이 내부적 변화로 말미암아 나타난 결과에 불과한 것이다. 당신은 지금까지의 당신이 아닌, 새로운 당신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이 깃 드린 당신의 새 생활을 탄생케 하고 이를 유지해 주시는 초자연적 근원이시다. 뿐만 아니라 당신은 인생에 있어서의 새로운 활력제를 얻게 되었다. 당신의 인생은 새로운 목적과 새로운 의미를 갖추게 되었다. 당신의 마음은 무엇보다도 당신의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 드리기를 원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탁월한 생명을 발로하시는 통로로서 당신을 택하셨다는 것은 얼마나 큰 당신의 특권인가? 2. 성령의 내적 역사 : 은혜로 말미암아 나에게는 성령이 주어졌고, 이 성령은 특히 나의 영적 미완성의 상태에 종지부를 찍고, 율법에 얽매인 처지에서 나를 놓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나는 이미 규칙과 격식에 묶여 사는 내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다시 태어남을 받은 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역사로서 이렇게 중생한 나를 이제는 자기가 신뢰할 수 있는 성인으로서 취급해 주신다. 성령의 역사는 내 마음 가운데서 오늘까지 고개를 돌려오고만 있던 나의 충성심을 일깨워서, 나의 생활을 끊임없는 화평과 즐거움과 승리로 가득 찬 새 생활로 일변시켜 준다. 율법과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두 가지 처지는 각각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율법 아래 있을 때 :
모든 문제는 우리들 자신만이 해결해야 한다. 우리의 능력의 원천은 오직 우리 자신들 뿐이다.
은혜 아래 있을 때 : 우리의 능력의 원천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우리의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이시다. 은혜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어떠한 뜻인가? 율법과 은혜는 서로 상반된 우리의 생활원리다. 우리들이 은혜에서 떨어지고 은혜의 근원 안에 깃 드리는 생활에서 실패할 때 우리가 갈 곳은 한군데 밖에 없다. 곧 율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옛 생활로 되돌아가며, 다시금 자기를 믿으며 자기의 선한 행위를 믿게 된다. 우리는 그것이 최선의 생활이거나 죄악된 생활이거나 간에 어차피 우리들 자신의 힘만으로서 생활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우리에게는 아무 유익도 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갈 5:21)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의 본바탕으로 돌아갈 뿐이다. 만일 주정을 부리는 것이 우리의 바탕이라면 지체 없이 우리는 주정뱅이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뒷걸음쳐 가는 곳은 단순한 노여움이나 근심이나, 혹은 거저 인내심의 결핍 정도에 불과 할 때도 있겠으나, 아무튼 이미 은혜에서 멀어진 우리들은 우리의 일시적 가장이 무엇이건 간에, 그 본바탕으로 재빨리 타락하고 말 것이다.
은혜 안에 거하는 생활이란 어떠한 생활인가? : 이것은 자기의 안에 이식된 은혜의 근원에 끊임없이 또한 시시로 닦아 서는 생활을 의미한다. 동시에 이것은 자기의 안에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믿음과,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생활의 모든 문제를 대신 즐거이 감당해 주시며, 또한 감당해 주실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의미한다. 그것은 로마서 7장에 기록된바 실패와 실망의 연속이 자기중심의 생활로부터, 동 8장에 명시된, 만사형통하고 고전이 없고 패배가 없는 생활, 성령께서 인도하시며,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신 생활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우리를 주검에서 일으킨 은혜는 나아가 우리의 모든 부족을 채워 주며 모든 처지에서 우리를 보살펴 주는 우리의 보호자이다. 은혜 안에 사는 생활이란 또한 이와 같은 은혜의 특질을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나날이 실증하는 생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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