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생활의 원리 (NEW TESTAMENT LIVING)
8장. 우리의 사명은 무엇인가
(게으름의 신자)
NORMAN B, HARRISON, D,D.
|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로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에게 부과된 사명은 선량하게 되거나 혹은 선량한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마태복음 25장 14-30절과 누가복음 19장 12-27절에 기술된 두 개의 비유 가운데 발견 된다. 즉, 달란트와 므나의 비유이다. 우리는 이것을 책임에 관한 비유라고도 한다. 한마디로, 우리의 책임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의 안에 재현시키고, 그 놀라운 생명을 땅 위에서 불멸의 것으로 만드는데 있다. 이 목적에 조금이라도 미급한 목적을 인생의 목적으로서 삼고, 그럼으로서 신약이 우리에게 명시한바 유일한 인생의 사명을 버리고, 그 대신 상식적인 선행으로서 이에 대치시키려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불원간 재림하실 주님께서, 그의 비유의 가르침 그대로 맡기셨던 돈의 회계를 요청하실 때, 저희들은 많은 이익을 남기지 못한 게으른 종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경계를 할 일이다.
바르게 해석되지 못하고 있는 달란트의 교훈 :
당신이 지금까지 들은 어떠한 설교든지 대략, 다음과 같은 권고를 당신에게 했을 것이다. 즉 당신이 만일 특별한 음악적 자질이나, 경리사무에 대한 소질이나 혹은 사랑스러운 심성 등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달란트이니 이 소유를 주를 위해서 사용하시오, ---라는 권면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작별을 앞두고 그들에게 자기 소유를 의탁하셨다. 그리고 그가 돌아와 회계하실 때까지 그 맡긴 물건으로서 장사하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장에서 연구할 제목은 다음의 두 가지 말씀이다.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눅 19:13)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눅 19:13)
증가의 원칙 :
예수께서는 그가 우리에게 분배해 주시고 가신 “자기 소유”의 적당한 비유물로서 돈을 들으셨다. 이 비유가 적당하다는 것은, 돈은 매일의 교환이나 장사로서 증가될 수 있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청산 시에 예수께서는 그가 맡기셨던 원금뿐만 아니라, 그 동안의 이윤까지도 요청 하실 것이다. 가령 내가 당신으로부터 돈 만 원을 꾸었다가, 20년 후에 그 원금을 한 푼도 떼지 않고 귀를 맞추어 돌려주었다고 해서 당신은 기뻐할 것인가?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 금액은 아주 싼 은행이자로 원금의 이자를 치더라도 대여섯 곱은 되어서, 적어도 당신은 5만 가량의 돈을 내게 청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도 원금 이외에 이자까지 청구하실 것은 물론의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밑천을 쓰지 않고 수건에 싸두는 미련하고 게으른 신자들의 앞날은 어떠한 것일까? 혹 여러분 가운데도 이들과 같은 부주의를 범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까?
예수께서 남기신 놀라운 재산 :
예수께서는 그의 짧은 재세 기간 중 막대히 큰 재산을 쌓아 올렸는데 그 가치는 인간의 척도로서는 셀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 재산들은 손으로 만져 볼 수 있거나 물질로 된 재산이 아니라, 마음과 생명과 인격으로 된 재산이 아니라, 마음과 생명과 인격으로 된 재산이다. 그것은 육신을 통하여 나타난 하늘의 생명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날 이 하늘 생명의 허다한 통로들을 삼으시고저 우리들을 택하시고, 택한 자 위에 능력의 기름을 부어 주셨다. 그리하여 그 받은바 능력의 선물 밑천으로서 거룩한 인생의 사명을 다 하도록 책임을 지우셨다. 시초에 그리스도 예수의 육신을 통하여 나타났던 신령한 하늘의 생명을 이제는 인간의 육신을 통하여 다시 이 땅에 나타내게 하시려는 것이 구속의 경륜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물려주신 유산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요한복음 13장 이하 17장까지의 말씀으로 돌아가자. 이 장들은 분명코 성경의 모든 장들 가운데서도 가장 빛나는 대목들이다. 이 장면은 작별의 장면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밑천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의 소유가 무엇인지 본다.
그의 겸손 :
새 언약의 상징인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면 아울러 생각나는 것은 겸손의 정신이다. 유대 나라의 옛 관습의 하나는 주가 의 시종이 문턱에서 손님의 발을 씻어 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때 그 자리에는 종이 없었다. “요한아 네가 하지 않겠니?” “안드레 너는 어때?” 이렇게 그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고, 아무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은 우리가 그 장면에 대해서 상상해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이때에 예수께서는 수건을 두르시고 이 친한 일을 몸소 감당하시려고 나서신 것이었다. 그것을 본 제자들의 얼굴이 얼마나 붉어졌겠는가 생각해 보라. 예수께서는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요 13:3) 즉, 자기가 하나님이시라는 그 모든 자각 아래, 이 일을 행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발을 씻기신 것이다. 이 일을 마친 다음 그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본을 보였노라”(13:15)라고 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유산의 일부로 겸손을 남기고 가겠으니 이것으로 매일 장사하라. 이것이 예수님의 분부이었던 것이다. 당신이 모든 사람 위에 서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먼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라. 인간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긍지의 심리다. 이 자부심에 대한 하나 밖에 없는 해독제는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깨닫게 되는 겸손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남기고 가신 바로 그 겸손이다. 부박하고 만족을 모르는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이 거룩한 해독제를 요하고 있다. “겸손은 평온한 마음의 상태이다. 그것은 동요를 모르는 마음의 상태이다. 그것은 남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내가 당하는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는 마음의 상태이다. 겸손은 나를 칭송하는 사람이 없고, 내가 비난 받고 경멸당할 때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 가운데 거할 수 있는 마음이며, 그것은 또한 주 안에 복된 피난처를 간직할 수 있는 마음이다. 이 보금자리 안에서 나는 문을 닫고, 홀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다. 위에는 거칠은 광풍이 몰아치고, 흉용한 파도가 부딪쳐 올 때에도, 큰 바다의 깊은 속에는 여전히 구원의 경적이 머물러 있는 곳이 있다. 여기가 즉, 겸손의 본향이다”(앤드류 머레이).
그의 사랑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13:34) 이것이 어떤 점에서 새롭다는 것일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이 점이 새로운 점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신약정신의 정수이며, 모든 사랑의 척도이다. 이 진리를 우리가 잘못 분간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갓 인간적 정감에만 사로잡히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남이 우리를 사랑할 때에만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무관심하게 되자, 재빨리 우리의 관심도 걷어 드리고 만다. 그리고서도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우리는 때때로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생각한다. (이장을 읽고 자선행위가 곧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할 것) 만일 내게 큰 능력과 신령한 지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네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만일 내가 남을 위하여 감당할 수 있는 모든 희생을 다 바쳤다 하더라도 내게 사랑이 없다면, 이 희생도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물려주신 소유의 하나는 그의 비길 곳 없는 사랑이다. 이 사랑이 인간의 육신을 통하여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나날이 빛을 발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그의 충심의 소원이었다. 우리가 얼마만큼의 그리스도적 사랑으로서 살고 있느냐는 것은, 우리가 얼마만큼 참된 그리스도인인가에 대한 척도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도들의 육신을 통하여 흘러 나올 때, 그 앞에는 패배가 있을 수 없다.
그의 평안 :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요 14:27).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은 아직도 어지러움 가운데 몸부림치고 있어야 하겠는가? 우리의 근심은 누더기 속에 한결같이 싸여 있어야 하겠는가? 그는 우리에게 그의 평안 --- 그 자신의 완전무결 한 평안을 주시지 않았는가? 이는 그 완전성이 이미 실증된, 그러므로 결코 깨틀어 질 줄을 모르는 평안이다. 이 온전한 그리스도의 평안 이상으로 크게 인간이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없다. 이와 같은 지상의 유산을 물려받은 우리들이 어째서 함부로 자신을 괴로움의 농락물로 간주하려는가? 주께서 주신 귀한 선물을 우리는 왜 감히 묻어 두려고 하는가? 일어나 장사를 하자!
그의 기쁨 :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이것은 얼마나 훌륭한 유산이냐? 예수께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행복은 외면적이고 피상적인 행복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 깊이 깃드린 확고부동한 행복이다. 이 행복은 어떠한 환경이 닥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행복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의 밀접한 내적 친교로서 이루어지며 또한 유지되고 있는 그 자신의 기쁨을 우리의 마음 가운데 이식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는 아버지와 그 자신이 친히 누리고 있는바와 같은 내적 친교의 관계를 우리들도 그와 더불어 가져 달라는 것이다. 환경은 우울과 불안에 대한 구실이 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인생의 가장 큰 슬픔이요 공포인 십자가의 주검을 목전에 바라보시면서도 기쁨과 평안을 잃지 않으셨다. 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겪은 고난이 부족한 연고로 오히려 예수의 기쁨과 평안의 참 비결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여하튼 우리의 책임에는 변함이 없고, 예수께서 이것을 면제해 주시는 일은 결코 없다.
이 밖의 유산들 :
이상에 열거한 그리스도의 유산들 이외에 첫째로 잊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이름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까닭은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지가 되어 주시기 위함이다. 기도는 우리의 특권이 동시에 의무이다. 예수의 이름으로서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되고, 이 승리는 곧 세상과 시대에 대한 우리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의 성령 :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요 16:14) 성령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남기고 가신 가장 가치 있는 선물이며, 이것은 지금까지 설명한 그의 모든 다른 선물들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 그는 성령을 통해서 그 자신의 생명의 온갖 근원과 비밀을 그대로 우리에게 물려 주셨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여러 특질들, 곧 그의 사랑과 기쁨과 평안을 우리의 안에 재현시킴으로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게으른 그리스도인 :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나이다”(눅 19:20). 수건이란 무엇인가?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기 위한 노력을 주저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귀한 보화들을 활발히 무역하기를 주저하고 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첫째는 육정이요, 또한 자기중심적 생활이다. 그 밖에 무엇이든지 이 두 가지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은 다 보화의 빛을 막는 수건이다. 육은 본질적으로 영혼의 적이다. 종류를 막론하고 무릇 이기심을 주장하는 곳에서는 영혼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갈 수는 없다. 이러한 생활은 다만 패배와 끝없는 손실로서 끝날 것뿐이다. 수건을 던져 버려라.
그리스도를 위한 사업에 있어 기억할 일들 :
우리는 “그의 소유”를 가지고 장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말은 곧 그리스도께서 장사를 위해서 우리를 내세우셨다는 뜻이다. 당신이 만일 변화한 도심지대의 한 곳을 택해서 당신의 전을 벌렸다고 생각해 보라. 그랬더니 어느 월요일 날, 한 사람의 손님이 찾아왔다. 그 손님은 이렇게 말했다. “댁에선 그리스도의 보물들을 파시려고 요즘 상점을 열으셨다죠?” “예 그렇습니다” “마침 잘됐습니다. 나는 얼마 전에 친구의 한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후, 늘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남들이 말하기를 이럴 때의 특효약은 그리스도의 사랑 밖에는 없다고 하는데, 이 약을 조금 팔아주실 수 없을까요?” “아, 참 손님은 운이 나쁘시군요. 나도 마침 친구 하나가 내게 억울한 욕질을 했기 때문에 온통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마음으로부터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내 마음에는 지금 원망만이 가득 차 있죠. 보세요. 우리 상점의 선반들은, 통 품절이 되고 없답니다. 미안하지만 다음에 들리세요” 이리하여 그 손님은 낙심해서 돌아갔다. 그 다음 날 부인이 울면서 들어왔다. “댁에선 그리스도의 물건들을 파신다지요. 전쟁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가고 말았어요. 내 외아들이 죽었단 말이에요. 그리스도의 기쁨을 제발 좀 나누어 주세요. 속이 타서 죽겠습니다.” “오 부인, 지난 주일에 우리 집에도 큰 불행이 생겼어요. 그래서 우리는 낙심 끝에 불루스를 한곡 추었으나 도무지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저 선반들을 보세요. 그리스도의 기쁨은 다 나가고 하나도 없습니다. 팔기는커녕 우리가 되려 사야할 판이요.” 그 다음 날 아침에는 이마에 주름살을 잔뜩 지운 중년의 신사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용무는 이러했다. “나는 방금 파산을 당할 처지에 놓였다. 근심 때문에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소. 이보시오, 빨리 좀 그리스도의 평안을 내놓으시오, 돈은 얼마든지 드릴 터이니!” “아 여보세요, 우리도 마침 당신과 같은 처지에서 몸부림 치고 있는 중이라오. 지금 내 마음에는 근심으로 빈틈이 없을 지경이오. 평안이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지, 품절이 된지가 벌써 옛날이라오.” 셋째 사람도 다른 두 사람과 같이 몹시 낙심한 체 걸음을 돌렸다. 인생의 가장 크고 긴급한 아쉬움은 사랑과 기쁨과 평안이다. 이 갈급한 아쉬움을 채워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다.
|
'바른교훈 > 신약 생활의 원리 - 놀만 B,해리슨'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장. 그리스도와의 연합 (0) | 2008.01.30 |
---|---|
9장. 성령을 좇아 행함 (0) | 2008.01.29 |
7장. 자기를 버린 생활 (0) | 2008.01.22 |
6장.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해결이다 (0) | 2008.01.21 |
5장.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사실 (0) | 2008.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