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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교훈/신약 생활의 원리 - 놀만 B,해리슨

4장.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삼분하신다

by 복음과삶 2008. 1. 16.

 

신약 생활의 원리

(NEW TESTAMENT LIVING)

 

4장.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삼분(三分)하신다

 

(고린도서의 진리)

 

NORMAN B, HARRISON, D,D.

 

 

 

일반 신자들의 생각에는 인간이란 크게 기독교인과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 곧 구원을 받았거나, 혹은 받지 못한 것으로 가정 되는 두 가지의 종족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피상적 일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만적인 생각이다. 사실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네가 실상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니면서도 믿고 있는 것으로 오산하므로 허다히 자기기만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자신의 자기평가에는 아무런 결정적 권위도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판정이시다.

 

 

삼 분류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

 

인종적으로 말해서, 사람은 누구나 탄생과 동시에 유대인이 아니면 이방인에 속한다. 그러나 그 뒤에 중생을 통하여 이 둘은 한가지로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몸이 된다. 여기에는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간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 이 분류는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분명한 분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장에 있어서 우리가 생각코자 하는 것은 각인의 경우를 따라 좀 더 친군하고 밀집성 있는 분류를 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인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앞에는 세 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본성에 속한 인간과, 중생한 영적 인간, 다음에 중생은 했으나, 여러 면에 있어 아직도 육의 권세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인간과의 세 가지의 종류가 곧 그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인간이나 이 분류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 그에게 적합한 평가를 받아야 하며, 하나님과 맺혀 있느냐, 있지 않느냐는 자기의 입장을 밝히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자문 해 보자. “나는 어느 부류에 속한 것인가?”라고.

 

 

본성적 인간 :

 

이 전형에 대한 설명은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적절히 요약되어 있다. 이 중요한 구절을 독자는 특별히 숙독해서 익혀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그 특징은 어떠한가? 인간은 그의 부모로부터 태어날 때 여러 가지 훌륭한 자질들을 타고날 수가 있다. 배운바 있는 품격이나, 깊은 지식이나 -- 무릇 인간사회가 요구하는 모든 탐스러운 성품들을 넉넉히 물려 받음으로서 풍성한 결실에 도달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성신의 감동을 받지 못한 야인에 불과하다. 스페인의 성경에서는 이러한 인간을 “동물적 인간”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 동물적이라는 점이 본성적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이 되고 있다. 그는 주위의 동물적 환경에 어울려 자신의 동물적 욕구만을 오로지 만족시키려고 한다. 이 유형의 인간은 영적으로 무능자인 동시에 영적인 일에 대하여는 낮선 외인이다. 저희가 “깨닫지도 못 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야 분별함이니라”(고전 2:14).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 진리를 받아 드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고 귀를 가지고도 듣지 못하는 무리들이라고 개탄하심으로서 그 당시의 불신자들을 꾸짖으셨던 것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리고 다만 중생만이 이 슬픔에서 우리를 구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남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께서는 육신이 미치지 못하는 신령한 시력과 청력을 선물로서 주신다. 이 신령한 통찰과 이해의 능력을 위로부터 받음이 없이는 무엇하나 가능할 수 없다. 따라서 이 능력의 밖에 있는 본성의 인간들이 얼마나 그릇 행하고 있겠는가는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처하고 있는 어느 한 공간이나, 순간이라도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신 귀한 은총이 아닌 것은 없다. 이 은총을 우리는 감사와 기쁨으로서 받아 드려야 하며, 이 일을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중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중생만이 은총의 참 뜻을 우리에게 밝혀 주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영적 인간 :

 

이 영적 인간이란 어떤 인간인가? 그것은 물론 영으로부터 난 인간이란 뜻이다. 그러나 영적 인간의 표식은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있다. 그는 성령의 지배를 받을 뿐 만 아니라 언행에 있어 매사에 영적 특전을 나타낸다. 그의 옮기는 발걸음은 항상 성령과 더불어 있으며, 그는 성령의 열매를 가지고 친구들을 대한다. 그리고 영적 인간들이 지닌 이 모든 특질들의 비밀은 다음의 말씀 가운데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그러면 이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중생으로서 될 수 있다. 마치 인간의 한 권속으로 태어난 어린이가 인간성이란 것을 잠재적으로 의례히 물려받는 것처럼, 그와 같이 하나님의 권속으로서 중생한 자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의례히 물려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혼이 개척할 수 있는 영역은 실로 얼마나 넓은 평원이냐?

 

 

문제의 고린도 교회 :

 

영으로부터 난 자는 지체 없이 영의 지배를 받는 동시에 영적 특색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분명한 일이다. 만약 우리들 자신이 이와 같이 하고 있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를 못하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거저 막연히 저들이 구원을 얻은 것으로 믿고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모호한 상태에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아직도 육의 주관 아래 있다. 그리고 우리들이 여기에서 문제 삼고 있는 고린도 교회도 꼭 이와 같은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분열과 소송과 이혼 사태와 그 밖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부도덕이 고린도 교회의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실정들이 바울로 하여금 고린도서를 쓰게 한 동기가 되었다. 이 육적 인간, 옛날 고린도에서와 같이 오늘도 교회를 망치고 있으며, 우리들 스스로도 그와 같은 인간이 되지 않도록 자재해야 할 이 육적 인간 -- 여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주된 대상은 이 고린도인적 유형에 관한 것이다.

 

 

육적 인간 :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이상한 일이다! 그들 (육적인간)은 영으로 나기는 했으나 여전히 육의 권세 아래서 그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다음의 세가지로서 요약된다.

 

1. 영적 성장에 있어서 그들은 아직도 어린아이의 태를 면치 못한다. 성장이 중지된 병자요, 이를테면 어린아이의 연장에 불과하다.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 어린아이처럼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허둥대고 있는 이름뿐인 어른들의 수는 참으로 무수히 많다.

 

2. 음식에 있어서는,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다” 함과 같이 유아들의 음식물을 언제까지 취한다. 이렇게 어린아이의 음식만 먹고는 결코 성숙에 도달할 수가 없다.

 

3. 행위에 있어서는, 시기와 분쟁이 아직도 그들 가운데 있어, 그들은 마치 본성에 속한 인간처럼, 즉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처럼 행동한다. 한마디로 이들은 아직도 본성적 인간의 꼬리를 가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심판이 이를 때 :

 

그리스도적 인격은 그리스도를 주춧돌로 가진 건물과도 흡사하다. 건물의 견고성은 우열에 좌우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우리들 자신의 건물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생각을 보다 높은 그리스도적인 수준 위에 세워야 할 무한한 책임이 있다. 이 사실은 신약의 생활표준을 더 없이 엄격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영적 인간의 여러 가지 특질)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육적 인간의 여러 무가치한 열매들)으로 이터 위에 세우면”(고전 3:12) 장차 올 불의 심판 날이 그들의 살아온 일생의 참가치를 다 밝게 들어낼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 수치스러운 온갖 육의 열매를 나타내고 있는 이 두통의 씨와 같은 고린도 교회의 형제들에게 경고의 말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나무나 풀이나 짚같은 생활은 앞으로 임할 불 앞에서는 한갓 불쏘시개 밖에는 못 된다. 우리들은 한 번 돌이켜 자문해보자 “얼마나 많은 고린도 교회나 고린도인들이 오늘날 우리의 주변에 넘치고 있는가?”

 

 

빛나는 소득과 전적 손실 :

 

영적인간과 육적 인간은 서로 동떨어진 극단이다. 전자는 영의 인도대로 살아서, 그 결과 그의 공력은 남고, 그는 상을 받게 될 것이다. (특별히 연구해 볼 가치 있는 주제임) 영생이라는 선물과 아울러, 공력이 남은 자에 대한 이 은혜로운 시상의 원칙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정성을 다해서 영적 수준에 의한 삶을 갖게 해 주는 좋은 권면이 된다. 한편 육적인간은 말할 수 없는 손실을 제 자신에게 초래한다. 그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으로서 아무런 그 자신의 공로는 없이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육성으로 말미암아 그는 아무런 공력도 마침내 남기지 못한다. 영광 받기에 합당치 못한 그의 약한 공력도 마침내 남기지 못한다. 영광 받기에 합당치 못한 그의 약한 공력은 불 속에서 모두 재가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명심해야 될 경고인가?

 

 

새로이 해야 할 자기인식 - 내적 임재 :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이 꾸짖음의 말씀은 우리가 가장 절실히 기억해야 할 말씀이다. 6장 19절에서 바울은 다시 꾸짖음을 되풀이 하고 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 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에 관한 하나의 큰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을 어찌 감히 우리가 푸대접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몸 이상으로 신성한 곳은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을 만드시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몸소 그 안에 거처하시기로 작정 하셨다. 이것은 성결한 생활을 해야 하는 우리를 얼마나 절실히 고무하는 사실들인가?

 

 

존절의 필요 :

 

이렇게 하나님의 거처가 된 우리는 결코 전과 같을 수가 없다. 다른 이가, 우리의 안에 들어오신 것이다. 설사 들어온 그가 보통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와의 동거를 위하여 우리 자신을 적절히 조심할 것이다. 하물며 들어오신 손님이 지신지고의 거룩하신 분일 찐대 얼마나 더 정성을 다해서 우리는 존경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인가. 우리의 모든 생각이나 사랑이, 또는 계획과 뜻이 다뭇 그의 기쁨만을 위해서 있게 하자, 그리하면 우리의 생활은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뜻을 갖추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보다 원활한 통로가 되어질 것이다.

 

 

우리의 안에 계시는 성령을 편하고

자유롭게 모시자 :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그의 거처로 삼으시기 위해서 천당을 버리고 내려오셨다. 그러한 성령을 우리는 어떻게 대접해야 옳을까. 불쾌한 일로 그의 마음을 상케 할 것인가? 혹은 불편하거나 슬픈 일로서 그를 모욕하고 괴롭힐 것인가? 마땅히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고 나들이의 자유를 아주 그에게 맡겨 버려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모든 방방에서 마음 놓고 거처 하시도록 너그럽고 편케 그를 모시자. “하나님과 내가 의좋게 동거하고 있느냐?” 이 물음에 대한 회답은 우리의 생활이 신약의 원리와 일치된 생활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밝히는 표준이 될 수 있다. 늘 성령에게 감사하라. “성령님, 내게 와 주신 것을 감사 합니다.” 이렇게 입버릇처럼 감사 하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