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생활의 원리 (NEW TESTAMENT LIVING)
9장. 성령을 좇아 행함
(갈라디아서의 진리2)
NORMAN B, HARRISON, 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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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앞에서 육의 정체라는 것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게으른 종의 운명을 면하고 신약의 원칙과 일치된 생활을 영위하는데 성공하려면, 아무래도 이 육의 권세로부터 결연히 이탈해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종류의 법칙 : 성경에는 첫머리부터 종류에 관한 놀라운 법칙이 되풀이하여 언급되고 있다. 창세기 1장에는 “각기 종류대로”라는 말이 열 번이나 나오고 있다. 모든 생물은 예외 없이 이 법칙의 지배를 받게 마련되어 있다. 인류가 처음 타락한 이래로 이 법칙은 모든 인간들을 선천적인 죄인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런 고로 인간의 행위는 한결같이 그들의 죄인으로서의 본성을 나타낼 뿐이다. 이 사실로 말미암아 우리는 중생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예수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서 이 법칙을 중생한 새 백성들에게 적용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육의 부정 : 그리스도의 특징은 한마디로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한다”(롬 8:4)고 한 말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결정적이고 단호한 육의 부정이 요청된다. 여기에는 아무런 구실이나 의논의 여지도 없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무릇 육은 그리스도적인 것과는 본질적으로 상극이다. 양자는 결코 융합될 수 없다.
성령에 의한 구원 우리는 이 육의 부정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성취할 수 있을까? 이는 우리들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육이 육을 이길 수는 없다. 다음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 보라.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문제는 이렇듯 간단하다. 이것이 성공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보장이다. 하나님에게 몸을 맡긴 다음, 인간은 다만 인간의 몫만을 완수하면 되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의 근원을 당신으로 삼고, 육신의 다스림을 물리치고 성령의 다스림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성령께서 당신을 도와, 당신의 모든 육정을 봉쇄하고 무찌르고 또한 마비시키고 말 것이다.
성령의 이중적 역사 :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 가운데 성령이 임재하시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성령의 올바른 사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 이하 24절까지의 말씀 가운데서 이 문제에 대한 명백한 회답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성령은 제 일선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선보이다. 성령에게는 수행하여야 할 그 자신의 임무가 있는데, 그것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소극적 역사, 곧 육의 역사를 파괴하고 마비시키고 무찌르는 방향의 역사이며, 다른 하나는 적극적 역사이다. 이 역사는 우리의 안에 잉태된 그리스도의 성품을 자라게 하고 이를 강건케 한다. 첫째 역사는 둘째 역사의 선봉적 역할을 하고 있다.
육의 역사는 어떤 것이냐? : 다음에 기록하는 죄의 목록들을 한 눈만 보아도 누구든지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색정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사회악과 기타 무수한 영혼의 범죄들, 인색에서 살인에 이르기까지, 무릇 인간의 상상이 미칠 수 있는 모든 범위에 긍하여 죄악은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이 죄악에 관해서 다음 세 가지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1. 우리는 어떤 죄악, 가장 순결하지 못하다든가 술 취한다거나 하는 일에 대해서는 분명히 이것을 나쁘다고 생각하나, 한편 시기라든가 말다툼같은 행위에 대해서는 이를 구태어 나무라지 않아도 좋은 일로 생각한다. 2. 그러나, 이 두 가지 종류의 죄악들은 한결같이 동일한 본성 안에 뿌리를 받고 있다. 3. 성령께서는 철두철미 이것들과는 적대관계에 있다. 그리고 우리들이 곧 잘 범하고도 대수롭게 생각지 않는 가벼운 죄악이나, 가장 악독한 죄악이나, 성령의 앞에서는 아무런 차별도 받을 수 없다. 이것들은 다 같이 성령께서 심히 미워하시는 것들이다.
그러나 : 성경 가운데는 여러 곳에 “그러나”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 접속사는 언제나 매우 계시적인 구절들 앞에 나타난다. 그것은 흔히 묵은 것을 폐기하고 새것을 밝히려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인간이 하는 일들은 묵은 것으로부터 무언지 보다 나은 것으로 조금씩 옮겨가는 과정이다. 그는 육적인 자신을 여러 가지 훈련으로서 얼만큼이나마 향상시킴으로서, 소위 교양 있고 범절 있는 행세라는 것을 갖출 수 있게 된다. 사실 그는 이렇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자긍심을 만족시킬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시는 일은 이것이 아니다. 그것은 육의 전적인 부인이다. 그는 육에 속한 일체의 것을 무찔러 버리고 전혀 새로운 생활, 곧 성령을 좇아 행하는 생활양식을 우리에게 밝혀 주시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 : 열매라는 말은 우리의 마음에 쉽사리, 요한복음 15장의 비유를 상기시킨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우리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갈 5:22-23) 이 모든 그리스도의 참 열매들을 풍성히 맺는 가지가 되기 위하여 특별히 뽑힘을 받은 하늘의 종들이다. 여기에 열거된 것과 같은 그리스도의 열매를 금하는 율법은 아무데도 없다. 없는 것이 당연하다. 율법은 육을 제어하는데 그 사명이 있으며, 악을 행하려는 육의 능력을 거세하고, 곧은길을 제시하여 육으로 하여금 그 길을 걷게 함으로서 그 생활을 율법 이전의 그것보다도 한 계단 높은 수준으로 이끌어 올린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 : 이것은 주께서 그의 생명의 빛을 우리가 몸소 체험하고 있는 표식으로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삼대 은혜이다. 성령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방법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본질들을 우리의 육신 안에 재현시키는 일이다. 이와 같은 성령의 활동으로서 육의 활동은 중화되고 인간은 그 안에 육의 행실을 위한 여지를 남기지 않게 된다. 당신의 마음은 아직도 악의와 실망과 근심 가운데 방황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것들의 출처를 한번 살펴보라. 그것은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근심과 낙망은 성령과는 아예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만일 당신의 안에 초조한 기분이나 염려하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육신에서 나온 것이지 결코 성령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당신이 실상은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보다도 자기의 육신을 더 많이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결과이다. 몸을 일으켜 함께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가자.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 : 성령의 특징의 하나는 그가 인간의 본성을 다루는 방법에 정통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노여워하기 쉽고 불친절하기 쉽다. 당신의 중심에 지금 불친절과 조급한 마음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것도 역시 당신의 육체에서 나온 것이다. 허나 이러한 당신의 본성도 성령의 권능 앞에서는 문제가 아니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당신은 이 말씀을 확신하는 사람이 되라. 그러면 모든 것을 자유케 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또한 당신의 것이 될 것이다.
충성과 온유와 절제 : 이 열매들은 성령의 가장 뜻있는 역사의 하나다. 우리의 안에 있는 의심스럽고 방종한 모든 요소들을 성령께서는 다 맡아서 처리해 주신다. 일단 성령께서 우리의 안에 역사하실 때 우리는 이미 육에 사로잡힌 우리가 아니라 향기로운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의 가지다.
그리스도인의 온도 조절기 :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 안에 하나의 온도조절기를 설치해 두셨다. 그리하여 우리의 생리에 적당한 온도인 섭씨 37도 안팎을 늘 유지케 하고 있다. 이 표준에 어떠한 변동이 있더라도 그것은 건강에 이상이 생겼음을 표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동일한 온도 조절기를 우리의 영혼에도 설치 하셨다. 성령이 곧 그것이다. 이 조절기가 우리의 안에서 기능을 발휘할 때, 우리는 노하지 아니하고 근심하지 아니하고 말썽을 부리지 아니하고 성급히 굴지를 아니한다. 이 조절기는 항상 우리의 마음을 조정해서 평정을 잃으려는 모든 경향을 앞질러 막아준다. 이 조절기는 또한 독생자의 고요하고 동요 없고 미쁘신 성격을 우리로 하여금 누리게 하고, 이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조절 작용의 실제적 결과는 우리의 성결이다 : 앞에서 말한 성령의 조절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성품을 바꾸어 버린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본성이 마땅히 원하는 일들을 행하지 않게 된다. 우리의 본성은 불가불 근심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성령은 이 근심을 뽑아 버리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평안과 인내를 이식해 주신다. 이와 같이 우리의 모든 자기중심적 경향은 하나씩 제거당하고, 마침내 우리는 아름다운 조화 가운데 이웃들과 발걸음을 함께하여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용납될 수 없는 이중의 생활표준 :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릇되게 이중의 생활표준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허다한 육의 소산들을 두 갈래로 나눈다. 즉 용서할 수 있는 악과 용서 할 수 없는 악으로 각각 분류하는 일이다. 가령 후자의 살인, 주취, 음란 등등이며, 전자는 노여움, 질투, 악의 등과 같은 소극적 죄악이다. 어떤 신자가 만약 술을 잔뜩 취해서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것을 우리가 본다면 우리는 반드시 손가락질을 하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이구 저런게 다 예수를 믿는다고!” “대관절 저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일까?” 그러노라면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선뜻 댓구할 것이다. “천만에!” “만일 저 친구가 참 예수를 믿는다면 저 모양으로 술을 마시진 못 할거야” 이렇게 말하는 당신이나, 당신의 친구들의 주장은 매우 지당한 것이다. 물론 당신도 그리스도인이 된 후로는 일찍이 마음 가운데 음주에 대한 유혹을 느껴 본 적도 없고 그것을 마신 일은 더군다나 없었다. 그러므로서 당신들은 서슴치 않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가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 치더라도 때때로 냉정을 잃는 것이다. 즉 화를 내서 물건들이 바로 보이지를 않는다. 그러면 여기서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러한 당신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냐”라는 것이다 .당신의 대답을 나는 상상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대답은 당신이 행위에대한 이중적인 표준을 가지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당신은 다 같이 육에서 나온 죄악을 한가지 경우에는 시인하고, 다른 한가지 경우에는 시인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당신의 생각은 순전히 아무런 근거도 없는 헛된 생각이다. 우리가 다 같이 심기일전해서 신약의 교훈대로 단호히 걸어나가야 할 때는 바로 우리 앞에 닥쳤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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