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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교훈/신약 생활의 원리 - 놀만 B,해리슨

10장. 그리스도와의 연합

by 복음과삶 2008. 1. 30.

 

신약 생활의 원리

(NEW TESTAMENT LIVING)

 

10장. 그리스도와의 연합

 

(친교의 생활)

 

NORMAN B, HARRISON, D,D.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놀라우신 분과 결합되어 그와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친교의 기쁨을 누리기로 허락되었다. 참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참 고백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혼인의 비유 :

로마서 7장 4절에 있는 이 비유는 우리에게 신약적 생활의 가장 높은 이상을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는 한 살아계신 인격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 그는 우리의 것이고, 우리는 그의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그 자신과의 내적 결합관계가 우리에게 절대 불가결의 조건이란 것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하나의 진박한 비유를 들으셨는데, 그것은 식물계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포도나무의 비유가 곧 그것이다. 그 후 바울은 같은 내용의 비유를 동물계에서 구했는데 이것은 우리가 아는바 몸과 머리의 비유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또 하나의 비유는 혼인의 비유이다. 이 비유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신약적 생활원리의 최고봉이다. 두 생활체가 혼인을 통하여 한 생활체로서 발전적으로 융화되는 것이다.

 

일대일의 결합 :

결혼의 기본적 개념은 무엇이냐?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선하게 되거나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 결혼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혼은 두 사람의 인간이 밀접한 우정 안에 한 덩이로서 생활하기 위하여 서로를 남김 없이 상대에게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두 사람은 그들의 생활의 중심을 서로 상대의 안에 발견된다. 이 두 사람의 관심은 서로를 어떻게 하면 상대를 좀 더 기쁘게 해 줄 수 있을까라는 일점에 집중되고 있으며, 서로의 취미와 원망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이 합쳐 그들의 몰아적 생활을 이룩한다. 우리는 다른 이에게 시집간 신부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위해서 살아야 할 다른 이를 가졌다는 사실은 신약의 생활원리를 본질적으로 친교 위에 두게 하고 있다. 친교라는 뜻의 희랍원어인 koinonia는 한 물건을 분유하고 공유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들이 그 무엇을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유한다는 뜻이다. 그 무엇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 자신이다. 곧 그리스도의 인격과 소유 일체를 우리가 함께 누리며 우리의 인격과 소유 일체를 그리스도께서 함께 맡아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떠난 우리에게는 아무런 삶의 의의도 없으며, 그리스도 또한 우리를 떠나서는 그러하다. 양자의 결합 없이는 어느 한편도 서로 완성을 기할 수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신약 정신의 극치이다.

 

우리가 율법에서 풀려 난 것은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위해서이다 :

로마서 7장 4절에는 종래에 인간을 묶고 있던 율법의 기반이 마치 결혼의 그것과 같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독생자의 놀라운 결혼생활로 들어가려면 먼저 이 율법과의 옛 관계를 깨끗이 청산해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섰을 뿐만 아니라 우리도 또한 그와 더불어 죽었던 것이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주검에 동참했던 우리는 동시에 그의 부활에 동참하는 권세도 얻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로마서 6장의 취지는 이 말씀 가운데 요약되어 있다. 이것은 심오한 교훈이지만, 동시에 기초적 교훈이다. 이러한 결과, 우리는 이제 율법의 구속을 벗어나 그리스도에게 시집갈 수 있는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이제는 율법대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법이 되셨다.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의 소망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와 더불어 영원히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이다.

 

구별된 생활 :

결혼생활이란 모든 다른 관심들을 저버린 생활이다. 결혼식에서 신부는 엄숙히 다음과 같은 서약을 한다. “나는 모든 다른 일들을 버리고 사랑과 충성으로서 그만을 위하여, 오직 그만을 섬기겠습니다.” 신랑에게만 모든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 일체의 구별된 생활, 이것이 결혼 생활의 본질적 특징이다. 결혼생활이 가진 여러 가지 특권이나 즐거움들은 그 대가로서 이와 같은 일편단심을 당사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케 하는 원동력이며, 이것이 중단되는 그 시간부터 두 사람의 결합은 파탄의 길을 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들에게 세상을 떠나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오로지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사람이며, 다른 누구에게도 얽매여서는 안된다. 이밖에 우리가 받들어야 할 생활은 없다.

 

애정의 생활 :

결혼은 사랑으로서 맺어지는 결합이다. 그리고 사랑은 인간생활을 일변시킨다. 이렇게 일변된 생활에 있어서는 인간의 행위가, 이미 의무감을 떠나, 언제나 사랑의 어쩔 수 없는 충동으로만 말미암게 된다. 그들은 무엇이건 다만 하고싶어서 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원불변하신 님”께서 그와 우리와의 결합을 위하여 베풀어 주시는 풍성한 사랑을 생각해 보라. 우리가 그와의 친교를 꾸준히 유지하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고후 5:14)하셔서 그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충성을 늘 타오르게 해 주시는 것이다.

1. 사랑은 허물을 가리운다.

“구속한다”는 말의 희랍 원어는 “가리운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운다”(잠 10:12) 그렇다. 그의 사랑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의 허물을 가리워 주셨다. 그리고 이 사랑은 또한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로 하여금 이웃의 허물을 덮어주며 그들의 약점을 온정으로 대하게 해주고 있다 .사랑은 형제의 약점에 틈타서 그들을 업어 넘기는 일을 하지 아니하며, 말없이 그것을 덮어준다. 사랑은 우리의 신의를 강권할 뿐 아니라 우리의 악의를 억제한다.

2. 사랑은 구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구별을 요구하는 것일까? 그렇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리스도에게만 대한 사랑의 생활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적으로 구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즐겨 성별토록 만든다. 한 청년의 사랑을 받는 한 처녀가 그의 사랑에 자기의 전심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 이상으로 아름다운 광경은 드물다. 비록 청년이 바다 건너 있을지라도 처녀의 평소의 행동은, 즉 동무들 사이에서라도 잠잠한 태도로서 그는 다음의 사실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나는 이미 그 사람에게 속해 있답니다.”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그리스도인도 마땅히 이와 같지 않으면 안된다.

3. 사랑은 우리를 온전케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진 빛나는 목표를 분명히 바라볼 수 있다. 그는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는”(엡 5:27) 완전한 상태로서 우리를 그 자신에게로 데리고 가시려는 것이다. 멀잖아 그와 대면하는 날 우리의 시야는 여러 가지로 달라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이것은 참 놀라운 약속이 아니냐? 우리가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려는 진실한 노력을 보일 때 그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는 소망은 이와 같이 큰 것이다. 그러면 얼마나 갈급한 마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받기에 바로 이 시간부터 전력을 다해야만 할 것인가?

 

헌신의 생활 :

지금까지 기술한 모든 사실은 신약적 생활의 본질이 한갓 선에 멎는 것이 아니라는 우리의 확신을 더욱 명확히 해 준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을 때 우리가 자주 맞본 그 기쁜 마음이란 얼마나 알뜰 한 것이었던가? 설사 같은 일이라도 의무적으로 한 일은 아무런 상쾌감도 우리의 심중에 일으켜 줄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중심은 성육하신 하나님과 그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 가운데 있다. 교회나 신조에 대한 충성이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대신 할 수 없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우리의 님이 되어 주신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고 교회나 교리에 대한 충성만을 일삼을 때 우리의 마음은 자칫하면 의무감에 사로 잡히고 만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신 분을 우리의 생활 안에 맞아 드렸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울과 함께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게 하는 자 되기를 (고후 5:9) 힘쓰며, 우리의 중심의 부르짖음이 항상 “주여 당신을 위하여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말이 되게하자.

 

영교의 생활 :

영교는 친교를 다르게 표현한 말이다. 그것은 가장 높고 깊은 의미에서의 사랑이라는 뜻이다. 물질의 공동소유가 아니라, 서로의 인격과 존재를 모두 기울여 나누어 가진다는 뜻이다. 영교는 내적 생활의 정다운 분유를 의미한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물질로서는 전혀 만족할 수 없다. 사랑은 애인의 전 존재를 남기없이 소유코저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바빠서 그리스도와의 영교를 너무 자주 가질 수는 없다고 한다. 얼마나 부끄러운 고백이냐? 이렇게 미온적인 태도는 그의 마음을 얼마나 괴롭게 할 것인가.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애정 시를 한 번 들어보자,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가 2:14).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우리의 목소리가 부드럽고 우리의 얼굴이 아름다운 것이다. 이러하거늘 우리와의 매일의 교통을 희구하는 그리스도의 중심의 소원을 우리가 어찌 물리칠 수 있으랴? 그리스도의 신부된 우리는 모름지기 그와의 교통을 부드럽고 끊임없고 만족한 것으로 만들기에 정성을 다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