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바른교훈/신약 생활의 원리 - 놀만 B,해리슨

11장. 그리스도인의 심령상태

by 복음과삶 2008. 1. 31.

 

신약 생활의 원리

(NEW TESTAMENT LIVING)

 

11장. 그리스도인의 심령상태

 

(빌립보서의 진리)

 

NORMAN B, HARRISON, D,D.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불리워지는 연고는 그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그의 안에 지니고 있다는 특수한 사실로 말미암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님이 없이 우리의 생활이 그의 생명을 나타내는 생활이 될 수 있을까?

 

에베소서와 빌립보서 :

에베소서와 빌립보서는 서로 연관적 관계에 있으며, 이러한 관계는 마땅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에베소서에서 우리가 배운 바는 첫째 우리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이다. 이 서한의 둘째 교훈은, 몸은 당연한 머리의 뜻을 제자신의 뜻으로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명한 이치에 속한다. 인간의 경우를 두고 말할 때, 만일 신체가 머리의 뜻하는 바를 충실히 받들어 그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면, 그 개인의 정신적 균형에는 어딘지 필시 고장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신적 불균형이야 말로 바로 뭇 교회들의 병폐인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는 정신 분열증에 걸린 불구자의 신세가 되었고, 당신 자신도 또한 그러한 자리에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4)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서 갖는다는 것 이상으로 세상에 더 훌륭하고 놀라운 일이 있을까? 항상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라. 이기심을 버리고 늘 부드럽고 순결한 마음을 가지라. 소동을 삼가고 남을 원망하지 말고 성급한 마음을 버릴 것이며, 언제나 이해와 동정심 있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라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나간다는 것은 얼마나 진실로 평안한 일일까?

 

마음은 생활을 결정한다 :

우리의 언행은 그대로 전부 마음의 표현이다. 불친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언어는 물을 것 없이 불친절 할 것이요, 이기심을 가진 사람의 행위는 이기적이다. 결백하지 못한 생각을 가진 사람의 행위는 결백하지 못하다. 어떤 사람이 그의 정신적 수준을 초과하는 행위의 실적, 곧 생활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마음은 곧 사람이다. 그런고로 인간이 비그리스도적 심정을 가지고 그리스도적 생활을 실현코자 노력한다는 것은 전혀 어리석은 일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끊임없는 실패와, 의심의 여지없는 패배를 되풀이 할 따름이다.

 

그리스도의 마음 :

그리스도의 생애는 그의 마음의 표현이었다. 아름답고 순결했던 그의 생애는 바로 그와 같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아주 명백한 진리이다. 그리고 우리도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비밀을 우리 간직 하였느니라“(고전 2:16)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얻게 되었던가? 중생으로 말미암아 얻었다. 육신의 생명이 아닌 그리스도의 생명을 위로부터 받음으로서 그의 마음은 우리의 것이 되었다. 그런즉 그의 마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허나 이제 우리의 정신이 장성함에 따라 우리는 이 선물을 그대로 지니는 자리에서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것을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우리의 안에서 원만한 발전을 이루기까지는 그 존귀한 생명의 특질들이 참으로 우리의 것으로서 기능을 발휘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안에서 능동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되지 못하는 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언제까지나 그의 안에 깃드린 다른 하나의 마음, 곧 비그리스도적 마음과의 한결같은 투쟁으로서만 일관 될 것이다. 그의 생애에서 시현된 바와 같은 그리스도의 마음의 여러 특질들은 빌립보서 2장 6절 이하 수절 가운데 요약되고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자발적 자기부인이다. 그는 그가 하늘에서 가지셨던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스스로 자기가 지으신 인간의 일원이 되셨다. 그리고 거룩한 하나님의 몸으로서 인간들과 더불어 하계에 거하시고 끝내는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고난까지 거리낌 없이 자취하셨다. 구주로서의 그리스도의 배후에는 이러한 세 가지의 마음이 숨어있다.

1. 몰아적 정신 :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서 모든 영광을 누리고 계시면서도 그 영광 안에 끝까지 안주하시려고 생각지 아니하셨다. 그는 그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버리셨다. 그가 저버리신 것은 영구히 또한 의당히 그에게 속한 것들이 있다. 당신 자신이 가령 그리스도의 위치에 있었다고 생각해 보라, 당신의 그 이기심으로서 하늘의 모든 영광을 깨끗이 저버리는데 당신은 대체 얼마만한 시간을 소요했을까? 아니 당신은 결코 영구히 그것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라도 그것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들의 천성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고도 우리들은 예수를 따르겠다는 뜻을 갖추고 있는 것일까? 예수의 그 절대적인 자기 부인을 따르겠다고 하는가? 그러나 우리의 뜻은 천만 허황한 뜻이다. 우리들이 자기를 죽이는 예수의 마음을 받아 드려서 가꾸지 않는 이상 우리의 모처럼 갸륵한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온전히 헛된 일이다.

2. 지극히 겸손한 마음 :

인간과 동일한 위치에서 인간의 언어로서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타나내시려는 사명을 띠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몸을 낮추어 인간이 되셨다. 그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로서 자처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교만한 자를 미워하신다. 교만과 그리스도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양자의 거리는 너무도 멀다. 만일 그 외아들의 특징이 교만이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미워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리스도의 한 걸음 한 걸음마다가 그의 겸손의 표식이 되었다.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우리의 형편은 어떤가?

3. 까닭없는 고난을 감수하는 마음 :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억울하신 고난을 자취하시기 위해서였다. 만일 한 사람이 죄를 저질렀다면 그가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기에 마땅한 신분이 되었은즉 그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것도 또한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와 상관 없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주검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다. 이것이 곧 십자가이었으며, 그 뜻과 가치도 또한 여기에 있다. 그는 그의 수욕을 두려워했던가? 아니다. 그는 이 일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 이렇듯 인간에 의하여 까닭 없는 고난을 당하시는 바로 그 가운데,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최고의 경륜을 성취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의 원칙 :

십자가는 이상과 같은 본질의 마음을 그 원동력으로서 가진 그리스도의 생명의 한 절정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생명이 곧 그의 주검을 가능케 했다. 그것은 전적인 자기 부인이었으며, 그의 생애의 구석구석을 뒤져 보아도 이기적 추구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그아먈로 전적인 겸손이다. 손수 창조하신 인간에 의한 아무리 부당한 처사에도 그는 원한을 품으실 줄 모르셨다. 까닭없는 고난이라도 감수하시겠다는 원칙 --- 그리스도께서는 돌아가시기까지 이 원칙으로서 일관하셨다. 그는 자기에게 가해진 모든 악을 지극히 겸손하신 마음으로서 묵묵히 감수하시다가 마침내는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벧전 2:22-23)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 :

바라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까닭없는 고난이라도 감수해야 한다는 이 원칙이야 말로 신약성경의 기본적 정신이라는 참 진리를 깨달아 주었으면 한다. 베드로 전서 2장 21절의 말씀은 이 원칙을 우리들 자신에게 적용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렇듯 부당한 고난이라도 자진하여 감수 하는 생활--- 우리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 생활에 있어서 우리는 왜 번번히 실패만 되풀이 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의 안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주검이 우리에게 끼쳐주는 혜택은 기꺼이 받아 드린다. 그러나 그의 생시의 행위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를 받아 드리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하면, 우리는 그의 주검에 의지하여 탐욕스럽게 구원되기를 원하기는 하나, 그의 생시의 행위를 본받아 살려고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

우리는 은혜 안에서 살기 위하여 은혜로서 구원을 얻었다. 여기서 베드로의 서한으로 잠시 돌아가 보자. 우리가 만일 마땅히 벌받을 죄를 범해 놓고서 그 결과로 초래된 고통을 설사 잘 참아 넘겼기로, 거기에 무슨 특별히 그리스도인다운 점이 있겠는가? 그 고통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우리의 착한 행위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한다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 되는 것이다. (벧 2:19-20) 이것이야 말로 까닭없는 고난이며, 또한 진실로 그리스도인이 받을 만 한 뜻있는 고난이다. 이제 우리는 신약의 본을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소명에 지성으로 응하고자 한다. 그러나 현실과 같은 인간성을 지닌 우리로서는 어떻게 이렇듯 높은 표준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께서는 이 표준에 무난히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곧 그의 정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생활은 그의 정신의 부단한 발로이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우리에게 성공의 비결을 다음과 같이 밝혀준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로”(벧전 4:1) 베드로가 밝힌 비밀은 심히 단순하다. 이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누가 당신에게 욕을 하거나 억울한 처사를 해서 당신의 마음이 분격되기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당신이 아직도 그리스도의 마음의 갑옷을 입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 곧 엎디어 그것을 구하라. 당신은 이 악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구실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당신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할 곳도 또한 이 세상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세상의 모든 악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갑옷으로서 지체없이 당신의 마음을 무장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다음의 권면을 당신의 마음 가운데 받아 드려라.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 이제 이 장의 끝으로 우리의 관심을 기울어야 할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은혜로 보신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번역된 베드로전서 2장 20절 말씀의 희랍 원어의 정확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이는 하나님 앞에 은혜가 되느니라” 이것은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수욕을 감수 하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안에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 있는 것과 동일한 은혜로 구원을 주신다는 뜻이다. 부당한 고난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 그와 한가지 은혜를 나타내는 생활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본질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에 합당한 생활이다. 이러한 생활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신약적 생활의 기수요 선봉이다. 어떠한 시험이 닥치더라도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약 4:6)를 주실 것이니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