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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교훈/그런 예수는 없다-Parkshin

4. 예수는 없다

by 복음과삶 2009. 9. 10.
제목 없음

예수님은 하나님이신가?

 

4. 예수는 없다

예수님이 하나님인가 인간인가 하는 기독론(Christology)만큼 기독교 사상사에 논란을 많이 불러일으킨 문제도 없었으며,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에 따라 이단 혹은 정통으로 나누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한 사물을 평가할 때는 어떤 기준과 범위 내에서 따져야 할지를 먼저 정해 놓고 그 한도 내에서 심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일반인들이 피겨스케이팅을 볼 때 누가 잘하고 못하는지 금방 분간이 안 가고 실력이 너무 비슷해 석차를 정하기 어렵지만, 심판들은 정확한 평가 기준을 따로 마련해 놓고 있다. 기술의 난이도·회전수·점프 높이·스피드 등을 측정하는 세밀한 규정이 있다. 만약 어떤 심판이 이를 무시하고 발레나 재즈 댄스 심사기준에 맞추어 점수를 매기면 말이 안 된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해선 이런 일이 예사로 벌어진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지지하는 측은 성경을 기준으로, 반대하는 쪽은 성경 밖의 것을 기준으로 든다. 전자는 전적으로 성경의 기록에 확신의 근거를 두는 반면에 후자는 성경 기록을 넘어서거나 무시하며 주로 세속적인 역사의 기록, 예수님이 하신 사역의 객관적 합리성, 특별히 기적과 부활의 진위 여부 등만으로 추측하여 판단한다. 예수를 평가하는 기준이 서로 다르다. 상호 어떤 기준으로 그를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가 되지 않고는 이 논쟁은 처음부터 확실한 결론이 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나아가 그 기준을 정하는 것조차 너무나 큰 의견의 차이로 인해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아마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정체성은 인간의 통일된 검증과 판단의 범위를 넘어서는 문제라는 것이다.

성경의 예수에 관해 기록된 내용과 의미를 있는 그대로 믿고 따르면, 아무리 따져 보아도 그가 구세주 하나님이라는 결론을 비껴갈 수 없다. 이를 부인하려면 성경 자체를 부인해야 한다. 예수의 정체성을 따지다 보면 자연적으로 성경의 정체성을 먼저 따져 보아야 한다. 만약 성경 자체를 부인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처음에 제기된 '예수가 하나님인가' 하는 문제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예수는 성경이 있고 예수이지 성경 없는 예수는 아무것도 아니다. 성경이 부인된 이상 예수에 대한 논쟁은 할 필요조차 없다. 대신 성경을 인정하면 성경대로 예수를 인정하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이 성경 밖의 자료를 분석해 예수가 전면 부인되는 확실하고도 분명한 결과를 도출해 낸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예수 믿는 신자들은 맛이 살짝 간 미친 사람들이다. 이것은 역으로 이야기해도 마찬가지다. 혹시라도 성경 밖의 자료가 예수의 실존성이나 그 사역과 이적의 객관성을 입증해낸다 할지라도 이미 성경이 부인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성경을 도외시한 예수 이야기는 단지 마술사와 도사를 합쳐 놓은 듯한 한 인물이 역사의 한 구석진 장소와 시간에 있었다는 에피소드 정도의 가치밖에 가지지 못한다. 구태여 예수의 정체성을 논할 필요가 없다. 결론적으로 성경을 시인하면 자동적으로 예수를 시인하게 되고 성경을 부인하면 예수도 부인된다. 이제 남은 문제는 성경을 전적으로 긍정할 것인가 아니면 부분적으로 긍정할 것인가이다. 또 후자의 경우, 어느 부분을 인정하고 하지 않을지를 정해야 한다.

성경을 전적으로 긍정하는 측을 두고, 그렇지 않은 쪽에서는 완고한 문자주의를 고집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한다. 우주의 신비도 하나씩 벗겨져 가는 판국에 어떻게 사람이 물위를 걷고,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며, 성령으로 잉태된 처녀가 아기를 낳으며, 그 아기가 이 땅에 인간으로 나타난 하나님임을 믿으라니 말이나 될 법한 이야기인가라고 따진다. 그러나 양측 다 분명히 주지해야 할 사실은 예수에 대해 믿을 만한 자료는 성경의 네 복음서가 거의 전부이고, 성경 밖의 자료로 예수를 판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성경으로밖에 판단할 수 없다. 그렇다고 둘 다 부족한 자료로 판단했으니 어느 쪽이 맞을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해선 안 된다. 그 부족한 자료 가운데도 누가 더 많은 자료로 판단했느냐의 문제다. 그런 면에서 성경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믿는 측이 가장 많은 자료를 가지고 판단했다. 2천 년 전의 한 특정인에 대해 4복음서 만큼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무조건 믿어보자는 식의 맹목적 신앙이 아니다. 성경의 자료가 예수의 정체성을 판단하는데 절대 부족한 것이 아니다.

어떤 마을의 노인 네 명이, 수십 년 전에는 동네로 들어오는 길목 어귀에 아름드리 나무가 있었고 그 옆에 정자가 있었다고 증언했다고 가정해보자. 새마을 운동으로 현대화되어 그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또 그 노인들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아도, 아무도 그 증언을 의심하지 않는다. 마태¡¤¸¶°¡¡¤´ⓒ°¡¡¤요한이 기록한 복음서가 일반에게 읽혀지기 시작할 때, 이 네 제자만이 예수의 증인으로 남아 있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동년배도 생존해 있었고 예수의 행적을 직접 본 사람들도 있었다. 하물며 네 노인만의 증언도 의심하지 않는데 동시대의 사람이 수도 없이 생존해 있을 때에 증언한 것을 단지 2천 년이 지난 기록이라고 하여 의심할 수 있을까? 만약 그 기록이 허위였다면 당시 사람들이 아무 말도 않고 잠잠했을 리 없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은 성경이라는 가장 많은 자료를 객관적으로 주도 면밀하게 검토한 후에 내린 결론이지, 기독교 교세를 확장하거나 목사들이 개인적 이득을 얻고자 억지로 꿰어 맞춘 것이 절대 아니다.

예수 세미나(The Jesus Seminar)라는 카톨릭과 여러 개신교단의 약 80명 정도의 신약학 학자들이 모인 조직이 있다. 매년 2차례 모여 신약의 기록을 사실 그대로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투표로 결정하는 모임인데, 해마다 어떤 특정 주제 내지 구절에 관해 학술적인 연구발표와 토론 절차를 거쳐 각자의 의견을 네 가지 색깔의 조그만 구슬을 투표함에 넣는 것으로 결정한다. 붉은 구슬은 의심할 여지없이 진실인 것(undoubtedly accurate), 핑크는 진실일 가능성이 있는 것(probable), 회색은 어느 정도 역사적 진실성이 포함된 것(passages containing some historic truth), 검정은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passages clearly without historical basis)으로 구분해 투표한 후 다수결로 결정한다. 성경을 부분적으로만 인정하되 어느 부분을 인정하고 어느 구절은 인정하지 않느냐를 사계의 전문가들이 모여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1995년 발표에 의하면, 신약성경에서 예수님 자신이 한 말씀으로 보이는 것은 오직 전체의 19%뿐인 것으로 판결(?)지었다고 한다. 7년이 지난 지금은 아마 이보다 훨씬 더 낮아졌을 것이다. 이런 추세로 가면 일부만 부인하려다 신약성경 전체를 부인하는 결과가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자기들이 고의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확인해보겠다고 시작한 작업이, 정체성을 깡그리 부인해 버리는 것으로 결말이 나고 온갖 노력을 경주한 모든 연구결과가 몽땅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릴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성경을 부인하고는 예수의 정체성을 검증할 수 없다. 나아가 예수의 정체성이 부인되면 예수의 실존성조차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동네 어귀에 수백 년간 있었던 큰 나무가 새마을 운동으로 잘라 없어져 버렸다는 기록을 2천 년 후의 미래 사람들이 보았을 때, 이미 그 장소가 초고속 헬리콥터 착륙장으로 변했고 주위에 최첨단 과학시설이 들어섰고, 나무를 본 사람이나 나무의 화석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에 모든 상황을 아무리 분석해 보아도 그 자리에 나무가 있었을 것 같지 않다고 부인하는 것이나, 예수 세미나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작업이 다를 바가 무엇인가?

그래도 저들은 예수의 참모습을 찾기 위한 가장 합리적이고 필수적인 시도라고 강변한다. 그래서 저들이 얻은 결론은 무엇인가? 예수는 한 평범한 인간이었고 성경은 그가 말한 것이 아니라 후대의 제자들이 지어낸 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예수를 바로 믿고 기독교를 바로 세우겠다는 저들이 예수를 부인하고 기독교를 사기극으로 몰아간다. 성경이 부인되면 무엇이 남는가? 아무것도 없다. 왜 불교의 경전과 이슬람교의 경전을 두고는 그런 작업을 펼치지 않는가? 오직 한 가지의 이유뿐이다. 다른 모든 종교는 처음부터 인간의 생각을 적어 놓았다는 것에 아무도 이의를 걸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과 기독교의 경우는 다르다.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끝이 나며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임을 스스로 선언하고 있다. 성경을 인정하고 안하고는 객관적·역사적·과학적 자료의 분석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성경의 이 선언을 토대로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해 유추해볼 수 있는 가능성은 오직 두 가지뿐이다. 완전히 미쳤거나 아니면 그가 말하고 사역한 그대로 다 맞거나 둘 중 하나다. 세상에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말한 적이 없다. 진리를 탐구하라고 하지 않고 자기와 진리를 동격시하며 자기를 따르라고 했다. 또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7¡­9)라고 했다. 어떻게 한 인간이 성령을 보낼 수 있으며 감히 자기를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신이 멀쩡한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인가?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고 고백한 직후에,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 16:21)라고 했다. 일반인들도 자기 죽음을 어느 정도 예상해서 유언하기도 하지만 3일 후에 부활할 것을 미리 가르치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 말을 들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아예 미쳤다고 상대를 안 하거나 아니면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죽는 것은 그렇다 치지만, 부활에 대해선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하고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만약 베드로가 부활을 믿었다면 결단코 막으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잡혀가기 직전에 그가 한 행동이 뒷받침 해주듯이 스승이 죽는다는 사실에만 신경을 썼다. 성경의 기록이 하나도 무리와 허위가 없고 실제 있었던 일 그대로 적었다는 뜻이다. 나아가 부활이 실제 있었던 사건이 아니고 또 성경이 순전히 인간 예수의 추종자들이 지어낸 작품이라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부활 사건을 조작해 넣는 것이 사람들의 호응을 잘 받을 수 있겠는가 빼는 것이 시빗거리를 사전에 제거하는 것이 되겠는가?

예수를 역사상의 한 위대한 인물로서 우리가 본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만 믿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 한 종교인에 불과하다. 성경을 믿고 그대로 말씀을 따라갈 때에는 저절로 그분이 그리스도임을 믿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을 과학적·객관적·논리적 증거로 따져 보기 이전에, 누구나 가장 먼저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예수는 완전히 미쳤는가 아니면 그가 말한 대로 사실인가를 확실하게 구분 짓는 일이다. 그렇다고 그가 한 행적을 봐서는 아무리 봐도 예수가 미친 것 같지 않고, 또 그렇다는 확실한 증거가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까 할 수 없이 그가 말한 것을 인정하자는 식으로 울며 겨자 먹기 택일을 해선 안 된다.

예수를 믿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아무 까닭 없이 예수가 싫다가 예수 믿고 난 후에는 아무 이유 없이 예수가 좋아진다. 예수를 믿게 됨에 그가 한 말·행동·사역·인격성·사랑이 너무나 탁월해 감동한 것이 일차적 원인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스승으로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러 온 구세주이다. 그가 말한 그대로 본인 당신이 진리이며 그가 보낼 것을 약속한 진리의 영인 보혜사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요 14:26) 했기 때문에 까닭 없이 좋아진 것이다. 감동·판단·결단·훈련·연습 등 무엇이라도 신자 쪽에 원인이 있었다면 까닭 없이 좋아질 리가 없다.

예수님의 정체성이 하나님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모든 종교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경을 인정하는 참된 신자에게만 중요하다. 성경의 진위 여부는 신학적 지식·문서비평·양식비평·고고학적 자료로 검증할 문제도, 종교사적 분석으로 가릴 문제가 아니다. 오직 진리의 영, 성령을 받은 자만이 따질 수 있는 문제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어떤 연구·고증·깨우침 없이도,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에 한치의 의심도 없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명제는 일차적으로 특정 교파의 완강한 고집도, 이단과 정통의 나누는 기준으로 끝까지 고집할 문제도, 학술적 논증적 검증의 문제도 아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어떠한 인간적 탐구노력과 종교적 강요와 관계없이 예수를 주(n≪)라고 하며 그렇지 않은 자는 아무리 평생을 연구하고 분석해도 예수는 랍비(스승)일 뿐이다. 그리고 또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불쌍하고 안타까이 여기지만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을 어리석거나 미친 광신자 취급을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절대 스승으로 소개하지 않고 구세주로 소개한다.

다른 종교인도 포함하여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간의 참 주인이며 위로자되시는 예수를 모셔들이라고 권한다. 스승이라면 그들에게도 좋은 스승은 얼마든지 많으니까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다. 이것은 종교의 관용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근본적으로 살고 죽는 문제다.

 

예수님의 성(ao)생활

어떤 목사님이 예수님의 성생활에 관해 이런 조크를 했다. "예수님이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감당하러 오신 구세주인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려면 그분 당신이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희생제물로서의 자격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여자랑 함께 결혼해서 살았다면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죄를 안 짓고 어떻게 견디었겠습니까?"

독자들도 짐작하겠지만 성 관계를 갖는 것이 죄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여자들의 조변석개(ðEU¨aªEC)하는 변덕을 맞추려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화를 내고 부부싸움을 하고 죄를 짓게 되는 경우가 반드시 발생하게 된다는 것을 빗대어 농담으로 말한 것이다.

예수님의 성생활에 대해 온갖 연구 결과들은 -사실은 연구라고 할 것도 없지만- 전부 이 조크와 같은 성격을 지닌다. 그들의 이론적 성과를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론을 먼저 도출해놓고 그 결론에 맞추기 위해 억지 논리를 끼워 맞춘 것으로 견강부회(I²E­Y¾ua)식 이론이다. 위의 예에서 비록 농담에 불과하고 그 내용이 지니는 의미도 분명히 있지만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결론을 부각시키기 위해 사실에 입각하지 않고 무리를 해서 추정하는 잘못을 범했다. 만약 예수님이 결혼했더라면 예수님이라도 아내의 변덕스런 성질에 자기도 모르게 죄를 지었을 것은 순전히 사실이 아니라 추측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 어느 곳에도 예수님의 성생활에 관해 명확한 기술이 없다. 추측이 만발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런 결과다. 그러나 추측은 어디까지나 추측이지 명확한 기록이 없는 한 사실이 아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오직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그것도 완전한 남성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온전한 생식기능을 갖춘 완벽한 남자 성인으로 이 땅의 삶을 사셨다. 그 외의 것은 우리로서는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에 관해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동성애자였다든지, 결혼을 했다든지, 창녀와 부도덕한 관계를 가졌다든지 하는 주장들은 비록 완전히 단정 지은 것이 아니라 아무리 '¡|였을 것'이라는 추정이라도 성경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성경이 기록하지 않은 것을 자의로 추정할 때, 만약 미리 가정한 어떤 명제를 갖고 있는 경우에는 아무래도 그것에 끼워맞춰 유추하기 쉽다. 또 어떤 결론을 미리 단정짓는 것은 항상 어떤 숨은 의도가 그 속에 있게 마련이다. 이는 성경을 그대로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보다 사실은 더 심각한 것이다. 아무리 그런 시도의 동기에 순수성이 포함되었다 쳐도 그 결과는 항상 곡해와 편견이 내포될 위험성이 상존하며, 그로 인한 반향과 파장은 처음 그 이론을 가정한 자의 예측과 통제를 넘어서버린다.

그래서 우리가 간과해선 안 될 것은 어떤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아무리 한 인간의 의도가 선하다고 해서, 그 선한 의도만이 순수하게 100% 반영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또 본인도 모르게 악한 방향의 반작용도 나타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완전히 선한 것은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신"(마 19:17) 하나님께로만 나온다. 예의 조크에서 선한 의도로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결론지었지만, 없는 사실을 억지로 끼워 맞추다 보니까 여자들은 전부 변덕이 심하고 남편들로 죄를 짓게 만든다는 엉뚱한 방향의 부작용이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성생활에 대해 성경 기록 외에 온갖 추측을 해본 것에는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었고,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히 4:15)로서 인간이 성적인 욕망으로 갈등하는 문제도 그분이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려는 선한 의도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성경에서 분명하게 큰 죄로 취급하는 동성애나 불륜이나 매춘의 죄를 짓게 만들었다. 예수의 인간 됨은 동정받을지 모르나 존경과 경배를 받을 수 없는 인물로 전락시켜 버린 결과를 낳았다.

거짓은 거짓을 낳게 마련이다. 거짓은 항상 무리수를 동반한다. 견강부회로 추정해 보는 것도 일종의 거짓이다. 오직 진리만이 무리수를 낳지 않는다. 성경의 화자(u¥iº)는 하나님 당신이다. 성령의 유기적 역동적 영감의 작용으로 인간의 손을 빌려 씌어졌지만 여전히 그 저자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성생활에 대해 침묵한 뜻은 따로 있다. 그 뜻은 두 가지다. 첫째는 사실 그대로 아무런 기록할 내용이 없었거나, 둘째는 그것을 기록할 때에 예수님의 예수님다우심에 방해되기에 일부러 침묵한 것이다. 성적으로 부도덕한 죄를 지었다는 뜻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고 부활할 하나님에게 이 땅에서의 결혼이나 성관계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인간이 십자가 사랑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어떤 여성과 사랑의 관계를 가졌다면 곧 십자가에 죽을 것을 미리 알고도 그 상대 여인에게 상처를 준 것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따져야 할 문제는 예수님이 30대의 건장하고 완벽한 남성으로 어떻게 성적 욕망을 처리했을까 하는 데 있지 않다. 그 문제가 예수님의 정체성에 잘못될 수도 있으니까 논쟁 자체를 덮고 얼버무리자는 뜻도 아니다. 이 문제 또한 성경 기록의 진위 여부를 먼저 따져야만 해결되어지는 문제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한결같이 시험을 받았다는 히브리서 기록으로 성적 유혹도 받았음이 틀림없다고 추측하는 것은 그야말로 문자적 해석이다. 그 구절에서 시험의 의미가 우리처럼 육신적 욕망에 넘어가는 그런 유혹이 아니다. 죄의 본질에 관해 광야에서 사탄으로부터 받은 유혹이다. 예수님은 둘째 아담으로 사탄에 넘어간 우리를 원죄에서 구원하러 오셨다. 이 부분은 앞 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적이 있다.

예수님이 우리처럼 동성애도 하고 창녀와 자기도 했음에도 그렇게 훌륭한 가르침과 행위를 할 수 있다니 얼마나 위대한가, 그래서 우리와 같으면서도 우리와 다르신 분이라는 데 그의 위대하심이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말이다. 이런 주장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허울 좋은 관념상의 문제일 뿐이다. 현실은 이와 다르다. 만약 실제로 예수님이 동성애를 했고 창녀와 잤다는 기록이 성경에 분명하게 나와 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분의 위대하심을 과연 인간이 지금처럼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찬양하며 그를 따르겠다고 하겠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안 그래도 부인하고 싶어 미치던 참에 좋은 구실로 삼아 하루 침에 예수를 미친 마술사로 비하시켜 버릴 것이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확정이 안된 애매모호한 상태로 있으니까 그나마 할 수 없이 애매모호하게라도 따르겠다고 하여 예수를 스승·선각자·위인·성자의 레벨까지는 인정해 주는 것이다. 나아가 예수의 성생활을 일반인의 수준으로 입증하겠다는 것은 그분의 사적인 성생활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정체성을 일반인 수준으로 끌어내리겠다는 숨은 뜻이 그 속에 있다. 그분에게서 하나님을 빼어버려 경배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광야에 시험하러 나온 사탄의 뜻과 하나 다를 것이 없으며 또 바로 그 점이 구세주 예수의 피로 죄 씻음을 받지 못해 원죄 아래 있다는 증거다. 구세주로는 인정하기 싫고 마지못해 억지로 스승으로만 따르려는 아주 그럴싸한 핑계에 불과하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최근 예수님을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예수로 구분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역사적 예수란 역사적으로 실존한 한 자연인으로서의 예수가 어떠했는가이고, 신앙의 예수는 교회와 신자가 체험하고 반응하고 믿으며 해석한 것에 따라 형성된 예수의 상을 말한다. 이렇게 구분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신앙상에 형성된 예수가 실재했던 예수와는 다르다고 보는 것이다. 두 예수가 다르다고 믿거나, 다를 것이라고 가정하거나, 심지어 달라야 한다고 믿거나, 아니면 순수하게 과연 우리 신앙상의 예수가 진짜 실체인가 진지하게 탐구해보는 노력이든 그 동기야 어떻든 예수를 둘로 구분하는 작업은 엉뚱한 결과를 낳는다. 기독교 신앙을 '예수님에 대한 믿음'보다는 '예수님의 믿음'으로 변질시켜 버린다.

역사는 관념과 신화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분명히 있었던 사실만이 역사의 소재가 된다. 역사적 예수가 신앙의 예수와 달라지면 당연히 역사적 예수가 예수의 진정한 실체가 되고 신앙의 예수는 허상으로 뒤로 밀려난다. 현재까지 기독교계나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예수 상은 그가 하나님으로 구세주이므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강조되어 왔다. 그런데 구세주가 허상이 되고 한 위대한 스승이 되면 경배의 대상인 하나님에서 존경과 모범의 대상 인간의 지위로 격하되며 '예수님의 믿음'을 중요시하여야 함은 필연적이다.

만약 진실로 역사적 예수가 신앙상의 예수와 그 실체가 다르다면 당연히 역사적 실체를 따라야 한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허상의 이미지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으며 그것은 우상숭배에 해당된다. 지금껏 믿어 왔던 하나님 예수를 감히 인간의 수준으로 격하시켜버린다고 해서 절대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몇 번 언급한 대로 '역사적 예수'를 알아보기 위한 자료로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4복음서뿐이라는 것이다. 성경 이외의 일반 문헌에서 예수님에 대한 언급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는가 아닌가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정도뿐이지 예수의 예수 됨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아예 없다. 따라서 아무리 문헌비판적¡¤°i°iCÐAu °EAoA≫ °AA£´U CØμμ ¼º°æ ¿UAC AU·a°¡ ¿ª≫cAu ¿¹¼o¸| AOAoCI´A AIA÷Au AU·a·I´A ¾²AI ¼o ¾øA¸¸c, 단지 보조 내지 참고자료로서의 가치만을 가질 뿐이다. 또다시 성경 그 중에서도 4복음서가 진실한가 아닌가를 먼저 따져야 하는 문제로 되돌아온다. 이에 대해 어느 누구도 지금 확증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이에 관해 한 가지 참고될 만한 통계를 들어보기로 하자.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1440년경 활판 인쇄술을 발명하기 이전까지 서구(a¤I±)에서 씌어졌던 현존하는 모든 책들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손으로 필사된 것이다. 파피루스나 양피지나 종이에 잉크로 씌어진 원본 한 권을 두고 여러 권으로 베껴 쓰는 형태로 보관·배포되어 왔으며 성경도 예외는 아니다. 또 성경시대에 씌어졌던 책들의 원본은 현재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며 소지하고 있는 것은 모두 이런 필사로 된 복사본이다.

필사본은 항상 그 복사 과정상에 오류가 발생하게 마련이며, 더 나아가 변조 및 개작의 가능성도 있을 수 있으므로 오래된 책의 정확성 여부는 필사본의 진위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의도적인 변조 및 개작의 경우에는 원저자가 자신의 저작을 고칠 필요가 있어 손을 댄 것은 문제삼을 수 없다. 다만 필사자가 개작하는 경우만 문제가 되는데 반드시 나중에 어느 것이 진짜 원본인지 논쟁에 휩쓸리게 마련이므로, 필사자가 최초 원본을 수중에 넣었거나 그 원본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지 않고는 함부로 고칠 수 없다. 고대의 한정된 자재와 필사에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 등을 감안해 볼 때 필사자가 구태여 원본을 개작할 이유는 현실적으로는 별로 있을 법하지 않다.

어찌 되었던 필사본은 고의든 실수든 오류를 포함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선 두 가지 요소를 감안해야 한다. 첫째 현재 소지하고 있는 최고로 오래된 필사본 연대가 원본과 시차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오류나 변조의 확률은 당연히 낮아진다. 둘째 믿을만한 필사본의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상호 비교하여 무엇이 오류이며 어디에 변조되었는지 찾기 쉽다.

서구 문화사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호머의 '오디세이'의 경우에 집필은 BC 900년경에 씌어진 것으로 보는데, 최고(oII?)의 사본은 BC 400년경으로 그 편차가 500년 정도다. 플라톤의 '대화'는 집필은 BC 400년경인데 반해 AD 900년경의 필사본이 최고이므로 무려 1,300년의 시차가 있다. 이에 비해 신약 성경은 27권 모두 완성된 것이 AD 100년경인데 AD 200년경의 필사본이 완간 상태로 남아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AD 125년의 것이 남아 있다. 이는 최초 집필 후 한 세대가 채 지나기도 전의 것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필사본의 숫자로 살펴보면 완간 혹은 부분 다 포함해서 '일리어드'는 643, '대화'는 7인데 반해 구약성경은 약 10,000개, 신약성경은 약 5,000개 남아 있다. 성경을 필사할 때의 유대인 내지 기독교인들이 원전에서 단 하나라도 더하거나 빼거나 하지 않으려고, 너무나도 엄숙하고 성실한 자세로 임했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처럼 필사본의 숫자가 다른 책에 비해 많은 까닭은 교회나 수도원들이 돌려가며 회람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인데, 또 바로 그 점 때문에라도 필사자들이 더 엄격하게 복사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어떤 동일한 독자가 어떤 곳에서 읽었던 성경 내용이 다른 곳의 그것과 다르다고 문제를 제기하면 필사자에게 책임이 돌아갈 것은 불을 보듯 뻔하지 않는가?

물론 성경 필사본에도 분명히 오류는 있지만 문자 그대로 필사상의 오류, 계속되는 단순한 작업에 지치거나 주의력이 산만해져서 생기는 실수로 알파벳에 점을 빠뜨렸다든지, 다른 철자로 오인해서 적었다든지, 숫자를 잘못 보았다든지, 같은 단어를 두 번씩 적었다든지 하는 것들이지 심각한 내용상에 해석이 달라질 만한 것이 아님이 밝혀졌다. 혹시라도 어느 정도 심각한 오류가 있어도 수많은 필사본을 서로 대조해보면 어느 것이 맞는 말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성경에는 오류라고 할 만한 오류는 없다.

어느 모로 따져도 성경은 그 원저자의 원본이 그대로 필사되어 전수되었을 가능성이 현존하는 고대의 어떤 책보다 가장 높은데, 그 진위 여부에 관해서는 가장 시비가 많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성경의 진위나 개작 여부를 따지려면, 호머·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세네카 등 고대 현자들의 저작 모두를 더 의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네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대하여는 하등 의심을 하지 않으면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라고 한 예수의 말은 끝까지 따진다.

역사적 예수는 인류가 갖고 있는 책 가운데 원전 그대로 100% 완벽하게 보관된 성경의 자료로 살펴야지 다른 무엇으로도 분석해 볼 재간이 없다. 일반 역사도 오래된 인류의 기록이 맞다는 가정하에 따지고, 혹시 기록간에 발생하는 오류나 모순은 관련된 기록과 유적을 비교·검토하는 수말고는 없다. 인류가 문자를 발명하기 이전의 역사는 유물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유일한 근거지만, 문자 발명 이후의 역사를 따질 때에 가장 우선시하는 자료는 문자로 된 기록이며 유물은 그 기록을 뒷받침하는 자료다. 예수에 대한 자료는 성경 외에 어떤 기록도 없고 유품은 더구나 없다. 성경의 예수가 바로 역사의 예수이다.

이 문제에 관해 아직은 더 따져 보아야 할 문제가 두 가지 남아 있다. 첫째, 성경이 아무리 완벽하게 보존되어 왔다 하더라도 원저자가 없었던 사실을 만들어서 기록해 놓았다면 어찌 되는가 하는 문제다. 만약 그렇다면 당연히 성경의 예수는 무시하고 역사적 예수를 비록 빈약하지만 성경 외의 자료에서 반드시 찾아야 한다. 그 작업이 도저히 불가능하면 역사적 예수나 성경의 예수는 둘 다 없어지고 단지 공상의 예수만 남게 되며 성경은 빈 껍데기로 전락한다.

그때 비로소 성경은 홍길동전과 수준이 같아지며 그 상징하는 내용만 맹목적으로 믿든지 지성적으로 참고만 하면 된다. 이런 작업을 거치지 않고 바로 성경을 흥부전과 비교해 보는 것은 아예 예수를 홍길동식으로 깔아뭉개겠다는 뜻말고는 없다.

둘째, 성경의 예수가 역사의 예수와 다를 바 없는데도 과연 교회가 성경의 예수를 잘못 가르쳤는가 하는 문제다. 최근 성경적 예수와 역사적 예수를 구분하는 작업이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으니까 그의 삶과 행동과 가르침과 죽음에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형 내지 전범(iðUo)만 찾으면 된다고 주장한다. 즉 지금껏 교회에서 '가르쳐진 예수'가 잘못되었기에 이제는 '가르치는 예수'를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르치는 예수를 성경적 예수상으로 대체하자는 움직임이다. 전통 보수 교회를 비판하는 측이 항상 저지르는 논리적인 잘못이 있는데, 전통 교회의 잘못이라고 기껏 지적해놓고는 그 대체 방안으로 자기들이 제시하는 것 역시 동일한 잘못을 내포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기독교 신자들이 잘못 가르쳐진 예수, 역사적 예수와 다른 신앙상의 예수상을 붙들고 있기에 그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덤빈 사람들 역시 또 다른 자기들만의 예수 상을 만들어 그것을 가르쳐야 옳다고 주장한다. '가르치는 예수'로 탈바꿈하겠다고 하지만 그것 또한 '가르쳐진 예수'가 된다.

물론 '가르치는 예수'도 분명히 성경의 예수나, 역사적 예수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스승으로서의 예수는 예수의 일부분일 따름이다. 또 그가 가르친 내용은 전부 자기가 죽고 부활할 십자가의 의미에 관한 것이었지 별도로 떼어 놓을 수 있는 윤리 교과서나 종교의 율법으로 가르친 것이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십자가가 부인되면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지금까지 교회에서 '가르쳐진 예수'는 '가르치는 예수'도 포함되지만 '가르치는 예수'만으로는 십자가에 죽는 예수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가르치는 예수'로 성경의 예수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은 결국 십자가를 부인하자는 시도이며, 예수로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성경의 전체 주제를 무시하겠다는 것이다.

성경의 예수가 역사의 예수와 다르면 인류 유사 이래 이 같은 사기극은 없다. 인류의 역사 특별히 서양사는 바로 예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의 예수를 부인하려면 예수와 성경 전부를 완전하게 부인해야 한다. 기껏 지성적으로 역사적 실체를 찾는 작업을 조금 해 보고 성경의 일부만 옳고 일부는 그르다는 식으로 주장해선 안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인식 없이 보면 그 비밀을 함부로 열어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보아야 하는 책이다. 역사의 예수가 백일하에 그 처음부터 끝까지 벗겨져서 성경의 예수가 부인되든지, 아니면 성경의 예수를 역사의 예수로 받아들이든지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성경의 예수가 역사의 예수와 다르다는 증거로 가장 손쉽게 드는 것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기사다. 예수 탄생에 관한 4복음서의 기사를 대조하면 서로 모순되어 보이고 또 세속의 역사와도 상치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출생을 경축한 동방박사와 목동의 이야기가 서로 연결되는 점이 없어 보이고 베들레헴 출생과 헤롯왕의 유아살해 사건과 어린 예수의 애굽 도피 등이 상호 모순되어 보이므로 동정녀 탄생 사실 자체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주장이다. 어떤 가난한 임산부가 출산예정일을 넘기도록 만삭의 몸으로 일을 해야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직장에서 양수가 터져 병원에 갈 시간도 없이 제대로 출산준비를 갖추지 못한 채 나이 많은 직장 여자 동료의 도움으로 아기를 받았다고 치자. 아이가 완전히 성년이 된 후에 엄마가 말하기를 그때 아기를 받아 급한 김에 감싼 수건이 자기가 갖고 있던 흰 타월이었다고 했는데, 나중에 당시에 있었던 여러 사람에게 문의해 본 결과 출산을 도와주었던 다른 여자의 푸른 색 수건이었다고 해서, 직장에서 급하게 출산한 사실 자체까지 믿지 않겠다는 꼴이다.

또 과학적으로도 동정녀 출산과 예수의 출생에 따른 여러 정황들은 완전히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야 한다. 동정녀 출산이란 출산 이후의 상황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출생 이전의 임신 수태에 관한 문제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구유에서 낳았든, 베들레헴에서 낳았든, 동방박사가 왔든, 애굽으로 피신했든 안했든 동정녀 출산에 하등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 인간의 아버지와 정상적 성 교섭 없이 임신했는가 아닌가의 문제일 뿐이다. 미혼모가 사생아를 출생하는데 서울대학 병원 특실에서 온 가족이 아무런 부끄럼 없이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거기다 실제 생부가 아니지만 남편처럼 보이는 남자 친구가 곁에서 떠나지 않고 간호하는데, 간호원들이나 의사가 "아빠 닮아 참 잘 생겼습니다."라는 칭찬을 해주어도 부인하지 않고 빙그레 웃거나 심지어 "네, 그렇지요.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해서, 미혼모 출산이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 것과 동일하다.

성경에 동정녀 탄생의 기록이 있게 된 근거는 무엇일까? 이 이야기의 발설자는 누구이겠는가? 두말할 것 없이 마리아다. 그런데 마리아가 이것을 언제 누구에게 어떤 뜻으로 발설했을까? 누가복음에 의하면 천사 가브리엘의 수태고지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후 친족 엘리사벳을 찾아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한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 찬송은 두 사람 사이에만 있었던 일인 것 같다. 아마 불임 상태로 오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임신이 된 엘리사벳만이 자신의 성령 임신을 믿어 줄 것이라고 생각해 상의한 것일 수 있으며, 당시로는 두 사람만의 비밀에 부쳤을 수 있다.

그러다 임신이 더 이상 남의 눈을 속일 수 없이 확실해지자 맨 먼저 정혼자 요셉과 자신의 부모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틀림없이 마리아가 말한 대로 성령의 수태를 처음부터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태의 기록대로 약혼자 요셉은 어떤 불륜의 씨앗으로 생각하고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을 것이다. 마리아 또한 감히 남편과 부모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이 일을 발설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성령에 의한 잉태를 어느 누가 말 그대로 믿어 줄 것이며 사생아를 임신한 바람난 처녀나 정신 나간 미친 여자 취급밖에 더 받겠는가?

예수 출생의 비밀은 그가 공적 사역을 시작하여 유대 사회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이후에도 그 명성에 금이 갈 수 있기에 아마 더 비밀에 부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최소한 예수가 공적 사역을 시작한 직후, 혹은 사역을 시작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까지는 관련 당사자 모두 외부인들에게 누설하지 않기로 무언의 합의가 이루어지고 그대로 지켜졌을 것이다.

언제인가 모르지만 그 비밀이 제3자인 예수의 제자들에게 전해진 것은 당연히 직접 당사자인 마리아와 요셉의 입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특별히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은 마리아보다 요셉이다. 요셉이 부인하거나 최소한 침묵만 지켜도 아무리 예수의 제자라도 마리아의 이야기를 믿어줄 리가 없다.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19¡­21)는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요셉은 자신의 심경 변화가 있었던 이유에 관해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음이 틀림없다.

그가 적극적으로 동정녀 탄생을 증언하기까지의 과정을 그의 입장이 되어 한번 가상해서 추적해보자. 아무리 마리아가 이야기하고 현몽 사건이 있었다 해도 성령 임신과 예언된 내용을 절대 전적으로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본래 의로운 사람이지만 자기 아내에 대한 번민과 갈등이 없었을 리 없으며, 아내로 받아들인 후에도 오랜 세월 동안 자기 처에게서 불륜의 의심스런 그림자를 완전히 걷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현몽 사건은 자기 마음속에만 담아 둔 채 그저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넘겼을 것이지만, 자기의 법적인 장남 예수를 쳐다볼 때마다 속에서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질투와 분노가 수도 없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미워해서는 안 되지만 절로 미워지는 장남 예수가 점차 자람에 따라, 자꾸 관심이 가고 차츰 미워할 수 없고 대신에 애정이 싹트니 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을 것이다. 다른 여느 아이와 달리 죄와 욕심과 영악함이 전혀 없고 지혜와 키가 자람에 따라 하나님과 사람 앞에 더욱 사랑스러워 갔으며,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구약 성경을 권세 있는 자 같이 풀이하지 않는가? 요셉으로선 예수가 자라 성인이 될 때까지 정말 애정과 증오가 순간순간 교차하는 참으로 미묘한 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마리아가 이야기한 성령의 잉태, 즉 하나님의 아들일 리는 만무하지만 꿈에 하나님의 사자에게 들은 대로 혹시 정말 어떤 큰 일을 해낼 인물이 되는 것은 아닌지, 또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 보이니까 그는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관심 있게 예수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드디어 예수가 30세에 집을 나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선포한 후에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살펴보니, 단순히 큰일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아니곤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 것이 아닌가? 중풍·나병·소경을 낫게 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물위를 걷고 귀신을 쫓으며 폭풍우마저 잠재웠다. "나를 믿는 자 심판을 받지 아니할 것이며,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며,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며, 나를 믿는 자는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며,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 올 자 없고,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도저히 미친 사람이거나 실제로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들을 하고 다닌다는 것을 들었다. 자라온 과정을 다 잘 알고 있는데 미친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기적을 베푸니, 차츰 마리아가 말한 대로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 맞는 모양이라고 생각을 바꾸었을 것이고,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자기를 누르고 있던 의심과 질투와 분노의 그늘이 점점 벗겨지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가 스스로 이르기를 죽었다 사흘 만에 다시 살겠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요셉으로선 예수를 믿어 보려던 생각을 순간적으로 잠시 접을 수밖에 없었다.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겠다고 큰 소리치니 혹시 몇 가지 신기한 일을 하더니 바리새인들의 비난처럼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게 사로잡혀 있는 것인가? 예수와 마리아를 향해 이제 막 쌓기 시작했던 신뢰와 애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반면에 동정녀 탄생의 직접 당사자인 마리아로선 자기 아들이 구세주라는 확신이 점점 깊어지고 지금껏 30여 년 전에 오직 의롭고 착한 남편 요셉에게만 털어놓았던 출생의 비밀을 누구에게나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시점이 다가 오고 있구나 하고 기대했을지 모른다. 또 예수가 죽는다고 하니까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보고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눅 2: 34, 35)고 예언한 말이 자꾸 생각났을 것이다. 정말 그 선지자의 말이 맞고 이제 예수가 직접 자기 입으로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까, 3일 만에 다시 사는 것은 몰라도 정말로 죽을 모양이니 걱정과 염려가 끝이 없고 속이 타들어 가며 심령이 칼로 찌르는 안타까움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드디어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는데 이게 웬 일인가? 예언한 그대로 3일만에 부활했다. 요셉은 마리아에게 가졌던 모든 오해와 갈등이 완전히 제거되고 만 33년 만에 처음으로 온전한 부부관계가 회복되고 자기들의 아들이었지만 예수의 하나님 되심에 부부가 공히 한 치의 의심 없이 확신했을 것이다. 이제는 성령의 잉태와 동정녀 출생과 그분의 구세주 되심과 성전에서 있었던 시므온과 안나의 예언과 천사가 보여준 현몽 등에 대해 얼마든지 당당하게 예수의 제자들에게 털어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마 마리아가 먼저 제자들에게 말했을 것이며 이야기를 다 들은 제자들이 요셉에게 확인을 해봤을 것이다. 요셉은 빙그레 웃으며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었네."라고 대답하지 않았겠는가?) 동정녀 탄생 기록에 관한 해석은 필립 얀시가 지은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를 참조하여 필자가 더 자세하게 추측해 본 것이다. 그리고 외경에 따르면 요셉이 일찍 죽어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했을 때에는 없었다고 하지만 성경의 어디에도 요셉이 죽은 시점은 나와 있지 않다. 성경학자들은 마태복음의 예수 출생 기록의 근거를 요셉에게, 누가복음의 기록은 마리아에게로 돌린다.

 

동정녀 탄생 기록이 가장 자세하게 기록된 것은 저자가 의사인 누가복음이다. 당시로선 의사는 가장 과학적인 사람이었고 또 지금처럼 전문의 제도가 없어 한 사람의 의사가 모든 질병을 다 돌보았고 당연히 산부인과 의사도 겸하고 있었다. 누가야말로 동정녀 탄생에 대해 가장 의심이 많았을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그가 가장 자세하게 동정녀 탄생을 기록한 이유가 어디 있을까? 상기의 추측에 크게 무리가 없다면 그가 처음 성령에 의한 잉태를 들은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이후이다. 죽은 지 나흘 되는 나사로라도 살려낸 예수가 스스로 사흘 만에 부활했는데 동정녀 탄생에 무슨 과학적 설명이 더 필요했겠는가?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고는 누가로선 절대 그런 기사를 쓸 수가 없다.

누가는 부활 이후 또 오순절 날 성령을 받고 난 후 자기 스승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요 10:10)이라고 약속한 말씀이 기억났을 것이다. 정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과 위로가 넘치고 지금껏 세상이 주는 어떠한 기쁨과는 비교하려야 할 수 없는 기쁨이 넘치는 새 생명을 맛보았을 때에 세상에 어느 누가 예수를 부인하든 의심하든 상관없이 그에게는 예수가 분명히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동정녀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의사가 될 정도의 지능이라면 차후에 동정녀 탄생에 대해 불륜의 사생자라고 비난받을 것도 뻔히 예상되었지만 그에게는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어쩌면 그런 예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마리아와 요셉이 손을 잡고 기쁨에 넘쳐 간증할 때, 한 성령 안에서 그분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외면할 수 없고 오히려 더욱 자신이 가졌던 그 주님을 향한 소망과 확신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기 위해, 만천하에 전해야겠다는 열망이 솟구쳤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무슨 종교든지 그 종교의 창시자를 신비스럽게 보이기 위해 동정녀 탄생, 알에서 출생, 반신반수(UaaeUaa®)의 형태로 묘사 하듯이 기독교의 예수 탄생도 같은 범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거짓말이란 말이 길어질수록 들통이 나게 마련이다. 예수 탄생에 대한 누가의 기록은 아주 상세하다. 사가랴의 사건,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과 찬가, 시므온과 안나의 예언 등 여러 사건과 인물들이 등장한다. 실제 당사자의 간증 없이는 섣불리 꾸며낼 수 있는 성질의 이야기가 아니다. 거짓말이란 요즘 한국 정가에서 유행하듯이 가능한 짧게 한 마디만 하고 그 이외의 여러 정황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모르쇠'로 버텨야 의심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

제자들이 이야기를 꾸몄다면 단순히 제자들의 자질 문제가 아니다. 예수의 책임과 자질에 관한 문제가 된다. 알기 쉽게 말해 예수가 사기꾼을 자기 제자로 뽑고 3년간 훈련시킨 사기꾼 왕초였다는 말이 된다. 복음서의 전부 혹은 일부가 제자들이 꾸며낸 이야기라면 그것만으로도 순전히 역설적인 의미에서 예수는 경배의 대상이 될 만한 자격이 있다. 세밀한 구성과 구약의 예언과 빈틈없이 연결되는 것과 최고의 도덕적 가르침과 극적인 감동 등을 비롯해 스승을 파는 유다 같은 배반자도 등장시켜 지어낼 수 있다는 것은 절대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신적인 수준이다. 또 꾸며낸 이야기로 사람에게 은혜를 주고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 하나만으로 그는 경배의 대상이 된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하지 않고 무식한 제자들을 단 3년이란 짧은 기간 안에 훈련시켜 그들더러 그런 작품을 남기게 했다면 예수는 분명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물론 역설적인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초대교회 시절에 복음서는 각 교회와 모임마다 읽혀졌는데, 그 중에 '벌거벗은 임금님'이라고 소리친 용감하고 진실한 신자나 순진한 어린아이가 최소한 한 명이라도 없었겠는가? 성경을 상징으로 그 의미만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예수와 그 제자들을 천재 사기꾼으로 간주한다는 뜻이다. 사기꾼에게 배울 것이 있고 사기꾼을 연구하여 삶의 지표로 삼겠다는 그들은 감히 하나님과 신앙을 논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말로는 성경에 일부 의심스런 부분을 빼고 믿어 주겠다고 한다. 넓은 도량으로 사기꾼에게 아량을 보여주겠다는 것인데 감히 자기가 예수를 용서해주고 봐주겠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세상에 이런 엉터리는 없다.

 

탄생 이야기에 얽힌 몇 가지 의문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문자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믿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범하는 실수가 하나 있다. 몇 번 지적한 대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는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자기들 주장의 근거는 문자적인 해석에서 가져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는 것이 동방박사의 방문 사건인데, 한 신기한 별이 나타나 그들을 예수님이 탄생한 마구간으로 인도했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UFO나 서치라이트처럼 예수 탄생지 베들레헴 위를 정확히 비치고 있는 한 별을 따라 오던 중 그 별이 사라져 방향을 잃고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다시 나타난 그 별을 보고 정확하게 마구간으로 찾아갔다는 것이 이 기록에 관한 일반적인 이해다. 박사들을 인도한 별이 조명을 비추듯 직선으로 비추는 별 빛이었다고 해석하다 보니, 공상과학 영화에나 나올 일이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비판의 근거를 삼은 것이다. 참으로 흥미롭게도 이 기록을 문자적으로 살펴보아도 오해할 부분이 전혀 없고 오히려 정확한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이를 규명하기 위해 별에 관한 기록만 순서대로 있는 그대로 옮겨 보자.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마 2: 1¡­2, 4¡­5, 7¡­10 발췌).

제일 먼저 주목해야 할 사항은 별이 직선으로 베들레헴을 비추다가 박사들이 유대 땅에 들어오니까 그것도 예루살렘에서 갑자기 사라졌다는 기록이 없다. 9절에서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였다"는 기록으로 그렇게 오해를 할지 모르지만, 앞뒤 문맥을 자세히 보면 그런 말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기록에 적힌 당시 상황을 재현하면 이렇다.

동방 박사들은 점성술에 능한 자들이고 바벨론 포로 시절 이후 이미 중근동 지역 곳곳에 흩어진 유대인들로부터,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받아들여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던 자들로 보아야 한다. 점성술에 능한 자들이란 별의 특별한 움직임에 특유의 의미를 부여하는 자들인데, 예수 탄생 약 2년 전부터 특별한 천체의 출현과 움직임을 메시아 탄생의 징조로 믿고 처음부터 베들레헴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목적지로 출발한 것이다. 자기가 있는 동방에서 보인 특별한 별은 분명히 서쪽 하늘 이스라엘 땅 위에 자리잡고 있었고, 또 그래서 더욱 메시아 출현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성경 기사에 박사가 동방에서 바로 예루살렘으로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 어디에도 박사들이 오다가 길을 잃었다는 언급은 없다. 별이 직선의 조명 라이트를 베들레헴 쪽으로 비친 것이 아니다. 단지 이스라엘 땅 위에 특별한 별이 출현한 것뿐이다.

박사들이 예루살렘 헤롯 궁으로 바로 찾아간 까닭은 고대에는 왕궁에 선지자·점성술사·지식인들이 모두 모여 있기 때문에, 성경 예언의 해석이나 정확한 지리적 지식을 얻기 위해선 왕궁으로 찾아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그들은 왕궁에 들어가 아마 이렇게 질문했을 것이다. "여러분도 지금 밤하늘에 유달리 반짝이는 별이 이곳에서 약간 남서쪽으로 가까이 보이지요? 우리는 저 별이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 징조로 알고 동쪽에서 이곳을 향해 서쪽으로 곧장 왔소. 그러나 우리는 유대의 세부적인 지리는 잘 모르니 저 별이 보이는 쪽에 있는 도시가 어디요? 혹시라도 선지자의 글에 어디에서 메시아가 태어난다고 예언된 도시가 있는지요?" 그러자 이스라엘의 율법사나 선지자들이 미가서에 메시아의 베들레헴 출생 예언과 마침 그 별이 보이는 방향이 일치하므로, 박사들에게 그곳으로 가는 지리를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박사들이 다시 출발할 때에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라고 표현했지 "다시 별 빛을 따라갈새'라고 하지 않았다. 이제는 왕궁에서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 가는 길을 다 가르쳐 받았기에 구태여 별을 보고 갈 필요가 없었다. 더 정확하게는 별을 보고 갈 수가 없었다. 높이 뜬 별이 한 작은 도시나 어느 한 집을 지정하여 일직선으로 비추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별이란 항상 방향만 지정해주지 세부적인 길 안내까지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성경은 왜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라고 표현했는가? 이것이 바로 UFO처럼 일직선 빛을 비췄다는 표현이 아닌가? 절대 아니다. 그런 표현이 어느 곳에도 없다. 이 표현은 무슨 뜻인가 하면 박사들이 하늘을 보지 않고 단순히 지도를 따라가다가, 지금 혹시 우리가 바로 가고 있는가 고개를 들어 하늘의 별을 보고 방향을 확인했더니 여전히 그 별이 자기들이 가고 있는 방향의 앞쪽 하늘 위에 떠 있었고, 그래서 '아! 우리가 지금 왕궁에서 가르쳐 준 대로 바로 가고 있구나.' 재확인을 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마구간이 아니라 베들레헴에 도착했더니 그 별이 정확한 수직 방향으로 자기들 머리 위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제는 2년여에 걸친 여행의 목적을 달성한 안도와 메시아를 만나 경배할 기대에 벅차 기뻤던 것이다. 집이 어디인지는 구태여 문제될 것이 없었다. 베들레헴은 작은 마을이었기에 그날 저녁 혹은 최근에 아기가 출산한 곳이 어디인가 수소문만 하면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성경 기록 어디에도 별빛이 일직선으로 비췄다는 단서도 별이 중간에 사라졌다는 힌트도 전혀 없다. 오히려 일상적으로 밤에 별을 바라보고 어떤 방향을 찾아가는 모습을 정확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박사들에게 별이 처음에는 서쪽에 보이다가 유다 땅에 가까이 가면서 차츰 머리 가운데 중앙 쪽으로 이동을 하지만 완전 정중앙은 아니었다. 그래서 일단 예루살렘에 가서 지리를 물어보고 길을 따라가다가, 가는 방향이 맞는지 별을 보고 다시 확인하고 도착해서 보니까 별이 자기 머리 위 정중앙에 위치했더라는 것이다. 별빛이 일직선으로 마구간 위에 비췄다고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문자적인 해석이 아니고 무엇인가? 동방박사 방문의 기록은 그 애매성으로 예수 탄생의 역사성을 부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지극히 정확한 표현으로 인해 그 사실성을 더욱 확인해줄 따름이다.

이 기사를 비판하는 자들이 무리하게 문자적으로 해석을 해, 동방박사의 방문이 없었던 것으로 가정해버리니까 당연히 그 다음에 이어지는 헤롯왕의 아기 살해 사건에도 시비를 건다. 선하신 하나님이라면 박사들을 일부러 헤롯을 만나게 해 아무 죄도 없는 아기들이 무참하게 살육당하게 했을 리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럴 수가 없으니 박사들의 방문사건도, 예수의 베들레헴 출생도, 동정녀 탄생도 모두 그 역사성을 의심해야 한다고 덤빈다.

진실의 실 타래와 거짓의 실 타래가 각각 있다면, 처음부터 풀려 나온 실은 실 타래가 완전히 다 풀려 나갈 때까지 하나는 진실이요 다른 하나는 거짓일 수밖에 없다. 실을 파는 가게에 가면 얼레는 포장 박스 안에 들어 있고, 박스 포장에 샘플 실로 색깔을 표시해 놓았다. 흰색 타래를 사면 끝까지 흰색이 나온다. 중간에 바뀔 수 없다. 그럼에도 그 흰색 샘플이 오래 되어 진한 회색으로 보인다고 해서, 포장 박스에는 분명히 흰색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도 중간에 회색으로 바뀔 것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어떤 한 가지 사건을 두고 시작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갖다 대면 끝까지 아무리 진실을 보여줘도 의심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심지어 얼레가 다 풀렸는데도 흰색이 아니라고 우기는 경우까지 있다. 지금 예수 탄생의 기록에 관한 논쟁이 바로 그와 같다. 기록된 말씀보다 포장에 나타난 색깔을 보고 흰색이 아니라고 우기는 꼴이다. 포장에 흰색이라고 적은 글씨가 너무 오래되어 희미하다는 것만을 유일한 핑계거리로 삼아서 말이다.

헤롯이 베들레헴에 사람을 보내어 물어보기만 하면 당장 알 일을 가지고, 아무리 흉포한 왕이라고 해서 2살 미만의 아이를 다 죽였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한다. 어떤 범죄든 그 진위여부를 가릴 때는 범인이 그런 범죄를 지을 만한 충분한 동기가 있는가를 제일 먼저 문제삼아야 한다. 바람을 피우는 아내를 청부살인 한 남편에게는 아내의 불륜이라는 충분한 동기가 있다. 헤롯왕은 태어난 아기가 장차 유대인의 왕이 될 것이라면 정적 제거라는 면에서 충분히 범죄동기가 성립된다.

범인이 범행동기가 충분하다면,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의 평소 성격이나 기질로 보아 그런 범죄를 저지를 만한 인간인가를 보아야 한다. 헤롯왕은 얼마든지 아기를 대량 살육할 소질이 다분히 있었다. 권력 유지에 방해된다고 자기 아내와 아들을 두 명이나 살해한 자였던 만큼, 베들레헴에서 헤롯이 죽인 두 살 미만의 어린이는 당시 베들레헴 전체 인구가 1,000¡­2,000명 정도니까 많아야 수십 명인데 그 정도는 눈도 깜짝 안하고 죽일 위인이 헤롯이다.

이제는 정황 증거를 따질 차례다. 헤롯은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물었고(마 2:8), 또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였다(마 2:16). 헤롯은 메시아가 정확하게 언제 탄생했는지 즉 별이 처음 나타났을 때에 탄생했는지, 아니면 박사들이 도착한 시점에 탄생했는지에 관해 물었다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그는 별이 처음 나타난 시점을 기준할 수밖에 없었으며 동방에서 유다 땅까지 여행에 걸린 시간과 여행을 위한 준비기간 등을 감안해 최대한도 여유 있게 2년을 잡았다. 그래 봐야 수십 명 안 짝일 테니까 권력 유지를 위해 자기 아들까지 서슴없이 죽인 그에겐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헤롯의 2살 미만 영아 살해 범죄는 범인의 동기·자질·정황에 비춰 충분히 있음직했다. 범죄를 입증하려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심증은 분명히 섰지만 물증을 찾아야 한다. 2천 년 전의 범죄에 쓰인 물적 증거를 내놓으라는 것은 사실 억지다. 물적 증거가 없는 역사는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뜻에서 성경의 기록이 최종적 증거다. 그럼 더 이상의 증거는 없는가? 아니다. 마크로비우스(Macrobius)가 지은 '축제(Saturaalia)'에 헤롯의 명령으로 시리아 지역의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살해할 때에 헤롯 자신의 아이도 포함되었다는 말을 듣고 당시 로마황제 아구스도(Augustus)가 "헤롯의 아들이 되느니 차라리 돼지가 되는 편이 낫겠다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구스도 로마황제가 이 사건을 듣고 빈정거렸다는 자체가, 누가복음의 아구스도 황제 때의 호구 조사와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기록과 마태복음의 헤롯의 영아 살해 사건을 동시에 증명해주는 물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헤롯의 범행이 모든 면에서 성경기록대로 이루어졌다면 그 배경에 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이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더구나 메시아를 이 땅에 보냄에 있어 꼭 죄 없는 어린아이들의 피가 뿌려져야 그 출생이 더욱 신비로워지고 예수의 예수 됨이 증명되는가? 더 나아가 마태가 기록한 대로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면 이런 엉터리가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이 문제는 아주 복잡한 신학적 논쟁을 야기하기에 이 자리에서 길게 논할 수 없지만, 두 가지만 간단하게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이 사건의 책임은 어디까지나 헤롯에게 귀착하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자기 욕심과 고집으로 죄를 짓는 것을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막지 않는다. 만약에 박사들이 유대 땅에 들어오자 하나님이 일부러 별빛이 사라지게 만들어, 할 수 없이 헤롯왕에게 찾아가게 만들었다면 하나님에게 책임 소재 내지 그 배경의 깊은 뜻을 정말 심각하게 물어야 하지만 지금껏 논했던 대로 그렇지 않다. 박사들은 너무나 인간 세상에 통용되는 상식대로 합리적으로 행동했다. 하나님이 헤롯왕의 영아 살해사건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박사들을 예루살렘으로 헤롯 왕을 찾아가지 못하도록 해야 했고, 그렇게 하려면 박사들이 그 집으로 바로 찾아갈 수 있도록 마구간 위에 직선으로 비추는 조명 같은 별빛을 2년간이나 계속해서 밤마다 나타나게 해야 했다. 이것이 있을 법한 일인가? 또 이것이야말로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사건이 엉터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그 근거와 그대로 일치하지 않는가? 만약 이것도 아니라면 헤롯 왕은 여러모로 보아 아이들을 그렇게 무참하게 죽였을 리 없었다는 변명밖에 남지 않는데 과연 그것이 타당한 설명이겠는가?

둘째, 마태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려 이 사건이 발생했다는 식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라마에서 슬퍼하여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마 2:18)고 했다.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할 때는 사건 발생의 동기와 이유가 전적으로 예언 성취에 있다. 그러나 '¡|COAI AI·c¾iA³´A´I¶o'고 했을 때는 사건은 다른 동기와 원인 때문에 이미 발생해 결말이 났었는데, 그것을 구약의 선지자의 예언에 비추어 보았더니 그 예언이 맞더라는 의미가 된다. 밤늦게 귀가한 아버지가 공부하지 않고 잠만 자고 있는 아들에게 "너는 대학 입학할 수 있어. 그러면 내가 자가용을 사줄 거야."라고 말했는데, 아들이 그 말에는 별 주의도 안 기울였지만 자기 장래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에 입학했더니 아빠가 정말로 차를 사준 경우와 같다. 까맣게 잊고 있던 아버지의 농담 같았던 이야기가 대학 입학하고 나니까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다. 아버지가 오직 자기가 한 말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아들을 강제로 공부시킨 것도 아니며, 또 아들이 오직 차를 얻기 위해 죽기 살기로 공부한 것도 아니다.

이 문제를 더욱 엄밀히 따져 볼 필요가 있는 것은 헤롯의 아기 살해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는데, 단지 예언의 성취됨이 이루어졌다고 강조하기 위해 마태가 지어낸 이야기라는 뜻인지, 아니면 기왕에 있었던 사실을 해석함에 예레미야의 예언과 핀트가 맞지 않게 해석했다는 것인지 둘 중 하나를 확실히 지적해야 한다. 전자의 경우 여러 번 지적한 대로 마태는 사기꾼으로 전락하고 복음서와 예수 자체는 부인되어야 마땅하다.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다. 후자의 경우는 그 인용된 구절을 있었던 사건에 비추어 마태의 해석을 정밀하게 다시 추적해보아야 한다.

베들레헴과 전혀 상관없는 예레미야의 이 예언을 마태가 억지로 헤롯왕의 영아 살해사건과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을 정당화하려 한다고 비난하는데, 이 예언의 초점은 라마와 베들레헴의 비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어미들(라헬)의 눈물에 포커스가 맞춰진 것으로 바벨론 유수 때에 이방의 속박으로 흘리던 눈물이 또다시 이방인 헤롯 때문에 자기 아이들이 살해된 베들레헴의 어미들도 흘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라헬이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는 부분이 성취되었다는 것이지 "라마에서 슬퍼하며"가 이뤄졌다는 뜻이 아니다. 앞에서 예를 든 아버지와 아들의 대학입학 사건에서 아버지가 아들이 대학 입학을 하면 노란 스포츠카를 사줄게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검정 지프를 사줬다고 아버지의 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따지는 것과 같다. 아버지의 뜻은 오직 공부를 잘해 대학 입학하라는 것이 그 목적이며, 또한 아들이 좋아하는 젊은 취향의 자동차를 사주겠다는 것이었지 꼭 노란색의 스포츠카만 사주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들이 노란 스포츠카 대신에 검정 지프를 사주었으니 아빠가 틀렸다고 덤벼드는 아들이 있겠는가? 그런 아들은 아빠의 뜻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아빠의 말꼬리만 붙들고 떼를 쓴 것이다.

 

성경 기록의 말꼬리만을 붙들다 보면, 저자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되는 또 다른 예로 "나사렛 사람 예수"를 들 수 있다. 나사렛이라는 지명은 구약성경과 외경과 요세푸스의 고대사 어디에도 나오지 않고 마태복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름이다. 그래서 메시아가 다윗 가문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한 이사야서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를 마태가 히브리어로 읽지 않고 희랍어 번역판(70인역)으로 읽는 바람에 '가지'의 희랍어 네제르를 나사렛 사람으로 잘못 읽고 예수를 나사렛 사람으로 꾸며냈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원래 베들레헴 사람인데 구약의 이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하자니 있지도 않은 나사렛이란 지명을 만들어서 이사 간 것처럼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아구스도의 호적 사건과 헤롯 왕의 영아 살해사건이 도저히 말이 안되니,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을 리 없다고 의심해 놓고 이제는 또 베들레헴에서 살았지 나사렛으로 이사 간 것이 아니라고 하니, 그들의 주장을 어디에서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럼 도대체 예수는 어디에서 났고 어디에서 자랐다는 말인가? 전체적으로 연결해서 보는 법이 없고 한 구절 한 구절 별로 말꼬리부터 잡고 보자는 심보다. 반대를 위한 반대만 일삼는다.

'가지'의 히브리어가 '네체르'이고 그것에서 유래된 희랍어가 나사렛이다. 마태가 70인역(구약의 헬라판)을 읽었는지 히브리어를 읽었는지에 관해선 누구도 함부로 속단할 수 없다. 그리고 나사렛의 어근을 구별하다는 뜻의 '나사르'에서 온 것으로 보고 "나사렛 사람"이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성별된 사람이라는 뜻의 "나실인"(민 6:2, 8)의 의미로 보는 학자도 많다. 또 마태복음 2:23의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에서 선지자가 복수형태를 띠고 있기에, 마태가 이사야 한 사람만을 선지자로 지칭해서 쓴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가 이사야 11:1을 의도적으로 인용했다면 선지자라는 단어를 단수로 사용했을 것이다.

마태가 "나사렛 사람"이라고 지칭한 의미는 구약에서 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아가 멸시와 천대를 받을 것이라고 예언을 했기 때문이다(시 22:6¡­8, 13/ 69:8, 20, 21/ 사 11:1/ 49:7 /53:2, 3, 8/단 9:6). 실제로 나사렛은 멸시당하던 곳이었고(요 7:41, 52) 심지어 갈릴리 사람에게조차 경멸당하던 곳이었다(요 1:46). 예수가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때는 단순하게 고향의 지명이 어디인가라는 차원을 넘어, 조롱과 경멸을 받으며 비천한 환경에서 자란 수난받는 종 메시아로서 하나님이 따로 구별하여 세운 나실인이라는 종합적인 뜻으로 보아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초대 교회의 기독교 신자들도 "나사렛 이단"(행 24:5)으로 불리웠다. 나사렛이란 그루터기만 남은 다윗 왕가의 혈통에서 나온 '가지'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이보다는 멸시받은 종과 외면당한 지역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

지명으로 따져도 예수의 고향) 출생지로서의 고향이 아니라 성년이 될 때까지 청소년기를 보낸 곳이라는 의미에서 고향을 말함

이 나사렛이 아니라고 할 근거는 없다. 마태복음에 아무런 사전 설명 없이 바로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기술한 까닭은 저자가, 예수의 탄생을 동방박사와 헤롯왕과 연관된 사건만을 기록했으므로 구태여 나사렛에서 호적하러 왔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은 것뿐이다. 문제는 마 2:22에서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라고 했을 때 애굽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 했으니 그곳이 고향이라고 추측하는데, 그것도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예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이 아이가 여느 아이와는 다를 것이라는 천사의 예언을 이미 받은 상태이므로, 그런 특별한 아이를 양육하기에는 먼 이방의 땅 갈릴리보다는 성도(a¡O´) 예루살렘 주변이 더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결국 이 문제도 "나사렛 사람"과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를 단지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성경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이 문자적으로 해석한 결과만으로 이뤄지는데, 성경을 앞뒤로 연구해보면 그런 주장들의 근거가 얼마나 빈약한지 쉽게 알 수 있다. 만약 성경에 대해 상반되는 두 주장을 두고 당시의 정확한 물증과 비디오로 찍어 놓은 기록이 없는 한 어느 쪽이 맞는 줄 알게 뭐냐고 끝까지 우긴다면 할말은 없다. 바로 이 '눈으로 본 사람이 없으니까'라고 하는 태도가 문자적 해석을 끝까지 고집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고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결과만으로 성경을 앞뒤 문맥에 비추어 비문자적으로 연구 분석하여, 믿는 사람들을 문자적으로 믿는다고 비난하니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동정녀 탄생의 신학적 배경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불합리할 뿐 아니라 특수한 목적을 지닌 종교적인 동기에서 만들어진 가설이기에, 그 사실을 그대로 믿을 필요 없이 예수님의 참된 정신만 살리면 된다고 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 1:23)에서 '처녀'가 동정녀인가 단순히 젊은 여자를 지칭하는지 불명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 해묵은 '처녀 논쟁(알마 논쟁)'이다.

마태는 분명히 당시의 희랍어판 구약성경(70인역)의 이사야서 7:14에서 인용했다. 히브리 성경 원전에 '알마'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성 경험이 없는 처녀(Virgin)를 의미하는 '베툴라'와는 달리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젊은 여자를 뜻한다. 그런데 이를 70인역에서 헬라어로는 완전한 처녀를 의미하는 '파르데노스'로 번역했고, 마태가 그것을 인용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70인역의 역자가 그렇게 번역한 배경에는 3가지 가능성뿐이다. 단순한 실수였거나, 의도적으로 '알마'를 틀린 번역으로 조작했거나, 아니면 '알마'를 동정녀로 정확하게 이해하고 번역했거나 이다. 이 중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3번째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문제는 원체 신학적으로 미묘한 주제라 번역자가 부주의로 실수하거나 고의로 조작할 문제도 아니며, 또 70인역은 사후 검증을 철저히 한 것으로 정평이 난 역본이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으로 되돌아가 생각하면 어느 누가 이 구절을 번역하든 이 구절은 특별히 신경을 썼을 것이고, 함께 번역에 참여한 학자들의 사후 교정에 반드시 한 번쯤 걸러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70인역의 역자가 '알마'를 동정녀로 해석할 충분한 근거가 있었고, 또 그것을 마태도 인정했다는 뜻이 된다. 이제 그 근거를 살펴보자.

'알마'가 일반적으로 젊은 여자를 뜻하지만 성경에 기술된 용례는 관용적으로 처녀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으며(창 24:43; 출 2:8; 시 68:25; 잠30:19; 아 1:3, 6:8), '알마'와 동일 어근인 남성명사 '에렘'은 결혼 전의 풋내기 소년을 뜻하고(삼상 17:56, 20:22), '알마'와 동근어(OOÐÆaÞ)인 우가릿(Ugarit)어 'glmnt'가 오직 결혼 전 여자에게만 사용되었고, 마지막으로 '알마'의 어근 '알람'은 '감추다', '숨기다'는 뜻이다. 그리고 반드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완전한 처녀를 뜻하는 히브리어 '베툴라'는 처녀성의 지속적인 유지에 관심을 둔 용어로서 오히려 이 용어가 강조되면, 그 해석이 카톨릭에서 발전시킨 '평생 처녀'설을 뒷받침해버리는 쪽으로 흐르기 쉽다. 반면에 '알마'는 남자와 격리되어 순결히 자라 온 처녀라는 뜻으로 동정녀를 의미하는데 전혀 하자가 없다. 누가복음 1:34에서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라고 했고, 마태복음 1:18에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라고 하는 말들이 의미하는 바로 그 뜻이 '알마'이다.

우리말에도 '동정녀(베툴라)'와 '처녀(알마)'라는 두 단어가 있어 전자는 처녀성의 계속적인 유지에만 초점이 둔 말이고, 후자는 남자와 격리되어 아직 결혼하지 않고 순결을 유지하는 젊은 여자를 뜻하므로 동정녀의 의미를 전달함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 또 실제 순수한 동정녀의 의미로도 처녀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지 동정녀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예수가 탄생하기 600여 년 전에 예언된 이사야서에서 "보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라고 표현했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그것이 자연스러운 표현이 되었겠는가? 그러면 후대에 와서 이사야서가 조작되었다는 시비를 낳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이런 식의 언어학적 논쟁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자칫 서로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알마'가 동정녀를 뜻하지 않는다고 무조건 단정지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알마'가 동정녀를 뜻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측의 이야기를 잘 분석해보면, 성경에 분명히 마리아가 요셉과 관계를 갖지 않고 예수를 낳았다고 기술되어 있으니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전제하에 논쟁을 전개하고 있다. 동정녀 탄생 자체가 불가능한 것인데도 성경 기자들이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이사야서에 '처녀'라고 적힌 단어를 동정녀로 억지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실제 있지도 않았던 사건을 신약성경에서 지어내다 보니 구약성경마저 곡해했다는 주장이다. 이중 삼중으로 사기를 친 꼴이다. 성경이 앞뒤로 모두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동정녀 출생의 논쟁에서 이해가 안 되는 불가사의한 것이 하나 있는데, 아브라함과 사라가 외아들 이삭을 낳은 사건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는 것이다. 그들 둘은 분명히 부부로서 함께 살았으니 노년에라도 아기를 낳을 수 있는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Ieaⓒ)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창 18:11, 1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에게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자 사라가 보인 반응이다. 경수라는 것은 월경(eAIe)을 뜻하는 것으로 사라는 이미 폐경(øEIe)이 되었으며 노쇠해 낙이 없다는 것도 아브라함이 이미 임포텐츠가 되었다는 뜻이다. 아기가 잉태되려면 여자의 난자와 남자의 정자의 결합이 필수적이며 둘 중 하나가 부족하면 임신이 안 된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안다. 또 여자가 한번 폐경이 되면 다시 멘스가 나오는 법은 없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삭을 낳은 사건과 마리아가 동정녀 탄생의 두 경우를 순전히 생물학적으로 비교해보자. 전자의 경우는 임포텐츠에 폐경이면 정자도 난자도 없었고 후자는 건강한 난자는 있었다. 어느 쪽이 더 가능성이 낮으며 말이 안 되는가? 아브라함의 경우 잘 봐주어 수태를 시킬 만큼 건강한 정자였는가의 여부는 불문하고 정자는 있었다 치자. 그래도 반쪽뿐이다. 어떻게 보아도 둘 다 말이 안되기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왜 이삭의 출생은 아무도 그 사실성을 의심하지 않고 예수의 경우만 문제를 삼는가? 구약의 기록도 조작되었는가? 이삭의 출생을 신비롭게 꾸미기 위한 특수한 종교적인 목적으로 그렇게 기록했는가? 아니다. 실제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다. 동정녀 탄생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외아들 이삭이 태어났듯이 마리아에게 분명히 있었다.

사람들이 1827년 난자의 존재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여자란 남자의 씨앗을 키워주는 토양 정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여자의 요소가 자식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고, 예수가 남자가 지니고 있는 성욕의 원죄를 지니지 않고 태어나기 위해 인간 아버지는 없어야 하므로 동정녀 탄생을 꾸며냈다는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성경과는 동떨어진 것인지는 위에 예를 든 창세기의 기록만으로도 반증이 된다. 사라는 자기 경수가 없이는 아이가 태어날 수 없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사라가 만약 자기 몸이 단지 아브라함의 씨앗을 받아 키우는 토양 정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면, 경수가 끊어진 것을 염려할 이유도 없었고 자기가 아브라함의 씨앗을 직접 받으면 되지 하갈을 첩으로 들여보내 이스마엘을 낳게 할 까닭이 없다.

성경이 다른 종교의 경전과 가장 다른 점은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에 직접 간섭하신 사실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 내려오셔서 마른 사막에 물이 흐르게 하고, 광야가 변하여 옥토가 되게 하고 죽었던 자도 살리셨다는 증언이다. 동정녀 탄생의 종교적 의미는 죄악과 사단과 사망의 권세 아래 신음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인간 세상에 오시기 위해선 인간의 몸을 빌려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성의 유혹에 넘어가 괴로워하는 정도가 원죄의 본질이나 인간이 이 땅에서 겪는 고통의 전부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으로 제약된 정보나 지식에 입각해 형성된 어떤 특정 상황과 시대에만 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교리 체계가 아니다. 성경에 드러난 절대 불변의 영원한 진리를 믿을 뿐이다.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알았기에 그 절대진리에 전 존재와 삶을 바치는 것이 신앙이다. 신자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참된 정신을 되살리는 것보다, 예수님이 참으로 누구인가를 알고 그분의 존재에 대해 전 인격을 동원해 제대로 반응하는 것이다.

 

청년 예수

예수의 출생 이후 30세 정도에 공생애를 시작하기까지 성장과정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최근 신학자들이 문헌학적·고고학적 연구로 이 부분에 관해 많이 알 수 있게 되었지만, 예수에 관해 알려면 일차적으로 성경을 보는 수밖에 없다. 예수의 이 '잃어버린 해(missing years)'에 관해 온갖 호기심 섞인 추측과 학문적 연구를 많이 해왔지만, 그 모든 연구가 성경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여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정황과 비교하여 사실성과 역사성을 검증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일종의 소설(fiction)에 그쳐 버린다. 사람들은 예수에 관한 성경의 기록이 마치 부족하고 오류가 많은 것처럼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단지 성장기의 기록이 부족할 뿐이지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떤 일을 했는가에 대해선 복음서의 자료가 절대 부족하지 않다.

예수의 성장기에 관해 기록이 없었다는 것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거나 신비감을 조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기록할 만한 내용이 없을 만큼 예수가 아주 평범한 성장기를 보냈다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가 평균 이하거나 메시아가 될 자질이 모자랐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서부터 특별한 능력을 나타내면 일단 그 부모 내지 조상 중 한 사람과 연관시킨다. 예수가 이룩한 일도 크든 적든 혈통의 공로로 돌릴 소지가 다분히 존재한다. 예수와 세례 요한이 혈연지간으로 예수가 요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그 좋은 예다.

물론 예수가 세상의 교육이나 부모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천하의 독불장군처럼 갑자기 어느 순간 뿅 하고 나타난 것은 아니다. 목수 수업과 평범한 유대인이 받는 일반적 훈련과 율법 교육을 거쳤다. 그러나 그가 이룬 십자가의 소명은 이 땅의 교육과는 상관없이 창세 전부터 삼위 일체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경륜에 숨겨져 있다가 때가 차매 드러났던 것이지 이 땅에서의 교육과 훈련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다. 인간 예수가 이 땅에서 온갖 고난과 시련과 유혹을 겪고 유대교의 종교 교육을 받다 보니, 어느 날 깨달음을 얻고 고통 중에 있는 불쌍한 인류 구원을 위해 내가 십자가에 죽어야지 결심하고 실천하여 하나님이 그 희생을 갸륵하게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청년기 성장 과정은 성인이 된 후 할 일을 이루기 위한 준비 과정이 아니라 단지 인간의 몸을 입었기에 필연적으로 성장 과정과 교육과 훈련을 거쳐야 했던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에 관해 성장기나 청년기에 관한 기록이 사실이었던 조작이었던 많은 까닭이 무엇인가?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처럼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총명하며 남을 리드하는 지도자로서의 영명한 자질이 있었기에, 성인이 된 후에 큰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바로 이런 면에서 예수의 성장기의 기록이 없는 것이 기독교에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예수가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보통 사람이었기에 우리 죄와 고통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뿐 아니라 구세주로서의 사명을 성취함에 부패하고 불완전한 이 땅에서의 이해타산 관계가 단 한치도 개입되지 않았고, 오직 성부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순수한 뜻만 계시되었다는 것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3년밖에 지나지 않은 것에 관해서도 하나도 아쉬워할 것 없다. 인간에게 불운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 좀더 오래 사셔서 더 좋은 가르침과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오셔서 하신 일이라곤 정말 별 볼일 없는 사람들과 식사하고 병든 자들 조금 돌보다가 억울하게 죽었으니 그분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 않다. 예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생각이다.

예수는 이 땅에 오직 죽기 위해 오셨다. 스승으로 우리를 깨우치고 모범의 본을 보이러 온 것이 아니라 우리 죄와 고통을 십자가에서 감당한 후에 부활하여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 만약 수십 년을 더 가르치고 희한한 기적을 더 많이 베풀고 갔다면 예수를 평가할 때에 십자가의 죽음은 퇴색되고, 오직 그의 말씀과 사역만이 연구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를 스승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 3년이 짧고 아쉽게 느껴질 것이며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은 십자가만 바라보아도 3년이란 짧은 기간이 문제가 안 된다. 십자가에서 모든 세대와 모든 장소의 모든 인류에게 다 적용되는 영단번(cμO¤Ua, once for all)의 구원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스승이 아니라 구세주라면 십자가에 바로 죽으면 되지 가르치기는 왜 가르쳤는가고 따질 수 없다. 예수가 어느 날 갑자기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했다면 한 마술사(magician)의 한갓 해프닝으로 생각하지 누가 그런 자의 일생에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3년의 공생애 동안에 제자를 두고, 가르치고, 병을 고치고, 이적을 베풀고 한 모든 것이 자신이 누구이며 앞으로 십자가에서 죽고 살아나는 것의 뜻이 무엇이며, 어째서 그 죽음의 사건이 인류에게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는가를 사전에 설명하고 계시로 보여준 것이다. 3년 동안 이 땅에서 그가 한 일은 오직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골 1:15)임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또 그것을 3년 만에 완벽하게 수행하셨다.

 

자신의 구세주 되심과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미리 보여주기 위해, 예수는 말씀을 가장 유용한 도구로 사용하셨다. 그래서 그의 말씀에는 십자가 구원이라는 일관된 주제와 천국을 향한 방향성이 없는 말씀은 없다. 그의 말과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권세 있는 자와 같은 것이, 상상력이 풍부하고 비유와 은유를 잘 구사하며 듣는 이가 정신 번쩍 나도록 촌철살인의 경구를 구사하고 율법의 자질구레한 면을 따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이 일관성과 방향성 때문이었다.

예수의 모든 말의 주제는 맨 처음 선포한 말씀부터 시작해서 끝까지 천국에 관한 것이었다. 오직 인간을 구원해 새 생명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살아 있는 말씀이었다. 말씀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다 직접 생기를 불어넣어 죄로 타락한 인간을 창조 때의 심히 좋았던 형상으로 회복시키는 재창조의 역사(æμÞA)였다. 그래서 우리의 정신이 번뜩 들어 깨우침을 얻는 정도의 말이 아니라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었다(히 4:12). 인간에게 깨우침을 주어 지성과 도덕성을 고무 함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게"했다(히 4:12, 13). 우리 생각에 유익한 것을 보태준 말씀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쓸모없는가를 벌거벗겨 보여주신 말씀이었다. 우리더러 우리의 지성과 도덕성과 종교성에 의지하지 말고 일관되게 구세주인 자신만을 바라보게 하여 십자가의 방향으로 인도하였다.

예수가 사용한 모든 비유도 바로 이 일관성과 방향성을 유지하였다. 그가 비유를 많이 사용한 이유는 "창세부터 감추인 것을 드러내기"(마 13:35) 위해서였는데, 그 감추인 것이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는 것"(엡 1:7)이었다. 예수가 그 감추인 것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엡 1:9)이기도 하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눅 8:10) 모든 비유에 천국이라는 주제를 곳곳에 숨겨두었다. 아무나 구원받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천국이라는 주제로 비유를 해석하지 않는 한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비유와 말씀은 선문답처럼 환기적이거나 제시적이어서 듣는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정답을 찾는 것이 절대 아니다. 이미 정답으로 제시된 키워드 천국을 가지지 않고는 풀 수 없고, 또 그 키를 가지고 푸는 자는 누구에게나 그 해석이 동일하다.

젊은 예수는 이 땅에서 자유롭지만 아주 좁은 범위의 교제만 하시다 죽으셨다. 그러나 그 교제가 단순히 기성세대의 고착화된 의식을 뜯어고치고 위선을 고발하고, 사회 개혁적인 차원에서 진정한 선을 실천하는 한 젊은 행동주의자의 것이 아니었다. 바로 이 천국을 증거하고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예수의 말뿐만 아니라 그의 삶과 사역 또한 천국이라는 키워드를 빼면 그저 조금 비범한 성자 정도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그가 다른 사람들이 상대하기 꺼려하는 창녀나 세리나 죄인들과 자유로이 식사했다고 해서 도량이 넓고 파격적이며 일종의 히피같이 자유 분망한 정신세계를 가진 자나, 혹은 도덕적으로 남들이 할 수 없는 사랑을 실천한 것으로만 생각해선 안 된다.

당시의 창녀나 세리는 단순하게 불쌍한 사람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의 바리새 율법)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율법을 바리새인들이 다시 해석하여 세부적인 규정을 만들어 실제 유대 사회에 적용한 율법

으로 따져서 절대 천국에 갈 수 없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죄인'은 단순하게 사기·절도·폭행범 같은 범법자라는 뜻이 아니라, 유대사회가 그 사회구성원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결례를 지키지 않음으로써 그 사회에 소속될 수 없고 구원 받지 못한 자로 낙인찍힌 자였다. 음식을 먹을 때 손 씻는 것을 심각하게 따진 이유가 단순하게 청결한 위생의 문제가 아니라 손 씻지 않는 자는 이방인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부류로 취급되었다. 유대 사회 제반 질서와 구조와 통념상 이들은 하나님의 돌이킬 수 없는 진노가 이미 확정된 천하의 죄인으로 도저히 가까이 해선 안 되는 부류의 사람, 그 사회에서 내용적으로는 완전히 추방된 자들이라는 뜻이다. 유대 땅에 살기는 살되 이미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로 따지면 어떤 자들일까? 살인죄를 범한 사형수, 전쟁 중에 학살을 저지른 공산당원, 창녀 촌의 포주, 조직폭력배 두목 같은 사람들 중에서도 최고로 악질인 자, 반드시 어떤 외형적 카테고리로는 나눌 수 없지만 저 사람은 반드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 거야 라고 사회 전체가 확신하는 사람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오사마 빈라덴¡¤E÷Ʋ·?¡¤±eAI¼º °°Aº AUμeAI¶o°i³ª CO±i? 예수님이 당시 사람들이 멀리하던 자, 피압박 계층들과 교제한 것이 사회 통념을 깨거나, 값싼 동정심을 보이거나, 파격의 멋을 부리거나, 지성의 자유로움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인간들이 볼 때는 하나님마저 외면할 자들이라고 낙인찍힌 자들을 몸소 오신 하나님이, 절대 그들을 구원의 반열에서 제외한 적이 없다는 것을 그들과 유대인들이 깨닫도록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천국은 인간의 선행이나 율법에 따른 결례를 지켜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고 몸소 실천한 것이다.

하나님 당신으로 천국을 계시하러 인간으로 오신 구세주 예수라는 핵심을 빼고 역사적 예수를 찾으면 그 예수상은 그저 인간의 눈에 비친 한 비범한 인간일 뿐이다. 종말론적 예언자·열심당에 속한 혁명가·기성 종교를 방해한 마술사·힐렐 파에 속한 바리새인·갈릴리의 카리스마 지도자·율법을 가르친 랍비, 이 모두는 인간으로서의 비범한 능력이 표출된 한 특수한 단면만을 발견한 것뿐이다. 소경이 코끼리를 더듬은 꼴이다.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 15:14). 성경의 예수, 신앙의 예수, 역사의 예수는 절대 다를 수 없다. 달라야 된다고 생각하거나 다른 면을 찾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왜곡되고 인간이 조작한 예수상만 발견할 뿐이다. 그런 예수는 성경에도, 역사에도, 우리 마음속에도 없다.

 

싸움꾼 예수

세상의 모든 종류의 종교인들이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 더 욕심을 내어 자기들끼리 많이 싸운다. 그럼에도 유독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 데는 그 까닭이 있다. 개신교는 개별교회 중심주의로 모든 활동이 공개적이다 보니 잘못된 모습이 중앙 통제 기관에 의해 여과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외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 더 중요한 이유는 교회 안에 가짜 신자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중생한 신자보다 단순히 스승으로 그를 본을 보려는 사람이 더 많고 나아가 예수의 가르침에도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 또한 많이 모이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분열과 분쟁이 있음을 옹호하자는 뜻이 아니라 교인들이 싸운다고 해서 기독교와 예수님이 잘못 되었다는 선입관을 가지는 것은 비논리적이라는 뜻이다. 절에서 스님들이 싸운다고 불교나 부처님에 잘못이 있다고 탓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사람이 싸운다고 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꼭 싸워야 할 정의의 싸움이 있으며 그런 싸움은 싸우지 않고 지나치는 자가 오히려 비겁하다. 싸웠다고 다 잘못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싸웠는가를 먼저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았고 예수님도 십자가에 한 마디 변명 없이 희생하셨기에 기독교인은 절대 싸워선 안 된다는 법은 없다. 싸워도 될 싸움과 싸워선 안 되는 싸움은 그 싸움의 대상에 따라 달라진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할 때 사랑해야 할 대상은 사람이다. 원수가 된 사람과는 싸우지 말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을 서로 원수 관계로 만들어버린 시기·질투·원한·악한 세력의 방해·사회적 부정과 모순 등 무엇이 되었든 그 죄악과는 철저하게 싸워야 한다. 두 사람이 서로 힘을 합해 싸워야 한다. 두 번 다시 원수가 되어선 안 되기 때문에 싸워야 하며 또 힘을 합해 함께 죄악과 싸우기 위해서라도 먼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해야만 한다.

신자에게는 싸움이 많다. 매일매일의 삶이 싸움이다. 아니 매순간이 싸움이 아닌 것이 없다.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는 세상의 실체의 내면을 잠시만 꽤 뚫어 보라. 얼마나 싸울 것이 많이 있는가? 싸울 것이 없고 신자가 싸우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자가 도리어 이상하며 신자라 할 수 없다. 도저히 세려야 셀 수도 없이 많은 죄악과 왜곡과 모순과 질곡과 눌림과 상처와 나태와 완악과 궤휼이 우리를 꼼짝도 못하게 옭아매고 있지 않는가?

조금이라도 영적으로 깨인 사람이라면, 그 모든 싸움의 대상의 뒤에는 항상 거짓의 아비인 사탄이 아주 화려한 속임수의 겉옷을 입고 우리를 조롱하며 사기치고 유혹하고 있음을 금방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인의 싸움의 궁극적인 대상은 바로 이 사탄이다.

이화여대 조태연 교수가 기독교 사상 99년 12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교회의 음악회에 갔더니 온통 싸우는 노래밖에 부르지 않아 그것도 새 천년을 맞는 크리스마스에 그러니 도대체 교회에서 적개심을 고무시켜 새로운 십자가 전쟁이라도 일으키겠다는 것인지 하나님의 나라를 찌르고 죽여서 건설하겠다는 것인지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무엇이라고 하겠는지?'라는 내용이 있음을 보고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어떻게 그런 자가 선배들의 믿음의 전통과 희생 위에 세워진 그 학교의 기독교학과 교수가 될 수 있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한국교회에서 공통적으로 채택한 찬송가 집은 알다시피 주제별로 묶어 놓았는데, 그 기고에서 예를 든 찬송가는 384¡­390장인데 모두 '분투와 승리'로 분류된 주제에 속한 곡들이었다. 찬송가는 송영과 영창 포함 558곡이 수록되어 있는 중에 이 주제는 9곡(1.8%)에 불과하며, 또 이 주제의 찬송가 가사에 등장하는 싸움의 대상은 전부 마귀와 죄악이다. 마귀와 죄악을 싸워 이기고 완전히 정복해야지 그들을 이웃처럼 친구처럼 사랑하라는 말인가? 조 교수가 찬송가의 가사를 제대로 읽어보고 하는 말인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으며, 이를 또 무턱대고 그것도 저자의 허락을 얻어 전재한 사람도 상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신자가 매일 싸운다는 것이 절대 이슬람과 문화충돌을 일으켜 현대의 십자가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랑을 심으려 오신 것은 분명하지만 그 사랑은 죄악과 사탄의 권세에서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해 내는 모습으로 실천된 것이며, 그러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죄악과 사탄과 십자가에 피 흘려 죽기까지 싸우셨다. 부활함으로 그 죄악과 사탄에게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죄와 사탄과 싸워 이기지 않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다. 신자란 이 땅에서 '싸워야 할 대상-영적인 죄악의 세력'과 '껴안아야 할 대상-영적인 죄악에 눌려 있는 사람'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다. 불신자는 이 구분이 없다. 그래서 무당도 점쟁이도 무조건 관용하라고 주장한다. 불신자는 종교의 자유를 논하면서 무당과 점쟁이뿐 아니라 그들이 믿는 우상과 미신마저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신자는 무당과 점쟁이는 사랑하되 그들의 우상과 미신은 타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0). 신자가 벌리는 악의 영들과의 싸움은 예수님 이래 인류 역사가 지속하는 한 계속될 것이며 그것도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UiaA)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엡 6:18) 해야 한다. 이 싸움은 적당한 타협이나, 휴전이나, 정전이나, 항복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오직 싸워 이겨야만 하는 싸움이며 그 승리는 보장이 되어 있다. 신자가 깨어서 기도하고 싸우기로 마음만 먹으면 반드시 이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완전한 승리가 성령의 권능으로 우리와 함께하기 때문이다.

그런 싸움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그럴 싸움을 싸울 의사가 없는 자에게 기다리는 것은 패배뿐이다.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약속하셨다. 어두움을 주관하는 악의 세력이 신자에게 환난은 주더라도 신자를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못한다. 신자의 싸움에 군국주의의 사고가 잠시 영향을 끼쳤거나 19세기 제국주의의 사조가 개입될 여지는 전혀 없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앞으로 영원토록 신자가 싸워야 하는 것은 처음부터 거짓을 일삼는 악의 영들이다.

 

싸움 말리는 예수

오늘날의 세대를 한 마디로 특징짓는다면 '다원화된 문화'라고 함에 아무도 이론을 제기할 자 없을 것이다. 따라서 현 사회의 가장 절실한 요구사항은 '문화간의 화해'가 됨도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인종·문화·종교·관습·언어·사상·체계 등 인류의 화해를 가로막는 장벽을 허물고 평화와 화해를 이루어야 한다. 이런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려면 '화해하는 예수', '평화를 가져 주는 예수'상을 강조하게 됨도 자연적인 흐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인류가 당면한 문제가 절실하다 해도 예수 본인이 원하지 않았던 예수상까지 우리가 만들 수는 없다. 바람직한 예수는 반드시 예수 본인이 성경을 통해 계시해 놓은 그 예수 됨을 넘어선 안 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모든 사람이 다 공감하는 보편타당한 원론적 해결책은 사실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또 그 해결책이라는 것을 가만 따져 보면 문제를 한 번 더 설명한 것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한국 정치에서 수십 년간 망국병이라고 불릴 정도로 지역감정의 폐해가 심했다. 그 해결책으로 '지역 감정을 조장하지 말고 서로 화해하여 망국병인 지역감정을 없앱시다'라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아이더러 '학교 성적이 나쁘니 어떻게 할래?' 하고 물으면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꼴이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정의를 실천하면서 평화를 실현하는 예수가 되어야 한다는데 공감하지 않을 사람 없으며 그에 반대할 자가 어디 있는가? 다원화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분열을 없애는 것이니 그 해결책은 화해합시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분열이 없는 것이 화해인데 같은 말을 반복한 것이지 해결책이 아니다.

'화해하는 예수'가 바로 이런 식의 어린아이 같은 해결책이다. 이런 그럴싸한 말에 현혹되어선 안 된다. 도대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예수라는 말인가? '화해하는 예수'니까 모든 종교, 모든 사상, 모든 문화 다 끌어안기만 하면 된다는 말인가? 그 속에 정의가 아닌 종교와 사상과 문화가 있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또 정의를 실천하면서 화해를 달성하자면 정의가 아닌 것들에 대한 판단 근거와 기준은 무엇이며, 또 누가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는 말인가?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다. 무슨 시국 선언에나 나올 법한 허울좋은 구호에 불과하다.

'하나가 되자, 화해하자'는 구호와 이론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인류 역사는 바벨탑 사건 이후로 항상 다원화된 사회였으며 문화간의 충돌도 상존했다. 인류의 문제는 언제나 다원화에 따른 분열과 시기였고 또 인류가 도달해야 할 목표도 언제나 화해와 평화였다. 모든 지나간 선각자들, 종교 지도자들, 정치가들, 사회 개혁가들의 한결같은 해결책도 '화해하자, 하나가 되자, 먼저 양보하자, 남을 위해 양보하자'였다. 이것은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라 위에 지적한대로 일종의 구호일 뿐이다. 당연히 구호만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고 또 모든 시도가 실패했음을 인류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문화간의 화해의 문제는 현대의 특징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과거요, 현재요, 미래의 전부다.

그럼 왜 똑같은 문제가 유사 이래 상존하는가? 이전에는 싸움하는 예수상을 강조했고 화해하는 예수상을 몰라서 그랬는가? 화해하는 예수상을 지금에서야 발견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가 몰랐던 것은 예수가 말하는 화해의 내용이다. 서로를 갈라놓는 벽을 허물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그저 벽을 허물자라고 구호만 외쳐댔다는 말이다. 하나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잠꼬대처럼 주문처럼 외우기만 했다.

예수님이 신자더러 하나가 되라는 것의 모델은 포도나무다. 포도는 송이 하나씩 각각의 모양은 다르지만 같은 가지에 붙어 있어서 어느 송이를 따먹어도 포도의 맛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가 되라고 하면 그저 수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겉으로 커다랗게 하나가 되어서 그 속에 겉과 속의 색깔이 다르든지 상관하지 않고 속이 덜 익었던지 곪아터졌던지 하나가 되어 보이면 된다. 하나님이 창조 때부터 인간에게 바랐던 사회적 원리는 연합이다. 그것은 사람끼리 연합(united)하라는 것이었지 똑같은 사람(uniformity)이 되라는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 세상에 두고 갈 제자들을 위해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요 17:11, 21)라고 기도했다.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같이 제자들도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각각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죽기 직전 제자들을 위해 기도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이 땅에서 꼭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다. 예수를 떠나서는 인간은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인류가 직면하는 모든 죄악과 모순과 왜곡과 갈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듭나서 서로 그 영혼이 연합되어 예수그리스도의 공동체가 확장되지 않는 한 가능성이 없다. 인류가 당면한 고민은 우리의 문제를 몰라서도 아니요, 또 인류가 도달할 목표가 없어서도 아니라 그 목표를 향해 우리를 태우고 갈 수단을 상실한 것이다. 그 길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이라도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고 제대로 변화되는 것이지 문자적으로 '화해하는 예수'를 구호로 외치면서 무조건 모든 종교를 포용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곧 오실 예수'상도 진지하게 이해해야 한다. 현대 세대의 가장 큰 문제는 '화해하는 예수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다. 화해의 의미가 변질된 것이 문제다. 예수님 당신이 강조한 화해는 개별 인간이 먼저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했음에도 그것을 무시하고 인간끼리의 화해만을 강조하는 예수상이 되었다. 이에 대해 심지어 기독교 내부에서조차 세태의 흐름에 침묵으로 대응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결국 점차 예수님이 원하는 대로 하나는 되지 않고 인간은 어리석게도 수천 년간을 두고 체험했던 그 실패를 되풀이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 실패의 강도는 차츰 세어지고 실패의 발생 빈도도 더 늘어날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인류의 미래는 인간 스스로 파놓은 파국을 향해 아무런 제동 장치 없이 달리고 있다. 예수가 다시 오지 않고는 안 될 상황으로 치닫는다.

길을 막고 물어 보아라. 예수님 당시와 오늘날 중에 죄악의 크기와 발생의 빈도가 어느 쪽이 심한지? 또 인간이 겪는 염려와 불안과 상처와 영적인 눌림과 방황이 어느 시대가 더 심각한가? 재림하는 예수상이 로마 식민지 국민들의 절박한 시대상황에서 나온 특정 시대에 국한된 특유한 산물이 아니다. 예수가 재림해야 할 절박성은 객관적으로는 지금이 그때보다 훨씬 더 높다. 예수 당시 사람들은 미개해서가 아니라 순수해서 재림의 소망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 사람은 똑똑해서가 아니라 그 소망을 외면하고 죄악을 더욱 탐하려니까 성경의 예수상을 부인하고 자신들만의 예수상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뻔뻔스럽게 고집하고 있는 것뿐이다.

'곧 오실 예수'라고 해서 시기적으로 10년, 100년 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인류의 죄악은 어느 시대나 똑같았는데 인간이 하나님을 부인하는 범위가 더 넓어졌고 더 빨라졌다는 의미다. 재림의 시기는 인자도 모르고 하나님만이 아신다. 예수 재림의 소망의 강도는 인류가 저지르는 죄악에 대한 혐오감과 비례하는 것이지, 단순하게 이 세상 실패자의 도피처나 마지막 기댈 언덕을 찾기 위해 재림이 의도적으로 강조되는 법은 없다. 그런 자가 혹시라도 있다면 지금껏 많이 보아온 대로 사기꾼에 불과하다. 재림 예수에 대한 소망은 인간의 죄악을 철저히 미워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에, 오히려 내재하는 하나님에 대한 갈증을 더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재하는 성령의 감화에 의해서만 그 소망을 품게 되고 간직하고 유지할 수 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는 자만이 현재를 무시하고 잘못된 종말론에 더 집착할 뿐이다.

 

예수님을 어떻게 볼까?

장님이 코끼리를 만진 이야기를 우리 모두 익히 알고 있다. 코끼리의 덩치가 인간에 비해 엄청나기 때문에 장님이 그 전체를 다 만져 완전한 그림을 그려낼 수 없다. 코끼리의 귀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커다란 부채같이 생겼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같은 이치로 코를 만진 이는 굵고 길다란 호스 같고, 다리를 만진 이는 굵은 기둥 같고, 몸통을 만진 이는 커다란 바위 같고, 꼬리를 만진 이는 길다란 새끼줄 같다고 말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예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무리 예수가 2천 년 전의 인물이요, 그에 관한 기록이 충분하지 않다고 해서 장님이 코끼리를 표현하는 것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경우에는 그 코끼리를 만지고 표현하고자 하는 이가 정상적 시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처음부터 전체가 아니라 일부도 볼 수 없다. 또 코끼리가 너무 커서 만질 수 있는 부분이 한정되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코끼리는 가만히 있고 장님들이 가서 만졌다. 말하자면 코끼리는 장님들에게 자기 스스로를 보여줄 의사가 없었다.

예수를 증거하는 자들은 그가 초대교회의 신자였던, 삼위일체의 기독론을 도출해낸 신학자였던, 2천 년이 지나 믿는 오늘날의 신자였던 앞에서 지적한 장님 코끼리의 경우와는 정반대다. 우선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를 정확히 볼 수 있는 시력을 갖게 되었으며, 예수의 일부 특징 만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일대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전체 그림을 그려낼 수 있으며, 무엇보다 불완전하고 우매한 인간이 예수를 찾아가서 연구하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 당신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셔서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어 주신다.

흔히들 예수를 하나님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친 분이라고 말한다. 이는 위에서 말한 관점으로 엄밀하게 따지자면 틀린 말이다. 말하자면 천국은 코끼리이고 인간은 장님들로 비유하자면 장님이 코끼리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못하니까, 예수님이 코끼리에 대해 평생을 연구한 박사로 나타나 코끼리의 크기·무게·모양·성질 등 모든 특성에 대해 설명해준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당신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직접 계시(Reveal)한 것이며 단순히 가르친(Teach) 것과는 다르다. 천국의 모형을 그가 살았고 실천한 삶에서 보여준 것이지 천국을 가르치기 위해 설명한 것이 아니다. 말씀으로 강화(E≫u¥)한 것은 천국의 실체를 이 땅에 옮겨다 보여줄 수가 없고, 또 자기 삶의 의미를 깨우쳐 주기 위해서이지 단순히 교육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 내지 설명은 항상 선포(Proclaim)의 성격을 지녔지 강의(lecture)가 아니었다. 그의 생각·말·행동·기적·죽음 모두 천국의 계시이자 선포였다. 코끼리 박사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코끼리가 직접 인간이 하는 말로서 미리 자기에 관해 인간들에게 다 설명한 후 그것을 직접 증명해 보이기 위해 자기 배를 갈라 죽으면서 까지 그 속을 속속들이 다 내보여준 것이다. 장님이 코끼리를 알기 위해선 일단 눈이 떠져야 하고, 다음에 코끼리 실체가 눈앞에 나타나야 하지 눈 감은 채 아무리 박사가 와서 설명해주어도 모른다. 그는 오셔서 성령을 부어 주어 장님이던 인간의 영혼의 눈이 뜨이게 했고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보여준 것이다.

예수의 정체성에 관해, 재림의 주·신인(aeiN)기독론¡¤CI³ª´O AoCyAC 현현¡¤¸≫¾¸AC CI³ª´O¡¤대속적 기독론¡¤≫c¸AAC ±C¼¼¸| AI±a´A ½A¸®AU¡¤½A·ECN ½º½A¡¤만유의 주·삼위일체의 기독론 등, 역사적으로 수많은 설명들이 있어 왔다. 그 많은 기독론 가운데 어느 것이 맞느냐, 틀리느냐, 어느 것이 좋으냐 나쁘냐, 어느 것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를 떠나 근본적으로 우리가 따져야 할 문제는 따로 있다.

진정한 기독론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조직신학적으로 이야기하는 기독론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론의 정의이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upon, and our hands have handled¡| KJV)"(요일 1:1). "요한의 세례로부터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행 1:21, 22)이 "예수의 부활하심"(행 1:22)을 증거한 것이다. 성경적인 기독론이란 일차적으로 학문적 연구성과가 아니라, 예수님의 3년간의 공생애 동안에 곁에서 함께 생활하며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 자가 증언한 것이다. 예수에 관한 많은 기록 중에 정경으로 선택하여 신약성경을 확정 지을 때에 최우선 기준으로 삼은 것이 바로 이 사도성(ÞAOuao)이었고, 그래서 신약성경의 저자는 모두 예수의 사도다.

따라서 아무리 신학적으로 정교한 이론과 심오한 사상이 뒷받침이 된 기독론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를 보고 듣고 만진 바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이미 2천 년 전에 죽은 예수를 어떻게 보고 듣는다는 말인가? 신약성경 27권 중 그 반 가량 저술한 바울도 예수를 직접 보지 못했지 않는가?'라고 반박할 수 없다. 바울은 어쩌면 예수의 직접 제자 12명보다 예수에 관해 더 많이 보고 들었다고 할 수 있다. 다메섹 도상에서 승천하신 예수님과 일대일로 극적으로 대면했고 심지어 하늘의 삼층천까지 가서,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지극히 큰 계시를 직접 받았던 자이다(고후 12:2¡­7). 그가 예루살렘 경비대장인 천부장 앞에서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나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예수님)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나의 보고들은 것에 대하여 증인"(행 22:14, 15)이 된다고 고백했다.

기독론의 형성은 가장 먼저 예수님 당신의 계시가 있었고, 제자들이 실제적인 만남을 통해 그 계시에 대한 수용이 있었고, 그에 관한 있는 그대로의 증언-복음서의 기록이 있고 난 다음, 그 증언을 후대의 신학자들이 학술적으로 해석·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신학적 해석도 성경의 증언을 넘어선 그 해석의 권위를 인정받을 수 없다. 시대와 문화와 환경과 해석자의 판단에 따라 성경에 기록된 것 중에 특정 부분을 더 중요하다고 강조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새로운 기독론이 아니라 성경 안에 있는 기독론이다. 성경 기록을 넘어서는 기독론은 기독론이 아니다.

예수님이 다른 시대 다른 문화에서 태어났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일이 있었을까? 등장하는 인물의 지방과 언어만 달랐을 뿐이지 그 내용은 성경의 기록과 하나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란 연극을 주인공 이름만 다르지, 나머지 대화·동작·상황·등장인물·배경까지 오리지널과 동일하게 설정하여 한국인 배우가 한국말로 공연하는 것과 같다. 조선시대 한반도에 예수님이 나타나셔도 그는 여전히 고아와 과부와 세리와 창기와 강도와 죄인들과 교제하며 농부를 제자로 삼고 중풍과 나병과 앉은뱅이와 소경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리지만, 정작 본인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가 3일 만에 무덤의 흙이 파헤쳐진 채 부활하셔서 시체가 남아 있지 않는 것으로 끝이 난다. 도사나, 미륵불이나, 정도령이나, 보살이나, 요임금 등의 이름으로 불리어지지 않고, "나사렛 예수"처럼 '함경도 김아무개'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다.

또 어느 누가 그 기록을 해석하더라도 성령의 감동이 있으면 정치적 압제와 사회적 불평등과 육신적 질병에서 해방시키며 심오한 종교적 깨우침을 한국민에게 주러 온 자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사탄과 사망의 권세에 허덕이고 신음하는 이 세상의 모든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기독론이란 역사에 실존한 예수가 하신 사역과 가르침과 그 죽으심과 부활에 관해 눈으로 보고 들은 것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말씀에 기준하여 성경의 전체 콘텍스트에서 해석되어진 것이지, 어떤 특정시대의 특정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다. 인간의 종교적 의식에 짜 맞추거나 기존에 있었던 어떤 관념과 사상에서 추출되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 당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인간 대신에 죽는다'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기존 문화나 사상에서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다만 인간의 모습으로 와서 인간의 땅에서 인간으로 사셨기에, 지혜·희생양·로고스 개념·부활사상·구원자가 하늘에서 온다는 것 등 기존의 인간이 갖고 있는 사상적 개념 내지 종교적 인식과 부분적 혹은 상징적으로 일치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 땅에 괴물이나, 하나님의 모습으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는 자체가 하나님이 인간의 눈높이에 맞게 자신을 낮추어 계시하셨고 하나님이 인간 예수로 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또 타인종과 타종교의 사상들이 유대인들의 구약에 나타난 내용들과 외형적으로 일부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창조시에 심어주신 하나님의 형상이 죄로 말미암아 부패되었지만, 희미하게나마 신에 대한 경외와 종교성의 형태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종교적인 의식·절차·신에 대한 인식과 개념 등에 서로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뿐이다. 그러나 그 형상이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이 베풀어 준 은총으로 말미암아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바른 모습으로 회복되었고, 다른 종교와 이방인들에게는 부패된 채로 우상 숭배의 모습 그대로 계승되었다. 나아가 구세주가 '비천한 죄인의 모습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담당하고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은 세상의 어떤 문화와 종교와 시대에도 없었다. 간혹 신화상에 영웅의 모습으로 대신 죽는 구세주는 있었을지 몰라도….

시대와 장소와 인종과 문화에 따라 변화되어야 하는 기독론은 이미 기독론이 아니다. 기독론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봉사가 코끼리를 만졌기 때문이다. 21세기 한국 창경원에 있으나, 100년 전 아프리카 초원에 있으나, 3천 년 전 인도의 정글에 있으나, 멀쩡히 눈 뜬 사람에게는 코끼리는 코끼리인 것과 같이 성령의 눈을 가진 자에게는 예수는 예수일 뿐이다. 새로운 이론체계나 신학적 정교함이 필요 없다. 그분의 실체를 보고들은 대로 전하면 된다. 그 실체를 본 자는 벌거벗은 임금님을 본 자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다른 말을 보탤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날 때부터 소경인 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자 바리새인들 사이에 큰 논쟁이 일어났다. 안식일의 규정을 위반하였고, 그 기적의 신빙성도 의심스럽고, 이미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하면 출교하기로 결의했으므로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 소경을 데려다 거짓 자백을 받거나 그 기적을 부인시키기 위해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예수)이 죄인인 줄 아노라"(요 9:24)라고 닦달했다. 그러자 이 소경이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다"(요 9:25)라고 했다. 그리고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 9:30¡­33)라고 덧붙였다. 이 소경은 그가 겪은 그대로 증거했다. 다른 이야기가 필요 없었다.

인간은 모두 영적으로 나면서 소경이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완전히 눈이 먼 자다. 나면서 소경인 자에게는 어떤 약과 수술도 필요 없다. 그를 만드신 분이 눈을 뜨게 하는 방법말고는 시력을 회복할 길이 없다. 아무리 잘 짜여진 기독론이라도 예수를 바로 보게 할 수 없다. 시대가 바뀌고 인간 지성이 깨어나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은 예수를 새롭게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약이 필요 없다. 성령의 간섭으로 우리 눈이 뜨이게 되면 자연적으로 정확하게 예수를 해석할 수 있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이 진리는 마찬가지다. 코끼리가 사자가 될 수 없다. 오늘날 예수가 구세주라고 하는 자가 점차 줄어들 듯이 코끼리의 수가 줄어들 수는 있다. 지금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코끼리를 제대로 보존하는 길이지 아직도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을까 논하는 것이 아니다. 부채를 쓰던 시대에서 선풍기나 에어컨을 쓰게 되었다고, 코끼리는 에어컨처럼 생겼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성불하신 예수님

한국에서 아주 저명한 한 스님이 어떤 잡지에 인터뷰한 글에 의하면, 기도란 소리내어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기독교에선 가능한 소리 내어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기도의 형식을 두고 말하는 별것 아닌 것 같은 이 차이가 사실은 이 두 종교의 결정적 차이를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예다. 불교에서 소리내지 말라는 이유는 내면적인 명상과 참선을 통해 고매한 깨우침을 얻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고 다른 잡념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에 소리를 내면 그런 정신활동이 방해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기독교는 자기의 깨우침이 아니라 절대자 하나님에게 삶의 아주 구체적이고 세밀한 부분까지 구하고 찾고 두드릴 것을 아뢰는 것이기에, 마치 아이가 부모에게 이것저것 해달라고 요구하듯 자기 소원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소리를 내지 않으면 오히려 잡념이 방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 쪽은 소리내는 것이 잡념이 생겨 방해가 된다고 하고, 다른 한 쪽은 소리 내지 않는 것이 그렇다고 한다.

기독교는 절대타자에게 탄원하는 것이 기도의 주된 내용이고, 불교를 비롯한 다른 모든 종교는 자기가 명상하고 수행하고 깨우치는 것이 기도의 주된 내용이다. 부처님이 참선의 사람이었고 예수님은 기도의 사람이었다고 할 때, 두 사람이 같은 종교 활동을 했는데 종교가 달라 용어만 다른 것이 아니라 이처럼 그 내용에 있어서도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하고, 새벽 미명마다 기도하고, 사람이 몰려오면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고, 또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가 땀방울 맺히듯 기도한 것은 수행을 한 것이 아니라 탄원의 기도를 한 것이다. 어떤 절대적 깨우침에 이르러 비로소 절대자를 만나는 체험을 한 것이 아니라 기도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절대자를 앞에 모시고 서로 대화하듯 이야기하는 것이다.

탄원 기도는 아무리 빌 것이 많다고 해도 기껏 몇 분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자는 단지 자기가 갖는 소원만 기도했다는 뜻이다. 정말 기도를 제대로 하는 사람은 기도를 하면 할수록 자기를 위해 구할 것은 줄고, 남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 훨씬 더 많아지므로 기도하는 시간도 갈수록 길어진다. 어떤 이는 기도할 것은 많고 시간은 모자라 요일별로 기도하는 제목을 주제별로 나누기도 한다. 바울 사도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한 대로, 일하면서 운전하면서도 계속해서 속으로 기도한다. 이 때는 물론 소리내는 것과 상관없이 한다. 이렇게 기도하는 자들이 기독교 신학자나 교회의 사역자나 특별히 방언이나 신유의 은사를 받은 능력자가 아니라 평신도들 가운데 얼마든지 있다. 그런 자들에게 물어보면 평생을 기도만 하고 지냈으면 좋겠다고 한다. 주위를 둘러보라 기도해 주어야 할 사람과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일개 평신도가 이럴진대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이라면 오죽했겠는가?

물론 기독교의 기도에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가운데 몰랐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 진리란 이미 성경에 기록된 내용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더 깊고 분명한 이해를 말하는 것이지 이 세상에 없었던 새로운 깨우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 우주의 궁극실체와의 어떤 극적인 만남도 이뤄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40일 새벽 작정기도나 산상기도나, 혹은 수십 년의 기도 수행을 거쳐 그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한 하나님을 처음으로 만나는 체험이 아니다. 신자는 기도를 시작할 때 이미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분의 임재 아래 시작하기에 별다른 만남이 필요 없다. 이전보다 더 충만하고 풍성한 관계이거나 날마다 새롭게 만남으로서 극적이지 첫 대면이라 극적인 것이 아니다. 자식이 며칠간 부모에게 마음 상한 일이 있었지만 그것이 순전히 자신의 오해임을 알고 부모 앞에 나와 서로 사죄하고 용서할 때에 깊은 사랑의 감정의 교차가 있고, 그후 그 관계도 더 깊고 튼튼해지는 것이지 이제껏 없었던 부모가 갑자기 새로 생긴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불교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예수님은 성불(a÷YO)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부처님 당신으로 이 땅에 온 것이다. 새삼 부처가 되어야 하거나 부처를 만날 필요가 없었다. 베드로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이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면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다"(마 16:16¡­19). 예수님은 천국열쇠를 주러 오셨다. 베드로더러 너도 나처럼 노력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깨우침을 얻어 천국 열쇠를 획득하라고 말하지 않으셨다. 열쇠란 그 집의 주인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인데 천국 열쇠는 천국의 주인인 예수님만이 그 열쇠를 줄 수 있다. 그 열쇠는 물론 베드로가 했던 예수님이 구세주임을 믿는 신앙고백이다. 예수님 당신이 열쇠다. 기독교 신자의 기도는 따로 하나님을 불러 내리는 절차나 오랜 깨우침이 필요치 않다. 예수님이 구세주임을 믿고 고백하면 바로 하나님이 기도하는 자 안에 임재한다. 아니 이미 임재해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이라고 끝낸다. '나는 천국 열쇠를 가진 자이므로 이 기도가 천국 문을 열고 하나님 보좌에까지 상달될 줄 믿습니다.'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줄 것을 약속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요 14:16)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여기에서 '또 다른'이란 의미는 'Different(내용과 질이 전혀 다른)'라는 의미의 '다른'이 아니고 'Another(내용과 질에서 100% 동일하지만 개체만 다른 것)'라는 의미의 '다른'이다. 다시 말해, 자신과 성령을 동일시(Identification)한 것이다. 예수님은 따로 성령체험을 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에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이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성령 체험을 하는 자는 진리를 알게 된다. 기독교에서 진리를 아는 것은 다른 종교에서 흔히 이야기하듯 도를 깨우쳐서 성인(a¡iN)이 되거나 심지어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올라 성불하는 체험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추하여 죽을 수밖에 없으며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죄와 공중권세 잡은 사탄이 가로막고 있어 도저히 가까이 하고 메꿀 수 없는 간극(EaÐA)이 있음을 발견하여,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오직 자비만을 바라며 무릎 꿇게 만든다. 예수님이 성령이 이 땅에 오면 하게 될 일에 대해 설명한 그대로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나를 다시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요 16:8¡­11).

성령 체험을 한 자의 첫째 반응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것이 죄임을 깨닫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사탄이 패배하였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심으로 구원의 길이 열렸음을 알 때만이, 비로소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그 간극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진리 안에 들어왔고 죄와 사탄과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었으므로 생전 처음 참된 자유를 맛보게 된다.

성령으로 거듭난 기독교신자 모두에게 물어보라. 자기들이 성령 체험을 했을 때에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 또 그들이 성불이 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예수님 당신을 원하는가?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와 살아 계신 우주의 궁극실체와의 대면의 경험인 것만은 틀림없지만, 내가 거룩한 존재가 되어 그 실체와 일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인간은 성불이 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었던 존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음을 믿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기도로 성불이 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세주로서 이 땅에 오셨다.

 

'자비'- 어머니의 태(÷A)처럼(womb-likeness)

오늘날 모든 종교인들의 공통된 화두(u¥Oe)는 관용과 자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 솔직히 한번 차분히 생각해보자. 자비와 관용이 인류의 문제에 대한 이제껏 한번도 시행해 보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해결책인가? 지금까지의 다른 노력들이 전혀 힘도 발휘 못했기에 새 차원의 방법이 동원되어야만 하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다른 모든 것보다 더 확실하고 능력 있는 해결책으로 검증된 것인가? 이 모든 물음에 대한 정직한 대답은 '노'이다.

그렇다면 작금에 새삼스럽게 논의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지금껏 했던 노력이 약하고 부족했거나 아니면 인간세상의 갈등이 더 많아지고 강력해진 것인가? 둘 다 아니다. 인간의 갈등은 항상 같은 모습·같은 크기로 있어 왔고, 그에 따른 인간끼리 자비와 관용을 베풀자는 노력도 같은 모습·같은 크기로 있어 왔다. 한 가지 달라진 것이라고는 교통과 통신 수단의 발달로, 갈등의 모습이 즉시 광범위하게 누구나 알 수 있게 됨으로써 문제가 더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 것뿐이다.

그럼 어떤 결론에 이르는가? 동일한 문제에 대해 문제 해결 방법도 동일한데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라면 문제를 잘못 진단했거나 해결 방법이 잘못되었거나 둘 중 하나다. 다시 심각하게 생각해보자.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인간 사회의 갈등과 분쟁이라는 것이 잘못된 진단인가? 그 해결책이 자비와 관용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가? 둘 다 아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인가? 그 동안에는 자비와 관용을 베푸는 노력과 힘이 모자랐으므로 더 성의껏 하면 되는가? 유사 이래 그렇게 노력해도 안 되었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노력해야 성공할 가능성이 있겠는가? 과연 그럼 지금 그런 노력을 하고 있고 해결될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도 솔직히 어느 누가 '예스'라고 자신 있게 나서지 못한다.

인류의 분쟁이라는 문제를 논할 때는 언제나 서로 더 포용하기 위해 노력하자는 결론으로 끝난다. 왜냐하면 자비와 관용만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고급한 가치를 지닌 덕목이 없고, 또 그보다 더 나은 해결책이 실제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인류 역사도 과거와 다름없이 나타나는 갈등마다 자비를 베풀려고 노력하다 실패해, 서로 사랑하자고 외쳐보지만 또 다른 분열이 불거지는 악순환만 계속되지 않을까? 몇천 년, 몇만 년 뒤에도 모든 지성인과 종교인의 공통된 화두가 여전히 '서로 사랑하고 관용을 베풀자'일 것이라면, 궁극적인 문제는 혹시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서로 사랑하지 못하니까 갈등이 생기고 그래서 갈등을 해결하려니 서로 사랑하자고 하는데 또 서로 사랑을 못하고 있으니 다시 갈등이 생기면 평생 제자리에서 돌고돌게 마련이다. 이 해묵은 인류의 문제를 다람쥐가 쳇바퀴 도는 식으로는 영원히 해결할 수 없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지 않으려면 그 쳇바퀴에서 나오는 방법말고는 없다. 그렇다고 모든 갈등을 외면하고 사랑하는 것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모든 인간이 완전히 세속을 초월한 도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한 인간 공동체에서 일탈(ii÷­)할 수 없으며 또 그 공동체가 존속하는 한 이 문제는 계속해서 발생한다. 그야말로 영원히 풀리지 않는 딜레마일 것 같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가 만약 자신이 아무리 돌아도 먹이를 따먹을 수 없는 쳇바퀴 속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계속 돌 리가 없다. 쳇바퀴 안에 있다는 것을 몰라서 도는 것이다. 다람쥐 쳇바퀴 식으로 돌고 도는 것은 인간의 실패한 행동과 노력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의 틀이다. 갈등을 사랑으로 치유하자는 해결책은 반드시 '인간은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만 효력이 있다.

지금까지 인류 유사 이래 예수를 제외한 모든 선각자·종교인·지성인이 제안했던 인류 문제에 대한 해결책들을 한 마디로 종합하면, '인간은 스스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데 단지 모자랐던 것은 그 노력의 크기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강조하는 것이 서로 자비와 관용을 베풀자는 구호였는데 이를 좀더 풀어서 정확하게 해석하면 '지금까지 해온 것보다 좀더 많이 자비와 관용을 베풉시다'이다. 이 구호는 모든 시대마다 단 한번도 변함없이 똑 같았지 21세기 인간의 지성이 깨여서 새롭게 제창한 것이 아니다. 20세기에는 '19세기보다는 더 사랑합시다'였고, 19세기는 '18세기보다 더 사랑합시다'였다. 구호를 외치는 사람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토록 실패했다면 한 번쯤은 그 쳇바퀴에서 빠져 나와 고민을 해 봤어야 하지 않을까? 서로 자비를 베풀자고 그렇게까지 외치고 노력했는데도 실패했다면 우리에게 과연 자비를 베풀 능력이 있는가에 대해 의심을 품어볼 만도 하지 않는가? 바로 여기에 인류의 근본적인 문제가 숨겨져 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이 남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조차 못하거나 혹은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기를 싫어했다. 왜냐하면 여전히 남을 사랑하고자 하는 소원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혼동했던 것이다.

노래방에 가면 노래실력이 형편없는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놓지 않는 사람이 가끔 있다. 노래 부르고 싶은 열심 내지 부르기 좋아하는 것과 정말 노래를 잘하는 것과는 다르다.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가 왜 도는가? 바로 눈앞에 도토리 먹이가 달려 있는데, 배가 고파 먹고 싶은 열망이 있고, 또 거리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평소 때 자기 달리기 실력으로 봐서 한숨에 도달할 거리밖에 안되니까 그것을 먹기 위해 달린다. 다람쥐는 자기가 쳇바퀴 위에 있다는 것도, 이전에 그렇게 노력했어도 실패했다는 것을 모른다.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놓지 않는 사람도 노래 부르고 싶은 열망이 있고, 조금만 하면 잘 부를 것 같고 또 어떤 쉬운 곡들은 점수도 많이 나오니까 계속 마이크를 놓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없던 노래실력이 생긴 것은 아니다.

인간이 서로 사랑하자는 마이크를 계속해서 놓지 않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와 같다. 사랑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고 또 어떤 때는 정말 서로 사랑하기도 했으니까 조금만 더하면 될 것 같으니까 그러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잊고 있거나, 모르고 있거나,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참된 사랑을 할 실력이 없다는 것이다. 다람쥐가 쳇바퀴에서 먹이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먹이를 달아준 주인이 그것도 쳇바퀴에서 꺼내어 먹여 주는 수밖에 없다.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을 사람들은 아주 뛰어난 다람쥐가 왔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주 능력이 뛰어난 다람쥐로 먹이를 따먹었기에 자기가 깨우친 먹이 따먹는 방법을 다른 다람쥐들에게 가르쳐 주러 왔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인류에게 가르치려던 본질이 바로 '서로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자'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이전의 선각자들이 다 말했고 실천해 보았던 것을 다시 이전보다 더 큰 노력으로 해보라는 말을 새삼스럽게 한 것이나 다름없다. 쳇바퀴 속의 다람쥐더러 조금만 더 뛰면 먹이를 따먹을 수 있다고 가르쳐 주는 것과 같다. 예수가 안 깨닫고 안 가르쳐 주어도 누구나 알고 있던 방법이었다. 쳇바퀴 속에 있는 다람쥐 자신도 '조금만 더 뛰면 먹이를 먹을 수 있는데'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따로 선배 다람쥐가 와서 가르쳐 줄 필요가 없다.

예수를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이 그 이해를 입증하기 위해 드는 대표적인 예로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주는 사건이다. 율법으로는 돌로 쳐죽여야 마땅한 현장에서 간음해 잡혀 온 여인을, 형식적인 율법의 굴레를 벗기고 자비를 베풀어 용서하고 어떤 사람도 차별하지 않고 사랑으로 품어안은 관용을 실천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는다. 물론 겉으로 봐서 이런 해석이 하나 틀린 것 없으며 정확하게 맞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정작 붙들어야 할 핵심을 우리 모두 놓치고 있다.

이 사건은 간음한 여인을 잡아 온 군중을 향해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말하자, 모두가 죄를 짓지 않은 적이 없기에 다들 슬금슬금 물러가 버리고 난 후 그 여인을 예수님이 용서해준 것이 전부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모든 사람이 물러간 부분에만 주목하여, '그렇지.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 없지.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처럼 서로 용서하고 관용해야지.' 정도의 이해로 그친다.

이 사건에서 정작 주목해볼 예수님의 말씀은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요 8:10)이다. 이 군중들은 사실은 여자를 정죄하러 오지 않았다. 여자가 돌로 쳐죽임을 당해 마땅한 죄인이라는 데는 따로 재판해 볼 것도 없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여자를 정죄하려면 율법대로 현장에서 돌로 쳐죽이면 된다. 이 여자를 핑계삼아 예수님을 시험하러 왔다. 예수님에게 일부러 끌고 오고 사람들이 무슨 큰 구경거리나 되는 양 따라온 것은 예수가 율법대로 돌로 쳐죽이라고 하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한 평소의 가르침에 모순되고, 그렇다고 그냥 용서해주라고 하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한 것이 되니까 어떡하든 예수님을 올무에 걸어보려는 심보였다.

군중들은 이 사건을 예수님이 여인을 용서하는가 아닌가 시험해보는 절호의 찬스로 이용하려 들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군중들이 여인을 용서하는가 아닌가를 시험하는 기회로 삼으셨다. 예수님 쪽으로 넘어 온 공을 군중 쪽으로 절묘하게 되돌려 넘긴 것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먼저 치라"는 말은 다른 말로 바꾸면 군중의 윤리 도덕적 죄만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먼저 사랑을 한 번 실천 해보라"는 것이며 더 나아가 "너희가 말로는 서로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자 하면서도 실제로 온전한 자비를 베푼 적이 있더냐? 정말 사랑할 수 있었다면 이 여인을 나에게까지 데리고 올 이유가 없지 않느냐? 너희의 문제는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혹은 사랑을 해야 하느냐 안 해야 하는데 있지 않고 어느 누구도 율법도 지킬 능력이 없으며 어느 누구도 온전히 자비를 베풀 능력이 없다는 데 있다."라는 말씀을 한 마디로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단순히 예수님에게 걸려든 시험을 잘 벗어난 것으로만 이해하는데 그런 정도의 시험은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올무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했을 때에 아무도 돌로 치지 못하고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실제는 어른에 대비하여 어린이를 말함)까지 다 물러감으로 스스로 죄 있음을 인정했다.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려 덤벼든 사람들이 전부 도리어 정죄받은 꼴이며 현행범으로 잡혀 왔던 여인만 용서를 받은 셈이다. 바로 여기에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진수가 숨겨져 있다. 이 여인은 누가 봐도 피고석에 선 결정적인 범인으로 용서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형벌을 받는가 하는 문제만 남았다. 그럼에도 형별의 감면이 아니라 완전한 용서를 받을 수 있었던 오직 한 가지 이유는 그녀가 예수님 앞에 끝까지 남아 있었던 것뿐이다. 돌로 쳐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심판에서 구원받음에 자기가 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오직 수치와 두려움에 떨며 세상에서는 랍비라고 하고 본인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 청년 앞에 문자 그대로 벌거벗은 몸과 영혼을 안고 엎드려 있었던 것뿐이다. 대신에 스스로 의인이라 자처하며 죄인을 돌로 치는 형벌을 가하려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 곁에서 떠남으로써 정죄를 받은 것이다.

예수님이 이 사건에서 보여준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은 자비를 베풀어 서로 용서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본을 보이기 이전에 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할 능력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른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무리 7이나 70이라는 숫자에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지만 인간이 그럴 수 있다는 전제를 한 것이겠는가, 그런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둔 말씀이겠는가, 아니면 단순하게 과장한 것뿐인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도달하는 인간의 의는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아무리 불가능해도 노력조차 하지 말라는 말씀도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 기준에 합격할 자 아무도 없으니 모든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그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사랑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것만이 산상수훈의 주제인 천국을 소유하는 길이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은 다람쥐 쳇바퀴에서 우리를 꺼내 놓으려 쳇바퀴의 주인으로 온 것이다.

그러나 모든 다람쥐를 전부 다 쳇바퀴에서 꺼내 놓았던 것은 아니다. 무조건 관용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쳇바퀴를 돌도록 놓아 둔 사람들이 있는데, 단순히 도덕적·종교적·사회적 위선자나, 관용을 못하는 자나, 기득권층이 아니라 스스로 쳇바퀴에서도 얼마든지 먹이를 따먹을 수 있다고 고집한 자들이다. 쳇바퀴에서 나오길 거절한 다람쥐는 억지로 꺼내지 않았다. 사람들을 인륜적¡¤A±¸®Au¡¤A¾±³Au ±aAØA¸·I ±¸ºÐCN °IAI ¾Æ´I¶o, 간음한 여인의 사건에서처럼 스스로 예수님 곁을 떠난 자는 구태여 붙들지 않았다.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 같은 세상적 의인도 종교나 도덕적인 결함으로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남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해 스스로 떠난 것이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그렇게 혹독하게 비난을 당한 이유도 스스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서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끝까지 고집한 까닭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구별했다. 그 구별의 기준은 오직 스스로 이웃을 사랑할 능력이 없음을 자인하는가 아닌가에 있었다. 단순하게 사회적으로 불쌍한 사람들을 온정으로 대한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임을 인정하고 보니 자신이 다람쥐 쳇바퀴의 덫에 걸려 자신의 힘으로는 그 쳇바퀴에서 나올 수 없음을 알게 된 자를 꺼내주신 것이다.

자비와 관용은 말로는 이보다 더 좋은 말이 없다. 분명히 전 인류가 추구해야 할 목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그것을 실천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에 묶여 있는 우리 영혼이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음을 자인해야 한다. 이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고는 절대로 자비와 관용을 실천하지 못한다.

최근 하나님을 여성화 시키고 모성애적인 사랑, 즉 무한한 자비와 관용만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사조가 생겼다. 하나님의 자비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무한한 자비라고 죄 문제를 선결하지 않고 무조건 받아주는 것이 아니다. 마치 개구쟁이 아들이 무조건 받아주는 엄마를 찾는 이유가 자기 잘못에 대한 벌을 받기 싫어서이지, 엄마의 사랑으로 자기가 변화받겠다는 뜻이 아닌 것과 같다. 정작 그럴 마음이 있는 자는 먼저 아빠 앞에 가서 무릎을 꿇는다.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란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생자를 죽이는 형벌로 대신하여 용서해주셨기에 무한한 자비라는 것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무조건 응석만 받아주는 엄마 같은 자비란 뜻이 아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자격조차 없는 죄인을 대신한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기에 무한한 자비가 되는 것이지 그것 없이는 절대 자비가 아니다. 밖에서 실컷 장난치고 놀다 들어온 아이가 손발도 씻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바로 침대에 가서 눕겠다는 것이 제대로 된 아이인가? 또 그것을 가만 두고 보는 엄마를 자비한 엄마라 할 수 있는가? 쳇바퀴에서 나오는 것이 귀찮아서 안 나오겠다 고집하거나, 얼마든지 먹이를 따먹을 수 있으니 상관하지 말라거나, 문제는 쳇바퀴가 아니라 자기 노력이 부족한 것이라든가, 쳇바퀴에 갇혀 있다는 것도 모르는 다람쥐를 그대로 두는 엄마 다람쥐는 과연 자비한 다람쥐인가?

기독교가 교회의 담을 쌓고 종교간의 장벽을 높이는 것이 아니다. 절대 어떤 우월성을 증명하거나, 종교간의 경쟁을 유발하거나, 교세를 확장하거나, 우리 교리만 옳다는 것이 아니다. 자비와 관용을 실천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사람들을 교리로 차별하는 것도 아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쳇바퀴가 없다거나 쳇바퀴에 걸렸어도 얼마든지 빠져 나올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기독교만은 유일하게 쳇바퀴에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그 차이뿐이다. 인간에게 사랑할 능력이 없다고 하니까 다른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배척당하게 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바로 그 이유다. 또 그런 값비싼 대가를 치렀는데도 아직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다석(Oya´) 류영모(׳cμU¼) 선생의 예수님

일반인들이 볼 때 기독교는 너무 배타적이라 기독교인들만을 위한 종교 같아 보인다. 기독교는 모든 인류를 위한 종교이다. 모든 인간이 쳇바퀴에 걸려 있다는 것이 그 출발이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목표이다. 예수님의 선포도 바로 그것이다. 누구든지 무거운 짐진 자는 다 오라고 했다. 그 대상에 일절 제한이 없었다. 한 가지 조건을 빼고는 말이다. 자기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자라는 조건이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그렇지 않은 자가 있으랴? 그런데 문제는 그 짐이 무겁지 않다거나 자기 힘으로 얼마든지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연히 예수께로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다시 다람쥐 쳇바퀴 이야기로 되돌아가자면, 만약에 주인이 쳇바퀴에서 꺼내 줘서 빠져 나온 다람쥐가 여전히 쳇바퀴 속에서 헤매고 있는 다람쥐를 볼 때 어떻게 하겠는가? "조금만 힘을 더 내야 해. 네가 노력하는 것도 가치가 있어. 나는 어떤 사람이 꺼내 주어서 이렇게 나와서 먹이를 먹고 있지만, 네가 너 노력으로 쳇바퀴 속에 달려 있는 먹이를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네 생각도 맞을 거야. 네도 네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나도 내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니 서로 간섭할 수 없지 않겠니. 서로 관용하고 자비를 베풀어야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욕을 들어먹더라도 "그 쳇바퀴 속에 있어서는 아무리 바퀴를 돌려도 우리 힘으로는 절대 먹이를 먹을 수 없어. 누군가 밖에서 우리를 꺼내 주고 먹이를 따로 주어야 돼. 지금 자네가 하는 일로는 할 수 없으니 제발 내 말을 좀 들어." 하고 따라다니면서 전하지 않겠는가? 과연 이 둘 중에 어느 쪽이 자비와 관용인가?

예수님은 밖에서 꺼내 준 사람이다. 그 안에서 자기 힘으로 먹이를 따낸 위대하고도 능력이 출중한 성자·스승·위인·종교의 창시자 다람쥐가 아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부르는 진정한 의미는 다람쥐 쳇바퀴에서 꺼내 준 분, 정확하게는 사탄이 쳐놓은 쳇바퀴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완전히 그 사슬을 끊어주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고백은 쳇바퀴 밖에 나와 본 자만이 할 수 있지, 쳇바퀴 속에 있는 자는 아무도 그런 고백을 할 수 없다. 다석 유영모 선생이 예수가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린 것을 믿으면 영생한다는 것은 자기와 상관이 없고, 예수의 가르침과 교회의 가르침이 다르다고 오해를 할 법도 한 것은 그는 쳇바퀴에서 빠져 나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 피 흘림으로 우리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의 교리만큼 사람들 사이에 논쟁을 많이 불러일으킨 것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논쟁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인데 이해가 안 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것을 억지로 이해시키려 하거나, 설명이 미흡하거나, 듣는 사람의 자질이 모자라는 것이다. 교리·전도자·피전도자 셋 중에 반드시 그 책임이 있다.

성경은 예수 십자가의 복음이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이유를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고후 4:4)이라고 했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고 하여, 비록 피전도자 고유의 책임은 아니지만 복음을 듣는 자에게 성령이 아직 간섭을 하지 않았거나, 사탄이 피전도자를 미혹케 했기 때문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피전도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히 작용하지 않았기에 사탄의 멍에가 완전히 벗겨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사실을 믿기만 하십시오."라고 하면, 어느 누구라도 납득하기 어렵다. 이 말씀이 이해되기 위해선 '세상 어느 누구도 선행으로 하나님의 의를 충족할 만큼 완전한 의에 이를 수 없다'는 전제에 동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죄와 2천 년 전에 죽은 로마의 한 청년 사형수와 무슨 연관이 있기에 꼭 예수를 믿어야 하느냐? 죄를 씻고 회개하는 데도 각자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하는 여러 방안이 있지 않느냐?'라는 반발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는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를 자기 자신의 관념으로나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한 데서 생기는 오해다.

구원이란 인간이 반드시 건짐을 받아야 할 어떤 죄에서 사함을 받는 것이지 어떤 특정 종교를 믿어 사후에 천국 가는 것은 나중 문제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 가려면 죄를 지고 갈 수 없으므로 당연히 죄 사함을 먼저 받아야 한다. 구원이란 하나의 사건 전체를 볼 때 죄 사함이 우선이고 천국 가는 것은 그 결과다.

따라서 정작 따져야 할 것은 우리가 건짐을 받아야 할 그 죄의 본질이다. 술 먹고 도박하고 살인하고 간음하며 마음속으로 시기 질투하고 음란한 생각과 원한을 품는 그런 것들이 죄인가? 그래서 그런 죄를 회개하고 또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선행을 해야 그 죄에서 건짐을 받는 것인가? 이것이 죄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으며 예수를 믿을 수 없다. 예수의 가르침을 쫓아 자기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고치고 더 선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에만 신경을 쏟으면 되지,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것과 자신과는 아무런 연관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야 더 이상 진척이 되지 않는다. 우리와 혈육으로는 똑같지만 좀더 깊이 깨우친 한 사람의 스승 예수뿐이다. 교회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이 달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 죄들은 영어로 치면 범죄(crime)로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죄(sin) 자체는 아니다. 그렇다고 기독교에서 죄를 행동의 죄와 생각의 죄로 구분해 생각으로 짓는 죄를 더 중요하게 취급하는 것도 아니다. 생각도 우리가 사고 활동이라고 부르듯이 겉으로 드러나고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뿐이지 일종의 행동이다. 그것 역시 범죄(Uonª)다. 기독교에서 죄(nª)란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르게 만드는 인간 속의 근본 원인 내지 잘못된 경향(IEu¾)을 죄라고 한다. 인간 속의 죄가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하게 하며 범죄 자체는 죄의 결과다.

죄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는 것이다. 좀더 풀어 설명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기대하듯이 그렇게 선하지만은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내 생각만큼 선하지 않으니까 내가 다른 데서 더 선한 것을 찾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 죄이고, 그 결심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범죄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을 하나님이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위반하니까 죄인이라 선고하고 낙원에서 쫓아내었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해석하면 안 된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법을 어긴 범죄는 아담이 갖고 있던 근본적 죄의 결과이며 하나님은 그 죄를 심판한 것이지 범죄 자체가 심판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다. 아담이 그 금령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주실 줄 알았는데 왜 가장 맛있어 보이는 저 과일만은 못 먹게 할까? 하나님이 나를 완전히 사랑하시는 것은 아닌가 보다.'라는 결론을 내려 그 열매를 따먹었으며, 그 이후로는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내 생각대로 해주지 않으니까 자기 삶을 자기가 좋아 보이는 대로 자기 뜻대로 하기 위해, 자기 인생에서 하나님을 배제해 버리고 오직 자기 통제아래 두겠다는 의지의 결단을 한 것이 죄의 본질이다. 술·담배·도박·마약·간음·거짓말·도둑·폭력·살인…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형태의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상관없이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고집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럼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더 이상 범죄를 안 지어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저질렀던 모든 범죄를 회개하고 선행만 해야 하는가? 각 종교에서 정한 율법의 계명대로 지켜야 하는가? 혹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해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안 믿어지지만 억지로 믿는 척해야 하는가? 아니다. 하나님이 선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 죄이므로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생각을 바꿔먹고 그것이 삶의 기준이 되면 된다. 하나님이 어느 정도는 선하다, 선할 것이다, 선하다고 생각하기로 하자, 선하다고 하니까 그렇게 믿어보자 등으로는 되지 않는다. 인간 쪽에선 정말 완전하게 선하심을 확실하게 믿어야 하며 하나님 쪽에선 그 완전한 사랑을 인간에게 보여줘 인간으로 믿어지게 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다 어느 쪽에 원인이 있었든지 간에 사랑하지 않나 보다고 오해하여 헤어진 연인들은, 서로의 사랑이 여전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 재결합이 가능해지는 것과 같다.

성경의 수많은 구절 중에 기독교를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을 고르라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이다. 그런데 문제는 "저를 믿는 자마다"를 지금껏 기독교에서 '저'를 단순하게 '예수나 그의 십자가의 교리를 믿으면' 정도로 불신자들에게 설명하고 제시해 왔다. 즉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종교적인 사상 내지 관념에 대해 불신자들이 이해하여 동의한 후 선택하고 믿어 주기를 요구했다. 그러니 피전도자로선 이해도 안 되고 왜 예수만 옳다고 하느냐고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저를'은 문장 구조상 예수를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을 수식한다.) NKJV나 NASV 역본에는 이런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begotten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이라고 대문자 Him으로 표기해 문장 구조상 성부 하나님임을 분명하게 적시해 놓았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예수를 믿는 자마다'라고 할 때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독생자를 죽이실 만큼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자마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말은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의 내용이 함축되어진 표현인데 풀어서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심히 좋았다고 할 만큼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인간과 교제하며 인간의 찬양을 받기를 기뻐하셨다. 하나님은 이 지구의 모든 것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 뜻대로 인간이 다스리기를 원하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에게 심어 주셨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중에 인간을 가장 사랑하셨고 다른 모든 피조물을 인간을 위해 지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도 자기가 인간을 사랑하는 만큼 자신을 사랑해주길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인간이 원해서 자기를 사랑하기를 원했지 아무리 당신이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마련해 주었지만 강요당한 사랑을 받기는 원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자유의지를 주시고 자신을 자발적으로 사랑해주길 원하는 뜻에서 선악과를 주었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것을 다 주고 오직 단 하나 자기의 사랑만은 잊지 말라는 뜻으로 준 선악과의 금령을, 하나님이 자기를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 줄 알고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마음에 드는 대로 자기 인생을 통제하기를 원해 스스로 그 길로 가버렸다. 한번 돌아선 인간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선 자신이 창조 당시와 하나 변함없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을 직접 확인시켜 주어야만 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고 죽이시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도 인간이 아직 죄 중에 있어 하나님과 원수일 때에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일방적으로 다시 한번 창조 때와 같은 사랑을 베푸셨다. 이제 그런 하나님을, 그런 사실을 믿는 자마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내용이며 그것을 요한복음 3:16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 뜻에서 마르틴 루터가 이 구절을 작은 성경(the little Bible)이라고 불렀다.

 

죄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인간의 생각에서 출발했으니까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므로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다'고 생각을 바꾸어야 죄가 씻어질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나님은 인간의 그 생각을 바꾸게 하는 방법으로 당신이 인간의 몸으로 와서 십자가에 죽는 모습으로 보여주었다. 비유하자면 상대의 사랑을 오해하여 토라진 연인에게 오해를 당한 연인이 찾아와 사랑한다는 말이나, 선물이나, 행동으로 아무리 보여주어도 안 믿으면, '그럼 내가 당신을 대신해서 죽는다면 그래도 내 사랑을 계속 오해하고 받아 들이지 않겠습니까?'라는 뜻이 십자가이다. 바로 이 뜻에서 십자가의 예수가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며, 또 그 원리를 예수님 당신의 입으로 설명한 것이 복음서의 기록이다.

그런데 문제는 2천 년 전에 한 번 있었던 사건을 후대의 사람들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믿게 할 재간이 없다. 또 예수님 당시 사람들마저 직접 십자가 사건을 보고도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죽으셨다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범죄를 한 상태에 있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생각만큼 인간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구세주라면 로마제국의 지배를 끝내고 유대 왕국을 솔로몬 시대의 영광으로 되돌려 주어야 할 것이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도수장에 끌려가듯 아무 말 없이 십자가에서 죽는 구세주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가 옳다고 판단한 후 고착된 인간의 생각을 인간 스스로는 절대 쉽게 바꾸지 못한다. 태어난 모습 그대로의 자연인 상태의 인간은 누구나 죄의 종이고 사탄의 노예였다. 악한 짓만 골라 하고 귀신이 들어 괴상야릇한 짓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부인·외면·저주의 생각을 바꾸지 못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으로선 인간의 이 생각을 바꿀 특별한 방법을 또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어 인간의 영혼을 거듭나게 했다. 거듭남은 말 그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으로 창조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영혼을 만드신 분만이 새롭게 영혼을 거듭나게 할 수 있다. 인간 스스로 육신적인 죄를 회개하고 영적으로 깊은 경지에 들어가며 자기 속에 있는 선한 것을 더 키우며 깨우침이 늘어나는 것은 거듭남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은 그렇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너 스스로 깨우치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너 스스로 깨우쳐서는 영생을 절대 못 얻는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항복하라고 한 그 외침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것을 말리는 자는, 설사 하나님이라도 싫어하는 인간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거듭남이란 하나님이 별로 선하지 않더라는 생각에서 어떤 경우에도 선하시고 인간을 죽기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제는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내가 깨우치고 내 인생을 내가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기로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혼자 기도하고 명상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종교근본주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죽이시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모든 것을 바치고 의지하고, 그분의 인도와 섭리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여 아무리 작은 일에서라도 절대자에게 순종하라는 것이다. 이전에는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뿐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문제까지 인간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해주시고 찾아와 주셔야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인간의 깨우침이 아무리 인격적·도덕적·종교적, 심지어 영적인 깊은 체험에 들어갔고 본인이 그로 인해 이전의 자기보다 훨씬 더 나아졌다 할지라도, 여전히 자기가 깨달은 것이라면 그래서 예수는 스승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거듭남도 깨우침도 아니다. 예수의 구원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으로 본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문제마저 자기가 통제하려 든 것이다. 인간의 부패된 영으로는 예수는 깨우침을 도와주는 스승이나 영적 순례의 친구로밖에 보지 못한다. 그것은 쳇바퀴 속의 깨우침이다. 쳇바퀴 안에서 깨닫는 깨우침은 아무리 그것이 그럴듯해 보여도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쳇바퀴 안의 다람쥐가 쳇바퀴의 회전 수를 좀더 빠르게 혹은 느리게 하거나, 쳇바퀴의 간격을 늘리고 줄이거나, 보폭을 넓게 혹은 좁게 하는 정도의 의미밖에 못 가진다. 간혹 바퀴의 속도에 쉽게 잘 적응하거나 보폭이나 스피드에 자신을 가지는 다람쥐도 있어 곧 먹이가 입에 닿을 듯하니까 그런 대책들이 그럴듯해 보이는 것뿐이다. 쳇바퀴 속의 다람쥐는 절대 먹이를 먹지 못한다.

 

함석헌 선생님과 간디옹과 틱냩한 스님의 예수님

1.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가 사람의 죄를 대신 씻어 준다는 정통교리가 이해가 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은 그들의 사상과 철학과 통찰이 어떠한 경지에 이르렀던 그 출발은 동일하다. 자기 길은 자기가 선택하므로 책임도 자기가 져야 한다는 것이다. 죄도 자기가 책임져야 하며, 구원도 자기의 깨우침으로 얻는 것이며, 하나님과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이해도 자기가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교리는 사람이 깨달아 자기 책임하에 선택할 수 있는 구원의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로 제시된 것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이 우리 기대만큼 선하지 않더라는 생각을 바꾸어 언제나 영원토록 선하신 분이라고 고쳐먹지 않으면 절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지 기독교 복음의 교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나중 문제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은 이 순서를 거꾸로 하고 있다. 십자가의 교리가 이해가 안 되니까 예수님에 대한 생각도 바꾸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함석헌 선생의 경우다. 대속의 교리가 이해가 안 가는 까닭은 그분의 지성과 사상의 수준이 낮아서가 절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의 잘못을 자기가 책임져야겠다는 선한 생각 때문에 남이 자기를 위해 대신 죽는다는 것이 자기의 그 선한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역사적 예수도 부인하고, 성경 속의 예수마저 믿고 싶지 않으며, 심지어 자연인 예수야 있었거나 없었거나 역사 위에 환하게 서 있는 그리스도 예수라는 인격을 믿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의 선한 삶과 그에 따른 바른 가르침만 받아들이겠으며 십자가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예수 본인이 실제 누구인가는 자기에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본인 스스로 '실제로 있었던 자연인 없이 그리스도 예수는 없겠지만'이라고 인정했듯이 궤변중의 궤변이다. 예수의 모든 가르침과 삶과 십자가의 죽음마저 성경의 4복음서의 기록에 나타난 역사적 예수에서 출발한 것이지, 어느 날 갑자기 예수의 네 제자가 지어낸 것이나 복음서 없이 함 선생 개인이 깨닫거나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만약에 함 선생의 논리대로라면 예수를 논하거나 믿는다고 할 것이 아니라 나는 누가나 마태의 사상을 지지한다고 해야만 말이 맞다.

그러나 이런 식의 논쟁은 사실은 예수를 알고 믿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함 선생이든, 유영모씨든 나는 누가 뭐래도 내 나름대로 예수를 이해하고 따르고 그대로 살기로 노력한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십자가의 교리를 믿는다는 것의 핵심은 하나님이 직접 인간 구원을 위해 인간의 역사와 삶 가운데 간섭하셔서, 그 영원하신 사랑을 십자가에 완전히 다 나타내었다는 것을 인정하느냐의 문제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성경은 하나의 사상서요 철학서요 종교 교리로 전락하고 만다. 종교의 교리로서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한 자가 오히려 교리적인 예수만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영원하신 그리스도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언제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가르침을 주시는 예수님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선한 도덕적 가르침은 예수가 아니라 어린아이가 해도 바른말은 영원한 바른말이 될 수 있다.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하기에 예수가 영원한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사람이 인정하든 안하든 역사적 사건으로 그리스도 위에 완전히 드러났지만, 그 사랑이 인간의 실존적 체험이 되기 위해선 개인적인 인정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을 갈급하는 자만이 십자가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영원한 분이 된다. 모든 것을 자기 책임하에 해석하고 따르겠다는 사람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지금 이 이야기조차 쇠귀에 경 읽기겠지만….

 

2. 성경 특별히 신약성서를 읽을 때에 가장 많이 감명을 받은 부분이 어디인가를 비교해 보면,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눠진다. 산상수훈을 보고 가장 감명을 많이 받는 자가 그 한 부류이고, 다른 부류는 로마서·갈라디아서·히브리서 같은 서신서에 은혜를 받는 자가 다른 쪽에 해당된다. 예수님의 도덕적인 가르침을 따르려는 데 관심이 있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구원에 관심이 있는가의 차이이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인간의 죄를 가장 심도 있게 다루었고, 또 선하게 사는 삶을 가장 강도 높게 설파한 말씀인 것만은 분명하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지금껏 있어 왔던 어떤 선지자가 요구한 도덕수준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를 요구하고 있음을 본다. 형제를 바보라 욕을 해도 살인한 것이요, 예쁜 여자를 보고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어도 이미 간음한 것이요,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 뺨을 대어라 등등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들이다.

그러나 산상수훈이 아무리 죄를 예리하게 파헤치고 사람으로 하여금 거룩하게 살기를 요구한다고 해서 죄 자체에서 구원을 주시는 말씀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예수님은 심술궂게도(?) 인간이 실천 가능한 범위 내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기준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인간 세상의 도덕규범이 아닌 하늘나라의 기준을 인간에게 들이미신 것이다. 간단한 예로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가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 5:32)를 들 수 있다.

이는 현대인이 생각할 때에 말이 안되는 말이다. 이미 이혼한 여자와 결혼한 것은 간음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부란 하나님이 맺어준 언약의 기초 위에 서로의 영혼과 육신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 배우자의 것이자 하나님의 것이므로, 스스로 그 언약관계를 파기하는 음행 이외는 그 관계를 절대 깰 수 없다는 것이다. 음행을 하지 않고는 이혼을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설사 이혼증서를 주어 버렸다 할지라도 여전히 아내의 마음과 몸은 전 남편의 것이기에, 그 여자에게 장가가는 것은 그 여자로 하여금 하나님이 정해준 본남편 외의 다른 남자와 간음한 결과를 낳게 된다는 말이다.

산상수훈의 규범은 천국의 기준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산상수훈을 주신 예수님의 뜻은 너희들이 의롭다 선하다 하며 율법을 준수한 자신들의 공적으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자신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내 말을 듣고 판단해 보라는 뜻이다. 너희들의 눈이 실족케 하거든 그 눈을 빼고 천국에 들어갈 만큼 의로운가? 문자적으로 눈을 빼라는 의미가 아니다. 한쪽 눈이 없어질지라도 천국을 사모하는가? 눈을 빼지 않는 한 온전한 의를 실천할 자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한가? 천국은 오직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다.

산상수훈에는 구원의 길이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고 숨겨져 있다. 인간의 도덕적 실행만으로 절대 천국에 갈 수 없음을 일깨워 주는 말씀이다. 인간 스스로의 책임으로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산상수훈이 이제껏 이런 정도까지 고차원의 요구가 없었으니까 가장 감동적일 수밖에 없음이 당연하다. 적어도 나같이 인격적·도덕적으로 고상한 사람에게나 적합한 말씀이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음 내지 교만일 뿐이다. 그러나 십자가는 이해를 하지 못한다.

간디는 아무리 자기 민족을 위해 훌륭한 업적을 남기고 또 인류 사상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할지라도 제3자가 확인할 길은 없지만, 만약에 그가 성령의 거듭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님과는 무관한 사람이다. 또 자신은 예수님과 닮은 사랑을 어느 정도 실천했을지는 몰라도, 그 본인이 하나님의 참사랑을 받았다고는 국외자가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이 아무 저항 없이 십자가를 지고 모든 희생을 감수하며 인간을 사랑했다고 해서 기독교가 단순하게 무저항주의를 가르친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엄밀히 따져서 무저항주의란 그 속에 가장 강력한 저항의 비수를 숨기고 있다. 무저항이란 모든 저항의 방법이 실패했을 때에 최후에 최강의 방법으로 동원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자기 뜻을 관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밥 굶고 말 한마디 안 하면 그것을 이겨내는 부모는 없다. 무엇이든 안되면 되게 하라는 군대에서조차 무저항으로 일관하면 고문관 취급하여 열외로 빼준다. 아무리 두들겨 패도 군말 없이 마음대로 때려 보라고 또 고개를 들이미는 자는 무서워진다. 속된 말로 '너 죽고 나 죽자' 혹은 '너 죽고 나 살자'는 것이 무저항주의일 수 있다. 물론 세상에서 폭력을 동원하지 않고 스스로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며 정치적·사회적 목적을 달성한다는 면에선 다른 어떤 방법보다는 도덕적이라고 평가는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장난감을 꼭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어린 아이처럼 잘못된 목적을 위해서도 무저항주의는 얼마든지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동원될 수 있다.

예수님은 절대 단순한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가르친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 죽기만 한 것이 아니다. 부활하여 승리하시고 성령을 주셔서 우리 속에 새 생명을 창조하셨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하게 주셨다. 주여 저들이 자기들 하는 짓을 모르니 사하여 달라고 하시면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 누구든지 십자가 앞으로 나오라고 초대하셨다. 자기를 매단 유대인과 로마인도 포함해서 남종이든 여종이든, 자유자든 노예든 상관하지 않으셨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자기를 향해 돌을 던지고 자기 혼자만 그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셨다. 제자들마저 그에게서 흩어졌고 심지어 가족마저 그를 외면했다. 동정녀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마리아와 감상에 젖은 불쌍한 몇 여인을 빼고는 그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 세상은 그를 버렸지만 그는 세상과 죄악과 사탄 앞에 혈혈단신으로 맞섰다.

간디가 아무리 선한 의도로 무저항을 택했지만 그 뒤에는 거대한 인도 국민이 함께 편이 되어 동참하였고, 반드시 달성해야 할 인도 독립이라는 자기들만의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당시 인도가 영국에 비해 현실적으로 무력하고 다른 효과적인 수단이 없어 채택한 가장 효과적인 저항 수단이었다. 예수님은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새 창조주의를 실현한 것이다.

 

3. 기독교의 기도가 형태적으로 다른 종교의 그것과 다른 점은 앉거나 걸으면서 하는 명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절대자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감사와 경배와 도고와 간구가 기도이기 때문에 자연히 무릎 꿇고 엎드리는 형태가 된다. 물론 쉬지 말고 일하면서도 기도할 때나 며칠씩 작정기도를 할 때도 항상 무릎 꿇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기도자의 마음의 자세가 거룩하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항상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겸비하게 무릎 꿇은 채로 기도해야 한다는 뜻이다. 신자가 기도하는 그 순간, 하나님이 바로 앞에서 다 듣고 계시다는 확고한 의식하에 하기 때문에 몸의 자세와 상관없이 마음은 이미 무릎 꿇게 된다. 기도뿐 아니라 삶의 전 영역이 하나님의 임재 의식하에 무릎 꿇는 태도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기도는 구도(I´O³) 내지 강신(E½ae)의 절차가 별도로 필요 없고, 하나님에게 감사함으로 바로 자기 구하는 것을 아뢸 수 있다. 그러나 마칠 때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을 붙여야 한다. 이것은 어떤 기계적 주문(n±Uþ)이나 형식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게 된 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우리 죄를 사해주신 그 은혜 때문입니다."라는 고백이다. "십자가에 독생자를 죽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만을 의지하여 기도합니다."라는 뜻이다.

기독교인이 진정 그 마음에 파고드는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을 때는 하나님 앞에 완전히 무릎을 꿇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이런 기도를 할 때뿐이다. 정말 미약한 일개 피조물로서 가난한 심령으로 통회하며 기도할 때에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신자 속에 내주하신 성령을 통해 우리 영혼에 위로와 평강으로 채워 주신다. 신자가 좌선하거나 행선은 하면 할수록 자신의 더러운 본성과 정욕의 찌꺼기가 내 속에 아직 남아 있음을 알거나, 온갖 세상의 잡념과 세상 권세 잡은 자의 방해만 받을 뿐이지 평화를 누릴 수 없다.

틱냩한 스님이 예수님과 부처님이 한 형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디 까지나 본인의 해석일 뿐이다. 모든 종교인들이 예수를 각자의 실존적 정황에 따라 나름대로 특별한 의미를 찾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도 십자가를 부인하거나 경시할 수 없다. 비록 그렇게 하는 것마저 그 사람의 자유이긴 해도… 문제는 우리가 예수를 어떻게 보느냐에 있지 않고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에 있다. 예수님이 인간이 각자가 깨닫는 것 몇 가지만 고치면 쓸 만한 존재로 보셨는가 아니면 우리 모두를 소경으로 보셨는가이다. 뒤집어 말하면, 또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내가 내 문제를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십자가는 무용지물이다. 함석헌, 간디, 틱냩한 스님 모두 이 생각을 가졌다. 쳇바퀴 안에서 인생을 산 것이다. 쳇바퀴 밖을 한 번도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다. 사상의 폭이 좁거나 생각이 편협하다는 뜻이 아니라 평생을 자기가 자기 인생을 책임지겠다고 한 자들이라는 말이다. 어떤 종교적으로 풍성한 체험이나 깊은 사상적 깨달음을 하지 못했다는 뜻도 아니다.

그런 체험과 깨달음마저 자신의 노력과 능력과 선택과 책임하에 하였고 그 결과와 영향도 오직 자기 지정의로만 판단했다.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고 변화시키고 인도하고 간섭한 체험이 없었다. 매일 자신의 선한 의지와 품성을 가꾸는데 모든 노력을 쏟았지, 매순간을 정말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의 임재 아래 무릎 꿇고 엎드리며 살았다면 십자가의 예수를 모를 리 없다.

 

참다운 길벗 

지나간 교회사는 언제나 '인간인 스승 예수를 따르느냐' 아니면 '하나님이신 구세주 예수를 믿느냐'가 갈등하는 역사였다. 아무리 시대마다 새롭고 그럴싸한 신학 이론과 사조가 대두되어도 그 내용의 근본을 따지면 이 둘 중 하나로 귀결된다. 여기서 해묵은 이 논쟁을 재개할 의도는 없다. 단 사람들이 자칫 간과하는 아주 기본적인 문제 하나를 지적하고자 한다.

예수를 따르는 것만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했을 때는 그를 구세주로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구세주 예수를 믿을 때는 그를 따르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예수를 따르는 데 힘을 쓰는 자들이 예수를 길벗으로 모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이 예수를 길벗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자들만이 예수님을 참된 길벗으로 모실 수 있다.

어떤 설교자가 말하기를 성경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종교만이 존재한다고 했다. 기독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종교가 하나로 그들의 모토는 '하라(do)'는 것인 데 반해, 기독교의 복음은 하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었다(done)'는 것이다.) 이 동원 목사 저 '로마가 들어야 했던 복음'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인들의 신앙생활은 겉으로만 보면 전부 다 '길을 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하라'와 '이루었다'는 두 가지 입장의 차이가 그 길을 감의 태도 또한 두 가지로 나뉘게 한다. 더 나아가 불행하게도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면에서도 이 두 입장에 따라 두 가지 모습의 제자로 나뉜다. '하라'는 입장을 택한 자들은 자기들은 열심히 '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스스로 예수의 제자라고 믿고 있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제자의 의미와는 전혀 딴판이다.

이들은 자기 종교적 수행을 통해 깨우치고 도달하여 자기 생각과 행동의 자유를 얻고자 하는 도착점을 예수님이 달성했던 수준으로 잡고 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금식 후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을 받아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체험을 하였고, 궁극적인 실체와 대면하게 되었으므로 자기도 예수님과 같이 그런 체험을 하길 소원한다. 또 그렇게 되면 완전히 남을 위한 존재가 되어 예수님이 실천한 자비를 자기도 실천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어떤 사람이 나는 간디나 슈바이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소원하면, 그들의 일생을 기록한 전기·언행록 등 그들에 관한 모든 자료를 모아 연구·분석하고 그대로 따르려고 노력을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은 간디나 슈바이처를 글이나 자료로 표현된 상태로 만나며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자료이지 간디나 슈바이처 자신은 아니다. 이들의 실질적인 '길벗'은 위인전이지 간디 본인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간디 위인전이 내 길벗입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으므로, '나는 '간디'를 내 삶의 평생의 벗으로 삼고 그를 따르려고 하고 있습니다.'라고 한 것뿐이다.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되려고 소원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기의 '길벗'이라고 표현할 때는 바로 이 경우와 마찬가지다. 기록된 자료인 성경을 연구 분석하여 그대로 따르려고 노력하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오직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뿐이다. 예수님의 역할은 살아 역사하시는 영적 실체가 아니라 종이에 기록된 하나의 도덕적·종교적 매뉴얼에 불과하다.

'벗'이라고 말할 때는 내가 그를 두고 일방적으로 따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벗이 나를 찾아와 서로 대화하며 위로와 도전을 주고 어떤 때는 고쳐주고 위험과 시련도 막아주고 심지어 죄에 빠지려는 것을 건져주고 넘어졌을 때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야 한다. 매뉴얼을 보고 독학하여 마음속으로 내 스스로 깨우치고 결심하는 것으로는 '길벗'의 사이가 되지 못한다. 실제로 살아 있는 실체가 나를 찾아와 함께 동행해 주어야 한다. 성령 체험을 해 예수가 했던 극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 내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사실 성도가 길을 떠나는 출발점에 불과하다. 그래서 신자의 기도는 매일 궁극적인 실체와의 만남이고 그분의 통치를 받는 것이며, 매일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것을 본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본질적인 의미는 이와는 다르다.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이 땅을 다스릴 때에 부패했던 모든 피조세계마저 새롭게 변화한다는 종말론적인 의미지만, 오 박사의 책에서 궁극적 깨우침을 얻는다는 의미에서 사용했기에 이해하기 쉽게 그 표현을 그대로 전용한 것이다.

 

모든 개신교 교회는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가장 기본적인 자격 요건을 세례나 침례받는 것에 두는데, 일정한 종교적인 요식 행위나 절차로 요구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나에게 '모든 것이 이뤄졌다(done)'는 것을 확신하는지를 고백하게 하는 절차이다. 세례 절차 자체로 성령을 받거나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아 옛 사람이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체험을 한 자가 공개적으로 그 체험을 했음을 증거하는 절차다. 이제는 예수님을 길벗으로 삼아 평생을 그의 인도하심에 내 삶을 드리겠다고 교회와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절차이다. 이제 자신이 '길을 감'의 출발점에 섰으며 앞으로 가는 내 인생의 모든 길을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고는 걷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이제 막 신자가 되었음을 증거하는 세례나 침례가 예수를 스승으로 따르겠다는 사람들의 평생 길감의 종착점이다. 신자가 세례받는 것은 이미 이루어졌음을 체험하고 확신하기 때문이지 단순히 예수를 따라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다.

간혹 이런 체험의 확신 없이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이 있고 교회는 그런 확신여부를 세례 문답으로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지만, 세례받는 당사자가 확신이 있다고 착각을 하거나 아니면서도 그런 척하면 가려낼 재간은 없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신자가 거듭남이 없어도 장로가 되고 심지어 목사가 되고 교계의 지도자까지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도 '이루었다'는 체험과 확신이 없기 때문에 항상 '하라'는 것이 그들 신앙생활의 목표가 된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말썽은 오히려 '하라'를 목표로 삼아 열심히 선행을 하려는 그들에게서부터 발단되니까 참으로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 그들의 잘못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 인간 죄성의 본질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나를 거듭나게 해주시는 간섭이 없이도 내 스스로 얼마든지 선해질 수 있고 그래서 예수를 내가 따라야 할 스승으로 삼겠다는 그 생각이 죄다. 자기 스스로 선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교회 안에 자기보다 그런 노력을 덜하고 선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참고 봐주지 못한다. 교회 안에 분쟁이 생기는 가장 큰 원인은 누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서로 잘 해보자고 열심을 낸 것이다.

세례받는 것은 이제 예수를 스승(길벗)으로 삼아, 더 큰 노력을 경주하여 예수님의 경지에 까지 이르겠습니다라고 헌신하는 뜻이 아니다. 내가 걸어 왔던 길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내가 깨닫지 못했었는데, 어느 날 예수가 십자가에 피 흘린 모습으로 찾아와 그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 주셨기에 이제는 지금껏 걸어왔던 길을 더 이상 가지 않고 완전히 U-turn하여 새 길을 가겠습니다는 뜻이다. 이제 그 길을 감에 있어 예수님을 '길벗'으로 모시고자 합니다라고 헌신하는 것이다. 이때 예수는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길을 함께 걸어가 주는 동무다.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동행하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예수가 우리를 찾아와 동행해주겠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며 그것이 세례의 참의미다.

엠마오 길을 가던 제자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 성경말씀을 풀어주시니까 가슴이 뜨거워지듯이, 매일 아침 기도하며 성경을 볼 때에 예수의 영,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이 그 말씀을 풀어 줄 때에 신자의 가슴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뜨거워진다. 비로소 예수를 따르는 것만이 신자의 진정한 삶의 목표가 되는데, 도달해야 할 목표로서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내 손을 잡아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는 의미에서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끄심을 따라 그와 동행하게 되면, 도덕적·영적 성장도 그 결과로서 자연히 이뤄지게 된다. 그렇다고 무조건 '믿슙니다' 식으로 우리는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이 십자가를 타고 가는 것은 아니다. 신자가 매일 노력하고 책임질 부분은 '내가 깨닫고 노력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행'하는 그것이다. 오늘도 가난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왔으니 주님 내 손을 꼭 잡고 가달라는 간구를 뼈를 깎는 노력으로 해야 한다. 진정한 살아 있는 실체 예수님과 손잡고 함께 길을 가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가 된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갈 바를 모르고 떠났다는 것이 영적으로 미혹된 상태에서 분명한 깨우침을 얻기 위해 떠났다는 것이 아니다. 목적지가 없이 떠난 것이 아니다. 물론 현실 세계에서 거주할 장소는 애굽일지, 가나안일지, 하란 땅일지, 어디가 될지는 몰랐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본토·친척·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떠났으며,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실 것이라는 분명한 목적지를 바라보았고 이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을 따르는 삶으로 변화되었다.

지금까지는 본토·친척·아비 집이 자기의 삶을 책임져주고 지탱해주는 힘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오직 하나님이 자기 삶의 주인 됨을 확실히 믿고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을 책임졌던 과거의 삶에서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U-turn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스승으로 삼아 그분을 닮아가는 삶을 살고자 노력한 것이 아니라,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에 이미 하나님과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일대일의 인격적 관계에 들어선 것이다. 궁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후에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이 믿음의 출발이지, 믿음으로 궁극적인 변화에 도달할 것을 바라고 추구하는 것이 기독교 믿음의 출발이 아니다.

솔직히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우리 같은 범인은 평생을 노력해도 자신이 간디나 슈바이처 수준에라도 도달했다고 생각할 수 없는데 과연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정작 간디나 슈바이처 본인들도 그 생을 마쳤을 때, 과연 예수를 잘 따랐기에 궁극적인 득도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준이 되었을까?

예수를 따름에 있어 가장 실천적인 모범을 보였고 '예수에 대한 전기'를 쓴 신학자이기도 한 슈바이처의 치료를 직접 받았던 환자들이 그를 너무나 차갑고 사랑이 없었던 사람이라고 평가한 것은 도대체 왜 그럴까? 그의 인격이 모자라고 도덕성이 딸려서 그랬을까?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훌륭하고 고상한 인품을 지녔던 그다. 다른 이유가 없다. 그는 변화되려고 힘껏 노력만 했지 실제로 변화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감당하기 힘든 노력에 찌든 모습이 자기도 모르게 자기 인격과 도덕성과 영성에 상관없이 겉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그는 예수를 스승으로 따르려고 했지 자기 삶의 주인으로 그분의 손을 잡고 그분이 이끄는 대로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기 한 몸을 사리지 않고 죽기까지 헌신한 한 인간의 정신적 승리를 보여주는 인류사의 기념비적 상징이 절대 아니다. 그 반대다. 인간은 그 어느 누구도 스스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기념비적 상징이다.

 

 

출처 : http://www.nosuchjesu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