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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교훈/그런 예수는 없다-Parkshin

5. 지금 여기에서의 Mission

by 복음과삶 2009. 9. 10.
제목 없음

철수의 어린 시절

재동 초등학교에 다니는 철수가 자기 학교가 최고이고 다른 학교는 똥통인 줄만 믿었지만, 나중에 그 믿음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그 사실을 솔직히 실토했다가 자기 학교 아이들에게 혼이 날 수 있다. 우리 학교가 최고라는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해야지 잘못하면 죽도 밥도 되지 않지 않느냐고 우격다짐으로 야단만 맞을 수 있다.

철수의 제안은 분명히 자기 학교의 실력을 다른 학교와 비교해서 더 향상시키자는 건설적 제안이며, 다른 학교도 실력이 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줘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논리임에도 처음 이야기를 꺼낸 철수만 바보가 되었다. 그렇다고 학교를 그만둘 수 없어서 철수는 자기 의견에 동조하는 자에게는 다른 학교도 좋다고 이야기하고, 이것을 못 알아듣는 친구에게는 여전히 재동학교가 최고인 줄 고집하는 것을 더 이상 따지지 않기로 하고 대신에 자기 혼자 열심히 실력을 쌓기로 한다.

기독교의 배타성 내지 편협성을 비유하려고 든 예지만 잘못된 예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학교마다 전부 동일하고 실제 학생들의 평균수준도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교과내용에 학생 수준도 다른 학교와 큰 차이가 없음에도 학교측에서 자기 학교에 대한 애정을 강요하기 위해 그렇게 말했고, 또 그런 사실을 학생들이 무식해서 몰랐다면 철수는 분명 선각자이고 그의 행동은 당연히 권장되고 칭찬받아 마땅하다. 철수는 분명한 사실을 지적했기에 그를 잘못이라고 꾸짖는 학생들이 나쁘다.

그런데 만약 철수가 영재들만 다니는 초일류 사립학교에 다니면서 우리 학교가 최고라고 말한다면, 틀린 것 하나 없으며 또 그런 말을 듣는 자도 아무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예수가 진리라고 할 때에는 이 경우와도 다르다. 영재들만 다니는 초일류 초등학교라도 가르치는 교과 내용은 동일하고 학생 수준이 높고 교과 과정만 앞서 나간 것뿐이기 때문이다.

학과 성적은 별볼일이 없고 학생들도 깡패수준에 가깝지만 특수 직업을 지향하는 전문계 실업고등학교가 있다고 치자. 이 학교는 다른 학교와 상호 우월성이 비교되거나 비판받을 수 없다. 아예 배우는 것이 다르고 목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대학교 입시 과목의 성적과 상관없이 그 직업을 가지려면 누가 뭐래도 그 학교에 들어가야 한다. 그 학교를 다른 인문계 고등학교, 그것도 서울대 많이 들어가는 일류 고등학교와 비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또 그런 비교로 그 학교를 멸시한들 그 학교 학생은 눈도 꿈쩍 안하며 오히려 그렇게 비교하는 사람이 바보다. 기독교는 바로 그런 고등학교와 같고 다른 모든 종교는 일반 인문학교와 같다는 것이 그나마 정확한 비유다. 그런데 만약 실업 고등학교에 다니는 철수가, 이 학교는 왜 다른 학교처럼 서울대학에 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으며 다른 학교와 비교도 하지 않으려 드는가 하고 따질 수 없다. 그야말로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 없는 쓸쓸한 외침이다. 이때는 다른 학생이 잘못이 아니라 철수가 바보다.

다른 모든 종교는 인간이 깨우쳐서 하나님에게 나아가야 하고 그것도 죽고 난 후에 심판을 받아야 판별이 난다는 것인 데 반해, 기독교는 인간이 깨우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의 공로로 인한 성령의 간섭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서부터 이미 구원받은 존재로 변화시켜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절대자에 의한 타자 구원과 자기 노력에 의한 자기 구원인데 어떻게 같을 수 있는가? 직업 고등학교에서도 일반 교양과목을 가르치고 교복 입고 책가방 들고 같은 시간에 등하교 하니까 그 내용을 모르는 자가 볼 때 똑같은 고등학교로 보이지만, 실제 가르치는 내용과 졸업 후의 진로는 다른 것과 같다.

직업 고등학교는 들어가기만 하면 자기가 포기하지 않는 한 졸업만 하면 그 직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는데도 이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아니야, 전공과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상식과 교양이 먼저야. 그것이 없으면 절대 그 회사에서 우리를 채용해주지 않으니까 우리도 인문계 고등학교로 가든지 인문계 고등학교 식으로 개편해야 해.' 하고 우기는 것이 말이 되는가?

어떤 사람이 한 특정 종교를 갖게 되는 것이 분명히 출생지와 부모와 환경에 따라 자기 의지와 상관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다. 스페인에서 태어났으면 카톨릭, 독일에서는 루터교, 이스라엘에서는 유대교를 믿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커서 본인 스스로의 중생의 경험을 반드시 요구하며 그것을 하나님과 교회 앞에 고백하게 한다. 절대타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았음을 검증하는 절차를 거친다.

성인이 되고 난 후 본인 스스로의 고백을 요구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모든 것을 비교해 보고 결정하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신자더러 태어나면서 주위 여건상 기독교를 믿게 되었으니 끝까지 고집하라고 절대 요구하지 않는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했고 예수님은 유대인더러 너희가 그러고도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야단쳤다. 끝없는 족보와 허탄한 신화에도 착념하지 말라고 했다.

모든 종교가 대동소이(OÞOOa³i¶)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구태여 종교를 바꿀 필요도 없고 특정 종교를 권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특정 직업을 가지려는 생각을 가진 학생이 꼭 가야 할 직업 고등학교는 가지 않고, 일반 고등학교·대학교·대학원에 갈 것을 고집하는 것을 본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는가? 계속해서 그쪽은 아니니 제발 이 학교로 와야 된다고 도시락 싸 들고 따라다니면서 말리지 않겠는가?

바로 그 뜻으로 예수님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서 전도하라고 하셨다. 당시에도 이스라엘의 유대교, 로마의 황제 숭배 종교, 애굽의 태양 숭배, 헬라와 동방의 인본주의 사상 등 다른 종교들이 있었음을 예수님이 몰랐는가? 아니다. 예수님은 단 한번도 종교간의 관용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다. 대신에 예수님은 헬라인은 지혜를 유대인은 표적을 찾으나 당신은 하나님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했다. 지혜의 헬라 사상으로, 표적을 구하는 유대교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며 오직 십자가로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며, 그 사랑은 종교간의 관용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많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자의적인 선택보다 환경에 의해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한 종교를 가지게 되니까 더더욱 참하나님을 증거하고 십자가를 전도해야 한다. 이것은 차별주의 태도가 아니다. 각 지역별로 억지로 갖게 된 종교를 무조건 끝까지 고수해야 한다는 것이 차별 주의다.

 

어느 신학자의 선교관

종교 다원주의의 사회로 종교간의 대화를 강조하는 현대에서 정통 복음주의 개신교가 처한 위치는 애매한 정도가 아니라 참으로 날이 갈수록 고립되어 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타종교인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데 유독 개신교만은 이미 다른 종교를 갖고 있더라도 전도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간의 갈등을 촉발하는 원인을 항상 개신교가 제공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아직도 구시대적인 배타성과 편협성을 고집하고 있다고 비난을 받는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기독교가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는가, 타종교와 그 종교인들을 대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선교관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배타주의에서

타종교인들이 기독교인들의 자신들을 향한 염려와 사랑을 대할 때, 친구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 마치 의사가 환자에게 베푸는 그런 형태라는 느낌을 가질 때가 종종 있다. 또 전도를 받다 보면 기독교만이 빛이고 자기가 믿고 있는 종교는 어둠이라고 생각되어지기까지 한다. 이는 물론 기독교 전도자가 교리를 너무 단정적으로 제시하고 또 전하는 태도도 무 자르듯 하는 데서 오는 잘못이다. 자신은 영적으로 똑똑하고 수준이 높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교리를 알아차리는데, 너는 왜 이렇게 못 알아차리느냐는 식의 태도가 은연중에 배어 나오기도 한다. 전도 대상자로선 마치 자신이 아주 중병에 걸린 환자로 앞뒤를 전혀 분간 못하는 병신 취급을 받는 기분이 든다. 이는 전적으로 전도자의 잘못이다. 전도자 본인이 복음을 잘못 인식하여 믿음의 출발에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신앙을 갖는 종교인은 누구나 자신에게 무엇인가 문제가 있으므로 신앙으로 그 문제를 해결 받고자 믿음 생활을 시작한다. 사람들이 이런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인식하는 데 있어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자기는 약점과 허물이 많아 고칠 것이 많은 죄인으로 생각하는 입장과 나는 핸디캡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하나다. 약점이나 핸디캡이나 그게 그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면 노래실력이 없어 음치인 것은 약점이다. 그러나 가요학원 에 가서 한 달간만 연습하면 만족할 정도는 아닐지라도 그 약점은 얼마든지 개선할 수 있다. 또 노래 못 부르는 것이 망년회나 회식 장소에서 조금 불편할지언정 꼭 고통이 따르는 것은 아니다. 노래를 못 부르면 춤을 잘 추든지 조크를 잘하면 된다. 다른 장점이 그 약점을 커버할 수 있다. 이에 반해 핸디캡이란 자기가 갖고 있는 문제가 결정적·치명적이라 평생 동안 고통이 따르며, 나아질 가능성이 전무하며 그 문제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는 것을 말한다. 나면서 벙어리처럼 아무리 연습해도 노래는커녕 말도 할 수 없는 것은 핸디캡이다.

약점이란 평균 수준 미달이다. 사람이 갖추어야 할 외모·건강·학벌·집안·교양·재산 등등 각 항목을 10점 만점으로 할 때, 어떤 것은 2¡­3점, 어떤 것은 7¡­9점으로 평가할 수 있는데 5점 미만은 약점 그 이상은 강점이 된다. 그러나 핸디캡은 점수로 따지면 0.00001도 줄 수 없다. 시력을 수치로 따질 때는 일단 희미하게라도 보이는 것을 전제로 2.0 혹은 마이너스 2.0 식으로 따지지만, 장님에게는 마이너스 점수조차 줄 수 없다. 그것이 핸디캡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했을 때에 우리더러 너희는 약점과 허물이 많고 그래서 실수와 죄를 많이 지은 죄인이니 그 약점들을 고치고 죄를 씻어 착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니다. 너는 처음부터 소경이다. 너의 죄를 너 스스로 고쳐서 나아질 가능성이 전혀 없다. 인간의 도덕적·영적 상태가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어, 전 인격·전 존재가 핸디캡의 상태에 있다는 말이다.

성경에서 기독교 전도의 성격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고린도 전서 1장에 이런 말씀이 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8절). 알기 쉽게 말해 예수 믿는 자는 천국 가고 믿지 않는 자들은 지옥 간다는 뜻이다. 이것이 단순하게 기독교라는 종교를 선택하지 않고 그 복음을 교리적으로 믿지 않은 것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괘씸해서 지옥 보내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비와 긍휼로 대한 것이다. 우리를 핸디캡으로 보신 것이다. 아무리 실수와 실패가 많아도 핸디캡을 죽일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예수님이 대신 죽은 것이다.

내가 가진 약점 몇 개는 내가 고칠 수 있는데, 예수가 와서 왜 내 대신에 죽는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나와 아무 관련이 없는 예수를 죽여 놓고 그를 믿기만 하면 자신이 한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데도 구원해 준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어디 있는가?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자를 하나님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선택하지 않아 지옥 보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핸디캡을 아시고 당신이 우리를 고쳐 주시고 용서해주시고 구원해주시겠다는 그 긍휼을 거절하니까 평생가도 하나님의 긍휼을 못 받는 것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니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결과다. 불신자는 하나님이 자신을 핸디캡으로 보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 그 긍휼을 우습고 어리석게 본다. 언제까지 고집을 피우는가?

인간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여서 그 피를 흘리는 것을 눈앞에 보고도 고집을 피웠다. 오늘날도 자기 스스로 선해지고 그래서 착한 사람이 되어 천국 갈 자신이 있고 착한 사람만이 천국 가야 한다고 큰 소리 치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죽기 직전에 헐떡거리며 방금 숨이 넘어가는 그 순간에 가서야 '나 같은 자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하고 어쩔 수 없이 참회한다.

이런 고집을 피우는 자를 하나님이 억지로 믿게 할 수는 없다. 강제로라도 믿게 하려면 갑자기 암에 걸리게 해서 자신이 나을 수 있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치명적인 병에 걸렸다는 것을 인정하게 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그렇게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자연인 모두는 분명히 핸디캡이다. 그러나 누가 자신을 병신이라고 하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억지로 믿게 할 수도 없고 인간 스스로 고집을 피우니까 성령으로 간섭하여 믿게 할 수밖에 없다.

우리 심령 깊숙한 곳에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에 묶여 있는 영혼의 가장 컴컴하고 어둡고 부끄러운 그 구석에 한 줄기 예수님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면, 그때 비로소 인간들은 자기의 헛된 고집을 버리고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인정하고 자신이 핸디캡임을 고백하게 된다.

기독교에서 볼 때 타종교인이나 무신론자는 의사가 필요한 환자이고, 하나님의 긍휼의 빛이 아직 비춰지지 않은 암흑 속에 있음에 틀림없다. 의사와 빛은 예수님이지 기독교인 전도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도 가끔 자기는 예수님의 도움으로 약점 몇 개 고치면 되고 또 그렇게 고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는 대로 했더니 고쳐졌다고 착각하기에, 감히 자기들이 타종교인들의 의사 내지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된다고 나선다. 예수님이 자기들을 고쳐 주신 것을 모르는 자들이다. 자기들이 실력이 있는 줄 안다.

기독교가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했을 때에 종교적 우월성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약점 가진 죄인으로 보는가 아니면 치명적인 핸디캡으로 보는가의 차이다. 나면서 앉은뱅이인 사람이 계속해서 자신은 핸디캡이 아니라고 우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계속해서 걸으려다 쓰러지고 뛰려다 넘어지지 않겠는가?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이 "그래, 너도 네 나름대로 네 생각이 있고 네 훈련방식이 있을 테니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하자."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휠체어뿐이다. 죽기 살기로 예수 십자가라는 휠체어를 핸디캡에게 갖다 주려는 것이 배타주의라면,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고 핸디캡을 가만 두고 보는 것은 자비주의란 말인가?

예수님의 십자가 교리는 배타성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란 존재를 핸디캡으로 볼 것인가, 단순히 약점을 가진 것으로 판단할 것인가의 문제다. 타종교인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배타적이라고 욕할 것이 아니라 정작 공격해야 할 내용은 "그래 너희나 병신 노릇해라. 우리는 병신이 아니다. 왜 우리더러 병신이라고 하는가? 별 미친 놈들 다 봤네."라고 해야 한다. 실제로 타종교인들이 지금 그렇게 기독교인을 비난하고 있다. 또 그래야 정확한 지적이다. 기독교인들은 분명히 나면서 병신이었고 예수에 미친 자들이다. 예수 믿었다고 그 핸디캡이 기적적으로 온전한 정상인이 된 것이 아니다. 여전히 핸디캡인데 예수 십자가로 만들어진 휠체어를 매일 타고 다니는 병신일 뿐이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병신이 아직 휠체어가 필요 없다고 하는 자에게 휠체어를 소개해 주는 것이 전도이다.

닛터가 기독교의 선교가 마치 의사가 환자 대하듯 하더라고 느낀 것은, 분명히 많은 기독교인들의 전도의 내용과 형식상에 문제가 있었지만 전도를 받는 사람이 환자라는 뜻에서는 맞다.

불신자들에게 전도가 힘든 더 근본적인 원인은, 닛터처럼 그들이 자신과 이웃을 바라볼 때에 둘 다 공히 휠체어가 필요한 핸디캡으로 인식하지 않고 약점과 허물만 많은 사람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다원화 사회에서 기독교 선교관이 바로 서려면 다른 종교를 더 깊이 연구해서 타종교인을 더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들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을 더욱 벌거벗겨 참실체를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인간 세상은 약점투성이 죄인들이 모인 곳이 아니다. 아예 기지도 걷지도 못하는 병신들만 모인 곳이다.

 

다원주의로

세상에 많은 종교들이 있으며 각기 그 가르치는바 내용이 분명히 옳고 심오하며, 또 각 종교마다 비록 그것이 궁극적인 실재와의 만남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엄청난 신비스러움의 경지를 체험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일반인들은 생각하기 쉽다. 또 모든 종교들이 지향하는바 목적 중의 하나도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 당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와 아픔을 해결하는 데 있다.

그래서 모든 종교인들이 힘을 합해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하는 명제에는 어느 누구도 반대할 명분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기독교만은 예수 외에 구원이 없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를 금과옥조로 끝까지 붙들고 있다. 도대체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고집불통 늙은이보다 더한 것이 예수쟁이들이다.

어떤 문제가 생겨 그것을 해결하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문제가 생긴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가다가 서 버리면, 배터리가 나갔는지 엔진에 결함이 있는지 변속기가 부숴졌는지 살펴봐야 하는 것과 같다. 모든 종교인들이 인간 세상에 갈등과 죄악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어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절대명제에는 누구나 공감을 하고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단 한 사람의 반대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왜 완전히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가 하면 바로 이 원인을 진단함에 있어 각자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원인을 인간의 종교적 깨우침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숙명에 무조건 복종하지 못해서, 사회와 환경이 잘못되어서, 도덕적인 삶을 살지 못해서, 이웃에 자비를 베풀지 못해서, 사탄과 귀신이 인간 세상을 조종해서, 하나님의 실재를 만나지 못해서, 인간이 좀 더 서로 사랑하려고 노력을 하지 못해서, 신에게 제대로 된 희생제물을 바치지 못해서 등등 유사 이래로 수도 없는 원인들이 분석되어지고, 그에 따라 해결책이 제시 되었으며 그래서 많은 종교들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 제시된 원인들이 단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으며 그 제시된 해결책도 다 일리가 있었다. 비록 종교간에 서로 강조하는 부분이 조금씩 다르긴 해도 다른 종교의 생각도 함께 받아들이고 존경해주는 데 하등의 문제가 없었다. 다 인간이 잘되자고 하는데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기독교만은 오랜 갈등과 반목의 아팠던 세월을 통해 모든 종교인들이 이제 겨우 이룩한 합의(consensus)-종교 다원주의의 입장에 동참하지 않고 있다. 그것도 다른 종교인들이 기독교를 볼 때에 분명히 묵상과 절대자에 대한 순종과 해방신학과 성령체험과 이웃 사랑을 강조하고 있어, 자신들이 분석한 문제점과 제시한 해결책과 크게 다른 점이 없는데도 자기들만 옳다고 하니 말도 안 된다. 그럼 과연 그럴까? 정말 다른 종교로 '넘어가 봄(passing over)'과 '되돌아옴(coming back)'이 닛터에게 가능했던 것처럼, 기독교인들에게도 가능하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기독교는 인간 사회의 문제의 원인을 다른 모든 종교와 전혀 다르게 본다. 한 마디로 축약하면 이렇다.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되었고 그래서 세상에 많은 문제가 생겼다'라고 보는 것이 다른 모든 종교의 입장이다.

이에 반해 개신교는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문제가 생겼다'라는 것이다. 죄가 문제의 원인이라면 죄를 없애야 하고 죄인이 원인이라면 죄인을 바꾸어야 한다.

다른 모든 종교가 제시하는 원인들과 해결책들은 모두 죄에 관한 것이지 죄인 자체를 문제삼지 않는다. 참선으로 깨우침을 얻지 못하고, 절대자에게 순종을 못하고,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지 못하고, 못 가진 자를 핍박하고,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고, 사탄에 넘어가는 죄를 지어 죄인이 되었으므로 이제 그런 죄를 짓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 죄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지역별·시대별·인종별·문화별로 다양하니까 죄의 해결책인 종교도 자연히 다양해진다. 그러니 모든 종교를 다 인정하고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식으로 종교끼리 협력하면 더 빨리, 더 쉽게, 더 많이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한국인에게 맞는 단군교를 믿든지, 예수님을 한얼님으로 해석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전혀 다르다. 위에 열거된 죄들이 인류 문제의 원인으로 보지 않는다. 심지어 구원의 교리상으로는 그런 것들을 죄라고 여기지 않는다. 교리적 의미로만 하나님과 예수와 기독교를 믿지 않아, 하나님을 체험하지 않아,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아, 이웃을 사랑하지 않아, 윤리적 죄를 짓고도 회개를 하지 않아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전 존재가 문제였지 그 인간의 범하는 과실과 잘못이 문제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가 다르게 분석되었으니 해결책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것을 알기 쉽게 예수님은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고 설명했다. 이 말씀은 기존의 형식적이고 고형적인 종교 결례를 개혁하여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어도 된다는 식의 예수님의 '뒤집어엎는 지혜(subversive)'가 아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19, 20).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 죄를 짓는다는 뜻이다. 인간과 인간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점에 대한 하나님의 분석이다.

자동차로 따지자면 공장에서 출고할 때부터 엔진 자체에 결정적인 결함이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생각이 기독교라면, 바퀴가 평행을 이루지 않아, 과속을 하고 브레이크를 너무 자주 세게 밟아서, 엔진 오일을 제때 갈지 않아서 엔진에 무리가 갔다는 생각이 다른 모든 종교의 해석이다. 차를 새 차로 갈아야 한다는 사람과 수리해서라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의 차이다. 엔진 자체에 결함이 있는 차를 다른 부분을 보강을 한다고 해야 일시적인 효과만을 얻지 얼마 못 가 차는 완전히 서게 마련이다. 자동차가 좀 낡았지만 그래도 수리해서 충분히 새 차나 다름없이 된다면, 브레이크 전문점·타이어 전문점·튠업 전문점 등이 서로 협력하여서 고치면 된다.

이처럼 인간이 겪는 문제를 몇 가지만 수리하면 된다고 진단한 종교인들끼리는 분명히 협력할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새 차로 바꾸어야 한다고 보는 기독교인들로선 그 수리에 관심이 없고 시간과 비용의 낭비일 뿐 아니라, 결국은 또 실패한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협력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다. 협력하기 싫어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새 차로 바꾸려면 수리점에 가선 안 된다. 차를 만드는 공장에 가야 한다. 죄가 문제가 아니라 죄인 된 인간이 문제라면 인간을 만든 분만이 해결책을 갖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거듭나게 해주지 않고는 절대 인간이 갖고 있는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다. 종교끼리 화해하고 포용을 하는 것이 급한 문제가 아니다. 모든 인간이 서로 사랑 안 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어린이로부터 늙은이까지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고, 그 앞에 온전히 무릎 꿇고 항복하려는 자 하나 없는 죄인이라서 서로 사랑하지 못한다. 모든 종교가 하나님더러 죄인을 고쳐달라고 그분 앞에 겸손히 바쳐 드리지 않고, 정말 완악하고도 교만하게 스스로 진단한 몇 가지 죄를 뜯어 고치겠다고 덤빈다.

그럼에도 그 모든 종교인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이 맞고 타당해 보이는 이유는, 그 원인과 해결책이 분명히 인간이 눈으로 보고 지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손을 뻗치면 얼마든지 손에 넣을 것 같은 해결책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현상일 뿐이지 실제 존재하는 실체(Reality)가 아니다. 사물의 실체를 본다는 것이 엄청난 영적인 체험을 통해 무아(Uia²)의 경지에 들어가서 이 세상과는 동떨어진 어떤 신비로운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죄를 지어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 죄를 짓고 있구나를 아는 것이다. 죄를 지어 죄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서로 협력해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자고 할 수밖에 없다. 아직 실체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본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여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자고 할지라도 여전히 그들 또한 죄인으로 본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도 또한 똑 같은 죄인으로 본다.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지 않은 자 하나 없는 불쌍한 죄인이라고 본다. 기독교인들과 다른 종교인들과의 차이는 그럼 무엇인가?

하나님의 긍휼만이 인간의 살길이라고 알게 되어 그 긍휼만을 갈급해하는 죄인과 아직까지 인간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주장하는 죄인의 차이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차이가 분명하므로 배타주의와 포용주의와 다원주의 식으로 종교적 개념과 지식을 서로 넘나들며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없으며 기독교의 선교관이 변할 수 없고 변할 필요도 없다. 이 수리점, 저 수리점 기웃거릴 이유가 없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하신 말씀대로, 모든 인간이 어떤 땅 끝에 있을지라도 성령을 받아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만을 갈급해하는 길만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 기독교의 바른 선교관이다.

 

지구적 책임

구약성경에 의하면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이 무지개 언약을 통해 인간에게 약속한 것이 하나 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창 9:11). 심판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물로 하는 심판이 없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에 오면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고 예언이 되어 있어, 물의 심판 대신에 불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구체적인 모습과 시기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

최근 지구 온도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오존층이 파괴되므로 혹시 태양열에 의한 생태계가 멸망하는 모습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어쨌든 '생태계와 인간의 안녕'을 보존·증진하는 것은 종교인들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절실한 과제가 되었다. 정말 종교인들 간의 대화와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긴급하게 요청된다. 또 그 노력의 일환으로 1993년 시카고의 세계종교 박람회에서 세상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규정인 '지구윤리' 장정이 채택되기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공해와 환경오염이 이렇게 심각하게 되기 수천 년 전에 이미 성경은 지구윤리 장정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인간더러 절대 마음대로 자연을 훼손하라고 하지 않았다. 생육하고 번성하려면 당연히 환경이 부패되지 않아야 한다. 땅을 정복하라는 것이 제국주의 이념으로 서로 땅을 많이 차지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상태를 잘 연구하여 인간과 자연이 조화되도록 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자연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인데 그 일을 인간더러 대신하라고 위임하셨다. 그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것이다.

인간끼리 서로 정복하라는 언급은 없었다. '다스릴 대상'은 인간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이었고 그것들을 하나님이 주신 생육과 번성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다스리기 위해 '정복할 대상'은 '땅'이었다. 움직이는 생물은 다스려야 했고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땅은 정복해야 했다. 움직이는 상대를 정복해야 하고 움직이지 않는 땅은 다스려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우리의 통념과는 반대다.

땅을 정복하라는 그 정복의 의미도 침략해서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잘 개간하여 다른 생물도 생육하고 번성케 하도록 하라는 뜻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정복과 다스림의 관계는 전혀 없었다. 인간을 제외한 피조세계를 잘 다스리고 정복해야 하는 까닭은 오직 그것들이 생육하고 번성할 때에 인간끼리 다툴 필요 없이 서로 사랑하게 되며 인류와 지구의 안녕이 보존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류는 피조세계를 다스리고 정복하기 위해 이마에 땀 흘리는 수고가 싫어 훨씬 손쉬운 방법으로 자기의 안녕을 도모했다. 남이 이미 잘 다스리고 정복해 놓은 것을 무력으로 공짜로 가로채기로 한 것이다. 친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이 원조였고 그 후예들의 족보에 바로 그런 내용이 나온다.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요.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창 4:19, 23). 라멕이란 이름의 뜻이 '힘센 자'이고 '아내를 취하였다'는 말은 자기 욕심대로 남의 여자를 빼앗았고, 그래서 그 일을 방해하는 자들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성경은 놀랍게도 가인 계보의 죄악의 행적을 기술하면서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라는 말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뜻을 제외시킨 문화와 문명의 발달은 죄인 된 인간의 자기 안위적인 물질의 발달은 가져왔을지라도 근본적인 영혼의 안식을 가져오지 못했다. 자기 파괴적인 전쟁무기의 발달과 퇴폐적인 산업의 발달로 인간에게 위임된 아름다운 자연과 다른 피조물마저 함께 파괴되는 결과를 낳았다. 인간이 스스로 자연을 지배할 때에 생긴 필연적 결과다.

지구적 책임에 있어서 모든 인간과 종교 간에 의견이 있을 수 없으며 그 책임 또한 무한하다. 여기에 서로간의 배타성이나 편협성이 작용될 여지는 전혀 없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이미 지구윤리 장정을 채택해 놓았다. 모든 종교가 이 일을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새로운 장정이 사실은 구태여 필요 없다. 문제는 훨씬 다른 데 있다. 우리가 지구를 살려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또 노력을 안해, 말하자면 종교 간에 협력을 안해서 이런 지경에까지 온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인간의 죄성이 없어지지 않는 한 절대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인간의 죄성을 없애자면 그 영혼이 거듭나 참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그 하나님 앞에 완전히 순복 하는 길 외는 없다.

어떤 공동체든지 궁극적인 목표는 그 공동체의 안녕을 유지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이는 가정·친목회·학교·회사·교회·종교·나라·민족, 더 나아가 전 지구적 공동체 어디에도 해당된다. 그러나 예수를 모르는 일반인이나 다른 종교의 목표는 공동체의 안정과 유익을 보존하는 것만 전부인 양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 제시된 기독교 공동체의 목표는 다르다. 공동체의 성결과 거룩을 보존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인간끼리 협력하여 공동체의 안정과 유익을 이루자는 것과 하나님의 뜻과 간섭으로 그것을 이루자는 것의 차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거룩해지는 것만이 인류 공동체의 존속과 발전에 의미와 가치와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지, 그를 떠나서는 공동체가 아무리 겉으로 문제가 없고 안녕하고 발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사실은 발전이 아니라 거꾸로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다. 성경의 내용이 전부 그것이며 역사 또한 이를 증명하고 있다.

멀리는 바벨탑의 사건, 소돔과 고모라, 로마제국, 가깝게는 나치 독일, 공산주의 제국들 하나님을 부인한 곳에는 반드시 죄악이 넘쳤고 또 역사의 심판의 있었다. 이들 만큼 공동체의 안정과 유익이 역사상 완벽하게 보존된 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이들이 자연을 살리고 지구를 멸망시키려 애를 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공해를 조장했기에 지구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공해가 발생하든 말든 내 속만 먼저 채우자는 욕심과 죄가 망하게 한다. 인간의 부패된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은 것이다. 자기 영역과 소유를 지키려는 싸움이다.

종교다원주의를 지키고 타 종교를 인정해주자는 것이 상식적으로는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지구적 책임을 모든 종교인들이 함께 협력하면서 나눠 지자는 윤리장정에 반기를 드는 자는 그야말로 인간의 최소한의 책임마저 저버리는 것같이 비난받아야 한다. 그러나 다원주의를 인정한다는 것을 잘 분석하면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서로 침해하지 말자는 차원의 이면에, 각 종교가 가지는 고유의 영역과 소유를 보존 내지 지키자는 싸움일 수 있다. 각 나라마다 인종마다 문화마다 고유의 종교가 존속되고 발전되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할 때에 그들이 단지 지구 공동체의 안정이라는 한 가지 궁극적 목표에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자기 나라와 민족과 문화를 포기할 수 있겠는가? 절대 아니다.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 인간은 항상 자기 나라와 민족과 문화의 이익이 먼저였고, 종교도 그렇게 하는 일에 앞장을 섰으면 섰지 반대한 적이 없었다. 간혹 반대한 측이 있었어도 항상 소수로 몰려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기독교 메커니즘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어떤 면에서는 그런 잘못을 가장 많이 저지른 측이었다.

인간은 눈앞에 멸망이 닥쳐와야, 당장 해가 서쪽에서 뜨든지 동쪽에서 뜨지 않든지 해야, 겨우 자기 고유의 민족·나라·문화·사상·종교를 포기하지, 그전에는 절대 자기 고유의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마 멸망이 닥치면 그때는 더 자기 것 챙기기 바빠서 서로 협력할 시간과 여유조차 없을 것이다.

이 땅에 모든 이들이 회개하여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성경에 이미 제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윤리장정 안에서 공동체의 성결을 유지하는 것이 단지 보존 발전만 시키려는 것보다 가장 우선한다. 그런 거룩한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지 않고는 절대 인류와 지구의 안녕이 유지 보존될 수 없다. 그런데 그럴 가능성이 있겠는가?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며 각자가 자기 고유 영역만을 고집하는데 어찌 가능하겠는가? 절대 무망할 따름이다. 노력도 안해 보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해가 거꾸로 떠도 자기 것만 챙기는 인간들이 변하지 않고선 안 된다.

그래서 성경은 각 사람이 먼저 거듭나라고 거듭거듭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럴 가망이 없을 줄 알면서도 그 영원하신 인자와 신실하심으로 지금도 집 나간 탕자 아들을 문밖에 나와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다 언젠가는 예수님을 다시 보내실 것이며 그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뤄져야 하나님이 처음 우리에게 주신 그 위임이 완성될 것이다. 지구적 책임을 인간은 자각은 할 수 있어도 완수하지는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이 시대 특별히 지구가 멸망으로 치닫는 징조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의 기독교의 지구적 선교 책임은, 다른 종교도 인정하고 서로 함께 협력하여 생태계와 인간의 안녕을 증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종교간의 대화를 하는 데 있지 않다. 종교간의 대화가 선결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오셔서 처음으로 선포하신 말씀 그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를 모든 인간에게 선포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기독교라는 한 종교로 통일하자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종교간에 대화해야 한다. 이것 또한 인간이 먼저 회개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교회는 강아지 훈련소가 아니다

한국이나 미국 이민사회에 교회가 새로 개척되면 사람들이 일단 인상부터 쓴다. 한 집 건너 교회이고 지금은 다방이 많이 없어졌지만, 한 때 서울만 해도 다방 숫자보다 많았던 것이 교회인데 또 생기나 싶어 짜증부터 날 때도 있다. 그런데 교회가 많으면 부끄러운가? 교회가 자꾸 생기는 것이 잘못하는 일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교회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남들 눈에는 비록 강아지 훈련하는 것같이 보일지 몰라도 교회마다 교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이런 면에 심지어 교인들마저 먼저 부끄럼을 느끼니 참 큰일이다.

물론 상업주의가 판을 치고, 숫자적인 성장만을 고집하고, 영적 성장을 도외시하고, 편협한 사고를 강요하여 신자를 교회 안에만 묶어 두려는 교회도 많아 그럴 바에야 차라리 안 생기는 것이 나을 수 있다. 시골 장터가 없어지고 백화점이 들어섰고 유랑극단도 자취를 감춘 대신 멀티플렉스 같은 최신 최대의 영화관을 바뀌었는데, 아직도 교회가 옛날 관행 그대로 그 자리를 유지해야 하는가 의심이 갈 만하다.

그러나 아무리 장터와 유랑극단이 없어졌을망정 서로 모여 장사하는 것과 활동사진을 보고 즐기는 것은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발전되었다. 장터와 유랑극단이 하는 일과 그 일의 목적과 가치 자체가 없어진 것은 절대 아니다. 없어진 것은 원시적인 시설과 소규모 거래량과 거래일정 뿐이었다. 지금은 오히려 상설 대형 매장과 극장이 생겼다. 매일 장터요 곳곳에 유랑극장이 들어섰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하는 일과 그 일의 바른 목적이 살아 있으면 상설이든 비상설이든, 대형이든 소형이든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교회는 무엇이며 하는 일이 무엇인가? 최신 사상과 조류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도덕적 훈련을 시키는 곳도 아니다. 다른 종교의 교회라면 몰라도 최소한 기독교의 교회란 그런 일을 하는 곳이 아니다.

교회란 대형 성전도, 날로 숫자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곳도, 눈 감으라 해놓고 신발 훔쳐 가는 곳도, 잘 믿어서 혼자 잘살게 될 것이라는 착각을 심어주는 곳도, 사회에 좀더 정의롭고 평화로운 일꾼을 길러내는 곳도, 구원받은 사람 받지 않은 사람 네 편 내 편 구분하는 곳도 아니다. 교회란 간단하게 말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했고 이 땅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확신이 있는 한, 단 한 명의 교인도 교회일 수 있고 그런 뜻으로 모이면 수십만 명의 조직체도 교회다.

교회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다.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회개하고 천국이 가까웠음을 확신하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자 하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 열명에 제사장 족속 레위인 한 명이 있었듯이, 열 명 혹은 열 가정에 목사 한 명이 있은들 나쁠 것이 무엇인가?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싫어하고 나아가 하나님이 이 땅에 보냄을 받았다는 인식이 전혀 없는 것이지 교회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다. 이 원칙은 비가시적인 우주적 교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가시적인 조직체로서의 교회에도 마찬가지다.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냄을 받아 이 땅을 거룩하고 성결된 공동체로 존속·발전시키려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집에 혼자 남아 있지 않는다. 당연히 모이게 된다. 함께 힘을 합치게 된다. 가시적인 조직체가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그 조직체는 마치 그 하는 일과 목적은 변하지 않고 더 효율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시골장터가 백화점으로, 유랑극단이 멀티플렉스로 전환된 것같이, 종탑 달린 작은 시골 예배당이 서점과 카페와 체육관까지 갖춘 대형교회로 전환할 수 있다. 문제는 교회의 존재 목적과 그 가치가 살아 있는가의 문제다.

세계적으로 기독교인의 숫자가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다. 미국 내 개신 교단에서 교세가 증가하는 교단은 이 목적을 붙들고 있는 교회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으며 그 목적을 놓치고 있는 교회는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전통적인 복음이 부인되는 교단은 감소하고 있고 그 복음을 강조하는 교단은 오히려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전통복음이 부인되는 교단일수록 내용이 없어지니 형식을 자유롭게 하고 오랜 관행을 없애는 데만 교회 개혁에 초점을 둔다. 겉만 치장한 교회는 신자들이 먼저 안다. 신자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강아지가 절대 아니다. 극장 시설은 좋은데 걸려 있는 프로가 삼류 신파극이면 그 극장에는 절대 손님이 몰리지 않는 것과 같다.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이 텅텅 비게 된 것이 예수가 틀리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어서가 아니라, 구세주 예수가 부인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빠져 나간 것이다.

 

하룻강아지 진리 무서운 줄 모른다

이런 판국인데도 아직도 일반인들은 마치 기독교나 예수님이나 성경이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 숫자가 많은 교회만 찾아 가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적거나 불쌍해 보이는 교회에만도 가지 않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제대로 증거되는 곳은 어디든지 찾아가신다. 오직 한 사람이라도 진정으로 신령한 사람을 하나님은 지금도 찾고 있다.

진정으로 신령한 사람이란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진리를 추구하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앞에 완전히 항복하였고, 그 사랑을 갈급해 하며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맛보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긍휼이 없이는 단 한시도 살 수 없음을 날이 갈수록 더욱 깊이 확신하여, 세월이 갈수록 하나님 앞에 겸비한 마음과 영혼으로 무릎을 꿇는 자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 하나님을 제외한 채 진리를 찾으려 했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인류 모두는 진리를 찾아가는데 길벗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나아가면 길벗 정도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형제요 자매가 된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절대적 진리가 이미 계시되어졌다. 더 이상 찾을 진리가 없다. 이 진리를 절대 기독교가 독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같이 나누고 함께 하나님 안에서 형제·자매가 되자고 권유하고 있다. 문제는 기독교가 독점하는 듯한 인상을 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더 차원이 높은 진리가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다.

흔히들 궁극적으로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한다. 또 어느 누구의 독점물도 될 수 없다고 한다. 심지어 진리를 잡지도 못하면서 마치 자기가 진리를 아는 양 '아는 사람은 말을 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는 식으로 얼버무리기도 한다. 이 모든 말은 결국 진리를 부인하는 말이다. 진리란 그 본연의 성질상 반드시 절대성과 배타성을 반드시 함의하고 있음에도 상대성을 고집하는 것이다. 사람이 생각하기 나름이고 이제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고 한다. 누가 알 것이냐고 반문한다. 그래서 종교도 다원주의를 인정하고 서로 존중해야 한다고 한다. 인간의 생각과 사상의 경우에는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절대자 하나님의 경우에는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책의 맨 서두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은 존재한다면 100%의 확률로 존재하듯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진리의 절대성 또한 100%의 확률로 보증된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복음의 진리도 100% 아니면 0% 둘 중의 하나이다.

모두가 진리 앞에 겸허하여 서로 진리를 찾아감에 없어서는 안 될 길벗이라고 생각하고, 서로의 의견에 성실히 귀를 기울이는 자세는 어디까지나 학문적 탐구심과 도덕적 훈련에선 필요하다. 그러나 절대적 진리의 존재 가능성 자체를 거부한 상태에서는 진리를 함께 탐구하는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고 흥미도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말이 안 된다. 절대적 진리가 있다는 사람과 그것이 없고 진리가 상대적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서로가 싫고 미워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논리적으로 대화 자체가 진행될 수 없다. 진리가 상대적이라고 인정하는 쪽에서만 진리를 함께 찾고 서로 나눈다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논리적인 가정일 뿐이다. 상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측은 아무리 열심히 남의 사상을 경청해주더라도 근본적으로 '절대적 진리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만 이해하면 된다. 그리고 그 중에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부분만 받아들이면 된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이상, 길벗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더 보강해주고 지지해주는 동조자를 구하는 작업에 불과하다. 자기가 진리가 되고 자기 편과 남의 편을 나누는 작업이 이쪽에서 더 세분화되고 전문화 된다.

기독교가 편을 가르는 것이 아니다. 장로교가, 침례교가, 감리교가, 허버트 암스트롱같이 처음 출발부터 아예 잘못된 교회가, 그리고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조직된 어느 체계나 교파나 교리가 진리를 독점하거나 전파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전유물일 뿐이다. 그리고 이 진리를 전파하는 자들은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의 권능을 받아, 이 예수 그리스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모든 영혼들이 불쌍하고 안타까운 사람들만의 몫이고 그들만이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눈물을 가진 자만이 진리를 알고 진리를 전파한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는가? 네 편 내 편을 나누지 말라고 죽지 않았는가? 절대자 하나님 앞에 무릎 꿇으라고 죽지 않았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3, 7, 10).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한쪽 곁에 제쳐두고는 절대 진리를 찾지 못한다. 독자 중에 또 다른 종교인들 가운데 이것에 동의하지 않아도 좋다. 아마 동의할 수도 없고 동의할 마음도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만은 우리 모두 솔직히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보자. 평생을 바친 그 진리 탐구의 작업에 자신이 과연 만족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맛볼 수 있을까? 조물주 수준으로만 그치는 하나님이 내 개인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 진정한 절대자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다른 종교인들이 기독교인들에 대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신자들 쪽에서 노력하여 진리를 찾아 알게 되었고 그 진리를 독점한 것으로 오해한다. 그렇지 않다.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들이 알게 되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찾고 또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뿐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러 열반과 무아와 신비한 천상의 경험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죄악 가운데 있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있었는데, 그분 당신이 십자가의 수난받은 종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신자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알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자기가 찾기 전에 이미 하나님이 찾아오셨고 그분이 나를 일대일로 알고 계시며 침 삼키는 순간까지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 그래서 언제든지 그분에게 담대하게 어떤 모습과 형편에 있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바로 그것이 절대불변의 영원한 진리라는 것이다. 다윗같이 이런 고백을 하게 된 자가 신자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 139:1¡­6). 하나님이 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너무 신기하다고 한다. 그것이 진리다.

방금 태어난 강아지는 주위의 얼마나 많은 맹수들이 많은지 모르니 범이 무서운 줄 모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하룻강아지라도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 개는 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사 1:2, 3). 하나님을 부인하는 하룻강아지만 진리가 무서운 줄 모른다.

 

김칫국- 누가 천당에 갈 수 있는가?

사람이 천당에 가면 세 번 놀란다고 한다. 분명히 와 있어야 할 사람이 안 보여서 놀라고 와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을 발견해 또 놀라고 마지막으로 자기가 와 있어서 놀란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지옥에 간 사람도 세 번 놀랄 것이다. 와 있어선 안 될 사람이 와 있고 꼭 있어야 할 사람이 없고 또 자기가 와 있는 것에 놀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고 거듭난 기독교인이라면 언제 죽어도 천국 갈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천국에 와 있는 것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장엄한 광경에 놀랄 것이다. 그렇긴 해도 이 예화는 구원에 관한 진리를 너무나 정확하고도 의미심장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이야기가 뜻하는 핵심은 구원이란 겉으로 선해 보이는 도덕적인 기준과는 상관없이 자신을 자기가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스스로 자신이 천국 갈 자격이 있다고 자부한 사람은 지옥으로 가고 대신에 자신은 지옥가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천국 간다는 것이다. 단순히 인간은 겸손해야 한다는 도덕적 교훈이 아니다. 구원이란 자신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평가받느냐보다 하나님에게 어떻게 평가 받느냐에 좌우되는데, 그것은 결국 자신이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숨은 뜻이 있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완전히 개인적인 문제이지 다른 사람이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도 자신의 구원과 심판에 대해 놀라고 틀림없이 와 있으리라 생각한 사람이 없어 놀랄 정도이므로 구원을 위해 남에게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직 모세나 바울처럼 하나님에게 차라리 자신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워지더라도 저 불쌍하고 미혹된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로 떼쓰는 일말고는 할 수 없다.

흔히들 기독교인들이 나만 천국 가서 영생복락을 누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자들로 비방한다. 신자가 더 뜨거운 열정과 안타까운 심정으로 다른 사람도 함께 천국 데려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개인 구원의 원리를 확신하고 자신도 그렇게 구원을 받았기에, 신자가 그들의 구원을 위해 해줄 수 있고 가장 잘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은 찾아가 선행을 베풀기에 앞서, 바울처럼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일대일로 만나 달라고 기도하는 것뿐이다.

한국의 군부독재 시절에 젊은 학생들은 전부 독재타도 데모를 위해 길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보수주의 기독교 교단에 속한 학생들 가운데 일부는 데모보다 학교 채플에 모여 기도만 하고 있어 주위 학생들로부터 비겁자라는 비난과 함께 자기들만 천국 가려는 이기적인 신자로 비춰졌다. 그러나 데모에 나선 자들에게는 독재정권과 그 위정자들은 오직 타도의 대상이었지만 채플에 모인 자들은 그들마저 하나님이 용서해주고 사랑해달라고 기도했다. 데모하는 뜻은 자기들처럼 의롭고 선한 자만 천국 가야지 저런 나쁜 놈들은 가면 안 된다는 것이지만 기도하는 뜻은 독재자나 데모하는 자나 오직 예수의 은혜가 아니고는 천국 가지 못하니 다 함께 가기 위한 것이었다. 기도하는 자들은 이미 천국 가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자기들이 천국 가는 문제를 기도할 필요가 전혀 없다.

신자는 심지어 불신자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역사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강권적 역사라는 말을 풀어 좀 과장해서 설명하면 '하나님이 필요하다면 그의 사업이 부도가 나든지, 암 같은 불치병에 걸리든지, 가정이 파탄이 나거나 심지어 교통사고가 나든지 하더라도 목숨만은 살리시고 그로 인해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오직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실 만큼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강제적으로라도 역사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말이다. 불신자가 불행을 당하기를 바란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가장 귀하고, 그것말고는 이 땅에서의 인간의 해결책이 없으므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해결책을 붙들게 해달라는 것이다. 예수 이후의 그 풍성한 삶을 같이 누리자는 뜻이다.

신자일수록 어려운 불신자를 찾아가 더 도와야 한다. 그러나 신자가 돕는 일은 그 일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게 하고 신자가 전하는 십자가의 복음의 진리에 상대의 마음이 더 잘 열리도록 하기 위한 보조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한국에 처음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한 일이 학교를 짓고 의술을 베푼 것도 그런 뜻이었다. 또 당시로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자원과 능력을 갖춘 곳이 교회뿐이라 그런 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일을 주업무로 하는 곳이 절대 아니다. 이제 정부나 사회기관이 구제나 선행을 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교회는 본연의 임무에만 전념하여 오직 예수님의 복음만 더 열심히 증거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잘 믿는 신자란 그저 '믿슙니다' 하면서 기독교를 잘 믿기만 하면 자기만은 천국 가겠지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알았기에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된 것이다. 남과 함께 천국 가기를 원하기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남에게 싫은 소리 들어가면서 전도한다. 교회 모여 기도하는 시간의 대부분은 교회 밖에서 만난 사람과 찾아가 도와주고 복음을 전한 자를 위해서 기도한다.

간혹 천국 가기를 너무 소원하다 보니까 예수님조차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 1:7)라고 했음에도 미리 특정한 날을 정해서 난리를 치다 낭패를 보는 자들도 있다. 분명히 잘못된 일이며 이단이다. 그러나 이들 이단과 '천당에 관한 한 구하지 말라. 그러면 주어질 것이요'라고 생각하는 불신자와 엄밀히 비교해 볼 때 과연 누가 천국을 갈 것 같은가? 천국에 가서 누가 누구를 발견하지 못해 누가 놀랄 것인가? 단지 재림의 시기만 자의로 판단했지만, 천국을 사모하고 재림을 소망하며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천국의 길임을 확신한 부분에서만큼은 틀림없다면, 그들 가운데 구원의 가능성은 열려 있지만 불신자에게는 가능성이 제로다. 천국을 소원하지 않는 자에게는 천국 열쇠는 주어지지 않는다.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 간혹 지나치게 개인적으로 보일지라도 절대 잘못이 아니다. 천국을 소망하지 않는 자는 천국 자체를 믿지 않는 자이며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부인하는 자다. 천국을 아는데도 소망하지 않는 법은 없다. 예수님도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며 밭에 감추인 보화나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하여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사는 것과 같다고 비유로 말씀하셨다. 천국을 소망하는 자만이 천국을 맛볼 수 있다. 천국은 죽어서 천당을 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말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 즉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는데, 삶의 구석구석에서 세밀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맛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리 적은 일에도 차고 넘치기 때문에 이 땅에서 일단 그 맛을 본 자는 천국을 소망하지 않을 수 없다. 역으로 그 통치를 맛보지 않은 자가 어떻게 천국을 소망하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실현할 수 있겠는가? 단지 이웃을 돕고 선행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성령을 매개체로 하여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 통치 원리로 작용하여 그 공동체가 거룩하게 될 때만이 하나님 나라가 된다. 그 나라를 실현하는 첫 걸음은 독재자든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이든 어느 누구라도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재림을 소망하며 예배당에 모여 기도하는 자들이,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이 떡이 너무 맛있으니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달라고 떼쓰고 있는 중이다. 천국을 소망하지도 않으면서 이웃을 돕는 것이 더 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떡 주는 사람이 그 사람을 모르고 또 그 사람도 떡이 어떻게 생겼는지, 떡 주는 이가 누구인지 몰라 떡을 달라고도 하지 않는데 어떻게 떡을 먹을 수 있겠는가? 이들이야말로 김칫국부터 마시는 자이며 지옥에 가서 세 번 놀라는 자가 될 것이다.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지 못한 자는 죽어서도 천국을 맛보지 못한다. 예수 밖에서는 김칫국만 마실 뿐이다.

 

땅 끝까지?

현대는 다원주의 사회다. 현실적으로 겉으로 보이고 진행되어져 가는 모습은 분명히 그렇다. 이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사조다. 그런데 기독교인으로서 이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딱 한 가지 불만이 있다.

저들의 주장은 한 마디로 줄이면 자기와 다른 여러 견해와 주장의 타당성을 인정하자는 것인데, 그렇다면 수차 지적한 대로 하나님이 절대적인 진리를 인간이 알게끔 계시해 놓았다는 주장도 그 다원주의가 인정하는 타당성 속에 포함시켜야 한다. 그래야 다원주의가 진정한 다원주의가 된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라고 하는 말씀도 진리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최소한 무조건 부정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원주의가 아니라 얄팍한 수준의 상대주의일 뿐이다. 나아가 자기들 스스로 상대주의에 불과함에도 다원주의라고 자처하는 잘못을 범할 뿐 아니라 다원주의라는 또 다른 독선을 하나 만들어 내는 셈이다. 기독교만이 진리냐 아니냐의 문제를 떠나 이치를 따지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들의 주장대로 기독교가 다른 종교 위에 군림하고 지배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면 마땅히 비방을 받아야 한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만이 어떤 시대·장소·문화·종교를 초월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종교 위에 군림해야 한다는 '하나님 제국주의'는 주장해도 기독교가 군림하자는 '종교적 제국주의'는 주장하지 않는다. 비록 기독교 메커니즘이 그런 잘못을 범한 적이 많았음은 솔직히 시인하고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 그 잘못에 대해 백배 사죄하지만 성경의 기독교, 골고다 언덕에 나타나셔서 인류역사에 간섭하신 예수님만은 절대 그렇지 않다.

진정한 기독교인들은 교세의 확장이나 종교적인 경쟁이나 문화적 충돌을 유발할 생각이나 의도는 전혀 없이, 오직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 심정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간다. 바울 사도가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 9:19, 22, 23)고 한 고백처럼, 어떻게 하면 한 사람에게라도 더 예수의 복음을 전하느냐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복음서에 의하면 특별히 믿음이 좋다고 칭찬한 사람들이 있다. 중풍병자 하인의 병을 고침 받은 로마인 백부장과, 귀신 들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인인데 둘 다 이방인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상종도 하지 않고 여행할 때도 그 지역을 둘러서 갔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에 의하면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4:3, 4)의 기록처럼, 의도적으로 그 지역을 통과해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한 불쌍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복음으로 초대하신다. 또 누가 복음의 그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이방인은 안중에도 없는 유대인들의 스승이 아니라 모든 이방족속을 불쌍히 여긴 구세주였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승천하기 직전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한 '땅끝'의 의미가 사실은 지역적 의미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다른 나라의 문화와 종교를 정복해서 군림하라는 말이 아니다. 예루살렘은 당연히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 성령이 임하는 곳으로 복음의 발상지다. 온 유대는 이스라엘 사람, 사마리아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혈이 사는 지역, '땅끝'은 완전한 이방지역이란 말로 지리적인 구분보다는 인종적 구분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필요한 자에게는 어떤 인종이든지 찾아가라는 말이다. 타종교 위에 군림하려 땅끝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러 땅끝까지 가는 것이다.

로마 제국은 역사상 가장 다양한 인종과 문화와 종교가 한 제국의 울타리 안에 공존했다. 다원주의라는 면에서는 오히려 지금의 미국이 비교될 수 없었다. 로마 황제에 대한 숭배만 하고 세금을 꼬박 내면서 반역할 생각만 먹지 않으면 각 나라의 문화와 종교와 관습의 타당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그때에도 항상 말썽은 지금처럼 예수 믿는 사람이었다. 성경에 천하를 소요케 한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타종교인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았기에 당연히 충돌이 생기게 되었고 유대교와의 첫 충돌도 필연적이었다.

사도행전의 기록에 따르면, 유대교의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의 당파가 예수의 제자들의 선교활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되자, 교세의 위축에 당황하여 제자들을 잡아다 고문하면서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의 이름으로는 가르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베드로와 사도들이 계속해서 선교활동을 하니까 두 번째로 붙들어다 문초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가로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 돌리고자 함이로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 4:28¡­32). 사도들의 대답은 천하를 소요케 하거나, 예수 죽인 것의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리거나,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어 교세를 확장하거나, 종교간의 충돌을 야기하려고 전도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구세주 되는 예수의 거룩한 이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만을 증거하는데, 그것도 "성령의 권능을 입어 증인이 되리라"고 한 대로 하나님이 시켜서 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오늘날에는 도저히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참다운 다원주의자가 바로 이때에 나타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사도들의 항변은 당연히 유대교 지도층들의 심기만 돋우는 결과를 낳았다.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간 밖으로 나가게 하고…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행 5:33, 34, 38).

가말리엘의 뜻은 예수가 유일한 길이요 진리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확인할 수 없기에, 구태여 인간이 시비 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말 그대로 하나님의 진정한 계시라면 복음대로 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사기꾼들이니 하나님이 벌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다원주의의 입장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원주의자들이 진정한 다원주의의 입장에 서 있지 않다. 기독교가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당장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말리엘처럼 그럴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은 열어 놓아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다원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 입장에 동참할 수 없다. 다른 모든 종교는 다원성을 인정하지만 기독교만은 절대성을 주장한다. 기독교의 절대성을 인정할 수 없으면 최소한 가말리엘처럼 기독교를 가만히 버려두어야 진정한 종교와 사상의 자유가 아니겠는가? 기독교인은 인간의 다양성은 한없이 인정하되 하나님의 절대성은 절대 포기하지 않지만, 다른 종교는 오히려 하나님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온갖 다양성을 인정하되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뭔가 순서가 뒤바뀐 것이 아닐까?

 

선한 사마리아인과 유마 거사

하반신 불수로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유학생을 필자의 집에 한 3개월간 유하도록 해준 적이 있다. 핸디캡 전용 학생 아파트가 나오도록 기다리느라 마땅히 갈 데가 없는 것 같아 그렇게 했다. 솔직히 이 일로 내 딴에는 목사로서 나름대로 진정한 이웃 사랑을 실천했으며 도덕적 자부심도 어느 정도 가졌다. 그런데 교회에서 식사 교제를 할 때마다 이 학생을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국(soup)을 통 먹지 않았다. 혹시 국을 좋아하지 않는지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면서 씩 웃었다. 그런가보다 하고 잊고 있었는데 사실인즉 하반신이 마비라 소변 조절을 제대로 못해 고무 호스를 오줌보에 항상 끼우고 플라스틱 주머니를 요강처럼 허벅지에 차고 다닌다고 한다. 그래서 국같이 수분이 많은 음식을 먹으면 소변이 자주 나와 그 오줌보 처리가 여간 귀찮지 않아, 국은 좋아하지만 일부러 안 먹는다는 것을 학생의 어머니를 통해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 동안 핸디캡의 고통을 그나마 남들보다 잘 알고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는 쥐꼬리만한 목사로서의 자부심도 얼마나 엉터리였으며, 단지 도덕적 교만과 영적인 사치에 불과했는지 얼굴이 화끈거려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했었다. 이웃의 고통을 이해하고 동참하며 선행을 실천한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로부터 한 3년이 지난 후 필자는 신병으로 12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난 후부터 그 수술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고 있다. 일종의 핸디캡을 갖게 된 것이다. 하루 24시간 내내 힘들며 평생을 두고도 나아질 수 없는 그런 고통을 겪고 있다. 이제는 또 다른 각도로 그 휠체어의 학생을 보게 되었다. '내가 겨우 이 정도로 이런 고생을 하는데 그는 정말 얼마나 힘들까?' 이전에는 그의 고통을 머리로 이해하고 손으로 도와주는 차원이었지만, 내 자신이 핸디캡을 갖게 된 후에는 가슴으로 그의 고통이 물밀듯이 밀려 왔다. 그의 고통이 진정으로 나의 고통이 되었다.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야만 했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다시 한번 정말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기는 말로는 쉽다. 또 그 일은 종교가 감당해야 할 진정한 선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십자가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참다운 이웃이 되기 힘들다. 동일한 고통을 체험하지 않고는 자칫하면 도덕적 교만이요 영적 사치일 수 있다. 우리가 남의 고통을 알면 얼마나 알 것이며 또 알량한 돈푼과 내가 가진 여유와 시간으로 도와주어야 얼마나 도와줄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자신도 잘 이해할 수 없는 혼자만의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와서 "당신의 고통을 이해합니다. 실망하지 말고 힘내세요."라고 위로하는 말을 듣고 속으로 '당신이 내 고통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새끼가 누구 부화 돋울 일이 있나?' 화가 치밀어 오르며 주먹으로 냅다 한대 쥐어박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동일한 고통을 당한 자가 아니면 그 고통당한 자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한다.

"우리가 환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 1:6). 암에 걸린 자만이 암 투병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안다. 휠체어를 타는 자만이 휠체어를 타는 자를 이해할 수 있다. 선한 사마리아 인이 되기 위해 우리 모두 다 암에 걸려야 하고 휠체어를 타야 되는 것은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바로 그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 대신에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셔서, 인간의 모든 한숨과 슬픔과 고통과 시련을 대속하셨다.

이 대속의 교리는 머리로는 절대 믿지 못하고 이해도 되지 않는다. 믿으라고 강요할 수 없다. 사람과 세상의 위로와 도움이 아무런 효능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자만이 그나마 조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면 천하에 흉악한 살인범 사형수라도 알 수 있고 변하여 십자가 앞에 눈물을 뿌리며 엎드리게 된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바로 그 부끄럽고 더러운 모습 그대로 사랑합니다. 당신의 그 흉악한 죄를 이제 다 담당하셨습니다."라는 말 한 마디에도 그 영혼이 고꾸라진다. 그래서 진정한 사마리아 인의 선교 사명이란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기도하면서, 바로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고난 가운데 있는 자의 영혼에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불화살을 그 심장에 꽂는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세계적으로 정부기관에서 하는 구제사업말고 민간기관에서 하는 구제와 사회사업의 80% 이상이 교회나 기독교 관련기관에서 담당한다고 한다. 그럼 기독교인은 전 세계인구의 80%를 넘게 차지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럼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독교인들이 자기의 교세에 비춰 다른 종교인에 비해 훨씬 많이 구제사업을 하며 이웃의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뜻이다. 비록 자체 교회성장에만 관심을 두는 교회가 있고 그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사실은 그런 교회는 일부다. 침묵하고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오늘도 그 80%의 일을 위해 수고하고 땀 흘리고 있다.

기독교 국가들이 서구 선진국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은 서구 선진국에는 신자가 오히려 줄었음에도 그렇다. 부자가 천국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듯이 돈이 많은 자가 구제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님의 고난과 위로가 성령의 간섭으로 자신들에게 넘치도록 채워져 이미 선한 사마리아인이 된 참된 신자만이, 아무리 숫자가 적어도 자기들 능력으로는 힘에 부치는 일들을 지금도 묵묵히 감당하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하는 자는 단 한 사람이라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참 이상하지 않는가? 인간은 서로 사랑할 능력이 있어 선행한 자만이 천국으로 간다고 믿는 자들보다 오히려 인간은 그럴 능력이 없어 선행으로는 절대 영생을 얻지 못하고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들이 선행을 훨씬 더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자 전부가 다 사마리아인의 역할을 감당하지는 못할지라도, 세계 도처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는 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거듭난 자다. 바로 그것이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이자 성령의 능력이다.

 

'지금·여기'에서의 mission- 하나님 나라의 건설

목사가 설교 중에 가장 쉽게 유혹에 넘어가 잘못을 범하는 것이 있는데, 잘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만병통치약으로 소개하고 선전하는 것이다. 이는 큰 잘못이다. 성경의 어디를 찾아봐도 그런 내용은 없다.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맞고, 암에 걸리고, 교통사고를 당하는 확률은 신자나 불신자나 똑같다. 얼마 전 미국의 US Airway라는 유수의 항공사가 9.11 테러 여파로 법원에 부도를 신청했다.

그런데 수많은 직원을 해고 하면서 기독교 신자는 열외로 치겠는가? 그렇지 않다. 가장 많은 경비절감의 효과가 있고 정상 업무에 지장이 없는 부서부터 평소의 근무성적이나 업무처리 능력을 평가해 해고한다. 물론 하나님은 특별히 신자를 구별하여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언제나 보호하고 인도하시지만 항상 '하나님의 뜻 안에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따라 오게 마련이고 그 뜻을 잘 이해해야 하지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하는 것은 아니다.

목사가 이런 유혹을 자주 받는 데는 목사 본인의 신학에도 문제가 있지만, 역설적으로 는 신자들이 그런 설교를 좋아하고 기대하고 심지어 요구까지 하는 잘못도 있다. 목사가 신자들은 강도 만나 피 흘리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그것이 다 하나님 잘 믿어서 받는 축복이니 자랑스럽게 생각하라고 가르치기 이전에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 잘 믿으면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기대하고 모인다. 어느 잘못이 시간적으로 꼭 먼저라고 할 것도 없지만 신자들의 잘못된 기대를 고쳐주어야 하는 것이 목사이므로 목사의 잘못이 훨씬 크다.

그런데 엄격히 따지자면 이런 문제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종교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문제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종교를 갖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현실의 고통과 어려운 문제를 믿음으로 해결하려는 것이지 어떤 면에선 거창한 깨우침과 영적 성장에는 사실 크게 관심이 없다.

그래서 모든 종교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의 그런 기대를 고의든 아니든 이용하게 마련이다. 기독교를 변명하고자 다른 종교를 함께 물고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종교와 인종과 문화와 나라와 시대가 아무리 달라도 자기만의 탐욕을 채우려는 모든 인간의 본성은 동일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말이다. 종교를 이용하거나 하나님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유익을 채우려는 바로 이것이 인간의 죄의 본질이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에게 받은 십계명에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가 첫째 계명이고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가 둘째 계명이다. 우상이라는 것이 꼭 나무를 깎아 만들거나 철로 부어 만든 어떤 형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날에 와서는 그런 것에 경배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정도는 누구나 알게 되었다.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우상의 정의(definition)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 외에 스스로 만든 어떤 것'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를 이용하거나 하나님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유익을 챙기는 자는 우상 숭배의 죄에 해당한다. 자기만의 탐욕을 채우려는 모든 인간의 본성이 '자기 유익'이라는 신을 자신 안에 만들어 하나님을 대체하는 자리에 앉힌 것이다. 스스로 자신 안에 자기가 신이 된 것이다. 자기가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것이다. 나아가 이 땅에 인간이 주인이 되어 인간의 뜻대로 인간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것인데, 하나님의 왕국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왕국이다.

설사 그 왕국이 아무리 근사하고 정의로워 보이고 공의와 사랑과 평화의 원리가 작용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배제되고 하나님을 유일한 절대자로 모시지 않는 한 우상의 도성일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선 바로 이 탐욕에 가득 찬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길뿐이다. 기독교의 선교목표는 당연히 '교회중심주의'가 되어선 안 되며 '하나님 나라 중심주의'가 되어야 한다. 인간 본성을 변화시키는 일이 없이는 아무리 선한 일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종교끼리 협력하고 합쳐진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을 거룩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오직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사랑뿐이다.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힘쓰는 사람들- 김 진홍 목사님의 경우

나이 삼십이 넘도록 '하나님이 있으면 눈앞에 데려와 보라. 예수가 밥 먹여 주느냐'라고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정도로 겁없이 날뛰었던 필자도, 처음 예수를 믿을 때에 많은 영향과 깊은 감명을 준 책 중에 하나가 김 진홍 목사님의 '새벽을 깨우리로다'였다. 그 책에서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오랜 영적인 방황기간을 거쳐 회심하게 된 경위를 간증하는 가운데 불교에서 진리를 찾으려다 실패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열심히 불자 수업을 받고 있던 그가 절을 멀리하게 된 계기가 불교계에서 생불이라고 추앙을 받았던 효봉 스님이 입적하실 때에 남긴 마지막 법어가 '무(Ui)'였다는 말을 듣고는, 전 인생과 생명을 걸 만한 진리를 찾으려는 자기로선 '아무것도 없다'는 경지에는 오를 마음이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필자에게는 그 스님의 말씀이 아무리 참선과 수행을 해도 스스로 진리를 깨달을 수 없고, 인간이 생불이 될 수 없음을 솔직하게 실토한 말로 받아들여졌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 자체가 진리이고 그것을 알게 된 것이 큰 깨우침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평생을 수행해서 그런 깨우침 밖에 없었다면 차라리 매일 적은 소자에게 물 한 그릇씩 열심히 떠 주는 삶이 낫지 않을까 싶다. 하나님을 배제한 채로는 진리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진리를 잡을 수 없음을 김 목사님의 책으로 그 때 다시 확인했다.

다른 하나는 청계천에서 활빈 교회를 사역하면서 이 땅에 빈곤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을 떡의 문제로만 인식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를 처음 시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여 사랑으로 섬기면 그 불쌍하고 올 데 갈 데 없는 빈민들이 변화되리라 기대했는데, 도저히 변화되지 않고 심지어 빌려준 돈을 떼먹고 도망가는 것을 겪게 된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고민하며 기도하는 중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임에도, 빈민 문제를 경제 문제로만 파악하여 인간의 영혼을 살리는 문제를 등한시 한 것이 원인이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인간 세상의 잘못의 원인이 영혼이 변화되지는 않고 선행과 구제만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다는 기독교의 진리를 목회 현장에서 값진 체험으로 확인한 것이다. 김 목사님의 표현을 빌리면 '사람들은 항상 새 옷, 새 직장, 새 조직 등의 새로운 것을 찾지만 문제의 뿌리는 새로운 사람, 새로운 영혼이다. 예수의 복음으로 가난한 자를 가난에서, 아픈 자를 아픔에서, 착취당하는 자는 그 눌림에서 해방시키는 동시에 한 영혼, 한 영혼에게 본질적인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196쪽)라는 것이다.

김 목사님의 그 간증이 아직도 변함이 없으리라 믿기에 '교회가 교회로만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겨레를 섬기는 교회가 되어 백성의 눈물을 씻고 한을 풀어줄 수 있을 것인가'라는 통찰력 있는 호소에도, 전체 문맥에 분명히 '예수님의 복음으로 한 영혼, 한 영혼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키면서' 겨레를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포함되었으리라 확신한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예수를 안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문제인 것이 그릇 믿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일은 바로 믿지 않는다면 차라리 믿지 않는 게 낫다'라고 하신 말씀 또한, 성령의 은혜로 거듭남으로 인한 영혼의 본질적인 변화 없이 믿는 것이 바로 믿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말씀이지 선행과 구제의 실천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김 목사님이 하신 말씀의 참의도임에 틀림없으리라 믿는다.

 

메타노이아

마태복음 19장에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이야기가 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어느 계명이오니이까"라고 구체적으로 가르쳐 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십계명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전반 4계명을 제외하고 인간관계를 규정한 후반부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이 청년은 그 계명들을 평소에 잘 지키고 있었기에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재차 물었다. 이에 예수님이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자,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가 버렸다. 이 일 후에 그 유명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는 다소 과장이 섞인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다.

이 청년의 경우 틀림없이 자기 말대로 계명을 잘 지켰을 것이다. 부자인지라 살인·도둑질·거짓 증거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며, 영생을 소망하는 심성을 가진 자라 간음은 당연히 하지 않았을 것이고 효도와 이웃 사랑도 열심히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인격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사람의 칭송을 받을 만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틀림없이 자기 재산의 일부를 구제사업에 희사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왜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고 하고, 부자가 천국 가기가 불가능한 것처럼 말씀하셨으며 또 그 청년은 왜 실망하며 돌아갔는가? 천국 가려면 재산을 몽땅 팔아 교회에 헌납하거나 이웃을 도와야만 하는가? 예수님이 모든 소유를 팔아 나눠주라는 말씀에는 여러 의미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 '너를 지켜주고 이 땅의 삶을 유지시켜 주는 것이 너의 재산인가, 하나님인가? 너의 재산을 모두 포기하더라도 영생을 소유하길 원하는가? 네가 선행을 하고 계명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네가 가진 여유 때문이지 않는가? 너의 그 여유가 없어져도 과연 계명들을 지켜 영생을 소유하길 소원하고 또 그럴 수 있으리라고 자신하는가? 계명을 지킨 것이 너의 선한 본성인가,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가, 종교적 의무감인가, 영생을 소원하는 열망 때문인가? 너의 소유를 지키길 원하는가, 이웃을 사랑하길 원하는가? 네가 무엇을 행하면 천국을 가리라고 생각하는데 인간이 무엇을 행한다고 천국을 갈 줄 아는가? 선한 이는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신데 어떻게 함부로 선을 논할 수 있는가?¡|.'

이 사건의 초점은 부자가 가진 재산을 다 팔아 이웃에게 나눠주는 선한 일을 안하기 때문에 천국에 못 간다라는 데 있지 않고, 그 청년이 반드시 어떤 선한 일을 해야만 천국 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지적해 주는 데 있다. 예수님이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고 하신 말씀은, 인간이 베푸는 선은 온전한 선이 아니며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면 선이라고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기준에 흡족하지 않은데 어떻게 그것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가니라"고 한 것이 그 많은 재산을 어떻게 다 팔고 누구에게 나눠주어야 하는지 그것을 걱정했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무릇 사람의 모든 행동은 그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다. 잠자고 밥 먹고 누워 자는 것 같은 본능적 행동을 제외하고는 반드시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 이 청년이 그대로 돌아 간 것은 영생을 얻으려고 왔다가 영생 대신에 재산을 택하기로 마음을 바꿔먹은 것이다.

재물이 많았다는 것은 재산이 자기의 삶을 유지·보호해준다는 확고한 의식이 있어 열심히 재물을 모았다는 뜻이다. 재산 외는 하나님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돈 모으는 일 밖에 하지 않으니 부자가 되게 마련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영생을 얻으려는 것이 잘못이다. 그 재물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요 거두어 가시는 이도 하나님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다. 선행 이전에 선행을 이뤄낼 수 있는 생각이 문제다. 이 생각의 변화 없이 하는 선행은 온전한 선이 될 수 없다. 이 청년이 영생을 얻지 못한 이유는 재산을 팔아 이웃을 돕지 않은 것이나 그런 잘못을 회개(uaEC)하지 않은 까닭이 아니다. 재물을 포함하여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며 모든 선한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인식의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부자는 과연 약대가 바늘구멍을 절대 통과하지 못하듯이 영생을 소유할 수 없는가? 똑같은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고 답했다. 어떤 사람이 갖고 있는 생각이란 자기 자신이 평생의 지식습득과 경험에서 터득한 것과 자기의 본성과 기질들과 주위 환경이 만들어 주는 여건들의 총체적인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스스로는 절대 바꾸지 못한다. 그때까지 살아 온 자기의 전 인생을 부인하는 일이며 자신을 죽이는 일인데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성령이 임해서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나야만 가능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옛 사람을 함께 매달아 죽어야 한다. 모든 선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온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회심 자체, 메타노이아도 하나님의 은혜여야 할 뿐 아니라, 신자가 회심할 때에 하나님이 회심을 시키셨다는 것도 체험으로 당연히 알게 된다.

기독교는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런 데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영적인 것에만 몰두하는 종교가 아니다. 세상과 연결고리를 끊고 수도원에서 도를 닦는 종교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종교다.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이웃에게 재물을 팔아 나눠주라고 한 말씀의 본질은 네 생각을 바꾸라고 한 것이다.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간단한 진리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생각이 바뀐 자가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종교가 참종교가 되기 위해선 내적 의식의 개혁을 강조하는 '의식개변중심주의'가 병행(U½u¼) 되는 것이 아니라 선행(a≫u¼)되어야 한다. 구구셈을 모르면 어떤 간단한 수학문제도 못 푸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과 자신을 바꾸는 것은 어느 쪽이 먼저 나와도 상관이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 아니다. 또 한쪽을 더 강조해 다른 한 쪽을 덜 강조하거나 아니면 어느 한쪽만을 강조해서도 안 된다. 자신이 바뀐 사람만이 세상을 바꾸지, 세상이 바뀌었다고 자신이 자동으로 바뀌어지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사회를 변혁시키는 일꾼을 양성하는 훈련소이다. 그러기 위해 언제나 먼저 해야 할 일은 영혼의 구원이다. 사회를 변혁시키는 자가 모두 의식이 변화된 것은 아니지만 의식이 변화된 자는 반드시 사회를 변화시키게 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는 진정한 사회의 일꾼을 길러낼 수 있는 곳은 교회뿐이다. 영생을 얻으려는 부자 청년이 계명을 지켜 선행을 한 것은 따로 훈련을 거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된 인간이라면 그 형상이 아무리 부패했어도 희미하게나마 그 흔적이 양심의 형태로 남아 있어, 그 정도는 누구라도 다 알 수 있고 또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항상 문제는 그 노력들이 결국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심지어 부자 청년은 그것을 깨닫고도 영생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그는 돈이 많든 적든 상관없이 우리 모든 인간의 대표였다.

 

그들도 우리처럼

예수님께서 내가 유일한 길이요 진리라고 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항상 그 절대적인 배타성 때문에 논쟁에 휩싸이게 되며 기독교만 일방적인 양보만을 강요당한 측면이 있다. 다른 종교를 관용으로 대하고 이해하고 존경해주라는 것을 타종교인들이 기독교인들에게만 요구했지, 그들이 기독교를 좀더 깊이 이해해보려는 노력은 등한시하는 것 같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다원주의가 진정한 다원주의가 되려면, 절대성을 인정은 못할지라도 최소한 상대성 안에 공존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기독교의 유일성과 배타성이란 우월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이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도착하고자 하는 목적지는 같되 가고 있는 길이 서로 다를 뿐이다. 정확하게 말해 그 방향은 정반대이다. 서로 정반대로 달리니까 마주 오는 기차처럼 충돌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냐고 단정지어선 안 된다. 단선 위에서 두 기차가 마주 보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선로는 수십·수백 개가 있는데, 다른 모든 기차는 남쪽으로 달리고 있다면 기독교라는 기차만은 유일하게 북쪽으로 달리고 있기에 우열의 문제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같은 방향으로 여러 기차가 달릴 때 만 우열의 문제가 발생한다. 엔진 마력이나, 내부구조나, 외양이나, 승차인원 등에서 차이가 있으므로 기차끼리 서로 대화해서 장단점을 보완하고 서로 협력해, 모든 기차가 더 성능이 좋은 기차로 개조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나 다른 방향으로 달리는 기차와는 경쟁이냐 협력이냐 문제를 논하기 앞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느냐를 먼저 따져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기차 하나만 끝까지 자기 방향이 옳다고 우긴다면 다른 기차들이 그 기차를 '죄악'이나 '교만'이나 '적자생존'의 문제로 보기 이전에 오히려 불쌍히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외눈박이 원숭이 동네에 두눈박이 원숭이가 왔다고 그 원숭이더러 한 쪽 눈을 칼로 도려내라든지, 외눈과 두 눈 중에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니 공평하게 전부 눈을 빼버리자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정이 바뀌어도 마찬가지이다. 두눈박이 동네에 나면서부터 외눈박이인 원숭이가 왔다고 해서, 외눈 옆에 억지로 눈구멍을 파서 개 눈이라도 집어 넣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최근에 불교와 기독교의 만나는 일이 많아 그 만남으로 마치 원숭이 동네에 완전한 통일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메타노이아'와 불교의 '깨침'을 의식의 전환이라는 공통분모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와의 공존과 협력도 이런 관점에서 보는데 이는 잘못된 분석이다. 인간의 깨우침 소위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득도이던 기독교에서 말하는 메타노이아든 그것이 '추구하는 목표점'과 '실제 도착하는 종착점'을 혼동하고 있는 데서 이런 오해가 생긴다. 모든 종교는 영생을 얻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자는 동일한 목표를 가진다. 그러나 과연 그 모든 종교가 목표하는 역에 도착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인간이 스스로 깨우쳐서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종착역은 어디겠는가? 정말 솔직하게 한 번 우리 깊은 속내를 털어 내놓아 보자. 그것은 영생도 아니요, 진리도 아니요, 성자의 반열에 오르는 것도 아니요, 영혼의 평강을 얻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절대 스스로는 깨우칠 수 없더라'가 모든 인간이 하는 깨우침의 종착역이 아니겠는가? 기독교의 메타노이아는 수행과 명상을 통해 홀연히 밝음(U¥)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며, 또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포기한 것이다.

기독교가 다른 방향으로 달리는 기차이며, 유일하며, 절대배타성을 가진다는 뜻이 바로 이것이다. '절대 인간 스스로 깨우칠 수 없다'와 '인간이 스스로 깨우칠 수 있기에 깨우쳐야만 한다'는 것은 영원히 평행선을 달리는 기차이지, 한 선로 위를 달리고 있거나 달릴 수 있는 기차가 아니다. 기독교의 기차는 엔진과 운전사와 철로 모두를 성부·성자·성령, 삼위 일체 하나님으로 바꾸고, 사람은 편안하게 객차에 타고 있는 것인데 반해 다른 기차는 여전히 그 세 개를 인간이 만들고 수리하고 개선하노라면 언젠가는 종착역에 도착하리라 믿고 있는 것이다. 목적지는 하늘나라로 동일하지만 목적지 자체가 이 땅이 아니기에 이 땅의 기차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품안으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 외는 불가능하다. 하늘나라에 도착하려면 기차 자체가 은하를 달릴 수 있는 열차로 바뀌어야지, 지상을 달리는 기차를 인간이 아무리 바꾼들 은하를 달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영적 분별력과 통찰력이 다른 이보다 뛰어나서 그런 열차를 골라 탄 것이 아니다. 그들도 동일하게 지상의 열차를 타고 있었고 열심히 그 기차를 고치고 조이고 기름치고 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기차가 종착역에 닿았다는 안내 방송이 없고 기차는 여전히 심하게 흔들리며 달리고 있고, 오히려 갈수록 더 멀미만 나려는 데도 창 밖을 보니까 다른 기차도 열심히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어 힘들어도 참았던 것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의 간섭으로 지금껏 열심히 살아 왔던 그 모든 인생이 완전히 실패였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기 노력으로 행복을 찾고 선을 실천하고 '밝음'을 깨우치겠다는 것이 아무 결실을 맺을 수 없는 헛된 노력이었음을 철두철미하게 깨닫게 된다. 깨우침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자기 모든 삶이 향방 없는 달음질이었고 허공을 치는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완전히 발가벗긴 채 무릎 꿇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다른 방향의 기차를 타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옮겨 탄 적이 없는데도 이전에는 말도 안 되는 놈들이 자기 혼자만 바른 방향으로 간다고 고집하는 그 미련해 보이는 낡은 기차, 유일하게 다른 방향으로 달리는 기차에 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더 이상 기차의 흔들림이 없고 기차의 전면을 둘러보니 하늘나라가 보이는데도, 창 밖으로는 다른 기차들이 자꾸 자기가 이전에 갔던 뒤쪽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처음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깨우침이 종교의 목표가 되면 그 목표는 일부 종교가·신학자·전문가의 전유물이 되어 버린다. 정말 불쌍하고 힘이 없고 지적·영적 사고의 능력이 열등한 자에게는 평생을 가도 밝음을 얻을 수 없다. 이들 정말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깨우침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봉사요, 앉은뱅이요, 시체나 다름없는 이들에게는 그 손을 잡고 직접 인도해줄 인도자가 필요하다. 예수님은 먼저 깨우친 자로 온 것이 아니라 이들의 손을 이끌고 천국 열차에 태울 운전사로 온 것이다. 그는 스승이 아니라 구세주였다.

혹시라도 먼저 깨우친 자가 가르치고 그대로 따라 하면 깨우쳐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다. 출생한 배경과 인생을 살아 온 여정과 각자의 품성과 은사가 천차만별인데, 그야말로 다원주의 사회인데 어떻게 남이 깨우친 것을 답습해서 자기가 같은 자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전세계 인구 60억 명에 단 한 사람도 DNA가 같은 자 없고 지문이 하나같이 다르듯이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소위 '마누라 치맛자락이라도 잡고 있으면 천국 가겠지.'는 정말 혼자만의 착각이다.

나아가 먼저 깨우친 자가 없는데 어떻게 따라 해야 할 모범이 있겠는가? 인간 스스로 깨우침이 불가능한데 종교끼리 머리를 서로 맞대어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깨우침을 갖게 할까 논의한다는 것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다. 종교끼리 정말 합력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배제한 채로는 절대 깨우침이 생길 수 없으니 우리 가운데 깨우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 인정하자고 동의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이 이미 각 종교를 붙들고 그것으로 먹고 사는 종교인들 사이에 가능하겠는가? 절대 불가능하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단 한 사람이라도 그런 인정을 하게끔 하기 위해, 종교인들의 모임에 가기보다 땅끝까지 평범한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성령의 체험이란 것이 신비하고 극적인 체험을 하거나 절정의 감격을 느끼거나 완전히 시야가 훤하게 밝혀지는 지혜가 늘어나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너무나 간단한 일이다.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이다. 내 힘으로는 깨우침도 회개도 회심도 있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스승이 아니라 구세주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느니라."

인류 역사 이래로 있어 왔던 어떤 종교적·철학적·사상적 조류와 이론과 경향도 그 내용이 아무리 심오하고 고상해도 결국 그 근원은 이 두 방향으로 달리는 열차로 귀속된다. 유일하게 세상의 다른 모든 기차와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기차는 세월이 아무리 바뀌어도 기차를 장식할 필요가 없다.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방향으로 떼를 지어 가는 기차들은 항상 종착역에 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기차를 수리하고 장식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온갖 사상이 나오고 새로운 종교가 나오고 민족마다, 시대마다, 문화마다 다른 종교가 나오고 각각의 종교를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아우성이다. 일단 기차를 만들었으니 달려봐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어느 방향을 가든 문제가 아니다. 정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도 된다는 것이다. 기차같이 생겼고, 운전사도 있고, 철로도 있고, 객차도 그럴싸하게 갖추었으니 일단은 철로 위에 올려놓고 달려보자는 것이다.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이 깨우침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은 기독교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이야기이다. 똑같이 기차처럼 생겼고 동일한 모습으로 철로 위를 달리고 있으니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것을 모르고 말이다. 인간이 깨우침으로 득도할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출발이고 깨우침으로 득도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이므로 출발역도 다르다. 출발이 다르고 방향이 다른데 종착역이 같을 수 있는가?

비록 서로 목적지는 같을지 몰라도 도착지는 다르다. 둘 중의 하나는 착각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협력할 문제가 절대 아니다. 오해를 말아야 할 것은 불교라는 종교와 기독교라는 종교의 내용이 그렇다는 것이지 불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서로 반목하고 질시해야 한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무조건 종교끼리 협력과 관용이 절대 능사가 아니라, 모든 종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이 땅에서 살면서 영적으로 직면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서로 방향이 다른 두 기차 중에 어느 기차를 타야 궁극적으로 바른 도착을 할 수 있는가이다. 어떻게 하면 스스로 노력해서 하나님의 기준에 합격하여 죽고 난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느냐는 것과 아니면 도저히 나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합격할 수 없으니 겸허하게 이 땅에서 미리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인도함을 받고 사느냐는 것이다. 이 둘은 반드시 둘 중 먼저 하나를 포기해야 다른 것이 취득 되어지는 것이지 둘 다 택할 수 있거나, 둘을 교묘하게 섞어 타협할 수 있거나 서로 협력하여 한 방향으로 고쳐 나갈 문제가 아니다.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는가, 예수를 구세주로 모시는가의 문제이다.

현대의 경향은 이 둘 중에서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는 쪽으로 흘러간다. 그런데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난 후에 구세주로 모실 때의 삶보다 실제 되어가는 형편은 점차 나빠지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예수가 아주 한정된 소수의 종교학자와 지성인과 소위 인격자들의 전유물이 되어갔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타락해서 교회가 빈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구세주 예수가 떠나고 스승 예수가 들어서고부터 교회의 좌석은 비기 시작하고 사회는 멍들어 간 것이다.

주위의 이 불쌍하고 연약하고 상처 많고 눌려 있는 수도 없는 사람들을 둘러보라. 그들에게 깨우침이 필요하겠는가? 사랑의 하나님의 용서와 인도가 필요하겠는가? 스승으로서의 예수 그런 예수는 없다. 예수가 가진 믿음으로서의 믿음 그런 믿음은 생명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 그분이 바로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믿음만이 길이요 진리이다. 그분 외에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그런 예수는 이 땅에서 혹시 있을지 몰라도 하늘에는 분명코 없다.

 

출처 : http://www.nosuchjes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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