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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로이드존스

죄와 그 결말 (민 11:4-6)

by 복음과삶 2010. 7. 12.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민 11:4-6)

   

저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 속에 나타난 특별한 사건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킴으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를 함께 상고해 보기 원합니다. 제가 만약 죄를 순전히 신학적이고 학문적인 방식으로만 다룬다면 아마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물론 그런 주제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좋을 것입니다만 우리하고는 별 상관이 없는 걸요" 그런 식의 대답은 실제적인 사람들의 삶에 나타난 실제적인 사건에 연루된 죄 문제에의 논란으로 인해 이미 배제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실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우리가 죄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인지 말 것인지 생각하고 있을, 즉 순전히 문제를 공론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을 여유가 없게 됩니다.

  

이 죄라는 주제에 접근하면서, 저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당신 설마 순전히 이런 부정적인 주제를 토론하는 데에 시간을 소비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왜 좀 더 긍정적인 주제를 다루어 보지 그러십니까? 당신이 청교도적인 기질에 사로잡히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흉측하고 어둡고 고약한 것을 설명하고 음미하는데에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주면서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움과 진실함을 생각하게 하는 데에 시간을 쓰는 것이 더 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그런 자세는 강론에 대한 완전히 그릇된 견해를 드러내 줍니다. 그런 비평이 내포된 의미는, 강론은 항상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보다는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대언자들에게 어떤 것들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것이 강론에 대한 보편적인 견해이며 오늘날 사람들의 상태에 대한 대체적인 설명임을 저는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종종 치과의사 앞의 의자에  앉게 됩니다. 그리고 의사가 야기시킨 통증으로 인해 분개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의사의 행위에 제동을 걸려고 그의 손을 잡아버리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치과의사의 임무가 우리를 단지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때때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영구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필수적입니다.

  

복음전파에 있어서도 이와 동일한 진리가 적용됩니다. 즐겁지 않은 것들을 말하면서 정말로 기쁠 하나님 말씀의 강론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만약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다면 그리고 그의 관심이 하나님의 모든 뜻을 증거 하는 것이라면, 그는 즐겁지 않은 일들을 해야만 하는 때들도 있습니다.

  

게다가, 부정적인 것들을 먼저 다루지 않은채로 곧바로 긍정적인 것들만을 접하겠다는 생각은 항상 어리석기 이를데 없는 논리입니다. "의사 선생님, 저를 진찰하지는 말아주세요, 제가 원하는 것은 저의 고통을 덜 수 있는 것만 해달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그런 사람을 설명하는데에는 한 단어가 썩 어울는데 그것도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서 그렇다는 데에 여러분도 동감하실 것입니다. 즉 그런 사람을 '바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라는 거대한 문제에 대해 논의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도 이 진리는 그대로 해당됩니다.  필요한 것이 그저 통증을 더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환자가 있다면 그거야말로 문제입니다. 죄에 대한 강론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주제에 대한 자기들의 견해가 천박하고 피상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모두에게는 바로 이 메시지가 필요합니다.

   

죄에 대해 근본적으로 그릇된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견해는 두 가지의 주된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죄가 겨우 그의 행동과 행위에만 관계된다고 생각하는 경험이 있습니다. 그는 죄가 심각한 질병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단순한 두통 정도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두통은 전혀 심각하지 않은 증세에 불과 하다고 느낄 수 있는 반면에, 인간의 신체구조 전체에 무엇인가 심각한 이상이 발생되었다는 징조일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인 추세는 죄를 삶에 수반되는 일 정도로 취급합니다. 그런데 사실 죄는 언제나 인간의 본성을 공격하는 그 무엇이며 인간의 핵심 본질을 공격하는 심각한 질병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 비록 행위는 악하지만 본심은 착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자주 난무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와 거듭남과 회심의 필요성에 대한 가르침에 거세게 반기를 드는 이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직면해야만 할 문제입니다. 죄에 대한 두 견해들 중에서 어느 것이 옳은 것입니까? 현대적인 견해입니까, 아니면 죄란 삶의 본질을 더럽히고 황폐케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성경적인 견해입니까?

   

한 편의 강론만으로는 이 주제를 철저하게 다루는 것이 불가능함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자손의 이야기에 나오는 이 사건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죄에 대한 올바른 견해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 함께 그들의 이야기를 살피면서 우리들 자신을 또한 살펴봅시다.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이스라엘 자손들이 구원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이룩하신 구원에 대한 묘사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약 성경의 이야기는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기꺼이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완벽한 묘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민수기 속에서 죄의 본질에 대해 서로 다른 세 관점을 보여 주는 사건들을 대합니다. 우선. 이 이야기는 죄를 일종의 정신 착란으로 묘사하면서 죄의 지독한 어리석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죄가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준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죄의 비극은 그것이 인간의 가장 고상한 기능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입니다. 신약성경과 구약성경 모두에서 이 영향력에 관한 말씀들이 나옵니다. 이사야는 그것을 이렇게 썼습니다. "소는 그 입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사1:3) 예레미야도 매우 흡사한 말을 합니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렘8:7)  

 

금수들은 이해하는 듯한데 사람만이 홀로 어리석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금수는 본능으로 행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은 금수보다 위대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생각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바로 그것을 가지고 자신을 짐승의 수준으로 낮추었을 뿐아니라 짐승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낮추는 실패를 했습니다. 이것이 죄의 어리석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감독의 채찍질에 맞고서도 또한 자녀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보고서도, 지긋지긋한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그 삶을 이 백성들이 되풀이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그런데 이들은 바로 그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런 태도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말할 수 없는 어리석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죄의 특징입니다. 옳지 못한 일의 결과로 고통을 받게 될 그런 일을 자초하게 됩니다.  다시는 그런 식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동일한 짓을 되풀이하며 고통과 자책감을 주었던 바로 그 짓을 다시 합니다. 죄는 우리를 바보로 만듭니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비이성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합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더 심층적으로 연구하면 우리는 언제나 죄와 함께 수반되는 환멸의 요소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보냈던 시절을 사모하며 상상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유일한 설명입니다. 죄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한지 그들은 한때 먹었던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감독자의 채찍과 자녀들이 당한 대학살에 대해서는 전혀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그저 좋았던 것들만 생각나게 하고 진저리 났던 일들은 기억 속에서 지워버림으로써 죄는 사람을 속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있었던 오직 즐거웠던 요소들만을 생각하고 불쾌했던 일들은 의도적으로 무시해 버리는 행위는 인간 지성의 기능이 매우 천하고 비열한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표징입니다.

  

죄는 우둔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음의 극치는 그가 어리석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사람에게 전혀 고마워하지 않고 평상시 충고를 듣고 분개하고 생각하려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성적인 기초 위에서 우리의 삶을 살아갑니까? 우리는 우리의 행동들을 논리적인 방법으로 생각해봅니까?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들,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그리고 양파들에만 흥미를 갖는 것은 아닙니까?

  

죄의 두 번째 특징은 타락하게 하는 영향력입니다. 죄는 우리의 본성을 비뚤어지게 합니다. 죄는 우리의 지성과 이해력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행하지 못하게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시기 원하시는 바를 거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마음으로부터 악한 생각이 나오는 것입니다.        

 

죄가 가지고 있는 타락하게 하는 영향력은 이스라엘 자손의 이야기 속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에 있는 좋은 것들만  사모했습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죄는 만나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서 나타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민11:6) 그들의 말에는 조소와 경멸이 담겨있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경멸하였습니다.

  

이 태도에 숨겨져 있는 어리석음이 어떻게 표출되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보내 주신 것은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가장 멋진 기적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이 백성들은 애굽의 오이와 양파가 하나님께서 주신 기적의 빵보다 무한하게 뛰어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죄가 갖는 타락케 하는 요소의 본질을 봅니다. 헬라인들이 복음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긴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값없는 은총을 받기보다는 자기들의 이지(理智)를 사용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넘어지게 하는 거침돌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자신들의 선행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주시는 구원의 은총은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이미 완성된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대신에 불가능란 것을 시도하려고 고집하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그런 사람을 본질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이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는 모든 사람의 상태가 바로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기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고 싶어합니다.

 

만나에 대한 이스라엘 자손의 언사에는 그들의 어리석음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오만함도 나타납니다. 그들은 경멸적으로 "이 만나"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의 은총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죄의 또 다른 특징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기사를 읽으면서,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사람들이 퍼부은 비아냥거림이나 조소와 경멸을 보실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주님에 대한 증오를 표명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진정한 본성을 드러내었습니다.

 

이 십자가의 전파, 즉  '이러한 구원 사업'이라고 하는 것만큼 조소와 경멸을 많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타락케 하는 죄의 극악성이 이 십자가 앞에서 나타납니다. 자연인들에게 끊임없이 걸림돌 역할을 해 온 것은 복음의 초자연적 요소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에서 벗어나 안식으로 인도되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를 공급하셨는데, 그들이 항상 사모하는 것은 애굽의 오이와 양파였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사는 것이 광야에서 방황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너무도 옹색합니다 " 이런 식으로 거절하는 것입니다. 지옥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궁극적인 안식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거부하는 것은 한동안 살아내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죽어 가는 세상의 쾌락이라는 찰나적인 것을 예수님께로 가는 삶보다 더 좋아하고 있습니다.  죄의 가장 무서운 점은 배은망덕입니다.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해주신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자손의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세우셔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홍해를 안전하게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들은 거듭해서 하나님께서 반항했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 속에서 그들이 "이 만나"라고 경멸적으로 말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선물이 자기들에게는 무가치한 것이나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다지도 지독한 배은망덕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보다 더욱 나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만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고 당신이 사랑하시는 바로 그 아들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으로부터 오셔서 자원해서 우리 죄를 지시고 나무 위에 달리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죽음을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의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주님답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도 경멸과 조소와 멸시로 대단합니다.  오. 이 끔찍한 배은망덕이여!

  

우리 함께 우리들 자신을 이 구약성경의 사건에 비추어 살펴봅시다. 그리고 만약 우리 안에 그와 동일한 태도의 요소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우리는 부끄러움과 통회로 한 번에 그리고 완전히 회개할 수 있을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예수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통한 용서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 http://lloydjone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