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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로이드존스

죽은 정통 (창 26:17-18)

by 복음과삶 2010. 7. 7.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창 26:17-18)

 

이제는 부흥의 장애 요소들 가운데 다른 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는 이 요소들을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죽은” 정통이라는 말보다 이것을 더 잘 묘사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수세기에 걸친 교회 역사는 이것이야말로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임을 분명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분명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복음적인 사람들 각자에게도 가장 큰 위험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교인들이나 어떤 부류의 교회들이 당면한 가장 큰 위험이 바로 이것입니다. 죽은 정통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정통이란 무엇을 뜻하는지 분석해 봅시다. 분석은 고통스러운 작업이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죽은 정통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첫째 이것을 다소 일반적으로, 즉 하나의 태도나 일반적인 상태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저는 이 죽은 정통을 가장 잘 요약하는 말은 “자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젠체함”이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지만, 이 둘을 묶어 “잘난 체하면서 자만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는, 진리를 믿는다는 것을 아는 자들의 상태가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질문하고 교리를 물어 보면 아주 빠르고 정통적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그들의 신조나 믿는 것에서는 흠을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자만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것들을 믿을 뿐 아니라 그들 자신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족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믿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믿지 않고 정통적이지 못한 사람들, 자유주의적이며 현대주의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공박합니다. 물론 정통적이 된다는 것은 좋습니다. 비 정통은 나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방식이 무섭도록 슬픈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젠체하는 것, 자만과 만족의 느낌이 가미되면, 우리의 믿음에서 바른 것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욥은 자기를 위로하러 온 친구들에게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욥12:2)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태도가 욥의 친구들의 경우를 통해 완전하게 예증됨을 발견합니다. 오, 그들이 말한 것은 다 옳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쌍한 욥에게는 소용이 없었으며, 오히려 욥의 상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었습니다. 욥이 그들을 보고 반박했던 것은 제가 묘사하려고 애쓰고 있는 바로 그 젠체하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태도와 모습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식은 온통 변명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옳은 것이 틀림없으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우리의 입장을 변호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에 빠진 교회나 개인은 거의 모든 시간을 변명하는 데 쏟음을 여러분은 발견하실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변증학이 큰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것이 주요한 관심거리가 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출간하거나 읽은 책들은 거의 한결같이 변증학 저서들입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이것은 매우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지난 80여 년 동안의 복음주의의 상태에 대한 의견을 진술해 달라고 한다면, 저는 그것이 바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하자면 스스로 움츠러들고 일종의 철의 장막이나 보호막을 형성하고 온힘을 다해 변호하고 변증학을 위해 정력을 쏟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든지 가까스로 붙잡고 사용하는 것을 보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탁월한 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믿는다는 희미한 조짐을 드러내기만 하면 사람들은 그 즉시 그를 부여잡습니다. 그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처럼 됩니다. 아니, 소문이 돌고 돌아 왕가(王家)와 다른 이들까지 심오한 영적 체험을 가졌다는 식으로 발전해 갑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입장을 변호합니다. 여기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흥분과 힘을 쏟습니다. 이것은 변증적이고 소극적인 방식입니다. 자신의 입장을 유지하는 데만 만족하는 것이 죽은 정통의 한 부분입니다.

 

이것을 규정하기 위해 성경에서 사용하는 또 다른 어휘가 있습니다. 그것은 “시온에서 안일하게”있는 상태입니다. - 여러분은 이 표현이 아모스 6:1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이 표현은 사람들이 스스로 안전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데 충분한 종교를 갖고 싶어하고,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상태를 묘사한 것입니다. 그들은 안일을 추구하고, 일종의 안보를 원합니다. 결국 죽음이라는 커다란 사실은 멀리하고 그 죽음 너머의 일도 생각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만 종교적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신앙 자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하고 적극적인 소원도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매우 한정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로 안일한 것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그들은 다만 일종의 낙하산으로서의 종교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제 낙하산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우발적인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이러한 기구를 가까이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삶 전체를 그것에 대한 생각으로 다 써버리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것에 신중하고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속한 것들에만 삶의 주요한 부분을 드리고 또 그것들에만 관심을 쏟으면서도 필요한 경우에는 종교라는 설비를 이용합니다. 안전하게 느끼는 종교면 됐지 그 이상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식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문제로 이어집니다. 제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이 인식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보편적인 메시지”라 할 수 있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들은 특별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보편적으로 약간 고무시켜 주는 것을 원하며, 보편적으로 자기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원합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흥미 있는 일입니다. 그들은 보편적인 생각들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들은 종교란 삶에 대한 선한 관점을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속한 것은 너무 많은 것은 원치 않습니다. 보편적인 개념이나 생각들에 자신을 국한시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얼마나 흥미롭고 얼마나 마음을 고무시키는가.” 물론 그들은 문학에서 인용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가!”

 

제가 여러분에게 묘사해 드리고자 하는 것은, 매우 보편적으로 말해서 후기 빅토리아식 종교와 에드워드식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계속 존속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종교를 갖고 있다. 그것이 모두 옳다고 생각한다.” 자,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집으로 나아올 때는 어떻게 합니까? 구원의 위대한 교리는 설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아니, 우리는 인물연구에 관심이 있다. 그것은 참 재미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 인물들을 살펴보고 그것을 통해 즐거움을 얻자. 얼마나 재미있는가! 그것은 소설만큼 좋다. 물론 우리를 어지럽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같은 사람을 생각해 보자. 이러한 인물들과 그들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는 것은 흥미 있다.”

 

지난 19세기 말엽의 문학이나 20세기 초의 문학을 살펴보면 이러한 노선을 따라 출간된 책들이 정말 부지기수라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인물 연구, 이러저러한 인물 연구, 성경을 재미있게 접근하게 하는 전형적인 인물들에 대한 연구서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보편적이고 너무나 멀리 떨어진 얘기이며 너무 흥미가 있어서 우리와 우리의 난제들과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그런 유의 이야기들이 그처럼 보편적으로 전해져 온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요점을 말씀드리면서 사람들이 탐사 당하고 간섭 당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반드시 지적해야겠습니다. 교훈은 언제나 보편적이고, 원근법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제1대 수상을 지냈던 멜번 경의 진술을 저는 자주 인용합니다. 그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아주 완벽하게 표현했습니다. “만일 종교가 개인적인 데서부터 출발한다면 상황이 형편없게 되었을 것이다.”

 

종교는 옳고 보편적인 것입니다. 내가 필요할 때 가서 사용할 수 있게끔 뒷전에 있어야 하며, 그것이 나를 어지럽혀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런 식입니다. 구약에서 우리는 언제나 이것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은 선지자들에게 “우리에게.....부드러운 말을 하라”(사30:10)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거짓 선지자들이 참 선지자들보다 언제나 더 인기가 있었습니다. 저 불쌍한 예레미야가 백성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까? 이 사람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어째서 그처럼 인기가 있었습니까? 그들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하다. 평강하다”고 말합니다.

 

이 거짓 선지자들을 질책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6:14).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설교자들과 선지자들, 또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걱정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는 선지자들과 설교자들에 대한 질책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참 선지자는 와서 탐사하고 정밀하게 꿰뚫어보며 정죄하고 질책합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

 

말이 난 김에 말하자면, 제게 가장 큰 기쁨을 주었고 제 목회에 대해 사람들이 한 말 중에 가장 큰 용기를 주었던 말은 이것입니다. 어느 부인이 제게 항의하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마치 우리가 죄인들인 것처럼 설교한다!”

 

정말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탐사 당하거나 시험 당하지 않으려 하며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밖에 있는 죄인들이나 자유주의자들은 비난해야지. 그런데 우리는 정통주의자들이 아닌가! 우리는 조사해 볼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가르침이다. 우리는 이러한 보편적인 강좌와 보편적인 연설을 듣고 싶고 인물 연구를 하고 싶다. 얼마나 흥미롭고 멋진가! 우리를 어지럽히는 일을 하지 말라. 우리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성경이나 교회사에서 보듯이 이러한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들을 조사하거나, 불안감을 느끼게 하거나, 꿰뚫어보는 어떤 것을 싫어합니다.

 

저는 결국 이 지점까지 이 문제를 끌고 왔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종교나 예배는 생명력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가지만 하나님을 만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마음도 없습니다. 예배 시간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는 주일 아침마다 언제나 이렇게 하며 이것이 관례요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그저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임하시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사람들의 존재 전체가 사로잡힘을 당하며,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고, 하나님의 능력을 느낄 수 있으며, 그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이 형식적이고 그저 모든 것이 잘되어 간다는 식으로 자만에 빠진 모습입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그러한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가면서 단지 전능자에게 아침 방문을 하러 간다는 인상을 주었어요.” 옳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 주시고 엄청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집에 갑니까? 아니면 그저 설교를 듣기 위해, 찬송가를 부르기 위해, 다른 어떤 사람을 만나기 위해 갑니까?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고, 거룩한 성령께서 교회 안에 계시며, 우리가 그의 능력의 감동하심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자주 듭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함께 나아온다는 생각을 얼마나 자주 합니까? 우리가 바른 믿음을 갖고 있다는 자만에 빠지는 것은 정말 섬뜩한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생명과 생명력과 능력, 예배를 진정 예배되게 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게 하는 그러한 힘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이 죽은 정통의 몇 가지 표증들을 저는 잘난 체하며 자만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태도로 요약해 드렸습니다.

 

이제는 약간 다른 시각에서 살펴봅시다. 이 죽은 정통의 두번째 특징 - 물론 이것은 첫 번째 특징에서 직접 연유되는 것입니다. - 은 열심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만일 보다 더 성경적인 용어로 이것을 표현하기 원한다면 저는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짓고 있다”고 말입니다. 열심을 혐오하는 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교회사와 친밀한 사람들, 특히 부흥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열심을 비난하는 것이 부흥의 시기에 가장 활동적이었던 사람들에게 가장 큰 거침돌이 되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들은 로널드 놋스가 쓴 “열심히”라는 책을 읽어 보셨을 지도 모릅니다. 이 책의 전체 주제는 열심에 빠지는 시기가 여러 번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저자는 그것을 탈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냉담하고 초연한 자세로 열심을 싫어합니다. 역사를 통해서 그것은 계속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예를 들어, 18세기에 속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조지 휘트필드는 감독들에게 열광주의라는 비난을 받으며 그들의 비난에 답변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자 여기 좀 보라.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당신의 교리가 아니라 교리를 설교하는 당신의 방식이다. 당신의 방식이 문제다.”

 

존 웨슬리도 역시 똑같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로부터도 그러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왜 다른 사람과 같이 설교할 수 없었습니까? 그는 무엇에 대해서 그처럼 흥분했습니까? 어째서 그 모든 것이 사람들을 어지럽게 했습니까? 수산나 웨슬리는 매우 경건한 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들들 중에서 이 웨슬리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갑작스럽게 영성적인 신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와 관련된 18세기 문헌을 읽어보면 단번에 이러한 비난이 부단히 쏟아져 나왔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주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열심을 이처럼 반대하는 것이 부흥을 저해하는 모든 장애물들 중 가장 큰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죽은 정통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빠질 수 있는 특별한 위험이 이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가 극히 어려운 주제임을 솔직히 시인합니다. 정말 선을 긋기가 매우 어려운 어떤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선을 그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또 교회사도 역시 그러합니다. 다행히도 이 주제는 성경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견해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안내자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을 읽어보십시오. 바울은 여기에서 바로 이 주제를 다룹니다. 여러분이 부흥을 만나는 순간 고린도전서 14장은 중요한 장이 됩니다. 이 14장을 즉시 읽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들어와 충만하게 되고, 억제되지 않은 생명과 삶이 과도하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의 상태와 조건을 살펴볼 때 우리가 서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 교훈을 붙잡아야 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우리를 돕고 안내해 주는 두 가지 위대한 원리가 제시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을 긋기란 어렵습니다만 그 선이 있습니다.

 

첫 번째 원리는 모든 일을 적당하게 질서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고전14:40). 그러나 또 다른 진술이 있습니다. 즉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한다는 것입니다.(살전5:19). 그러므로 우리는 두 입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두 입장은 분명 신약성경에서 발견되는데, 그 각각을 특징짓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이 말은 어떠한 잘못을 범한 사람들에게 쓰여 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범한 잘못 가운데 하나는 혼돈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큰 혼돈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때때로 그들이 모여서 함께 말하였다는 사실에서 야기된 문제입니다.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는 문제에 대해서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성경적인 방식으로 보지 않았고, 동시에 다 같이 말을 하였습니다. 사도는 이렇게 하는 것은 아주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33).

 

그는 말합니다. “외인들이 와서 너희들이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을 본다면 한 가지 결론만을 내릴 것이다. 즉 ”너희를 미쳤다하지 아니하겠느냐“”(14:23).

 

이것은 결코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는 만일 동시에 방언을 말하고, 사람들은 그 말을 듣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혼돈만 일으킬 뿐이며 복음 전체가 오도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살펴보십시오. 무엇보다도 거기에는 질서가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진실로 체험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도 거의 혼돈이 기독교의 표증이라고 생각하는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즉 동시에 큰소리를 치지 않으면 성령이 함께 계시지 않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혼돈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린도전서 14장을 읽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도가 한 번에 한 사람씩 말해야 한다고 한 말을 주목해야 했습니다. 처음 사람이 말하다가도 다른 형제가 말할 것이 있는 줄 알면 멈추고 다른 형제에게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언제나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쩔 수가 없어요.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이는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들에게 이렇게 심오한 말을 합니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고전14:32).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해서 자신은 어쩔 수 없이 큰소리를 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사람이 자제할 수 있는 한 이렇게 해야 합니다. 또 이렇게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혼돈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혼돈은 언제나 복음을 오도시킵니다.

 

이제 저는 첫 번째 요소와 함께 나타나는 두 번째 요소를 언급하겠습니다. 그것은 흥분, 또는 거짓된 기쁨의 의식입니다. 아니, 이것은 순전히 육체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흥분시킬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방송에서 축구 중계를 하는 것을 들으면 흥분, 동물적인 흥분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소리치되 결국은 자기 목이 쉬기까지 고함을 칩니다. 이것은 순전히 육체에 속한 것입니다. 예배와 종교의 영역에도 이러한 것이 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일부러 이러한 일을 만들어 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흥분 상태로 사람들을 몰아가면서 사람들이 매우 행복하다고 상상하게끔 만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육체에 속한 것이며, 육신적인 기쁨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이러한 일들을 적당하게 해야 한다고 명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시로 하나님께 드리려 합니다. 또 한 사람은 영으로 노래합니다. 또 한사람은 예언의 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위대한 사도는 말합니다.

 

세 번째 요소는 감정주의입니다. 저는 감정, 또는 정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감정주의는 감정이 격한 상태에 빠진 것을 의미합니다. 감정이 모든 것을 지배합니다.

일종의 환각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감정주의가 나쁘다면 일부러 감정을 일으키려고 애쓰는 것은 얼마나 나쁘겠습니까? 일부러 감정을 유발시키려고 애쓰는 것은, 그것이 노래이든 주술이든 아니면 원시적인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어떤 춤이든 이러한 것들은 모두 신약성경의 정죄를 받습니다. 단순히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것을 정죄합니다. 감정은 이해와 마음을 통하여 진리로 인해 접근해야 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직접 공략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거짓된 것이고 틀림없이 문제를 야기 시킵니다. 그러므로 감정주의. 특히 인위적으로 감정을 유발하려는 시도는 어떠한 것이든지 분명히 부흥을 크게 저해하는 요소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틀림없이 부흥을 오도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흥의 역사는 바로 이 문제에 있어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부흥을 반대하는 첫 번째 이유로 이것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흥은 순전히 감정주의다. 그 혼란을 보라. 그 동물적인 흥분을 보라. 사람들이 제정신을 잃고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히스테리에 빠져 있다.” 언제나 이러한 비난이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곤 했습니다. 신약성경이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저는 다시 데살로니가전서5:21을 인용합니다. 같은 문제가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거기에는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스스로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다음에 어째서 그것이 그러한 경향을 나타내게 되는지 그 이유들을 살펴보고 싶습니다. 저는 단순히 그것을 사실로 인정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영들을 시험해 보라.” 그것들을 가늠해 보고,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니면 육체에 속한 것이거나 진리를 위장하여 육체에 작용하는 마귀의 장난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귀가 그러한 속임수를 써서 사람들의 눈에 그 모든 것이 왜곡되게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닌지 알아보라는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명령에 대한 해석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사도가 명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다음의 요점도 붙잡아야 합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첫 번째 요점, 곧 모든 일을 적당하고 질서 있게 하라는 명령에 대해서는 매우 분명히 합니다. 아니, 그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능란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점을 너무 분명히 하려하다가 그만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을 범한다는 것입니다. 거짓된 것을 막는다는 구실 아래 동등하게 거짓된 다른 입장으로 넘어가 버립니다. 제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예를 들어, 혼돈에 대한 두려움을 생각해 봅시다. 이런 사람들에 관한 한 아무 위험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들의 입장은 모든 것이 완전히 통제되고 , 훌륭하며, 질서 있고, 바르며, 규범적이고, 무엇보다도 칭찬할 만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어떤 교회들을 신약 서신에 비추어 본다면 아마 여러분은 차이를 발견할 것입니다. 그들은 신약의 모든 지시 노선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교회는 형식적이고 죽어 있으며 겉으로 보기에 꽤 훌륭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입장에서 어떠한 일들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예배의 형태가 형식적이 될 때 성령께서는 덜 나타나시며, 여러분은 신약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된다는 것을 언제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약 교회의 매우 중요한 특징은 자발성, 생명력, 생생함. 활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과 그 감화력에서 멀어지게 되면 모든 것이 형식적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예배의 형식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침체기에 빠진 교회는 예배 의식에 있어서 더 형식적이 되고, 예배 형식을 채용하여 공 기도서나 의식서로 돌아가는 경향을 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형식 종교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여러분이 부흥을 만날 때마다 그러한 유의 모든 일들이 멈추게 됨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약의 단순함 속으로 되돌아갑니다. 대성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호숫가의 배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 예배를 드리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또 고린도나 데살로니가, 로마 이 외의 곳에서 사람들이 서로의 집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아주 현격한 대조를 이룹니다. 어떤 의식이나 공기도서나 절차나 예복이나 옷을 차려입는 그런 일이 전혀 없고 다만 성령께 속한 자유와 일들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부릅니다. 각성과 부흥이 일어나는 시기에는 바로 이러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을 맞지 않을 때에 성가대에 중점을 둡니다. 또 성가대와 성가대의 독창자들을 돈주고 사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회중들은 가만히 앉아서 듣기만 합니다. 성가대가 그들을 위해서 노래를 부릅니다. 이것이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모든 일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런 일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날 여러분은 교회 생활을 프로그램화하려는 매우 무서운 성향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까? 모든 것이 다 짜여 져 있습니다. 어느 한 지점을 향하여 모든 일들이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성령을 소멸하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모든 항목이 미리 정해져 있고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어느 시점에 시작하여 어느 시점에 마쳐야 하는지가 다 정해져 있습니다. 목회를 하는 제 친구 가운데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일마다 다른 교회에 가서 순회 설교를 하면 할수록 이러한 일들을 더 많이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적인 교회에서마저 강사목사에게 순서가 적힌 종이를 준다는 것을 저는 자주 듣습니다. 그리고 순서지대로 행할 것을 종용합니다. 즉 11시에 시작합니다. 성경을 봉독하고 순서지에 적힌 모든 것을 다 진행하여 12시가 됩니다. 그런 다음 축도가 이어집니다. 제가 볼 때 이것은 아주 심각한 일입니다. 긴 설교가 덕이 될 것이 없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설교의 길이를 위해서 설교를 길게 늘어뜨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성령께 기회를 드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프로그램에 너무 매여 있어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틈이 없지 않습니까? 어째서 이처럼 형식적이 되었습니까? 모든 것을 이처럼 묶어 놓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갑자기 임하시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저는 매우 심각하게 이 문제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누가 어떠한 관심을 같든지 간에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며 이것이 바로 제가 라디오 방송으로 설교하지 않는 주요 이유입니다. 한번은 방송에서 종교프로그램을 담당하는 사람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성령께서 갑자기 임하시면 당신이 계획한 프로그램은 어떻게 됩니까?” 그는 그 문제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방송을 제작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프로그램에 매여 있습니다. 저는 사무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그와 같은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정확하게 시간을 지켜야 합니다.

 

제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교회에 그러한 요소가 들어와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나라에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몇 년 동안 미국에서도 그러했습니다. 모든 것이 분초를 다투어 정확하고 기술적으로 질서 있게 진행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는 묻습니다. 그런 경우에 성령께서 자유롭게 역사하실 틈이 있습니까? 아니,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가 믿는 신에 통제 당하는 대신 우리가 신앙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제 말을 믿으십시오. 부흥이 일어날 때에는 언제나 체험했던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고, 시간문제를 생각지 않게 될 것이며, 시간이 가는 것을 잊어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에 통상적인 시간에 예배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 끝날지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성령께서 자유롭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혼란을 두려워함으로써 하나님의 성령을 소멸하는 다른 극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인위적인 흥분이나 거짓된 기쁨을 두려워하는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다시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제가 체험한 한 사건을 들어서 그것을 지적해 보겠습니다. 몇 년 전, 휴가 기간 동안 다른 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거기에 모인 회중들은 아주 좋은 사람들이었고 열심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정통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설교를 했습니다. 그가 들고 나온 본문은 “구름 속의 무지개”였습니다. “구름 속의 무지개”, 참 영광스럽지요. 그러나 그 설교자는 가련하게도 거짓된 기쁨을 두려워한 나머지 거짓된 기쁨 문제를 다루고 거짓된 평안의 위험을 경고하는 데 그의 설교 전체를 투자했습니다. 저는 제 형제를 비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실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것이 제게 미친 영향은 구름밖에 아무 것도 없었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게 할 정도였고, 우리는 무지개를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거짓된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참된 것을 소멸했습니다. 우리는 극단적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극단에서 저 극단으로 과격하게 흔들립니다. 비록 정통적이나 완전히 죽어 버린 교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된 흥분이나 어떤 영적 움직임이 지나치게 나타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성령을 소멸하거나 방해하거나 참된 것을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드릴 마지막 요점은 감정주의를 두려워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감정을 완전히 불식시켜 버리는 큰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물론 감상에 깊이 젖어들 수 있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마는,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감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감상이란 약하고 힘이 없는 것입니다. 감상은 메마른 사람이 자기 속에 아직 어떤 느낌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신하기 위해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상을 원치 않습니다. 눈물을 잘 흘리는 병든 감상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정서, 감정을 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특성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에 울어본 적이 언제였습니까?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우는지 조차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가 기쁨에 겨워, 하나님의 영광을 의식하면서 순전한 기쁨에서 울어본 적이 언제였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감정을 두려워합니다. 우리의 교육과정이나 자라난 배경이나 삶에 대한 태도는 감정을 꼼짝 못하게 합니다. 감정을 나타내는 것은 훌륭하지 못하고 멋지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없애 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이것을 묶어 버립니다. 오늘날 삶의 많은 부분들이 그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위대한 설교자들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웅변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그저 대화로 하고 이치적으로 따져가며 합니다. 열정을 가져서도, 감동되어서도, 어떤 사람이 당신을 감동케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조용한 언사로 진술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말할 때조차 조용하게 하고, 주님의 영광에 대해서 말할 때도, 성령의 충만함에 대해서 말할 때도 감정 없이 조용하게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감정주의를 두려워한 나머지 참되고 건전하며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그 감정을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무엇에 기인한 것입니까? 거짓된 지성주의, 꽤 훌륭하다고 느끼는 것에 대한 거짓된 의식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흥의 가장 큰 장애 요소들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학식을 스스로 자랑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 선조들이 부흥을 만났던 것은 절제와 훈련이 부족했기 때문이며, 우리처럼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칠고 원시적이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들 속에서는 아직도 부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서는 부흥이 일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지적인 자들이다.”

 

하나님이시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지성인 중 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를 보십시오. 그가 감정의 거센 물결 앞에서 움직이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어느 한 요점에서 출발했다가도 갑자기 그리스도의 이름을 언급하다가 논증의 과정을 벗어납니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는 갑자기 장엄한 웅변을 터뜨립니다. 그런 다음 다시 그가 다루던 요점으로 돌아옵니다. 만일 여러분이 좋아하는 표현대로 한다면 사도 바울의 이러한 자세는 무질서, 일관성을 잃어버린 것, 일관성이 없는 진술이라고 비꼬아 말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 사람의 영광이었습니다. 그 위대한 지성인인 그가 진리에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습니다. 조지 휫트필드에 대해서 읽어보십시오. 이 사람이 은혜와 구원의 영광에 관해서 설교할 때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가 설교하는 것을 듣는 자들도 역시 울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도 메마르고 지성적이며 지나치게 자제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주의를 두둔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기각시켰습니다. 다만 정서를 두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키셔서, 거짓된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성령을 소멸하지 않도록 하시고, 너무 점잖고 지성적으로 보이려 하다가 하나님의 성령의 물러가게 하는 일이 없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메마르고 생명 없이 계속 진행하며 ㅡ 정말 쓸모 없고 무력하게 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신약의 이 두 가지 전제를 생각해 봅시다. “모든 일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건대 성령을 소멸치 마십시오. 예언하는 것을 멸시하지 마십시오(여기서 로이드존스가 말하는 예언이란 오늘날 흔히 말하는 유의 예언과 같은 것이라기 보다는 초대 교회 당시에 있었던 성령의 감동으로 나온 예언과 같은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역자 주). 우리는 자유롭게 하나님의 집으로 나아갑시다. 그리고 능력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며,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으로 우리가 녹아지고, 감동 받으며, 부서지고, 우리 자신을 잊게 될 것을 기대하고 나갑시다. 우리는 신약성경에 묘사된 교회의 모습을 점점 더 닮아 가도록 합시다.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예언하는 것을 멸시치 마십시오.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선한 것을 붙잡으십시오.

 

 

출처 : http://lloydjone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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