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승리생활
알란 레드파스(Alan Redpath)
제7장. 참된 보상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수5:3,10)
앞의 두 장에서 우리들은 요단강 뚝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공부하면서 우리들 앞에 다가서 있는 영적전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길갈은 이미 말한 대로 임전태세를 갖추는 장소였다. 길갈은 어떤 이들에게는 시험의 장소였을 것이다. 길갈에서의 교훈은 실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즉, 오순절이 있기 전에 갈보리가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보좌에서 생수가 신자들의 가슴으로 밀려오기 전에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마 당신은 이렇게 말할런지 모른다. "뭘, 그렇게까지 철저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자신에게 덜 가혹하면서 하나님에게서 덜 받고 살면 되지. 지나치게 자기를 전적으로 부정하며 살 필요가 뭐람. 개인적으로 크게 간섭을 안 받으면서도 얼마든지 적당하게 교인생활을 할 수 있어!"
물론 그런 신자생활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실 많은 교인들이 2등품의 수준에 만족하며 그렇게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자원과 권리를 살리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채워지고 하나님을 향해 불이 붙어서 신약의 거룩한 생활로 살고 있는 사람만이 이 시대의 도전을 받아들일 수 있다. 공산주의의 헌신한 수 백만의 열성당원이라도 같은 정도의 헌신을 그리스도에게 한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을 막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런 교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교리가 건전하고 성경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 부족한 것은 비극이다. 하나님이 세상사를 주관하시고 얼마 안 있으면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을 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교회의 조직과 기계적인 일에 너무도 얽매여 있다. 귀하고 바쁜 시간이 개성의 차이와 의견의 대립을 해결하느라고 낭비되고 있다. 교회의 기구적 조직과 각 부서에는 성령의 기름이 말라 있다. 머리로는 온통 정통과 보수의 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마음이 바로잡혀 있지 않은 것은 비극이다. 헌신이 온전치 못한 결과는 이렇게 모순적인 현상이 빚어낸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100%의 헌신이 반드시 있어야 함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적과 싸우기 전에 길갈에서 더 배워야 할 두 개의 교훈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 길갈은 기억과 부활의 장소였으며, 또 단념과 회복의 장소였음을 살펴보았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갱생시키는 회복의 장소에 이어 이제 인식과 계시의 장소로서의 길갈을 생각해 보자.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수5:12).
본문에는 3개의 연속적인 날들이 나와 있다. 14일에 유월절을 지켰고, 바로 그 다음 날에는 만나가 그쳤다.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자녀들에게 얼마나 빨리 응답하시는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기가 무섭게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여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기 시작한 바로 그 날에, 여러 세기를 지나 우리 주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이것은 우리들이 처음으로 모든 자원은 부활하시고 승리하신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예증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그의 승리를 인정하며 그의 능력을 받아들일 때에는 전혀 딴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의 믿음이 십자가에 깊이 뿌리를 박아야 비로소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보좌와 직접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갈보리를 뒤로 바라보면서 한편 보좌 앞에 있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경험에 속한다. 이런 신앙의 단계에서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능력을 하늘에서 받게 되고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신 그리스도는 과연 우리 삶의 생명임을 깨닫게 된다. 모든 생수의 원천이 부활하셔서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에게 있다.
광야의 음식은 만나였었다. 이 음식은 광야의 여행에 적합했었다. 가나안의 소산을 먹을 때까지 만나는 광야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양식이 되어 주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굶기시지 않는다. 우리들에게 베푸시는 일을 의아해 하거나 슬픔과 고난 중에 하나님의 도움을 의심하는 순간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오는 빛은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그리스도의 구속적 삶에 속한 새로운 경지로 인도하고 싶어하신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항상 우리들을 만나의 경우에서 보듯이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정상적으로 이끌려고 하신다. 그렇지만 그런 변화를 우리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현재의 안일한 여건을 바꾸시는 것을 우리는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나이를 먹으면 그만큼 변화를 싫어하고 의심을 많이 하는 것이 상례이다. 옛 집, 옛 방법, 옛 친구처럼 옛 것이 가장 무난하므로 이를 떠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옛 방법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단련시키는 목적에 쓰이고 나면 성장을 위한 다른 방법이 새롭게 소개되어야 한다. 지금 주를 위해서 하고 있는 일보다 당신이 하나님의 눈에 더 귀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당신에게 맡기신 그 일은 당신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온전하게 이루어 나가는 도구와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늘 새로운 여건과 방법을 써서 우리들이 그의 은혜와 능력을 더욱 실감하며 살도록 하신다.
형제여, 당신의 인생을 값지게 살라. 감정에 붙잡히거나 영적 스릴을 추구하거나 요란한 집회에 현혹되지 말라. 이것들은 모두 성숙치 못한 그리스도인들의 일이다. 당신은 유치원생이 아니지 않은가! 당신은 튼튼한 교인이 되고 싶지 않은가? 사탄과 싸울 용의가 없는가? 그렇다면 가나안의 소산을 먹으라. 예수님은 굶주린 자들에게 좋은 것으로 먹여 주신다. 그는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신다. 그는 오늘 자기 이름으로 당신이 겪어야 할 영적 싸움을 안내하시고 전략을 세워주신다. 십자가를 통하여 열매있는 삶을 살면서 보좌의 능력을 믿으라. 믿음의 초보를 벗어나서 하나님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고 당신을 선한 싸움의 전사로 지명할 때까지 전진하라.
길갈은 인식의 장소였다. 광야의 여행은 끝났다. 육신의 경험은 지나갔다. 광야에서 필요했던 음식도 끊어졌다. 이제 축복의 땅에서 새 삶을 살 게 되었다. 우리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새 생명을 받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길갈은 여기서 마치는 것이 아니다. 길갈의 의미는 아직 더 남아 있다.
길갈은 계시의 장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야흐로 전투준비가 거의 완료되었다. 이들은 가나안의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이는 적군을 정복하기 위해서였다. 여호수아가 정찰을 나갔다. 그 앞에는 난공불락의 여리고가 버티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냥 함락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아마 야전 장군으로서 여호수아는 이렇게 자문해 보았을 것이다. "저 성벽을 오르려면 몇 개의 사다리가 필요할까? 저 막중한 성문을 파괴하려면 얼마나 많은 파성(破城)퇴가 있어야 할까?"
갑자기 한 사람이 그 앞에 나타나서 도전을 하였다. 여호수아가 담대히 물었다. "당신은 우리편이요 아니면 적편이요?" 칼을 빼든 이 사람은 누구였을까? 여호수아의 질문은 명백한 답변을 받았다.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일순의 주저도 없이 여호수아는 이 위대한 군대장관의 발 앞에 얼굴을 파묻었다. 40여년 전에 모세에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출3:5)고 하신 분이 바로 이 군대장관이었다.
이 분 앞에 고침을 받은 문둥병자가 엎드려 감사의 절을 하였었고, 베드로가 고기잡이 배에서 내려 그의 발 앞에서 주님이심을 시인하였었다. 요한이 만왕의 왕이시며 주님 중의 주님이시라고 계시록에 밝힌 분이 바로 이 분을 두고 한 말이었다. 여호수아 앞에 서 계신 분은 다름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럼 왜 오셨을까? 여호수아의 사령관 직을 대신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여호수아의 권위를 이양받기 위해서였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첫 번째 이유는 아니다. 그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오셨다.
"여호와의 군대"는 길갈에 진쳤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다. 이 군대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영원부터 하나님의 보좌에 둘러서서 사탄의 세력을 꺽기 위해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하늘의 전투부대이다.
성경에는 이 군대에 대해 여러 번 언급이 되이 있다. 야곱은 피신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이 하늘 군대들을 목격했었다. 엘리사의 종은 그가 시리아 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이 하늘 군대가 대신 적을 분쇄하려고 그 뒤에 둘러 있는 것을 보았었다. 또 주님 자신이 겟세마네를 떠나실 때에 만일 자기가 명령만 내리면 열 두 영(營)이나 되는 천사가 단번에 원수들을 쳐 부술수 있다고 하셨다. 성경의 기사는 결국 한 편으로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한 영적 세력에 대해서,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모든 적들을 멸망시키고 지옥으로 집어던질 것이라는 종국적인 승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호수아는 이 대 군대장관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함으로써 주님의 능력과 지도력을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여리고가 한 번의 싸움도 없이 무너진 것은 별로 놀랄 일이 못 된다. 여호수아 앞에서 적군들이 혼비백산하고 7년 만에 가나안 땅이 정복된 것도 군대장관이 누구였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다. 이것은 천사들의 군대로 승리한 가시적인 땅의 승리였다. 여리고의 성벽들은 일발의 화살도 맞지 않고 그냥 무너졌다. 그것은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군대장관과 연합하여 그의 지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길갈은 계시의 장소였다. 성령께서 이 말을 당신과 나의 가슴에 새겨주셔서 우리들이 겪고 있는 투쟁의 성격과 승리의 비결을 깨닫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늘날 이 세상에 있는 믿음이 없는 강대국들과 공산주의에 생명을 건 수억의 인구 뒤에는 사탄의 권위가 도사리고 있다. 진리에 대해 마음이 궂어지고 복음에 대해 무관심한 현대인의 이면에는 이 세상의 신이 버티고 앉아서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눈멀 게 한다. 성경을 받아들이지 않는 아내나 남편이나 자녀나 부모의 뒤에, 파탄된 가정, 상심한 마음, 망쳐 버린 인생, 실패한 생활 뒤에 사탄이 도사리고 있다. 마지막 은혜의 시기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사탄은 사력을 기울이고 있다.
선교사업의 문이 닫히고, 건강이나 능력이나 영력의 시험에 견디지 못해 실패하는 선교사들 뒤에, 재원이 없어 선교나 전도를 못하는 배후에는 사탄이 신자들의 호주머니와 마음을 조종하며 방해하고 있다.
오늘의 현실은 부흥도 아니고 파산도 아니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이 사실을 인정하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우리들이 시도하는 일을 무엇인가? 우리는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이 방법 저 방법 안쓰는 방법이 없다. 큰 힘을 들여서 선전도 하고 상도 준다.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여 복음을 듣도록 사람들을 초대한다. 그러나 일이 끝나면 우리들은 전투에서 퇴진한다. 피곤과 실망과 당혹 속에서......
어떻게 하여야 할까? 있는 힘을 다 기울여서 전도를 하였건만 참으로 주님을 알고 믿는 사람들은 너무도 적다. 당신은 현재의 교회가 날로 급증하고 있다고 보는가? 사탄은 수 백만의 사람들을 날마다 자기 손아귀에 휘어 넣고 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후10:4).
이 말씀의 뜻을 성령께서 비추어 주셔서 당신의 마음을 붙잡아 주시기 바란다. 주 예수님은 일생 동안 줄곧 이 영적 원수들을 만나셨다. 이 원수들은 광야에서 예수님을 공격하였으며 겟세마네에서 집중적으로 주님께 달려들었다. 또 십자가에서는 사력을 다하여 발악적으로 주님을 이기려고 애쓰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오라"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주님은 사망을 통해 이 모든 유혹과 공격을 이기시고 승리하셨다. 그는 저 하늘 높은 영광의 절대적인 보좌로 승천하시고 모든 권위를 초월하셨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2,23).
하나님은 우리들이 영적 싸움을 하는데 육적인 방법들을 쓰는 것을 인정하기 않는다. 계획, 광고, 출판, 캠페인, 갖가지 대회와 위원회로 무엇을 성취할 것으로 생각하면 잘못이다. 세상의 방법으로 우리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당신은 우리 투쟁의 무기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가?
당신은 100% 성결된 삶을 살려고 자신을 맡겼는가? 알려진 죄는 모두 끊어 버리려고 결심하였는가? 믿음으로 당신은 그리스도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기고 했는가? 그렇게 했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다시 한번 구약의 표현을 빌린다면 "여호와의 기도온의 칼이여"(사7:20)하고 외치게 될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사무실에서 타자만 치면서 일하는 여직원은 별로 주님의 일을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주님과 연결되면 남들이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다. 공장에서 하루 종일 불결한 분위기에서 일하는 교인도 주님을 위해 아무 일도 일어날 것이 없다고 낙심할 일이 아니다. 갈보리는 뒤로 바라볼 뿐 아니라 보좌 위를 올려다 보는 데까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면 하늘의 능력을 받게 될 것이다.
주일학교에서 어린아이들을 놓고 주일마다 가르치는 교사들도 살아계신 보좌 위의 그리스도와 연결이 되면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어 여리고가 무너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러 해가 거듭되어도 믿지 않으려는 남편과 깨어진 가정 때문에 상심하는 평범한 주부도 언젠가 자신의 믿음이 전능하신 주님 앞에 있음을 알고 믿음이 전능자와 연결되어야 함을 인식한다면 새로운 경험을 갖게 될 것이다. 일생을 다해도 못하는 일을 하나님은 거뜬히 해결해 주시어 영혼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일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심장속으로 모시고 가라고 하신다. 그래야 각 교인들이 보좌와 연결이 될 것이다. 우리들이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포로가 될 때 하나님은 일하시기 시작한다. 부흥이 오고 복이 온다.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교회가 막강한 군대처럼 전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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