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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그리스도인의 승리생활-알란 레드파

축복의 왕도

by 복음과삶 2005. 7. 2.

 

그리스도인의 승리생활

 

알란 레드파스(Alan Redpath)


 

 

제4장 축복의 왕도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나니." (수3:11)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넘어가는 역사적인 시점에 당도하였다. 요단의 도강은 천국의 길을 예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 단계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다음 단계로 옮겨지는 것을 예증한다. 즉, 자기 중심의 생활이 끝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생활이 시작됨을 뜻한다. 자기 노력의 원칙에서 살았던 과거를 청산하고 믿음과 순종의 원칙으로 사는 새 삶의 출발이다. 이 두 개의 원칙 사이로 불가능의 강인 요단이 세차게 흐로고 있다.

 

당신은 지금의 신앙생활이 질적으로 매우 저조하다고 느끼는가? 본 장들을 읽으면서 보다 높은 차원의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보았는가? 아마 당신은 본능적으로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경우가 달라. 내가 처한 입장과 문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어. 당신은 내 환경을 모르고 하는 말이야!"

 

나는 물론 당신의 문제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주님을 안다. 모든 것이 그에게는 가능하다. 당신은 넘어갈 수 없는 중첩된 고뇌의 산 앞에서 인생은 도저히 바꿀 수 없다고 체념할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성경의 말씀을 통해 당신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 말씀을 들어보라. 패배의 잔을 승리의 잔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럼 250만의 대군이 요단강을 건너가는 이 대사건을 자세히 공부해 보자.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나니"(수3:11).

 

10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또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이 일로 너희가 알리라." 이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을 이겨내야만 승리가 있다는 엄숙한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가나안은 승리를 위한 투쟁이었다. 이 땅에는 7개국의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 민족들을 모두 전멸시키라고 명령하셨다.

 

여기서 잠시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 여러분 중에는 철저하게 모든 생명을 다 끊어 버리라고 명령하시는 잔인한 하나님은 믿기가 어렵다고 볼 것이다. 네 세대(世代)이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이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창세기 15:16에서 "네 자손은 사대(四代)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네 세대를 지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의 국경 지대에까지 다가왔다. 정복지의 주민들은 죄로 가득차 있었다. 이들에게는 도덕도 윤리도 없었고, 악령들과 교통하는 악습에 빠져 있었다. 신명기 18:10에서 하나님은 악령들과 상관하는 사람과는 누구든지 상종을 말며 그런 자는 마땅히 제외시키라고 엄히 경고하셨다. 이제 하나님이 이런 악한 사람들을 자기 백성 앞에서 몰아내시겠다는 약속이 성취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심각한 투쟁에 직면해 있었다. 그들의 투쟁은 일반 사람들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의 민족들을 지배해 온 악령들과도 싸워야 하는 양면적인 전투였다.

 

이것은 물론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겪게 되는 전쟁의 완벽한 유추이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5:12).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면하고 있는 투쟁은 당신과 내가 날마다 살면서 겪고 있는 형편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당신은 하늘과 지옥 사이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쟁터가 곧 당신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가? 한 쪽에서는 사탄이, 다른 한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당신의 생명을 취하려고 싸우고 있다. 한 쪽은 당신에게 해를 끼치고 또 한 쪽은 당신을 구원한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라는 말은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치루는 싸움의 성격을 명확하게 지적한 말씀이다. 이 싸움은 곧 우리들의 투쟁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투쟁과 함께 승리도 얻게끔 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대하여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 이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베들레헴의 구유에 있는 어린아기며, 갈보리 십자가 위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며,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신자들에게 내리시는 성령이었다. 베들레헴, 갈보리, 오순절, 성육신, 예수님께 씌워진 산더미 같은 인류의 죄, 신자들에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생명, 이 모든 것은 타락한 인류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마스터 플랜이었다. 그 어떤 것도, 땅 위에건 지옥에 있는 것이건 이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지 못한다. 백성들의 죄는 하늘에까지 치솟아 있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가만히 앉아만 계실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삶에도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그것은 무엇일까? 베들레헴, 갈보리, 오순절이다. 즉 성령에 의해 성육하신 예수님이 당신 속으로 들어오고, 십자가에 당신의 죄를 던지며, 그리스도아 함께 죄에 죽고, 성령의 넘치는 능력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자 하는 당신의 삶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모든 남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베들레헴, 갈보리, 오순절에 들어있다. 하나님의 이 계획에 맞서려는 것은 무엇이든 정복해야 한다.

 

그런데 이 목적과 그 실현 사이에는 요단강이 흐르고 있다.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은 불가능의 강이다. 이 불가능은 그럼 무엇일까? 그것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당신은 어떤 나쁜 습관의 노예가 되어 있는가? 당신은 믿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욕으로 몸이 끓고 있는가? 혹 당신은 죄로부터 풀려나오는 경험을 가진 적이 있는가? 당신은 남을 가르치지만 하나님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지는 않은가? 당신은 주 예수님에 대해서 남에게는 말하면서 당신의 생활에서 주님이 주시는 승리의 능력은 모르고 있지 않은가? 아마 당신은 이상과 같은 엄청난 일들에는 상관이 없고 그저 작은 몇가지 일로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알고 있는 그 비밀과 사건들은 하나님의 눈에는 결코 작은 일들이 아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사랑이 없는 정신일 수 있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몰인정한 비판의 버릇이 이 불가능의 목록에 끼여 있을 것이다. 혹은 지나치게 과민하거나, 걸핏하면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자신을 변호하는 일에는 조금도지지 않거나, 남의 성공을 질투하는 일들이 당신의 불가능일지 모른다. 이런 일들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속에 깊숙히 뻗혀 있어서 축복의 길을 막고 경쟁의 담을 쌓게 한다. 우리들은 오늘날의 교회를 멍들게 하고 신자들의 간증을 흐리게 하는 요인들이 이런 것들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 속에 끼여있는 추악한 폐물들이 우리와 가나안 사이를 흐르는 요단강의 홍수처럼 넘치고 있다. 지금까지의 경험은 투쟁과 패배였다. 그러나 앞으로는 투쟁과 승리가 놓여 있다.

 

제 3장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중심이 되어 있다.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리니"(수3:11). 10번 이상이나 본 장에서 언약궤가 직접 언급되어 있다.

 

요단강을 건널 때 제일 먼저 언약궤가 백성들 앞에 있었다. 250만의 백성들은 12제사장들이 아침 일찍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강으로 나아가는 것을 목도하고 언약궤의 의미를 새삼 절감하였을 것이다. 이들은 언약궤의 움직임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이 되었다. 강물이 줄어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서서히 건너갔으면 안 되었을까?

 

백성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12제사장들은 강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강물은 계속 넘치고 있었다. 강변까지 다가섰을 때에도 강물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가엽ㄴ의 물에 제사장들의 발이 닿자마자 마치 큰 손으로 밀어내기라도 하듯이 강물이 뒤로 밀려났다. 제사장들은 마른 강바닥을 밟고 나아갔다.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느니라."

 

이와 같이 우리들도 자기 중심의 삶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삶으로 옮기려면 주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이해가 있어야 한다. 백성들은 불가능의 요단강 앞에서 당황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언약궤는 당당하게 요단으로 나아갔다. 백성들은 이제 주님의 임재가 언약궤로 상징되어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그래서 언약궤가 요단강으로 들어가는 것을 볼 때에 강물이 갈라지고 마른 땅이 나와서 불가능이 극복된 사실을 목도하게 되었다.

 

이 사건에서 우리들이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 예수님은 어느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다. 그 앞에는 요단의 홍수가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그는 갈보리의 언덕으로 올라가셨다. 여기에는 산더미 같은 물결이 그를 뒤집어 삼킬 듯 하였다. 그는 죽음을 당하셨다. 사람들은 그를 돌문이 있는 무덤에 장사지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은 아니었다. "대 승리로 원수를 이기시고 그는 무덤에서 일어나셨다." 바울은 이 주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당신은 이제 우리들의 가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보기 시작하는가?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고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항해서 싸우는 영적투쟁이다. 우리들의 대제사장인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로 가셨고 거기서 무덤으로 가셨다가 승리의 부활을 하시고 우리들의 적을 사로잡으셨다. 그는 사탄의 모든 공격을 퇴치하셨다. 그는 부활하셨다. 승리와 정복과 재림의 왕이신 우리 주님께 찬양을 드리자! 주님은 요단의 강물을 앞에 놓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니 강물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리라." 아무리 세찬 홍수나, 정사와 권력들의 반대가 있을지라도 주님이 이미 정복한 것을 다시 일으키지는 못한다.

 

요단을 건너간 것은 불가능의 극복을 의미한다. 이 능력은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 안에 있다. 당신은 요단강에 발을 대기 전에 당신의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주님을 직시하고 그가 누구시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진지하게 한 진리를 말하고 싶다. 아무리 사탄의 공격이 교묘하고 끈질기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가슴을 먼저 공격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공략하는 일은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공격을 다 받고도 승리하셨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 사실을 확실히 알고 믿으라고 간청하신다. 그리고 나서 우리들의 불가능을 다시 대하고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주 예수님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기를 원하신다. 그 순간 무섭게 흐르던 요단강의 홍수는 잠잠해지고 세찬 물결이 뒤로 밀려나게 되어 마른 땅을 걷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향하는 길은 불가능 앞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에게 매달리는 길이다. 이것은 이론에서 끝나는 논리가 아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느니라"(수3:17)

 

죽어가는 어린 양, 보배로운 당신의 피, 몸값으로 찾아낸 당신의 교회, 빠짐없이 구속받을, 그날이 오기까지, 다시는 죄없는 놀라운 구속, 영원히 서 있을 보혈의 능력.

 

우리들에게 필요한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주님만이 죄와 유혹의 불길을 잡으시고 불가능을 물리치신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 땅이 멀지 않은 곳까지 다가왔다. 소망의 땅이 그들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요단강이 중간에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축복의 땅을 보았지만 불가능이 그 앞에 버티고 있음을 알았다. 이것은 당신의 처지를 설명하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축복의 가능성과 새로운 수준의 삶을 보고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른 패배의 과거를 인정할 것이다. 축복과 당신 사이에는 요단강이 흐르고 있다. 당신은 믿음으로 이 불가능의 강을 딛고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닿자 강물은 말랐다. 이는 언약궤가 그들의 어깨 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은 축복의 땅 대신 언약궤에 시선을 쏟으며 요단을 지났다. 불가능과 축복의 땅 사이에 넘치던 강물이 언약궤로 인하여 마른 땅으로 변하고 그 자리에 굳게 이 법궤가 서 있었다.

 

패배의 광야생활과 승리의 가나안 생활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우리들과 축복 사이에는 이 불가능의 강이 넘쳐 흐르고 있다. 축복의 땅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수치나 교만, 인간적 근성과 나쁜 성품이 불어난 요단의 홍수처럼 흐르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주 예수님께 시선을 쏟고 불가능과 나 자신 사이에 하나님이 서 계신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그러면 "승리한다"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 "승리자"에 대해 논하게 될 것이다. 또 "새로운 축복"이나 "새로운 경험"을 찾으려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의 눈은 주 예수님을 세워놓을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것이다. 여기에 승리가 있다.

 

이것이 축복의 왕도이다. 여기에는 이기심이나 질투심이 없다. 작은 일에 신경을 쓰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에 급급한 마음이나 복을 받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일이 없다. 당신은 이 길을 걸어갈 용의가 있는가? 여려해 동안 당신을 패배자로 묶어온 불가능의 요단강을 당신은 믿음으로 딛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가지 않으려는가? 당신과 요단강 사이에 예수님을 모실 마음이 있는가? 주님께 이렇게 말하라.

 

"주 예수님, 이 순간부터 저는 불가능과 맞서 있습니다. 저는 믿음으로 발을 내딛고 당신의 얼굴만 바라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축복의 땅으로 들어갈 때까지 주님께서 요단의 불가능을 물리쳐 주시고 그 가운데 굳게 서셔서 저를 지켜주십시오. 저 자신은 이제 사라지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있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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