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승리생활
알란 레드파스(Alan Redpath)
제5장. 십자가와 그리스도인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리라." (수5:9)
우리는 구약의 여호수아서와 신약의 에베소서 사이에는 뚜렷한 유추가 있음을 보아왔다.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에게 바라시는 승리와 생명의 길은 이 여호수아서에서 사진으로 보듯 선명하게 나와 있어 우리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앞의 몇 장에서는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에 접근하였는가를 말해 주었었다. 이제 4장에서는 이들이 요단을 건너간 곳에서 어떻게 처신하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이들은 요단을 성공적으로 도강함으로써 말하자면 가나안 땅에 교두보를 확보한 셈이 되었다.
이들 앞에는 여리고가 버티고 서 있었다. 이와 같은 성들을 앞으로 수 백개나 무너뜨려야 할 입장에 있었다. 전투가 눈 앞에 다가왔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축복과 투쟁은 언제나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축복이 크면 클수록 어둠의 세력들과 더 치열한 전투를 하게 된다. 오로지 하나님께로 똑바로 직진하는 사람만이 최상의 보상을 받는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 참여하기 전, 황급히 여리고를 공격하기 전에 길갈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이 있었다. 그것은 기다림의 교훈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가장 하기 힘든 일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기 위해서 기다리는 일이다.
아마 당신도 믿음으로 요단강을 넘어 축복의 땅에 교두보를 세웠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요단을 건너온 기세로 앞에 있는 것들을 단숨에 격파하려고 달려들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들의 싸움은 대전쟁임을 알아야 한다. 축복의 땅에서 우리들이 전투와 승리를 쟁취하기 전에 배워야 할 유익한 교훈들이 있다.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한 장소가 되었다. 여호수아서에서 길갈은 모든 전투의 작전 본부이다. 여호수아는 전투를 치르면서 자주 길갈로 돌아갔었다. 승리한 때에는 물론이려니와 이따금 패배한 후에도 길갈로 갔었다.
길갈은 작전본부로서 작전계획이나 수정이나 명령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전방과의 통신을 긴밀하게 유지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곳은 전력무기와 물자의 공급지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전투에서 이기려면 전방과 기지 사이에 분명한 통신망을 유지하여야 한다. 축복의 땅과 길갈 사이의 통신은 어떤 일이 있어도 두절되어서는 안된다.
길갈에서 우리들이 배워야 할 교훈은 6가지이다. 그 중에서 우리들이 지금 배우게 될 두가지 교훈은 승리와 구원을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들이다. 이것은 승리의 한 방편이 아니고 승리의 유일한 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두 가지 길이 있지 않다. 이 길은 이상이나 이론이 아니다. 신기하지도 않고 괴이하지도 않다. 극단적인 교인들이 즐겨 택하는 감정이나 신비나 독단에 기울어진 방법이 아니다. 나는 당신이 승리의 삶을 참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자녀가 걸어야 할 이 유일한 구원의 길을 보여주고자 한다.
첫째, 길갈은 '기억의 장소'였다. 4장의 앞 절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요단강에서 12개의 돌을 취해 그 날 일어난 일을 기억하도록 요단강의 서편에 두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서 있었던 요단강에서 돌을 취하였다. 뿐만 아니라 돌 12개를 더 취하여 제사장들이 서 있었던 강 한가운데의 바닥에 세워놓았다. 그래서 강이 넘치지 않을 때에는 언제나 이 돌들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곳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서 건너온 곳이었다.
가끔 있었던 패배나 자주 있었던 승리의 시간에 여호수아는 이 장소로 돌아오곤 했었다. 그리고 다음 세대들이 이곳으로 돌아오면 "이 돌들이 무슨 뜻이냐?" 고 물을 것이었다. 10절에 나와 있는 대답을 보라.
"궤를 멘 제사장들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이르게 하신 일, 곧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한 일이 다 마치기까지 요단 가운데 섰고."
그럼 이 말씀이 내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최고의 성경주석은 성경 자체이다. 구약의 이 기사를 설명하는 신약의 조명은 성경 전체의 주제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갈보리에서 예수님은 돌아가셨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고 말하라고 하실 때까지 거기에 달려 계셨다. 이 갈보리에서 인류를 위한 구속의 사역이 완전하게 종결되었다. 죄의 문제는 이로써 영원히 해결되었다. 그래서 하늘과 땅 사이에는 죄의 문제를 놓고 더 이상 논쟁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인간의 죄가 아무리 크든 혹은 아무리 작든, 아무리 더럽건 또는 아무리 인정할만 하건 십자가에서 배척과 조롱과 멸시를 받고 돌아가신 우리들의 구속주 예수님에 의해서 남김없이 처리 되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있다. 강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제사장들만이 아니고 백성들도 따라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갈보리의 가장 깊고 위대하고 실제적인 뜻은 예수님이 우리들의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 아니라 나도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주님 안에서 죽었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이 사실을 영적으로 깨닫지 못하면 절대로 승리의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다.
바울의 말을 당신은 알고 있을 줄 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5:1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6:4).
그리스도인에게 승리를 가져오는 작전과 공급의 기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대 혼자만 달리신 것이 아니고 자기 백성들을 모두 자기의 죽음 속으로 데리고 가셨다는 진리 속에 세워져 있다. 당신은 이 사실을 알고 믿어야 한다. 이성으로는 이해가 안되더라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여러 해 전에 잉글런드의 케직에서 선교회 연차대회가 열렸을 때의 일이다. 그 때 중국에서 돌아온 한 선교사가 간증을 하였었다. 이 여선교사는 자기가 선교지로 떠나기 전에 한 친구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도대체 중국에까지 가서 묻힐 필요가 뭐요? 기후도 맞지 않는 곳에서 6개월도 못가서 죽을거요." 선교사에게 주는 충고치고는 매우 달갑지 않은 말이었다.
이 선교사는 그 친구에게 이렇게 응수하였다. "걱정 말아요. 나는 5년전에 이미 죽었다오. 예수님이 나를 중국 땅으로 부르셨을 때 나는 십자가에서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과 중국을 빼놓고는 모든 것을 죽였오." 본인이 알기로는 이 여선교사는 결혼을 하여 자녀를 갖고 가정을 꾸밀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기의 가족도, 안락한 생활도 모두 다 저 버렸다.
하나님과 하늘의 천사들의 눈에는 이것이 진정한 십자가의 뜻이다. 우리들에게는 다른 길이 없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며 십자가에 달리신 자기 아들을 계시하신다. 이때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진리를 머리와 가슴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아마 당신은 하나님을 위해서 큰 일을 하고 싶은 꿈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계획을 짜면서 그리스도께로 영혼을 인도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할 줄 안다. 대단히 좋은 일이다. 그러나 최선은 아니다. 최선은 죽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아무리 똑똑하고 잘나도, 아무리 죄가 많고 신분이 낮아도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심판과 죽음만이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당신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다. 오직 예수님과 함께 죽는 길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주님과 함께 죽은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신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일은 아무리 업적이 높고 성과가 좋아도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당신은 십자가를 어떻게 보는가? 한번 곰고히 생각해 볼 문제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승리와 왕국의 영광으로 인도하기 전에 요단의 깊은 강바닥 밑으로 데리고 가신다. 하나님은 거기서 우리들이 죽을 의향이 있는지를 물어보신다. 구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성령님이 이런 질문을 당신에게 했다고 생각해 보라.
"너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는가?" "너는 명예에 죽었는가?"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고집에 죽었는가?" "자존심, 심지어 가장 자연스런 일상사 중에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도 죽었는가?" "미래의 뜻을 품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면서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은 곳에서 배우자를 찾거나 일하려고 하는가?"
머리를 들어 줄 저 십자가밖에 갈 곳이 없어라. 생명의 영광은 흙 속에 있나니 나 죽음 속에 누워있노라. 그 땅에서 붉은 꽃 피어나리리 그 생명 영원하리라.
나는 죽었는가? 길갈은 기억의 장소이다. 그리고 또 감사할 것은 길갈에는 긍정적인 뜻도 있다는 사실이다. 즉 길갈은 부활의 장소이기도 하다.
"정월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서 길갈에 진 치매"(수4:19)
정확하게 40년전 정월 십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했었다. 이들은 유월절 양을 잡아 피를 뿌리고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후 40년동안 광야에서 육신과 불신과 거역의 방랑생활을 하였다. 이제 이들은 요단을 건너 길갈에 진을 쳤다.
길갈의 뜻은 "치욕이 벗겨졌다"는 의미이다. 육신과 영적 낭패에서 광야생활을 하는 신자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를 치욕으로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요단을 건너 교두보가 세워졌다면 이 치욕은 벗겨진 것이다. 그러니까 길갈은 부활의 장소이다.
"정월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서." 이들은 모두 강에서 나왔다. 비록 여러 해가 걸렸고 개중에는 광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강에서 올라와 길갈로 나아갔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은 결코 구원을 잃지 않는다. 그럴지라도 축복의 땅으로 밀고 나가며 승리의 장소로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 다시 광야로 돌아가서 애굽의 가장자리에서 인생을 마칠 수도 있다. 그렇게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은혜를 완전히 받는다고 간주하는 제 2의 축복은 없다. 축복의 땅으로 오늘 들어갈지라도 내일 광야로 되돌아 갈 수 있다. 길갈이 부활의 장소임을 알지 못하면 오늘 승리하더라도 내일은 실패에 잠기게 된다.
이것은 당신과 나에게 실제로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5,6).
이 말씀을 잘 명상해 보라. 무슨 뜻인지 당신은 알겠는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말씀이다.
만약 당신이 승리를 맛본 일도 없고 주님이 당신을 위해서 마련하신 자유도 경험하지 못하였다면 죄로부터의 구속에 관한 가르침을 다시 배워야 한다. 이 가르침은 바로 이 구절 속에 모두 응결되어 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을 뿐 아니라 그의 부활과 승천에까지 함께 한 자들이다. 우리는 모두 주님과 함께 죽었었다. 그래서 그와 함께 무덤에까지 내려갔다가 부활절 첫날 아침에 그와 함께 부활하였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승천하여 하늘에 있게 되었다. 오늘 우리들은 정사와 권세들보다 더 높은 하늘에 있다.
지금 땅에 발을 딛고 살고 있는데 하늘에 있다니 이게 무슨 말이냐고 의아해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23에서 우리들은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말하였다. 우리들은 현재 인간의 원죄로 인한 타격과 영향 밑에 있는 육신의 몸을 가지고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은 썩어 없어질 사망의 몸을 늘 의식하게 된다. 우리는 육신의 본성, 욕망, 기호 등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그리스도가 돌아가셨을 때 자아는 죽었다. 그리스도는 승천하실 때 새 생명을 하늘의 보좌에 데리고 올라가셨다. 그리고 신자들의 가슴에 정사와 권세보다 훨씬 우세한 생명을 쏟아주셨다. 나는 육신으로는 땅에 살고 있지만 영으로는 하늘에 있다. 육신으로는 마귀의 공격을 받지만 영으로는 영광의 주님과 함께 있다.
그럼 어떤 것이 내 생애를 주관한 것인가? 육인가 아니면 영인가? 이 썩어질 몸과 예수님이 내게 주신 자유의 영 중에서 어떤 것이 나의 그리스도인의 경력을 이룰 것인가? 당신은 이 죄의 몸으로 유혹과 정욕의 희생이 될 셈인가? 아니면 믿음으로 주 예수님이 주신 성령 안에 있으면서 마귀에게 "나가라,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라고 외치겠는가?
젊은 청년들 중에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이 많다. 그런 여러분은 이 문제를 잘 파악하고 육신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성령이 자기를 주관하도록 하라. 아마 새로운 승리의 삶은 꿈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또 그 가능성을 의심하기도 할 것이다. 사탄이 제일 잘 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고 하는데도 안 그렇다고 회의를 주입시키는 일이다. 믿음으로 이 승리의 자리에 굳게 서 있는 교인들은 결코 넘어가지 않는다. 믿음으로 정사와 권세를 능가하는 새 생명을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마귀는 대항하지 못한다. 길갈은 부활의 장소이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넘어선 후에 다시 광야로 갔다면 요단강에 세워둔 돌들이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즉, 구속을 받고 승리의 땅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광야로 되돌아 간다는 부당한 처사를 항의했을 것이다. 세속적이고 타협적이며 죄를 잘 짓는 당신의 신앙수준 때문에 주 예수님의 빈 무덤이 항의의 소리를 지르고 있지는 않은가? 다시 승리의 편에 서 있으라. 당신이 세워진 곳은 그곳이다!
길갈은 부활의 장소이다. 그러나 사망의 기억을 전제로 한 곳이다. 길갈은 생명의 터전이다. 그러나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길갈은 승리의 땅이다. 그러나 내가 낮아지는 것을 앞세우고 있다. 길갈은 승리의 장소이다. 그러나 내가 주 예수님과 함께 무덤에 내려가는 것이 선행되었을 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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