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강해(20)
M.R 디한
사랑의 수고
The Labor of Love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갈라디아서 5장은 1-4장에 제시된 교리적인 가르침에 대한 ‘적용’으로 시작되고
있다. 사도 바울은 힘을 다하여 이 갈라디아 성도들이 거짓 교사들에 의해 주장된 교리에 의해 요동했던 어리석음을 드러내 보여주고자 했다.
그 거짓 교사들은 “우리는 은혜로써 구원받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규례를 지켜야 하며, 할례를 받고, 율법적인 금지조항들을 준수하고,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계명의 법 아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바울은 매우 강력한 말로, “신자는 은혜로써
구원받고,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으며, 은혜로써 보존되고, 최종적으로도 은혜로 구원받게 될 것이라” 고 이미
설파했다.
이와 같이 신자는 율법에서
해방되었으며(롬 8:2), 율법에 대하여 죽었고(갈 2:19), 율법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롬 7:6).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기” (롬 10:4)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그의 논증을 다음과 같은 구절로 마치고 있다.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율법]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은혜]의 자녀니라”(갈
4:30,31)
갈라디아서의 교리적인 부분의 마지막
말씀인 자유! 자유! 라는 단어에 주목해보자. 신자는 해방된 자이며, 자유를 얻었고, 종살이에서 놓인 자이다. 은혜로 구원받은 것은 자유와
해방(deliverance and freedom)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종노릇하는 것이 없다. 이제 앞으로 보게
될 것이지만, 자유란 죄에 대한 방종(license)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해방이란 우리가 우리의 행위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5:13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참으로 우리는 자유하다. 그러나 이것은 죄에 대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섬기되, 아무런 두려움이나 의무감이 없이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갈라디아서
2:19에서 보았다. 거기서 우리는 “율법을 향하여 죽었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았다”는 사실을 보고 있다. 어떤 사람이 은혜를 전파하는 한
전도자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은, 만일 내가 은혜로써 구원받았다면, 나는 이제 내 원하는 대로 살아도 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
하나님의 종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렇소. 만일 당신이 구원받은 자라면,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소. 그러나
당신이 기억해야 할 것은, 만일 당신이 참으로 구원받은 자라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이전과는 다른 ‘원함(소원)’, 즉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소원을 주셨을 것이오.”
갈라디아서 4장이 자유라는 말로써 끝난
후에, 그 다음 장인 5장이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지 주목하기 바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이러한 훈계는 절실히 필요하다. 왜냐하면, 박해를 피하고 친구를 잃지 않기 위해서 다시금 율법
아래로 들어가고자 하는 유혹과 시험이 대단히 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유케 된 그들은 종종 반율법주의자나 무법한자로,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죄와 방탕의 기회로 삼는 자들로 오해를 받곤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굳세게 서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유케하신 것을 버리고, 다시금 종의 멍에를 메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조차도
‘율법은
자기들이나 자기 조상들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 임을 시인하였다(행 15:10).
우리는 이제 ‘은혜의 자유 안에 굳게
서라’는 바울의 말에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도록 하자.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지킬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갈
5:2-6)
율법주의 교사들은, 이방인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유대인이 되어야 하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울은 이것을 단호히 반대하여,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너희는 율법 전체를
지킬 의무가 있으며, 율법의 저주와 정죄 아래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하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리라”고 말했다.
이것은 ‘율법과(AND) 은혜’의 문제가 아니고, ‘율법이냐 아니면(OR) 은혜냐’의 문제이다. 즉 이것은 ‘온전히 은혜든지’ 아니면
‘전혀 은혜가 아니든지’의 문제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4절의
의미이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여기서 ‘떨어진’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엑핍토(ekpipto)인데, 그 문자적인 의미는 ‘가던 길에서 벗어나다’이다. 이것은 마치 ‘배가 정규 항로에서 이탈한 것’과 같다. 이것은
배의 파선에 관하여 기록된 사도행전 27장에 나오는 단어와 꼭같다. 누가는 사도행전 27:16-17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선원들은)
간신히 거루를 잡아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FALL)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리고 사도행전 27:29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암초에 걸릴까(FALLEN) 하여 고물로 닻 넷을 주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더니”
이러한 구절들로부터 우리는 ‘은혜에서 떨어진’이란 표현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율법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던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그 구원이 보존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사람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놓친 자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의 그와 같은 행동으로 인해 크게 실망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을 참으로 회심한 자들로 믿은 것은 바울이 잘못한 일이었을까?
그는 갈라디아서 4:11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너희가 이러한 거짓된 율법 교사들을
따르는 것을 보니 너희에 대해 의심이 간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훼손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차라리 그들이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도록 그대로 두는 편을 택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BY FAITH)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갈 5:5,6)
죄를 지을 것인가?
‘구원이란 율법에서 자유를 얻고 해방된
것’이라고 선언한데 대하여 제기될 수 있는 반론이 예상된다. 즉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만일 구원이 우리 행위와 전혀 상관이 없고, 온전히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행위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전혀 무관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확실히 말해두지만, 행위는 구원의 열매이다. 행위는 구원의
기초(ROOT)나 근거는 아니지만, 구원의 필연적인 결과(FRUIT)이다. 즉 만일 어떤 사람이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면서 계속해서
죄를 짓거나, 은혜를 방탕한 생활이나 무절제한 행실의 구실로 삼는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 사람의 구원의 진실성 여부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참으로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 확실하다면, 그 구원은 확실히 우리의 행위를 통해 입증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구원얻는 믿음이란 역사하는 믿음이다(Saving faith is a WORKING
faith). 만일 믿음에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원얻는 믿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에다 ‘사랑으로(BY
LOVE)’란 말을 덧붙이고 있다.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이지, 율법을 따라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 종은 율법이나 규칙이나
규정에 따라서 일한다. 그러나 사랑이란 규칙이나 규정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일 뿐 아니라, 그 이상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을 행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국가의 법을 지킨다면, 그는 국가에 대한 자기의 의무를 다했고, 그 이상은 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가
국가를 사랑한다면, 그는 법에 따라 사는 것 이상의 일들을 행할 것이다. 즉 그는 자기 나라의 복지를 증진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며, 가치있는
사회사업을 후원할 것이고, 투표하는 데 자신의 자유를 행사할 것이며, 여러 모양으로 정부를 지원할 것이다. 법은 그에게 이러한 일들을 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법은 단지 법률에 규정된 대로 따르는 것만을 요구할 뿐이다. 그러나 사랑은 율법에 요구된 것 이상을 행한다. 사랑은 어떻게
하면 일을 적게 하고 적당히 모면해버릴 것인가를 생각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더 많이 일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율법에서 자유케 되면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에 빠지게 된다”는 비난에 대해, 우리는 “그러한 비난은 은혜의 능력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소치”라고 대답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가르치는 교사가 된다. 일단
우리가 은혜를 바르게 이해하고,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참으로 깨닫게 되면, 사랑이 율법을 대신하게 되고,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행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인 것이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 5:14).
종이냐
사랑하는 사람이냐?
필자가 의사의 일을 보고 있었을 때,
우리 집에는 몇 가지의 일들을 돌봐주는 사람들(종들)이 있었다. 즉 집안 일을 돌봐주는 파출부가 있었고, 필자의 차를 운전하는 운전기사가
있었다. 그들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하인들이었다. 그들의 임무는 분명히 정해져 있었고, 그들은 자기들에게 요구되는 일의 분량을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일정한 시간 동안에 일정한 양의 일을 하도록 되어 있었고, 그에 대한 약정된 임금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규칙과
규정들은 모두 명확하게 정해져 있었다. 예컨대, 집안 일을 하는 파출부의 경우는 오전 8시에 출근하여, 한 시간동안 점심시간을 갖고, 오후
5시까지 일해야 했다. 그리고 그녀는 하루에 두 끼 식사를 우리 집에서 제공받았고, 수요일 오후에는 휴무였다. 또한 그녀는 몸이 불편하면 어느
정도의 병가(病暇)를 얻었으며, 기타 소소한 혜택들을 누렸다. 그녀는 이와 같이 자기 의무에 속한 일들을 하기만 하고, 그에 대한 급료를
받았다. 일단 그 여자가 자기의 법적인 의무를 완수하기만 하면, 우리는 그녀에게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할 수
없었다.
내 아내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제 필자의 아내의 경우를 앞에서 본 그 파출부(종)의 경우와 비교해 보자. 내 아내는 종이 아니다. 그녀는 품삯을 위하여 일하지 않는다. 내 아내는 노동시간이나 품삯에 대하여 아무런 약정도 하지 않았다. 내 아내의 임무는 일일이 규정되어 있지도 않다. 그리고 내 아내는 시간제 노동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즉 여덟 시에 일을 시작하여 오후 다섯 시에 끝마친다는 것이 아내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뿐만 아니라, 내 아내는 품삯이나 파업에 대해서 생각지도 않으며, 오직 가정과 가족을 위해서 하루에 24시간 동안, 일년 365일을 쉬지 않고 자원해서 섬긴다. 내 아내는 아무런 법규나 약정이나 계약 아래 있지 않으며, 그러한 것들이 그녀에게는 아무 필요가 없다. 나는 내 아내에게 어떠한 일을 하라고 지시해 본 적도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기 가족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가족들이 요청하기도 전에 알아서 해결해 주기 때문이다. 즉 나는 내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옷을 입히고, 아기에게 젖을 주며, 부모님들을 기쁘게 해드리고, 설거지를 하며 잠자리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불평이나 투정 한 마디가 없다. 오히려, 그녀는 지치고 피곤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일한다. 만일 파출부(종)에게 한 시간이라도 더 일해 달라고 하면, 그녀는 불평하면서 마냥 늑장을 부릴 것이다. 그녀는 파출부(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아내는 ‘시간외 근무’라는 것을 모른다. 내 아내는 토요일이나 주일에 일해도 그에 대한 ‘시간외 근무수당’을 요구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 해답은 분명하다. 그녀가 그처럼 섬기는 동기가 바로 사랑(LOVE)이기 때문이다. 내 아내는 자기 가족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헌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아낌없는 사랑의 헌신 때문에, 우리 가정에는 어떠한 법규나 규정이나 계명이 없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수고이다. 이처럼 사랑의 수고는 율법의 요구 그 이상을 행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가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참된 신자는 율법의 계명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법과 사랑의 법아래 있다. 만일 어느 가정의 아내나 혹은
어머니가 자기 가족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며, 기쁨으로 섬기고 원하는 대로 봉사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면, 그녀는 구태여 세세하게 규정된
규칙과 약정된 봉사 시간과 임금의 굴레 속에 들어가려고 하겠으며,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만일 필자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여보, 당신은 지금 너무나 힘들게 일하고 있소. 당신은 이제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모두
쉬도록 하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에게 주당 100불을 주겠소.” 그러면, 내 아내가 뭐라고 할 것 같은가? “그 100불은 그냥 당신이
가지시고, 그 시간제 노동에 관한 제안도 접어두세요. 나는 내 가족과 함께 있고 싶고, 온종일이라도(ALL THE TIME) 그들을 돌보고
싶어요.” 필자가 다시금 아내에게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일하기를 종용할지라도, 그녀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이미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고 있어요. 그러나 나는 또한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도 임금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일할
거예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런데 은혜로 구원받았으면서도 다시금 율법 아래로 돌아가려는 신자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당신은
내게 이렇게 물을 것이다. “은혜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단 말입니까?” 그렇다, 은혜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키도록 강요받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참으로 거듭난 신자는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데, 이것은 그가 지켜야만(MUST) 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기(WANTS TO) 때문이다. 이것은 율법 자체의 요구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의
율법주의자들은 우리를 다시금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는 데로 돌아가도록 했으며, 우리에게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기쁨을 빼앗아가려고 했다. 만일
우리가 마땅히 사랑하고 싶은 대로 사랑한다면, 아무도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우리에게 말해 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더 이상
판단치 않게 될 것이다.
아, 은혜는 이상과 같은 바울의
원리들을 실천에 옮기게 함으로써, 세부적인 면에서 자기와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다른 신자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을 영원히 그치게 만든다.
세상에는 우리가 어느 절기를 지키지 않거나, 어떤 종교관습이나 예식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영원한 지옥에 가기로 예정된 자라고 말하면서
우리를 정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아래의 질문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즉 문제는 결코 어떤 날에 관한 것이 아니다. 바로
은혜와 은혜에 속해 있느냐의 문제이다. 또한 문제는 의외로 단순하다. 즉 “당신은 율법 아래 있는가, 아니면 은혜 아래 있는가?”의 문제이다.
만일 당신이 율법 아래 있다면, 온 힘과 정성을 다해서 계명들을 지켜야 하고, 그 가운데 있는 각 계명마다 전부 다 지켜야 한다.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그 계명들을 완벽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율법에 관한 성경 말씀은
다음과 같이 아주 분명하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바로 이것이 율법에 대한 성경의 정의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은혜 아래 있다면,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고, 따라서 율법의 모든 조항이 이미 성취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유 안에서 즐거워하며,
그리스도께 대한 감사의 표시로,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다해 그를 섬기고, 대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를 섬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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