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의 혁명> 6장. 욥의 축복 박철수 |
참된 행복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 솟아난다 - 간디 「간디어록」에서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 - 시편 119편 71, 75절
파스칼은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다. 행복이야말로 인간의 최대 관심사다”고 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학교 신문에 축복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상당히 긴 글이었는데 이 글을 본 어느 전도사님이 상기된 얼굴로 찾아와서 성경은 여기저기에서 축복을 말하는데 그 글 내용은 성경과 다르다고 항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전도사님의 말씀대로 성경은 복을 약속하는 책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 성경이 말하는 복인가에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에리히 프롬이 「존재냐 소유냐」에서 이야기한 대로 더 많이 갖고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습니다. 넓은 칩에서 잘 먹고, 잘살고, 높은 자리에서 좋은 차를 굴리고 다니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마저 세상적 축복을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서 성경이 말하는 축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은 대표적인 인물로서 성경 여기저기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복의 사람이 아브라함의 생애가 얼마나 고난과 역경의 삶이었던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고난과 역경을 빼버리면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아브라함은 일평생 세파에 시달렸으므로 비극의 일생을 그리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아야 될 것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이 현세적이고 가시적이 아니었던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죽을 때에 땅 한 평도 갖지 못한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행 7:3~5). 아브라함의 축복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끝내 좌절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축복은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구애받지 않는, 하나님이 동행하는 삶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욥
이어서 욥의 생애를 통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축복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모두 42장으로 구성된 욥기는 성경 중에서도 두꺼운 책 중에 하나입니다. 토마스 카알라일은 “욥기만큼 수많은 사상과 수많은 문학과 수많은 신앙인과 비신앙인에게 고루 감동을 미친 책은 없다”고 했습니다.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욥기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욥기로부터 받은 도전을 잊지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욥기가 제기하는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난과 축복에 관한 문제입니다. 고통은 인간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요기가 제기하는 문제입니다. 고통으로부터 제외된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어쩌면 고통을 당하는 존재입니다. 과연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축복은, 진정한 축복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바로 이 요기가 제기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잘못된 축복신앙에 병든 한국교회는 무엇보다도 욥기에 관심을 가져야 될 때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욥의 고민을 해보지 않고 신앙한다면 아직도 천박한 신앙에 머물고 있다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욥이 가진 고민을 하지 아니하고 신앙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아직도 천박한 신앙 가운데 머물러 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욥의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욥이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대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 여기 보면 욥은 순전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이나 외식이 없는 사람,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보면 욥은 정직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순전하다고 하는 것이 내면적 삶의 모습이라면 정직은 대인관계의 모습니다.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욥은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해치거나 손해를 입히거나 어떤 사람을 성가시게 하거나 속여 빼앗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욥은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자였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욥은 악에서 떠난 자라 했습니다. 욥의 신앙은 말로만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진실로 악에서 떠난 신앙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천만이라는 성도의 숫자를 자랑하면서도 악에서 떠난 성도가 얼마나 되는지를 생각할 때 욥의 신앙은 순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1장 2절에 욥은 그 소생도 많아서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라고 했습니다. “그 소유물도 많아서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1:3).
고난당하는 욥
욥은 명예로운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욥에게 광풍이 몰아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토록 아름답고 귀한 인품과 흠 없는 신앙을 소유한 요에게 축복이 아닌 모진 고난이 몰아닥친 것은 도저히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가 순식간에 몰살당해 버렸습니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자녀가 한 사람이 아니라 열 명이 모두 몰살을 당했습니다. 거기에 욥 자신도 병에 걸려, 그것도 통증이 심하고 보기에도 흉한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욥에게 일어나는 이 사건, 욥에게 일어난 일이 욥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는 사실입니다. 왜 욥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이 욥이 당했던 것과 같은 고난을 당하고,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욥이 당한 일은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사고를 당해서 불구가 된 사람의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 성도 중에서도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아들이 백혈병에 걸려서 죽은 일도 있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난 일을 당하는 일들을 너무 많이 봅니다. 지금은 고등학교 1학년인 저의 딸아이가 여섯 살 때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집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지금 당신 딸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갔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자 ‘야! 나한테도 이런 사고가 일어나는구나’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습니다. 하루 만에 깨어났습니다만 그 하루 동안에 별의별 생각을 다 했습니다. 82년 버어마 아웅산 사건에서 몇 십 명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86년 중동에서 일하던 근로자들을 실은 대한항공 비행기가 폭파되어 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몰살을 당했습니다. 며칠 전에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서 불이 나 어린아이들 예닐곱 명이 죽었습니다. 이러한 불의의 사건들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나쁜 사람들만 골라 벌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아웅산 사건에서 사실 죽어야 할 사람은 죽지 않고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서석재 총리, 김제익 재무부장관, 함병춘 비서실장 등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몰살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죽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조리한 사건들이 순간순간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나쁜 사람들만 골라서 불치의 병에 걸리게 하고 자동차 사고를 만나게 해서 죽게 하신다고 생각합니까?
인과응보 논리의 위험
욥이 자식을 잃고 재산을 다 잃고 그토록 고통스런 병에 걸렸을 때, 그 소식을 전해들은 친구들이 와서 욥을 위로해 줍니다. 욥의 친구들이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를 내가 보건대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욥 4:7, 8). 이것은 욥의 친구 엘리바스의 이야기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찾아가서 “네가 무엇인가 알지 못하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형벌을 받은 것이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친구인 빌닷은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다”(8:3, 4)고 말했습니다. 여기 두 친구들과 다음에 나오는 친구들도 공통적으로 욥에게 “네가 틀림없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네가 틀림없이 잘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는 회개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욥기 8장 11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속담입니다. “왕골이 진펄이 아니고 나겠으며 갈대가 물 없이 자라겠느냐.” 왕골은 펄이 있어야 난다는 이야기입니다. 물이 없는 데서는 갈대가 자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한다면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또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와 같은 속담입니다. 친구들은 “네가 그러한 형벌을 받은 것은 틀림없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라”고 욥에게 말합니다. 얼핏 보면 친구들의 조언은 매우 경건한 것 같습니다. 또 그들의 신앙은 매우 좋은 것 같습니다. 욥을 찾아가서 하나님을 말하고, 회개를 말하는 욥의 친구들의 말을 듣다 보면 그들의 신앙이 대단한 것 같고 욥의 신앙이 별로인 것 같습니다. 욥을 위로한 친구들의 논리는 “인과응보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 인과응보의 논리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인과응보 사상이란 내가 행한 대로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저변에는 인과응보를 부정하고 있음으로 알아야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인과응보의 논리 속에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감히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교만이 들어 있습니다.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 1:9). 이 말은 사탄이 하나님께 욥의 신앙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여기 나타난 사탄의 사고방식은 복을 주셨기 때문에 욥이 당신을 사랑한 것이지 욥이 어찌 까닭 없이 당신을 경외하겠습니까하는 말입니다. 당신께서 욥에게 그토록 크게 복을 주셨기 때문에 욥이 당신을 따르고 경외하는 것이지 어떻게 욥이 그런 것 없이 당신을 따르겠습니까(욥 1:10)하는 식입니다. 이렇게 사탄의 논리는 인과응보의 논리입니다.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욥이 그렇게 한 것이고, 욥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논리입니다.
사탄의 논리
욥의 친구들의 논리에서 인과응보의 논리를 보았는데 곧 사탄의 논리에서도 그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인과응보의 논리가 사탄의 논리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일이 잘될 때가 있고 일이 잘못 될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일이 잘되다가 내일은 일이 못되기도 합니다. 인과응보의 사고는 일이 잘 안될 때 항상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잘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더 많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일이 잘되기보다도 안타깝게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니, 안 되는 일로 꽉 차 있는 것이 인간사가 아닙니까? 인과응보의 논리로 본다면 일이 잘되지 않을 때는 결국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고 부정하게 만듭니다. 내가 애쓴 만큼 하나님이 응답해 주셔야 되고 보답해 주셔야 된다면, 그렇지 못할 때는 하나님이 과연 계시는가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비행기 사고로 사람들이 죽었을 때 멀리서 보는 사람들은 쉽게 ‘저 사람들은 무슨 죄를 지어서 그러는가보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일을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것입니다. 내가 과연 무엇을 했길래 내 사랑하는 남편이 비행기 사고로 죽어야 하는지, 내 사랑하는 부인이, 저토록 착한 부인이 암에 걸려 죽어야 하는지 등 세상에 안되는 일 가운데서 실제로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카라마죠프가의 형제들」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주인공 이반을 통해서 우리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고통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은 계실 수 없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도무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들과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한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이반은 무신론자의 대표로 등장합니다. 이 무신론자인 이반을 통해서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리고자 했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세상이 이토록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고 고통이 많은데 어떻게 하나님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도 만사가 잘 안된다면 믿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는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 줍니다. 우리는 실제로 살아가면서 그토록 애썼는데도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과연 하나님이 계신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과연 이럴 수가 있는가?’하는 의심을 가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실제로 우리가 당하는 삶의 아픔으로 고민한다면 이 문제가 얼마나 절절한 문제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일이 잘 되어가지 않을 때를 전제하면서 고찰했는데 다음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일이 잘 될 때입니다. 일이 못되면 ‘과연 하나님이 계신가? 내가 믿어야 할 이유가 뭔가?’ 이렇게 의심하다가도 일이 잘되기만 하면 인간은 내가 잘해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인간이 얼마나 간사하고 이기적인 존재입니까? 내가 잘해서 출세하고 행복한 것이지 하나님이 함께 해주셔서 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패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 대로 일일이 보응하신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되며 또 날마다 죽어 마땅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이것을 잘했으니 당신이 상을 주시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인과응보의 논리는 자칫 잘살고 출세한 자의 논리가 되기 쉽습니다. 잘살고 출세한 자의 입장에서는 내가 잘해서 하나님께서 복 주신 것이고 가난하고 고생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저주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와 같이 욥기에서 보여 주는 것은 인과응보의 사상이 사탄적이라는 것입니다. 인과응보의 사상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상업적으로 만듭니다. 하나님과 인간관계를 주고받는 관계로 만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상업적 관계나 거래적 관계가 이루어 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과응보의 관계가 있다는 이 상업적 거래 논리는 참으로 사탄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욥기에서 인과응보의 사상을, 공로의 사상을, 축복신앙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욥을 보게 됩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욥 2:10).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재앙도 받습니다. 좋은 것과 함께 나쁜 것도 받습니다. 욥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욥이 정직하고 순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였지만 그는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것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재앙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욥은 네 명의 친구들로부터 분명히 네가 잘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그렇게 큰 벌을 받는다는 말을 듣습니다. 욥은 이 인과응보의 논리를 가지고 도전하는 친구들을 향해서 아타까운 마음으로 “나를 용납하여 말하게 하라”(욥 21:1~3), 즉 내말도 좀 들어보라고 말합니다. 너희들이 말하는 대로라면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21:7)고 되묻습니다. 욥은 끝까지 인과응보의 신앙, 공로사상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다. 여기에서 욥의 유명한 고백을 듣습니다.
이제는 내가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내가 가는 길을 오직 주께서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이 말은 내가 가는 길, 인생길을 아무도 알 수 앖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가는 길은 인간이 알 수 없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사람이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사실 이 욥기는 고난과 축복의 문제를 제시하면서도 우리들에게 공식적인 답변을 보여 주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이다”라고 확실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욥기 전체를 통해서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들에게 알려 주고자 하는 교훈의 말씀은 두 가지입니다. 즉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과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욥이 알았을 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 받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이 사실과 그 분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큼 큰 복이 없다고 하는 것을 욥기는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이제는 내가 직접 주님을 만나보게 되는구나”(욥 42:5) 이것이 고난에 대한 욥의 해결입니다. 이제는 살아계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으며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설령 이 세상에서 아무 걱정 없이 잘 먹고 잘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의미하고 허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것이라도 허망한 것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데 백 년을 산다 한들 아니, 천 년을 산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백 년도 잠깐이고 천 년도 잠깐입니다. 한낱 물거품이고 한낱 안개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 인간들이 누리고 있는 그 어떠한 것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이 세계는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쥐새끼나 닭 같은 동물들을 잘 죽이지 못합니다만 특별히 개미를 죽이지 않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안 밟으려고 애를 씁니다. 왜냐하면 개미는 멋모르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데 사람이 무심코 지나가다 밟으면 죽습니다. 그런 개미를 볼 때마다 우리 인간도 저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저는 특별히 개미를 안 죽입니다. 이렇게 인간도 하나님이 없다면 마치 개미와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개미가 있는 곳에서 갑자기 사람이 소변을 보게 되면 개미는 홍수에 빠집니다. 개미는 거기에 빠져 죽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무심코 그런 일을 했는데 개미에게는 죽느냐 사느냐의 중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 인생은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참으로 무의미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낱 티끌일 뿐입니다. 그래서 욥은 13장 15절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됩니다. “그가 나를 죽일지라도 내가 그분 안에 소망을 가지리라”(영어 성경에는 Though he slay me, yet I will hope in him). 내가 비록 죽는다고 할지라도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내가 소망을 갖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확신이 바로 욥의 축복입니다. 욥은 엄청난 질고와 고통을 이 확신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파스칼을 참 좋아합니다. 저는 그가 남긴 「팡세」를 성경 다음으로 자주 읽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삶이 너무 감동적입니다. 파스칼은 예수님을 빋을 때 고백한 글을 써서 죽을 때까지 자기 옷깃 속에 넣고 다녔습니다. 이 글이 죽은 후에 발견되었는데 거기 보면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철학자나 과학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파스칼은 대단한 천재였습니다. 수학자요, 철학자요, 물리학자요 참으로 희귀한 천재였습니다. 12세 때 논물을 쓰기 시작했고 15세 때 벌써 유럽의 지성들을 감동시켰던 천재입니다. 그가 32세 때 하나님을 알고 난 다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그러나 철학자나 과학자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확신! 확신! 사랑! 기쁨! 평화!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당신을 알지 못했어도 나는 당신을 알았습니다.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이렇게 썼습니다. 파스칼은 하나님을 아는 순간에 이 세상 일체의 사물을 망각한다고 고백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수저까지도 다른 사람에게 다 물려 준 다음에 오직 성경연구와 기도에 전념하면서 그의 짧은 39년의 생애를 뜨겁게 살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영국의 철학자 버틀란트 럿셀은 그가 쓴 철학사에서 파스칼을 가리켜 “참으로 아깝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몰랐었더라면 인류에 공헌한 것이 얼마나 많았을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천재 신앙인인 파스칼은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은 당신을 알지 못했어도 나는 당신을 알았습니다.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욥의 축복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복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주기도문에 있는 첫마디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과연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이 확신을 가지고 계십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기도문 중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참으로 확신 가운데 부를 수 있다면 그 나머지 기도는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시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분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가치가 있고 아름답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바로 이것이 욥이 발견한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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