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의 혁명> 7장. 야곱의 축복 박철수 |
침몰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 때 폭풍이 휘모는 배를 타고 있는 것은 오히려 유쾌한 일이다. - 파스칼 「팡세」에서
주께서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 - 히브리서 12장 6절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사람은 세 가지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쾌락의 본능입니다. 사람들은 예외 없이 더 좋은 음식을 먹기를 원하고 더 좋은 옷을 입기를 원하고 더 좋은 집을 갖기를 원하고 더 많은 시간을 즐기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본능이 있는데 그것은 권력에 대한 본능입니다. 권력의 본능이란 남을 지배하려는 마음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남을 지배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하려 하고, 그 자랑을 통해서 남보다 내가 더 낫다고 하고 그것으로 남을 지배하려고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능은 소유의 본능입니다. 사람들은 더 많이 갖기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본능은 끝이 없고 철판을 뚫고 바위를 깰 수 있을 만큼 강하고 큰 것입니다. 이러한 본능은 너무도 크고 강해서 거의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아무리 채우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쾌락의 본능이요 권력의 본능이요 소유의 본능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 본능저긴 욕구가 채워지는 것을 가리켜 복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까지도 인간의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만들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 만큼 우리 인간의 본능은 강합니다. 이러한 본능을 충족시킴으로써 위로를 받고 안심하기를 바라고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심지어는 종교의 이름으로, 기독교의 이름으로, 성경의 이름으로, 목사님의 이름으로, 제사장의 이름으로 이러한 인간의 본능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복이라고 하는 참으로 가중한 종교가 이 땅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저는 성경을 알면 알수록 인간의 본능을 채워 주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일 수 없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축복관이 성경적으로 달라지지 않고는 아직도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즉, 축복에 대한 성경적인 정립과 확신 없이는 신앙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 사람이 신앙인의 모습을 띠고 있다할지라도 축복의 개념이 바뀌어지지 않고는 우리는 그를 신앙인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 욥과 관련해서 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욥이 받은 그토록 극심한 고난과 역경은 어느 인간도 받을 수 없는 처참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도 욥은 “그가 나를 죽일지라도 그분 안에서 내가 소망을 가지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욥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은 즉 재앙도 받아야 마땅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욥에게 주어졌던 진정한 복은 그의 재물이나 그의 소유였던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과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기가 받은 그 고통을 너무도 하잘 것 없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이 사실, 그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살아가는 것 만큼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욥은 이 사실을 깨닫고 난 후 그가 가지고 있던 고난의 문제가 눈 녹듯이 다 사라졌습니다. 이 장에서는 고난과 징계의 문제를 중심으로 복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인간은 누구나 고난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욥기 5장 7절을 보면 “인생은 고난을 위해서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인생은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고난으로부터 제외된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고난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과연 고난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이 복입니까?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입니까?
징계의 의미
첫째로 고난은 징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책찍질하심이니라”(히 12:6).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징계를 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에게 특별히 고난의 징계를, 징계의 고난을 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는 증거이고 그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현입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 12:8).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징계와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고난은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에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잘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탄의 장난입니다. 사탄은 천사의 모습으로 인간을, 특별히 신앙인을 사로잡으려고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이 된다는 놀라운 사탄의 계략 속에 한국 교회가 빠져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너희가 고난을 받아야, 징계를 받아야 사생자가 아니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반대로 말한다면 고난이 없는 사람은 사탄의 자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본훼퍼는 “고난은 참 제자의 진정한 모습이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난은 징계로 오게 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 고난은 형벌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확신하고 섰을 때 그 고난이 어떠한 형태라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징계를 의미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자에게는 고통이 형벌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한다는 미신으로부터 떠나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징계의 종류
두 번째로 징계의 종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를 깨우치게 하기 위하여 고난을 주십니다. 사람은 너무 교만하고 너무 이기심이 많기 때문에 이 세상 일이 잘되기만 하면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줄 압니다. 이 세상을 살아나갈 때 잘되기만 하는 것 만큼 비극적인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일들이 잘되가면 인간에게 있는 뿌리 뽑을 수 없는 교만과 이기심이 자기 자신과 인생의 의미를 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교만합니까,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우리의 욕심이 얼마나 충천합니까! 다른 사람을 생각할 필요 없이 내 자신을 들여다봅시다. 우리들이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가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가장 잘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의 징계를 통해서, 육신의 병을 통해서 그리고 재난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며 인간이 얼마나 허망한 존재인가를 깨우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고난의 징계를 주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사막의 광야 생활을ㅈ ntls 목적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광야생활을 하게 한 의도는 이스라엘 민족을 낮추기 위해서입니다(신 8:2). 우리의 인생길에 이러한 광야 생활이 없으면 틀림없이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어려움을 겪지 않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교만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생활을 하게 하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광야의 삶이 없이 잘 먹고 잘살고 모든 일이 마음대로만 된다면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그리고 떡으로만 살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주심으로써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알게 하시고 겸손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고난을 주심으로 자신을 보게 하고 또 하나님을 찾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고난은 유익한 것입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그런 의미에서 고난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에게 주시는 신앙의 보약입니다. 혹시 지금 어떤 고난을 받고 있습니까? 어떤 징계를 받고 있습니까? 감사하게 생각하는 믿음을 가집시다. 이 고난과 징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축복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의 타락을 예방하기 위해서 징계를 주십니다. 너무도 죄된 속성을 가진 우리 인간의 타락을 예방하기 위해서 우리 하나님은 징계의 채찍을 드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7~10).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만큼 위대한 사도는 없습니다. 기독교에 바울을 따를 만큼 위대한 인물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바울의 종교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참으로 위대한, 인물 중에 인물입니다. 바울은 놀라운 체험들을 많이 했고 수없이 많은 기적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병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떤 벼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바울이 안질이었을 것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위장병이었을 것이라고, 또 어떤 사람은 간질병이었을 것이라는 등 여러 가지 추측들이 있지만 성경에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습니다. 하여튼 사도바울에게는 고질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능력의 사도는 하나님께 “주여 저로 하여금 이 병에서 떠나게 하여 주시옵소서”하고 여러 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에게는 그 병이 있어야 한다. 네게 그 병이 없다면 너무도 교만한 인생을 살 것이다. 네가 가지고 있는 그 놀라운 능력과 나를 만난 것과 위대한 사역들이, 자칫 교만으로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너는 죽을 때까지 그 병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고질병을 주셨습니다. 위대한 종교개혁가 중에 칼빈이 있습니다. 칼빈은 환갑을 넘지 못한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칼빈은 하루에 두 번, 세 번 설교를 하면서 몸이 좋지 않아 심지어는 설교 전에 누웠다가 나와서 설교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몸이 매우 연약한 가운데 지냈습니다. 하지만 천재 칼빈이 몸이 연약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교만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칼빈에게 참으로 어려운 병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칼빈이 더 오래 살면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젊은 칼빈을 불렀습니다. 앞에서도 파스칼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그 위대한 파스칼, 하나님마저도 파스칼의 영리함에 시기가 났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비상한 천재였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파스칼은 몸이 매우 연약했습니다. 이십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도무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나빴습니다. 그가 쓴 많은 명상록 이외에 「병의 선용을 위한 기도」라는 조그마한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저로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저에게 병을 주셨습니다. 아버지여 이 병을 잘 선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진정한 복을 받은 사람들, 참으로 위대하게 살다 간 기독교인들의 모습입니다. 또 하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더 위대한 사람을 살게 하기 위해서 징계의 채찍을 사용하십니다. 더 위대한 신앙, 더 위대한 삶, 더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징계를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아브라함의 축복을 보았습니다. 그의 삶은 흠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위대한 일꾼으로, 위대한 자기의 종으로 만들기 위해서 역경과 고난 속으로 집어넣었습니다. 이삭도 그러하고 요셉도 그러합니다. 욥의 생애 또한 얼마나 고난과 역경의 삶이었습니까? 욥은 고난의 와중에서도 “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순금처럼 만들기 위해서 더 위대한 삶, 더 아름다운 삶, 더 위대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징계를 허락하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절룩발이가 된 야곱
우리는 그러한 삶의 또 다른 인물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가 바로 야곱이라는 사람입니다. 야곱 하면 무슨 생각이 나십니까?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야곱만큼 교활하고 이기적이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끝까지 자기의 방법대로 이루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그는 교활하고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야곱은 장자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어머니로부터 듣고 이 장자권을 술수를 사용하여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탈취합니다. 또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자기 아내를 얻기 위해서 여러 방법을 동원하고 또 많은 재산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야곱이 성공했다고, 복을 받았다고 생각할 무렵에 외삼촌 라반으로부터 쫓겨나게 됩니다. 야곱은 이제 어디론가 돌아가야 할텐데 그가 돌아갈 곳은 아버지 이삭이 계신 곳,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떠나온 지 벌써 15년, 20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막상 돌아가려고 하니 옛날에 장자권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탈취했던 것을 기억하며 형인 에서를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형은 라를 받아 줄 것인가? “그들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는 이같이 내 주 에서에게 고하라. 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더라 하라 하였더니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가로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창 32: 4~6). 몇십 년 만에 성공해서 돌아오는 야곱은 뒤에서는 라반에게 쪼기고 앞에서는 아직도 증오의 불길에 쌓여 있는 형 에서가 사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는 보고를 듣습니다. 야곱은 많은 재물을 주어서 형 에서를 달래려고 했지만 에서가 오히려 사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다가오고 있습니다. 7절에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라고 나옵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안 되는 일 없이 하고자 하는 일을 기어코 이루고야 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형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됐습니다. 여기서 야곱은 또 꾀를 내어 한꺼번에 가면 몰살을 당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세 번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일진을 가게하고 다음에 이진을 가게하고, 삼진을 가게 한 다음 자기는 맨 마지막으로 갑니다. 여기서도 인간 야곱의 모습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예물은 그의 앞서 행하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경야하다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창 32:21~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야곱은 이제 홀로 남았습니다. 여기서 그토록 유명한 얍복 나루터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야곱의 생애에 있어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이 이 얍복 나루터 사건의 의미를 깊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잘못된 성경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기도했다는 식으로 해석하지만 야곱이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증거는 하나님의 사람이 먼저 싸움을 청한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24절). 기도는 사람 편에서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지 하나님 편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을 예로 들면서 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한다면 성경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과 씨름하더니”에서 여기 “어떤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많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실제적인 사건이면서도 매우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한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기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즉 야곱의 이기심, 야곱의 고집, 야곱의 욕심을 하나님도 꺾을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야곱의 욕심과 교만, 그리고 인간의 이기심은 하나님도 꺾을 수 없을 만큼 강하고 진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야곱을 당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야곱의 환도뼈를, 엉덩이뼈를 쳐서 절뚝발이로 만드십니다. 바로 이 사건으로부터 야곱의 위대한 생애는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기심과 교만과 고집이 가득한 인간 야곱을, 절뚝발이로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위대한 삶으로 만들기 위해, 그 고집을 꺾기 위해, 그 교만을 꺾기 위해, 이기심을 꺾기 위해서 환도뼈를 꺾고 절름발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로부터 야곱을 향하여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의 위대한 생애는 절뚝발이가 된 다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절뚝발이가 되게 해서라도 기어코 당신의 뜻을 이루고야 마시는 분입니다. 베스트 셀러 가운데 안요한 목사님의 「저 낮은 곳을 향하여」가 있습니다. 청춘이 만리같고 똑똑한 안요한, 목사였던 아버지를 저주하였던 안요한, 그러나 결국 안요한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미국에 좋은 직장을 얻어 출국수속을 하려던 차에 어느 날 갑자기 눈이 가물가물해지더니 결국은 두 눈을 잃게 됐습니다. 얼핏 보면 이토록 큰 불행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안요한은 그의 수기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목사로 만들기 위해서 눈먼 소경으로 만드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경이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비록 소경이 된다고 할지라도, 절뚝발이가 된다 할지라도 감사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몇 년 전 금당사건의 박철웅이라는 사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세 사람이나 잔인하게 죽여서 자기 집 앞마당에 파묻고 거기서 몇 달을 살았던 박철웅. 그의 옥중 편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늘에 계신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사형수를 만들어서까지 나를 주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뚝발이로 안될 때, 소경으로 안 될 때 사형수로까지 만들어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사형수를 만들어서까지 나를 주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신 이 은혜와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심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몇 달 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무엇이 축복입니까? 잘 먹고 잘살고 무병장수하는 것이 축복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하시면 그의 자녀와 남편을 죽이기까지 하십니다. 절뚝발이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야곱의 생애를 통해서 “나의 절뚝발이”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겠습니다. 야곱이 절뚝발이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부자고 똑똑한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불행한 사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징계의 목적
세 번째로 징계의 목적이 무엇인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히 12:10). 하나님께서 징계를 주시는 목적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더 궁극적인 목적은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의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십니다(히 12:11). 소나무를 부여잡고 주여 저로 하여금 만사형통하게 해 달라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시 119:75). 우리의 삶에 괴로움이 있습니까? 여기 말씀에 보면 괴로움이 있는 것은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실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 하나님께서 “성실하다”고 하는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실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포기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성실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괴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괴로움은 오히려 큰 축복인 것입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5).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을 때 그 사람의 신앙이 진짜 신앙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강퍅해지는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애굽왕 바로는 하나님의 여러 기적 앞에서 오히려 강퍅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하고 “아! 나에게 이와 같은 징계를 주셨구나”고 깨닫는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고난과 역경 때문에 “하나님이 어디 있어”라고 말함으로 크리스챤이 아닌 것을 결정적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징계를 당할 때 이것을 경히 여기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고난은 변장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사탄은 광명의 천사처럼 우리에게 그럴 듯하게 좋은 것으로 약속해 주지만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변장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시편 34편 19절에 의인은 고난이 많다고 했습니다. 의인은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많은 돈을 부여잡고 이것이 내 것인 양 사랑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인은 고난이 많습니다. 우리는 고난이 많은 것 만큼 위대한 삶,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 것은, 건강을 주시고 돈을 주시고 명예를 주신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쁜 것을 주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온상에서 자란 채소는 맛이 없습니다. 또 영양분이 덜합니다. 밖에서 비와 눈을 맞고 자란 채소여야 영양분도 많고 맛도 있습니다. 좁은 공간 안에 메어 기른 닭은 맛도 없고 영양분도 적습니다. 그러나 밖에서 어려움 가운데서 멋대로 돌아다닌 토종닭은 맛있고 영양분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토종닭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참으로 진정한 복이 무엇인가를 확신하면서 고난을 당할 때에도 경히 여기거나 낙심하지 아니하는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겠습니다 그것이 참으로 복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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