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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교훈/축복의혁명 - 박철수

9장.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복 (1)

by 복음과삶 2007. 5. 8.

<축복의 혁명>

9장.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복 (1)

박철수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만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 자신을 안다. 또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을 알고 죽음을 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목적이요 만물이 지향하는 중심이다. 그를 아는 자는 모든 사물의 이유를 안다.

                                                        - 파스칼 「팡세」에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 요한복음 14장 27절

 

“믿음”을 여러 가지고 설명할 수 있겠지만 한 마디로 말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야, 즉 오실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고 신약은 이미 오신 예수님에 대한 기록입니다.

한마디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성취도고 완성되고 통일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초점과 우리 믿음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이 겪은 여러 가지 사건, 즉 출애굽 사건이나 유월절 사건이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없다면 구약은 우리와 아무 관련이 없는 단순한 책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구약이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아주 잘못 보는 것입니다. 구약은 마치 남녀가 결혼하기 이전의 양가(兩家)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의 남자 동생이 결혼을 했습니다. 지금은 사돈이 되었지만 저의 동생이 그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사돈댁은 저와 아무 관련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동생이 결혼을 함으로써 지금까지 아무 상관이 없던 그 쪽 집안이 의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사돈댁이 동생의 결혼을 통해 저와 관련을 갖게 되듯이, 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오늘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 기념일입니다. 우리나라의 815 광복절과 같은 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815 광복절만 있으면 됐지 왜 남의 나라의 해방 기념일인 유월절까지 지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고린도전서 5장 7절에 보면 ‘우리의 유월절 양 그리스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해방과 그 일을 기념해서 양을 잡았던 것이 신약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로 쓰이는 양이 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구약의 역사, 그 중에서도 유월절의 역사가 지금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성전에서의 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다면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종교들은 다 제사드리는 성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성전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이 성전이 나 육체를 가리킨다’(요 2:21)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구약의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가리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뜻을 모르면 구약의 성전의 의미가 완전히 오해되고 의미가 없어집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복

얼마 전에 제가 어느 교회의 초청을 받아 강의를 했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제게 ○○교회 목사님께서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해서 구약학 교수에게 물어봤다고 하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마음에 거슬렸습니다. 왜냐하면 그 목사님이라는 분이 구약학 교수에게 물어보았다는 자체가 한심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혹시나 예배당 건물이 구약의 성전에 해당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물어 본 것이거든요. 아무리 큰 교회의 목사님일지라도,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신학자라도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끝내 고집한다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이것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강조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살아야 하는데 자꾸 다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행, 아니 예수님 자신이 성경을 푸는 열쇠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에 축복이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큰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들이 보게 됩니다. 축복이 무엇인가? 그거야 대강 넘어가면 되지 않는가. 오복이니 칠복이니 우리 기독교인도 그런 복을 받기 위해서 살아가면 되는 것이지 뭘 그렇게 복잡하게 따지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의 문제는 지엽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복의 문제는 대충 넘겨버릴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복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제 2의 회심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무엇이 축복이냐 하는 문제는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냐 하는 문제와 똑같은 말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신앙을 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왜 신앙을 하느냐는 말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성취되고 완성됩니다. 과연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을 복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서두에서 제가 성전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했었던 것도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에 대해 마음문을 열고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각오와 결단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요 신앙의 자세입니다.

과연 우리 예수님은 무엇을 축복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예수님의 위대한 교훈인 산상수훈은 복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복이 있다는 말이 여덟 번이나 반복됩니다. 국민학생이라도 이것은 예수님께서 복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해석할 필요조차도 없는 너무도 분명한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이 축복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심금을 울려 주는 말씀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그렇게 축복을 좋아하는 목사님들이 복을 강조하며 복을 받으라고 하면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은 별로 관심도 없고 인기도 없습니다. 목사님들이 ‘축복이 있을지어다’하고 말할 때 그 축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분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복을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예수님의 축복에 관한 말씀이 별로 소개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몇 년이 가도 팔복에 관한 설교를 들어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는 것이 복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복을 보면 처음부터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나옵니다. 복이란 기뻐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애통하는 것이 복 있는 것이라 했으며, 마음의 평안이 복인 줄 알았는데 고난이 복이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번지수가 다른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씀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복의 말씀을 볼 때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반가움보다는 놀라움이, 기쁨보다는 우울함이 생깁니다. 합리적이라기보다는 뭔가 궤변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사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인 로이드 죤스 목사님은 예수님의 복을 강해하면서 “이 놀라운 역설은 우리들을 당황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닌게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복을 보면 우리가 생각했던 복하고는 머누 다른 것을 보면서 당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어조는 ‘이러이러한 사람은 복이 있을 것이다’라든가 ‘이러이러한 사람은 복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매우 확신에 찬 어조로, 단정적으로 ‘이러한 사람에게 복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팔복에 관한 말씀은 우리나라 성경 번역에는 잘 나타나 있지 않는데 성경 원어에는 ‘이 사람들에게 복이 있도다!’하는 감탄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아는 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을 중심으로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팔복은 하나하나 더 자세하게 공부할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야기서는 전체적인 흐름을 개괄하는 것으로 그쳐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첫째 복은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란 우선 “내가 별 볼 일 없는 존재”라는 사람을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내가 별 볼 일 있는 존재가 아니라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역설이 시작됩니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나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별 볼 일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복의 첫 단계를 우리가 별 볼 일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데서 시작하십니다. 이것을 깨달은 자가 복을 가진 자라는 사실입니다. 세익스피어는 그의 작품 가운데서 “여자는 바람에 나는 갈대”와 같다고 했습니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세익스피어는 파스칼에게서 이 말을 인용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파스칼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갈대다.” 세익스피어는 여자만 갈대라고 했지만 파스칼은 모든 인간이 갈대라고 말합니다. 여자만 흔들리는 갈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우리 인간은 남자와 여자, 늙은이나 젊은이, 돈을 많이 가진 자나 그렇지 못한 자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갈대일 뿐입니다. 여자만 바람을 날리는 갈대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갈대입니다. 파스칼은 이어서 “인간은 갈대다. 자연 속에서 가장 연약한 갈대다”고 말합니다.

갈대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흔들흔들 합니다. 인간은 갈대입니다. 우리 인간은 단지 흙으로 된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의 주성분은 흙일뿐입니다. 우리 인간이 흙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단지 흙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6․70년, 7․80년 잠시 살다가 가는 허망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은 자신이 얼마나 별 볼 일 없는 허망한 존재인가를 깨달은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죄인임을 아는 자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복은 자신이 얼마나 별 볼 일 없는 존재인가를 아는 사람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적인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이 축복은 놀랍습니다.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두 번째 복은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나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달은 사람을 말합니다.

저는 처음 신앙을 가졌을 때 오랫동안 예수 믿는 사람들이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기에 죄인, 죄인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되돌아보면 대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점점 눈이 뜨이면서 인간이란 것이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가에 대해서 깨달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남이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매우 실제적이고 매우 종요한 체험이어야 됩니다. 이것은 이론적인 지식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하는데 그런가 보다’하는 정도로 아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얼마나 문제가 만혹, 더러운 존재인가를 날마다 날마다 아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서 17장 9절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다음 말이 참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누가 능히 이것을 알리요.” 사람이 다 자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겷혼한 여자들의 탄식을 가끔 듣게 되는데, 결혼하기 전에는 진정으로 사랑해서 결혼을 했는데 결혼을 하고 몇 년을 살다 보니까 남자가 늑대고 여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것은 여자만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듯이 남자만 늑대가 아니고 모든 인간은 다 늑대라는 사실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의 시제는 현재분사형입니다. 이것은 계속해서 애통하는 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어느 한때만, 지금부터 10년 전에 내가 예수를 믿을 때만, 또는 큰 죄를 저질렀을 때만 애통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애통하는 자의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깊은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한 말을 보고 얼마나 많은 것을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이 말씀은 저에게 깊은 위로가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아, 바울 같은 그 위대한 사도도 그 마음 가운데 놀라운 갈등과 좌절이 있구나. 그렇게 위대한 사도에게도 많은 문제가 있구나’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는데 우리 같은 사람ㄹ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누가 행복한가? 누가 복을 받든 사람인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더러운 모습을 보고 애통하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역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복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자

세 번째로는 온유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원한다면 우리는 복이 무엇인가에 대해 예수님의 말씀대로 생각을 바꾸어야 됩니다. 이 시대는 힘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똑똑하고 재능이 있고 힘이 있는 사람이 잘살고 잘 먹고 다른 사람 앞에서 떵떵거리는 시대가 바로 오늘의 시대입니다. 힘이 오늘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땅을 지배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온유한 자란 부드러운 마음을 갖는 자입니다. 성경에서 “온유”라는 말의 뜻은 사나운 개가 주인 앞에서 꼼짝도 못하고 아주 고분고분한 개로 바뀌어 질 때 쓰는 말입니다.

온유한 마음이란 사나운 개가 주인 앞에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통제된 마음, 부드러운 마음을 말합니다. 강제와 권위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겸손과 자제와 인내로 하는 마음입니다. 세계 최대의 전도자인 빌리 그래함은 이 팔복이야말로 하나님의 놀라운 복의 창고라고 했습니다. 온유한 마음은 또한 열린 마음입니다. 무감각한 마음이 아니라 민감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귀를 기울일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사람, 이것이 복 받는 자의 삶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부부간에도 자녀 간에도 서로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소나무 가지를 꺾는 것은 강한 바람이 아니라 부드러운 눈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소나무는 강한 바람으로는 꺾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눈이 많이 오는 결울에 딱! 딱! 소리가 난답니다. 강한 바람으로는 꺾이지 않던 소나무 가지고 소복소복 쌓이는 조용한 누의 힘에 의해서 꺾이는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은 이러한 눈같은 마음입니다.

 

의를 추구하는 자

네 번째로 예수님께서 복 받는 자의 삶을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하셨습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매우 애타고 갈급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와 우리는 과연 무엇에 목말라 하고 애타고 있습니까? 더 많은 쾌락을, 더 많은 소유를, 더 많은 권력을 향해서 사람들은 애타게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에 목말라 하고 애타고 있는가를 아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먼저는 얼마나 그 일에 시간을 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가장 많이 내는 것이 가장 그 사람이 목말라 애타고 있는 것입니다. 또 사람이 얼마나 돈을 투자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이 무엇에 목마르고 애타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과연, 내가 목말라 애타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행복이 보장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돈 많이 가진 사람들은 백만 원, 이백만 원짜리 과외를 아깝게 여기지 않고 투자를 합니다. 기꺼이 투자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단돈 만 원도 아까워하지만 내 아들 딸이 잘되게 하기 우해서는 백만 원도, 이백만 원도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필요하다면 더도 낼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무엇을 애타게 목말라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더 많은 쾌락을, 더 많은 권력을, 더 많은 소유를 목말라 애타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기 의(義)는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목말라 애타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순종하기 위해 목말라 애타는 사람들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먼저‘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가장 먼저 우리들이 진정 구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필수품을 거부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본질적으로 추구해야 될 것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런 사람이 바로 진정한 복의 소유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동정심을 갖는 자

다섯 번째, 예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긍휼’이라는 말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친근한 말은 아닙니다. 우리말 번역을 다르게 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긍휼이라는 말은 특히 구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인데 인자, 인애, 사랑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긍휼을 가진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란 동정심을 갖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는 한자 뜻 그대로 상대방의 마음과 같아질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얼마나 잔인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까? 참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몰라주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갈수록 무정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긍휼히 여기는 자는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이웃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이야말로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나는 절대로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는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하고는 결코 화해하지 않겠다”고 화가 나서 혹 순간적으로 그렇게 말 할 수는 있겠지만 그 말이 잘못된 것을 아록 한 시간 후, 수 시간 후, 하루 내에, 일주일 내에 우리는 회개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죄인도 용서하셨는데, 별거 아닌 우리가 나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한때 화가 나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있을지라도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죽을 때까지 나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애통하는 자의 삶을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용서할 줄 아는 마음, 기꺼이 용서할 줄 아는 마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마음, 그리고 용서하는 시간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깨끗한 자

여섯 번째,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마음이 깨끗하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무엇보다 진실한 마음입니다. 진실해야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너무나 거짓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참, 저 친구 순진하단 말이야’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그 친구 참 순진해. 그렇게 해서 무슨 일이 될까?’라는 말을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순진한 것이 통용되는 사회가 아닙니다. 순진하다는 말은 무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래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겠느냐는 말입니다. 거짓을 말할 줄 알고 임기응변을 할 주 알아야 되는 것이지 바른 말하고 옳은 이야기를 하면 별로 인기도 없고 무능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오늘 이 시대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잘해야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진실한 마음을 갖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빈 마음을 갖는 사람입니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는 마음,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의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의 마음속에 얼마나 불순물이 많습니까? 시기와 질투와 교만과 욕심과 지배하려고 하는 마음 등 이러한 불순물들로 우리의 마음이 꽉 차 있습니다.

요즘 베스트 셀러 가운데 법정 스님이 쓰신 「텅 빈 충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산사에서 존경하는 스님의 방에 들어갔는데 그 방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벽에 옷걸이도 없고 책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도배만 한 방 그대룁니다. 필자는 거기서 ‘여기는 뭔가 꽉 차 있구나’하는 것을 느꼈다고 썼습니다. 책도 없고, 옷도 없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우리의 마음에, 우리의 삶에, 우리의 집에 무엇인가를 꽉꽉 채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채워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러나 빈마음의 소유자가 복이 있는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평화를 만드는 자

일곱 번째,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화평이라는 말은 ‘에이레네’라는 말입니다. 구약언어로 말하면 ‘샬롬’입니다. 샬롬을 만드는 자는 복이 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서도 그 사람만 들어가면 이유야 어쨌건 분위기가 아주 시끄러워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똑똑한 것이나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란 마음씨가 좋아 대충대충 넘어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분위기를 읽고 그의 여건들을 읽어내면서 평화를 만들어 내는 그러한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내가 들어가면 시끄럽게 싸움을 하던 분위기도 조용해지고 화해가 이루어지는 모습이 얼마나 좋습니까. 바로 이러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프란체스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주시옵소서.”

미움과 상처와 분열과 의혹이 우리 가운데, 이 땅에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이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전하는 평화의 도구들이 되어야 하겠스비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프란체스코의 기도는 이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우리는 자꾸 위로받고 이해받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위로하거나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해받기 원하고 위로받기를 원하는 모습을 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향해서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고생하는 자

마지막 여덟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의(義)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팔복을 산에 비유하기도합니다 .그래서 팔복산이라고도 합니다. 가난한 마음은 팔복산을 올라가는 첫단계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고는 아예 팔복산에 오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산을 오를 때 헬리콥터를 타고 꼭대기로 바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갑니다. 팔복산을 올라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가 얼마나 별 볼 일 없는 존재인가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 확신이 없이는 아직도 팔복산에 올라가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오르기 시작한 팔복산의 꼭대기에 무엇이 약속되어 있을지 상당히 궁금합니다. 그런데 팔복산의 꼭대기에는 핍박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난과 핍박을 받는 자는 최고의 복을 소유한 자라고 말씀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의 내용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복과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상당히 당황하게 됩니다. 우리 생각과는 너무 다른 것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은 한국 교회가 가르쳐 준 복과 다르고 동양적 오복과도 다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면서도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복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무시하고 있는 실정을 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보면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당하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경건이 무엇입니까?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고 구역예배를 참석하고 수요예배에 참석하고 아침 저녁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면 그 사람을 보고 경건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울은 경건한 사람의 증거는 핍박을 받는다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을 때 진정한 경건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불편을 감수하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손해를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경건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조용히 밀실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을 경건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삶을 조용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경건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전혀 핍박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에서 ‘무릇’이라는 말은 ‘참으로’(indeed)라는 뜻으로 경건을 강조하고 있는 말입니다. 참으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예수 그리도 때문에 손해를 본다는 말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33년밖에 살지 못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33년 밖에 살 수가 없었습니다. 더 살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같이 살아가는 삶은 필연적으로 핍박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에 33년 밖에 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말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순종하는 삶을 산다면 5년 내지 10년 내에 다른 사람에 의해서 모함과 고통을 받거나 나아가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상당히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오늘과 같은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게 되면 틀림없이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핍박을 받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았고 복을 받은 증거는 출세하고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어느 곳을 보아도 그런 구절이 없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을 받은 사람은 틀림없이 고난을 받게 됩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

이상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고 추구하는 복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이사야서 55장 8절에 보면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고 하나님의 길은 사람의 길과 다르고 하나님께서 복이라 하는 것과 사람이 좋아하는 것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죤 스타트는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가장 복된 상태를 누구보다 더 잘 아신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할 것인가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 어떤 사람의 말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석가모니가 한 말을 읽어 보십시오. 공자가 한 말을 읽어 보십시오. 간디가 쓴 말을 읽어 보십시오. 칼 마르크스가 쓴 말을 읽어 보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들이 발견합니다. 요한복음 7장 46절에 “그 사람(예수님)이 말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이때까지 없었나이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말한 사람이 지금까지 없습니다. 아무리 석가모니, 공자, 마호멧이나 마르크스가 있어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는 다릅니다. 누가 행복한 자입니까? 누가 복을 받은 사람입니까? 무엇을 축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축복의 개념이 바뀌지 아니하고는, 축복의 개념이 혁명되지 아니하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된 자란 팔복을 가진 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땅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 가운데에는, 오늘 우리 한국 교회에는 내가 원하는 땅으로 가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에는 내가 원하는 땅으로, 내가 바라는 곳으로 가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하는 모습들을 너무도 많이 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는 것이지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이 팔복 속에 예수님의 모습이 담겨져 있음으로 보게 됩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의 모습을 닮은 자야말로 복된 삶을 산 자입니다. 로마서 8장 29절에 우리를 택하신 목적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이 팔복 가운데 가장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이 여덟 가지의 마음, 이 여덟 가지 삶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고, 그리고 그 분을 따르는 자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진정한 복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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