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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교훈/축복의혁명 - 박철수

8장. 바알신과 암몬신

by 복음과삶 2007. 5. 8.

<축복의 혁명>

8장. 바알신과 암몬신

박철수

 

보다 더 많이 갖는 일에만 전념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으로 구성된 사회 또한 병든 사회다.

                                 - 에리히 프롬 「존재냐 소유냐」에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 로마서 8장 17-18절

 

이스라엘 민족의 탄생은 창세기 12장 1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이 말씀은 언뜻 보기에 대수롭지 않은 것 같지만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태동되는 모태가 되는 구절입니다. 창세기 14장 14절에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보라.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동서남북으로 보이는 이 넓은 땅을 너에게 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 당대에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이 죽은 후 무려 700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인 모세와 여호수아를 일으키셔서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 땅을 정복하도록 하셨습니다. 바로 그 천신만고의 기록이 출애굽기요, 민수기요, 신명기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하나님께서 그의 선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 가나안 땅을 두고 그 땅에 들어가게 되면 조심할 것과 명심해야 될 것에 대해 신신 당부를 하는 내용이 바로 신명기요 여호수아서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반복해서 강조하고 또 당부한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다른 신을 절대로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만약 다른 신을 섬기면 너희들이 그 땅으로부터 다시 쫓겨나리라는 것입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이 신명기와 여호수아서가 가르쳐 주는 가장 핵심적인 교훈입니다. 여호수아서 24장 20절을 보겠습니다.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벌하시리라.” 이 말씀은 여호수아가 죽을 때 유언과 같이 마지막으로 남긴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더라도 너희들이 이방신을 섬기게 될 때에는 너희에게 화를 내리고, 너희를 멸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다른 신, 이방신은 어떤 신입니까? 모세가 그토록 신신 당부하면서 그 땅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 여호와만 섬기고 다른 신은 섬기지 말라고 했는데 그 다른 신이 어떤 신입니까. 도대체 그 신이 어떤 신이길래 모세와 여호수아가 그토록 신신 당부를 했을까요? 그 신이 다름 아닌 ‘바알 신’입니다.

성경을 어느 정도 알고 교회를 어느 정도 다니신 분이라면 이 바알 신의 이름은 다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쩌면 세계의 역사는 이 바알 신과의 싸움입니다. 도대체 바알 신이 어떤 신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서 그토록 그 신을 조심하라고 했을까요. 바알 신은 원래 중동지방의 토착신입니다. 어느 지역에서나 그러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바알에 대한 신앙은 전래로부터 쭉 내려온 뿌리 깊은 민간 신앙이었습니다. 마치 오늘 우리 무당종교와 비슷한 신앙이었습니다. 이 신은 그 때 당시의 농경사회에서 생산의 신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풍요와 쾌락을 약속하는 신입니다. 즉 축복을 약속하는 신이 바로 이 바알 신입니다. 얼마나 좋은 신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모세와 여호수아와 하나님의 그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 바알 신의 유혹이 얼마나 크고 강했던지 이스라엘 민족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적으로 여호와 신앙이 아니라 바알 신앙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하는 것을 봅니다. 점차적으로 이스라엘은 풍요의 신, 축복의 신, 쾌락의 신인 바알 신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바알 신을 섬기는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살아 있을 당시와 여호수아와 함께 동역했던 장로들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그래도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던 것 같습니다(수 24:31).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고 난 다음에 그 뒤를 이어 사사들이 등장하는데, 그 때부터 바알 신을 섬기기 시작합니다(사 2:11). 하나님께서 그토록 바알 신을 멀리하라고 경고했건만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신이 바알 신을 섬기게 되는 것을 봅니다. 북왕국 시대의 아합왕 때에는 이스라엘이 온통 바알 신을 숭배하는 천지로 바뀌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라 바알 신을 믿는 신앙으로 바뀌어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때부터 예언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예언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종교를,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을 살리기 위해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는 엘리야와 바알 신과의 싸움을 기억합니다. 결국 통쾌한 승리를 하였지만 엘리야는 바알 신과의 싸움에서 절망 가운데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 너무 소수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이렇게 절망과 좌절 가운데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절망하지 말아라. 내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명을 남겨 놓았으니 걱정하지 말아라”는 음성을 들려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서 ‘너무 절망하지 말아라. 내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자 칠천 명을 남겨 놓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그때 사회가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극소수였으며 반면에 바알 신을 숭배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예레미야 시대에도 바알 신 숭배가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무엇보다도 바알 신으로부터 EJ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서 11장 13절에 보면 바알 신의 모양을 만들어 세운 제단이 매우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심은 후에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라고 하셨습니다(렘 11:17).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다른 신을 섬기면 재앙을 내리겠다고 선언하셨으며 그 땅으로부터 뿌리 뽑히리라고 여러 번 경고를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들으면서도 바알 신이, 축복을 약속하는, 풍요를 약속하는 신이 너무도 강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심판의 역사로 점철되고 버림의 역사로, 고난의 역사로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는 역사로 점철되고야 말았습니다.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로마가 계속하여 이스라엘을 정복하면서 이스라엘은 땅을 잃어버린 비참한 유랑의 민족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들이 불순종한 결과였습니다.

 

바알 신의 매력

그렇다면 왜 이 바알 신이 그토록 이스라엘에게 큰 유혹이 되었으며 그 신이 도대체 어떤 신이기에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가? 왜 그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신을 버리고 바알 신을 따랐던가에 대해서 그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첫 번째로 바알 신은 편리한 신이었습니다. 바알을 숭배하는 신앙은 순종이 필요없는 신앙입니다. 어떤 부담도 갖지 않고 믿을 수 있는 신이 바로 이 바알 신입니다. 보이는 형상을 만들고 그 형상 앞에 제물을 갖다 바치고, 그 형상에 절만 하면 되는 신앙입니다. 얼마나 편리한 신앙입니까? 바알을 숭배하는 신앙은 결단과, 순종과, 각오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형상을 만들고 거기에 물질을 바치고 절만 하면 축복이 약속되는 신앙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의 어느 부분을 보더라도 ‘너는 내 말에 순종하라. 순종하지 아니하면 네가 벌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말씀의 어느 구절을 보더라도, 여호와의 신앙은 결단과 순종을 요구합니다. 그런 데 반해 바알 신은 순종이 없어도 축복이 보장되는 편리한 신입니다. 편리하기 때문에 인기가 있었고, 그래서 그들에게 유혹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 바알 신은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축복을 약속합니다. 편리한 신인 데다가 손으로 만져볼 수도 있고,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축복까지 약속을 했으니 이건 참으로 금상첨화입니다. 얼마나 좋은 신앙입니까? 부담 없이 믿으면서도 복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좋은 신같이 느껴졌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토록 놀라운 체험을 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바알 신을 따라가고야 마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곧 나 자신의 모습이고, 우리들의 모습이고, 우리 인간 모두의 모습입니다.

지금도 우리 한국교회와 우리들은 이 바알 신의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편리한 신, 가시적인 축복을 약속하는 이 바알 신을 찾고 있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우리는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맘몬’이라는 또 하난의 신의 이름을 발견합니다. 제가 쓴 「돈과 신앙」에서 ‘맘몬’이 신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언급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4). 맘몬 신은 한마디로 말하면 돈의 신이고, 재물의 신이고, 잘되는 신이고, 축복의 신입니다. 어느 학자는 이 맘몬 신과 바알 신과의 관계를 “사이 좋은 의형제”라고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맘몬신과 바알 신은 사이좋은 의형제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유혹하는 신이 바알 신이었다면, 신야그이 우리들은 유혹하는 신은 바로 맘몬 신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신 것은 맘몬 신의 위력을 간파하신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니 혹은 이를 미워하면 저를 미워할 것이요, 혹 이를 중하게 여기면 저를 경히 여기느니라’고 하신 것은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본성은 동시에 두 가지 것, 즉 여호와 하나님과 맘몬 신을 함께 섬기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돈이 황제가 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새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한 권의 책이 소개되고 있는데 「돈황제」라는 책입니다. 돈이 황제입니다. 돈만 있으면 오늘 우리 시대에 안 되는게 없습니다. 돈이야말로 하나님보다도 힘 있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보다 돈의 위력이 더 큰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회나 교회에 똑같이 돈의 위력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결코 그래서는 안되겠지만 현실적으로 돈이 지배하고 있고 돈이 황제로서 추앙을 받고, 돈이 황제로서 권세를 누리고 있는 것이 오늘의 세계이고 교회의 현실입니다.

우리들은 평상시에는 신앙이 좋은 것 같아도 비상시가 되면 그래도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그토록 신앙이 있는 것 같이 보이는데도 비상시가 되면 돈을 따릅니다. 그래도 돈 신이 있어야 되지 여호와 신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리의 양심으로 자문자답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진정 나를 든든하게 하고, 편안하게 하고, 내 마음을 끄는 것이 하나님입니까? 돈입니까?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 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를 편하게 하고, 나를 든든하게 하고, 나를 기분좋게 하는 것이 하나님인가? 돈인가?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나의 노래시요 그는 나의 구원이시라”는 시편의 노래가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나의 노래요 그는 나의 구원이시라. 과연 그러한가? 진정 교회를 다니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돈은 나의 힘이요 돈은 나의 노래요 돈과 나의 구원이라고 고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나의 힘이요 나의 노래요 나의 구원이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들의 삶은 돈만이 나의 힘이요 돈은 나의 노래요 돈은 나의 구원이 아닌지요.

오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 중에 입시문제가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사회를 강타하고 우리 사회를 완전히 구부러지게 만드는 악신이 있는데 바로 대학입시라는 귀신입니다. 완전히 우리의 멱살을 잡고 오늘 한국 땅을 누르고 있는 악령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대학입시라는 귀신입니다. 완전히 우리의 멱살을 잡고 오늘 한국 땅을 누르고 있는 악령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입시의 문제입니다. 며칠 전에 중학교 3학년이 동반자살을 했습니다. 죽고 싶다는 학생들이 지금 많이 있습니다. 자기만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도 죽이고 싶은 학생들이 지금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내가 죽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죽여야겠다고 하는 이러한 끔찍한 이야기들이 이 시대를 풍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입시문제가 우리들의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까?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몇 십만원, 몇 백만원을 들여 가면서 과외를 하게 되고, 평소에는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입시 때가 되면 백일기도를 하고 금식기도를 하는 그런 열심이 어디서 나옵니까? 교회에서 헌금하는 데는 그토록 인색하면서도 과외를 하는 데 드는 비용은 몇 십만원 몇 백만원은 별것이 아닙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듯이 요사이 재미있는 부흥회가 새로 생겼습니다. “대입시험 대비 산상 기도회”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백일기도회”라고 해서 불교표어를 갖다 놓더니 이제는 고민하는 어버이들을 위한 기도회가 생겼습니다. 엄청나게 사람이 몰리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입시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까? 한마디로 공부를 잘하는 것이야말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복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잘하는 거야말로, 대학을 가는 거야말로, 좋은 대학을 가는 거야말로 축복을 보장해 주는 확실한 근거이고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 이상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도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확실한 방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좋은 대학을 들어가는 일이라면 신앙도 동원하고, 돈도 동원하고 다 동원해서 입시에 모든 사람들이 혈안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돈을 보장해 주고, 출세를 보장해 주고, 좋은 결혼을 보장해 주고, 또한 나아가서 인격까지도 보장해 줍니다.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을 다니면 인격까지도 좋아지는 시대를 우리는 지금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돈도 아깝지 않고 백일기도회가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황금, 돈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돈의 권세가 우리들의 삶을 속속들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 바알 신과 맘몬 신을 거역하는 것은,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그토록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바알 신을 따르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따르라고 말했지만 그들이 따르지 못한 것처럼 어려운 것입니다.

 

회개 없는 위로는 아편이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얻기 위해서 교회에 온다고들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입니다. 참되고 완전한 위로가 오직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입니다. 교회는 분명히 위로의 저수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위로가 어떤 것인지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위로의 실체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내가 지금 무슨 위로를 구하고, 받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결단 없이, 순종 없이, 고난 없이, 아픔 없이 쉽게 위로를 얻고자 합니다. 가시적이고, 직접적이고 물질적인 결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십 세기의 위대한 사상가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칼 마르크스는 순종이 없는, 결단이 없는, 아픔이 없는 기독교를 향해 아편종교라고 했습니다. 아편은 마약입니다. 마약은 기분을 좋게 해줍니다. 몇 푼 돈만 있으면 바로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솟아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아편입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가 과연 ‘민중의 아편’이 아닌가를 엄숙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편 같은 위로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오늘 윌 교회 안에 너무도 많습니다. 그것은 순종을 거부하는 종교입니다. 그런 신앙은 결단을 거부합니다. 사람들은 곳곳에서 지금 아편을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아편을 비롯한 마약을 맞고 있는 사람은 30, 40만 정도로 추정합니다. 90년대 초반이 되면 100만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사회적 현상은 교회에 반영되고, 교회의 현상은 사회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입니다. 지금 아편을 찾는 무리들이 갈수록 교회 밖이나 교회 안에 늘어가고 있습니다. 아편 한 방이면 쓰라린 통증이 깨끗이 가셔집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아편을 맞았다고 해서 순간적으로 기분은 좋을지 몰라도 근본적으로 건강해지고 힘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한국 기독교가 천만이라는 놀라운 교인이 있는데 왜 이토록 무기력합니까? 아편을 맞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편을 맞고 있는 동안은 기분이 좋고 힘이 있는 것 같고, 얼굴에 화색이 돕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에 하숙집 할머니가 아편을 맞는 분이었습니다. 평소에 보면 얼굴이 주름투성이인데다 우울하셨는데 아편만 맞으면 얼굴에 화색이 돕니다. 천사의 얼굴입니다. 우리들한테도 잘해 줍니다. 그런데 그 약 기운만 떨어졌다 하면 마귀할멈과 비슷한 얼굴도 돌아갑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 안팎에서는 아편신앙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엘리야가 당시에  신에게 가는 이스라엘 민족 때문에 절망했을 때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던 7천 명을 숨겨 놓았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성도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목회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편을 주어야 교회가 성장한다고 하는 진리는 이미 증명된 사실입니다.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아편을 줘야 된다는 말입니다. 아편을 안 주면 교인 수가 늘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쉬운 신앙, 결단이 없는 신앙, 순종이 없는 신앙, 아픔이 없는 신앙은 인기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이 축복기도를 하셔야 예배를 본 것 같고, 기도를 한 것 같다는 말씀을 합니다. 목사님의 축복기도가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성경은 회개 없이는 기쁨의 위로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회개가 없이는, 회개가 없는 기쁨과 위로는 가짜입니다. 그런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참 신앙, 하나님 신앙, 여호와 신앙은 회개를 통해서만 기쁨에 도달할 수 있으며,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회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내가 밟아 온 길을 되돌아서는 것입니다. 가던 길을 바꾸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것이 아니고, 오던 길을 빨리 가는 것이 아니고 또는 오던 길을 서서히 가는 것도 아니고 오던 길을 바꾸어서, 거꾸로 방향을 바꾸어 가는 것을 회개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을 그대로 놔두고, 거기에 더하기 신앙이 아니라, 지금까지 있는 생각을 벗어 버리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없애 버리고, 이제 새롭게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을 갖는 것을 회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를 눈물 흘리고 교회만 나오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교회에 왔다갔다 하고, 술 안 먹으니까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술 안 먹고 담배 끊는 것이 중요한 회개의 표징일 수는 없습니다. 신앙을 술 안 먹고, 담배 안 먹었기 때문에 잘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신앙의 본질, 회개의 본질은 보다 깊은 데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좋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했던 것을 이제는 새롭게 바꾸고 버리는 행동이 회개입니다. 아무리 40일 기도를 하고 와도 그의 생각과 행동하는 것이 바뀌어지지 않고 그의 가던 길이 바뀌어지지 않는다면 아직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회개는 고통스런 결단이 수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지금 가던 길, 내가 지금까지 좋아했던 것을 버려야 되고 뒤로 돌아서야 되기 때문에 거기에는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몸을 쳐 복종케 하는 아픔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뒤에 하나님께서 위로를 주시는 것입니다. 목사님 설교 몇 마디 들으면서 말의 기교를 통해서 위로를 받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아편입니다. 가짜입니다. 아편과도 같은 위로를 어디다 써먹습니까?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위로입니까?

진정한 축복이 과연 무엇입니까? 복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거기에 생명을 바치고, 내가 거기에 혼신의 힘을 바치고, 내가 거기에 돈을 바치고, 내 인생을 걸 수 있는 그것을 복이라고 말합니다. 철학적으로 우리는 ‘최고 선’이라고 말합니다. 나에게 있어 바로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혹시 바알 신과 여호와 신을 함께 섬길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그 유혹이 항상 시시때때로 우리를 향해서 오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니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의 것과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은, 우리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은, 위로는 세상의 거소가 전혀 질이 다릅니다. 이스라엘 신앙에 있어서 바알 신이 항상 올무와 함정이 되었던 것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산앙에 있어서도 맘몬 신이 올무가 되고, 함정이 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런 것들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죽을둥 살둥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질적으로 삶의 차원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주신 복이고 우리가 구해야 될 복입니다. 그 복을 얻기 위해서는 아픈 결단과 순종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