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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교훈/축복의혁명 - 박철수

11장. 나를 따르라

by 복음과삶 2007. 5. 8.

<축복의 혁명>

11장. 나를 따르라

박철수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 같이 성도가 성도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

                                     - 본훼퍼 「나를 따르라」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마가복음 8장 34절

 

“배가 터지도록 한번 먹어 봤으면 좋겠다.”

이 말은 요즘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40세 이상 된 사람들은 어렸을 때 많이 들어 보았던 말입니다. 제가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들었던 한스러운 이야기 중에는 “쌀밥 한번 실컷 먹어 봤으면 한이 없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민족은 한이 많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고난의 민족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경제성장은 지난 20여년동안에 갑작스럽게 발전한 것입니다. 그 전의 우리민족은 실컷 먹어보지 못한 한, 굶어 죽어가는 한들을 가지고 살아온 민족입니다. 반만년 역사를 자랑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웃나라에 틈나는 대로 두들겨 맞은 나라가 우리민족입니다. 틈만 나면 두들겨 맞고 처자식이 잡혀가고 남편이 죽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당나라, 명나라, 청나라 등 중국의 왕조가 바뀔 때마다 우리나라는 빼앗기고 죽임을 당하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근세에 들어와서는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 배우기만 했던 일본까지 가세를 해서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일으킵니다. 고사를 잃어 보면 임진왜란 때 일본사람들이 할퀴고 간 이 강토에, 먹지 못해 굶주린 부모가 자식까지 잡아먹는 사례가 있었습니다. 이해가 안 가지만 머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자식가지 잡아먹어야 했던 한스러운 민족이 우리나라입니다. 최근에 와서는 36년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45년에서 50년간을 일제의 통치 밑에서 한을 받게 됩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그런데 우리나라의 한스러운 역사와 비슷한 한을 가진 민족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고,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한스러운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의 경상남북도를 합친 정도의 조그만 나라입니다. 그 조그만 땅덩어리의 동서남북 사방에 강대국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북쪽에는 앗수르, 남쪽에는 애굽이 그리고 동쪽으로는 바벨론, 페르시아, 서쪽으로는 로마가 번갈아 가면서 지중해 연안을 정복합니다. 그 한가운데 끼어 있는 조그만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힘도 없는 나라이므로 강대국의 전쟁 통로였습니다. 한마디로 동네북입니다. 우리나라는 200년 전까지는 북쪽에만 중국이 있었고 그 이후에 일본의 침략이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동서남북이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조그만 나라입니다. 구약성경은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모르고 보면 그 깊은 의미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한 후 B.C 587년 즉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에 앗수르와 바벨론에 차례대로 멸망합니다. 이 이스라엘이 A.D 1948년에 독립했습니다. B.C 163년에 100년 정도 독립한 기간을 빼놓고는 약 2500년의 오랜 기간을 다른 나라의 압제 속에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나라들이 있지만 생겨났다가 없어진 나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인구가 백만에서 이백만 정도였던 이스라엘은 망하면서부터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그런 후에 2500년 만에 다시 독립을 한 것입니다. 역사가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기적의 역사요, 역사의 기적이다” 우리는 50년간 일제의 압제 속에서 대단한 고통을 받았는데 유대인은 2500년 동안 고통을 받았습니다. 다른 것은 다 생략하더라도 유대인들이 2차대전 때 6백 만명이나 히틀러에게 죽었습니다. 그것도 무슨 특별한 잘못이 있어서 죽은 것이 아니고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영화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당시 유대인들을 전부 골라 가슴에 별표를 달아 놓았습니다. 독일에서 뿐만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유대인들을 골라내어 별표를 달았습니다. 별표를 단 유대인은 아무렇게나 죽여도 상관이 없습니다. 유대인을 죽인 이유는 단지 유대인이 게르만 민족보다 우수하다는 것뿐이었습니다.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간이 가면서 나는 점차 유대인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을 죽여야 하겠다는 것이 나의 사명으로 점점 부각되었다.” 유대인 학살의 이유는 이것뿐이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엄청난 고난을 받은 민족이 바로 이 유대민족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로마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일제시대처럼 빌라도라는 총독이 와서 통치를 했습니다. 일본이 대동아 전쟁을 통해서 아시아를 지배한 것처럼 인류역사에 로마만큼 큰 나라를 이룬 나라가 없습니다. 로마가 당시 세계를 제패했습니다. 세계를 통일했다는 의미는 지배한 나라들을 통치하기 위해서 강압정치를 해야만 한다는 의미이므로 지배당한 나라들은 그만큼 고통을 당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당시에 로마로부터 임명된 이스라엘의 왕이 헤롯입니다. 이 헤롯이라는 왕은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잔인한 왕이었습니다. 예를 한 가지만 들자면 예수님이 와으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기의 왕권이 위태로울까 봐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모두 죽여 버렸던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잔인한 왕에게서 폭압을 당했습니다. 참으로 이 민족만크 고난을 많이 받은 민족이 이 세계에 없습니다. 요하킴 예레미야스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이라는 책에서 “예루살렘은 거지들의 중심지였고 독재정치에 의한 학대와 돈의 탕진에 의한 민중의 탄식은 극도에 달했다”고 예수님 당시의 사회상을 설명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유독 병자나 미친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영양실조의 결과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에만 병자들이 몰려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그때의 상황이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당시의 이스라엘은 참으로 고통과 한이 하늘에 사무칠 때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메시야 사상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살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정감록사상이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에서도 당시에 정감록사상과 같은 묵시문학이 발달했습니다. 혹세무민케 하는 말이 사회에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후에 가짜 메시야들이 극성을 부립니다. “내가 메시야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행여나 저 사람이 메시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3장 15절에 보면 요한을 보고 저 사람ㄹ이 혹시 메시야가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백성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이 세례요한도 결국 헤롯 왕에게 잡혀 죽습니다.

이때부터 예수라고 하는 젊은이가 이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예수님의 나이는 서른이 갓 넘었습니다. 이 예수라는 분이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등장하게 됩니다. 벙어리와 소경, 문둥병자가 치유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등 놀라운 현상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사실은 급속도로 퍼져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분이야말로 우리가 몇 천 년 동안 기다리던 메시야로구나’하는 생각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생겼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분이 바로 이 분이로구나. 이제 우리도 고통스럽고 한스러운 세월을 끝내고 로마와 헤롯의 통치로부터 독립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의 나라를, 메시야가 통치하는 좋은 세상을 살 수 있겠구나’는 생각이 백성들의 마음속에 가득 차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영광스러운 다윗의 통치가 이루어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놀라운 기적 후의 성경기록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가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12~15). 여기 보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면서 사 오천 명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를 뿐만 아니라 ‘저 사람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다. 저 사람을 우리의 왕으로 삼으면 이제 우리의 한스러운 역사를 끝마치고 영광스러운 다윗의 시대를 살 수 있겠구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 사건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방의 조용한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요한이라고도, 엘리야라고도, 예레미야라고도 말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메시야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계시던 예수님께서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8:30~32).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고난을 받고 죽게 되리라”는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던 베드로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니 당신이 고난을 당하고 죽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당신은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야, 우리를 구원할 영광의 메시야가 아닙니까. 당신이 금방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죽으시다니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이제까지 고생을 하면서 당신을 따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고생을 하면서 따른 것은 당신이 왕위에 오를 때에 한 자리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어떻게 된 것입니까. 당신이야말로 그 능력을 가지고 이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위대한 분이 아니십니까.” 아마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렸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말씀이 직접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오랜 시간 상당한 항의와 설득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 베드로의 간곡한 말을 듣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그 말에 동요나 동조를 하신 것이 아니라 33절에 보면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물러가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그 간곡한 몸부림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말씀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사단아 물러가라. 네가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나는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까지 그냥 끝났으면 좋았을지 모르는데 혹을 떼려다가 혹을 붙이는 격이 되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R서는 “나뿐만 아니라 너희들도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라는 말은 예외가 없다는 말입니다. 나를 믿고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내가 십자가를 진 것처럼 예외 없이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본훼퍼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같이 성도가 성도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도 베드로처럼 마음속에는 영광의 메시야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나도 예수님을 따르면 한 자리 하겠지 나도 예수님을 따르면 소위 축복을 받을 수 있겠지’ 이 베드로의 마음이 바로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주여, 어떻게 된 것입니까. 당신이 십자가에 돌아가신다면 내가 따르는 것이 헛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편리한 신앙, 영광의 신앙, 축복의 신앙, 이것은 사탄적인 것입니다. 이것들은 인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인기작전을 쓰시지 않았습니다. 복음서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은 인기작전을 쓰시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에는 한 자리 하기 위해서, 영광의 신앙을 위해서, 축복의 신앙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은 인기작전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야 교회도 잘 되고 존경을 받습니다.

89년 11월 23일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간 지 일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날 백담사에서는 전두환씨가 바치는 부천님 진신사리 봉정식이 있었습니다. 그날 행해진 전두환씨의 연설문이 언론지에 발표됐는데 재미있는 구절이 있어서 인용을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여기 오셨는데 우리 내외가 여러분들에게 무슨 보은할 것이 없어서 오늘 새벽 일찍 일어나서 오늘 백담사를 찾아오시는 모든 불자님들의 소원을 성취하시고 건강하시고 또 wlgO를 많이 내려 주셔서 모든 일이 아주 술술 풀리게 기원해 드렸습니다. 그것도 아주 지극한 정성으로 기원해 드렸습니다.” 우리 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이 말을 듣고 있던 불교신자들이 “아멘”을 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식 축복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불교와는 다릅니다. 우리 성경에는 그런 식의 축복이 없습니다. 성경의 신앙은 백일 기도로 모든 것을 이루고 깨달아 버린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교회 안에서 전두환식 축복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생일에 목사님을 초청하면 이 연설문과 똑같은 내용의 기도가 올려집니다. 저는 그래서 일부러라도 축복이라는 말을 삼갑니다. 며칠 전 돌을 맞는 집에서 예배를 인도하면서 이 아이가 커서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자가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건강케 하시고 지혜를 많이 주시라는 말은 듣기는 참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을 구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성경적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시험은 예수님만이 받으신 시험이 아니고, 우리 모든 인간이 받는 공통적인 시험입니다. 이 세 가지 시험 속에 인간의 욕망이 다 들어 있습니다. 더 많이 갖고자 하는 경제적인 문제, 기적적인 것을 갖고자 하는 종교적인 문제, 남을 지배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으면 이런 것이 성취되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런 약속은 사탄이 했고, 예수님은 이 세 가지를 거부하신 것을 봅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받을 영광 때문에 고난을 함께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고난과 영광의 순서를 잘 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을 살아나갈 때 고난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여광이 보장되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현재 속에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지금은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고생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만큼, 예수 그리스도 만큼 자신만만하게 이것을 이야기한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은 그런 의미에서 복을 약속하는 조교가 아닙니다. 진정한 축복과 진정한 영광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 기꺼이 고난을 받으라고 말하는 것이 예수님의 축복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팔복의 마지막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복의 의미가 바뀌고, 복의 혁명이 우리의 삶과 신앙 속에 일어나야 합니다.

 

비용을 계산하라

누가복음 14장을 생각하면서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눅 14:25). 몇 천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시고 권위 있는 교훈을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따르고 있습니다. 그때 당시도 오늘과 같이 예수님을 따르는 허다한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무리들을 향해서 갑자기 뒤로 돌아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24:26, 27).

지금도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한국 땅에 허다한 무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눅 14:28). 이 말씀은 사람이 집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을 계산해 보고 집을 짓는다는 말입니다. 비용을 계산하지도 않고 어떤 바보가 집을 지으려고 하겠느냐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이와 같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미리 계산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비용을 계산하라! 영어 성경에는 Calculate the cost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과연 이익이 있는 것인지 손해가 되는 것인지 예수님을 믿기 전에 계산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분명한 각오를 하고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려거든 아예 처음부터 그만 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장 중에 우리가 잘 아는 유다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오늘의 이야기와 관련해서 한 가지 학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영광의 메시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이스라엘을 회복할 자로 생각했습니다. 유다는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와이 되시면 자기가 재무부 장관 정도는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 분 정도라면 무엇인가 할 것으로 확신하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예수님께서는 영광과 축복을 약속하기보다는 고난과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무엇인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유다는 예수님을 옳게 본 것입니다. 유다의 마음속에 실속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습니다. 은 30은 지금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사백만 원에서 오백만 원 정도입니다. 유다는 이 정도로 실속을 차린 것입니다. 유다는 이렇게 비용을 계산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 마음에도 유다적 생각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유다는 영광과 축복의 메시야를 소망했습니다. 그것이 좌절되자 예수를 팔아 버린 것입니다.

“예수께서 동행하던 군중을 향하여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 누가 망대를 지으려 한다면 그는 먼저 앉아서 그것을 완성하는 데 드는 비용을 따져 과연 그만한 돈이 자기에게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기초를 놓고도 힘이 모자라 완성하지 못한다면 보는 사람마다 저 사람은 집짓기를 시작해 놓고 끝내지를 못하는구나~!하고 비웃을 것이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공동번역; 눅 14:25~33).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하신 후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시대 가운데 인기 있는 메시지, 백담사의 전두환적 메시지가 교회 안에서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으면서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고난의 십자가를 질 줄 아는, 그리고 그 십자가 때문에 오늘의 삶 가운데서 고통당하며 손해를 보는 삶이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들을 귀 있는자는 들을지어다” (눅 1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