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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교훈/축복의혁명 - 박철수

10장.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복 (2)

by 복음과삶 2007. 5. 8.

<축복의 혁명>

10장.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복 (2)

박철수

 

그대는 축복의 산(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8복을 말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 만약 그대가 그 꼭대기에 다다르게 된다면 그대는 한 가지 소망만을 품게 elf 것입니다. 그 산을 내려가 가장 깊은 골짜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어렵고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소망. 그런 까닭에 우리는 그 산을 축복의 산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 칼릴 지브란「모래.물거품」에서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 누가복음 6장 46절

 

예수님의 말씀 중에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내가 있었다”(요 8:58)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30세가 조금 넘는 때였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조상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님보다 약 2천 년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30세가 약간 넘은 새파란 젊은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이 그토록 존경하는 조상 아브라함에 대해서 “내가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터무니없는 말에 분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나를 보기를 매우 사모하다가 죽었다”고 했으니 이 말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위대한 조상 아브라함을 모독하였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일제히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신히 도망쳐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고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사람들에게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오히려 혼란하게 만드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귀와 마음의 문을 열고 진심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나사렛 예수를 미쳤다고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의 말에 무릎을 꿇고 “이 말씀이 옳습니다”고 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중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느 것도 대충 넘겨버릴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 10: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교만한 자기 자랑에 대하여 기분이 나빠서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전통 가운데서 돌로 쳐 죽인다는 것은 누구든지 즉결 심판에 처해도 좋을 만큼 큰 죄를 저질러서 죽여도 전혀 죄가 되지 않는 흉악범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때에 겸손하게 “나와 아버지는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나의 말은 절대로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다”는 등 예수님의 말씀은 조금도 양보가 없고, 조금치도 틈이 없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죽이려고도 한 사람이 있었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저 젊은이의 말이 서기관들과 다르구나. 마치 권세 있는 자와 같구나”라고 말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어느 땐가 군병들을 시켜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보냅니다. 그런데 군병들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그 사람이 말한 것처럼 말한 사람을 아직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고 보고합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대제사장이 “너희들도 그 사람의 말을 듣더니 미혹이 되었느냐”고 말합니다(요 7:45~47). 아닌게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는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이 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해 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의에 목마르고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반복하여 강조하셨습니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복이 있다고 말한 사람이 산상수훈 이외에서 과연 누구인가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복이 있다.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3~1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부분에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하신 것입니다. 3년 동안 열심히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을 향해서 먼저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으신 다음에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전기 작가인 영국인 존스튜어트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이라는 책에서 “이 질문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질문이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로 아느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답변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어떠한 삶을 사는가를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구세주를 찾아 헤맵니다. 하나님을 만나보고 알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을 듣고 계시던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아, 어떻게 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가?”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바요나 시몬에 네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를 아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파스칼은 “나는 내가 믿는 자가 누구인지를 안다”고 했습니다. 그가 그토록 위대한 신앙의 삶을 살고 온전히 헌신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까? 첫 번째로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인생의 목적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야 할 이유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야 할 이유를 아는 것만큼 아름답고 멋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인생은 벌레나 짐승과 같이 그저 먹고 살다 가는 우연한 존재가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아야 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예수님을 안 자는 모든 사물의 목적을 안 자”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안자에게는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요 10:27)고 하시고 “야곱이 주는 물은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이 주는 물은 사람이 주는 물입니다. 사람이 주는 것은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준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체험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을 아는 자의 복은 죄 사함의 축복입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도저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얼마나 더럽고 얼마나 완악한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의 요j함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누립니다. “이제부터는 결코 너희에게 정죄함이 없나나”(롬 8:1).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네 번째로 예수님을 아는 자의 축복은 능력 있는 삶을 사는 데 있습니다. 기독교인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어려움과 고난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결코 넘어지지 않는 담대함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내가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다윗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듣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

예수님께서 복이 있다고 하신 두 번째 사람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함부로 아무에게나, 기분 나는 대로 복이 있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긴 것은 너희들에게 본을 보인 것이다. 알고 지켜라.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요 13:12~17)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마지막 날 밤에 있었던 일입니다.

인간의 본능, 인간의 욕망 중에 가장 큰 것은 권력에의 본능입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권력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지는 신앙인으로서 날마다 시간마다 깊이 살펴야 합니다. 권력의 본능이란 정치세계에서 한 자리하려는 욕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남을 지배하려는 마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이 본능을 하나님은 나쁘다고만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가진 이 본능을 지혜롭게 잘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진시로 칭찬하는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이 가진 이 본능을 지혜롭게 잘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진실로 칭찬하는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긴간은 인정받기를 원하는 권력에의 본능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칭찬하지 않고 출세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부와 칭찬의 경계선이 참으로 애매하기는 하지만 칭찬이 지나치면 아부가 됩니다. 바울은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롬 12:10)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카아네기가 「인생독본」에서 강조하기를 “상대방을 지혜롭게 칭찬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에도 헤프지 않으면서도 지혜롭게 칭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권력에의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백지화시키고서는 인간 사이가 원한하게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칭찬에 인색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인데 이것은 세상의 가치를 전도(顚倒)시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통속적 가치개념을 바꿔 버린다는 듯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으뜸이 되고 첫째가 되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지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가 으뜸이 되고자 하느냐? 그러면 섬겨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으뜸이 되려면 오히려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역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알고 행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남을 지배하고 큰소리 치는 것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섬기는 자가 진정한 복의 소유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1장 28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행동하는 신앙, 복종하는 신앙, 열매를 맺는 신앙, 우리 주님은 그런 신앙의 소유자를 향해서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세 번째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복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의 복입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요 20:29).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다른 제자로부터 전해들은 도마는 “야, 웃기는 소리 마라.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느냐. 나는 못 믿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면 내가 그 십자가에 못 박힌 손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만져 보아야 믿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도마의 의심은 어쩌면 나의 의심이고 우리의 의심이고 모든 사람의 의심입니다. 만져 봐야 믿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스펄젼은 크리스챤이 걸리기 쉬운 병이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는 기도를 게을리 하는 병입니다. 심지어 신앙한다고 하면서 세 끼 식사 때조차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식사 때만이라도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의 모범에 따라 항상 쉬지 않고 열성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기도하기 싫다면 신앙의 병에 걸려 있는 것이 틀림없는 증거입니다. 두 번째 병은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하는 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이 한시라도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보호 아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 아침에 일어난다고 하는 사실, 우리가 말을 한다는 사실, 우리가 그래도 건강하게 산다는 사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인데 이것을 실감 있게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도 신앙인의 병입니다. 우리의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손길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병은 표적과 기적을 보고 싶어 하는 병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9절부터 나오는 예수님의 교훈은 사실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이 세상에 살다가 죽은 다음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내용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살았습니다. 두 사람이 죽은 후에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고 부자는 음부에 들어갔습니다. 불꽃 가운데 고통 하던 부자가 아브라함을 보면서 이렇게 간절히 소원합니다. “나도 나사로가 있는 곳으로 갈 수가 없습니까? 여기는 너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를 그 쪽으로 가게 해주십시요.” 이 말을 듣고 있던 아브라함은 “이곳과 그곳은 너무 간격이 커서 올 수 없다”고 합니다(눅 16:27~29). 그렇다면 나사로를 자기 집에 보내어 아버지와 형제에게 증거하여 이곳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 간절한 요청에 대한 아브라함의 답변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가 살아났다고 하더라도 믿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눅 16:27~31). 여기 “모세와 선지자에게 듣는다”는 말은 그들이 기록한 성경을 말합니다. 즉 땅에 있는 형제들에게는 성경이 있으니까 구태여 나사로를 보낼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들은 부자는 계속해서 성경말씀으로는 부족하니까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땅에 가서 말하면 더 잘 믿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자꾸 표적과 이적을 성경 위에 놓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이단입니다. 바로 이러한 잘못된 생각에서 이단들이 나오게 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증거할지라도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확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확신을 위해서는 성경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이적과 기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사탄이 누구보다 잘 아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기적과 표적을 이용합니다. 사탄은 인간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으로부터 받은 세 가지 시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험을 예수님만이 받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날마다 받고 있는 시험입니다. 사탄의 시험의 특징은 모두 기적적으로 표적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해보시오”하는 것입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시오. 높은 곳에서 한번 떨어져 보시오. 내 앞에 절해 보시오”라고 하면서 사탄은 기적적인 것을 보장하며 우리들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주이에서 기적과 표적이 있다고 하면 조심스럽게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특별히 이 한국적 교회 상황 속에서 그것을 함부로 좋다고 날뛰다가는 큰 함정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표적과 기적이 지금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표적과 이적을 간구할 수 있고 또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것을 허락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성경말씀보다 더 위에 놓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나를 본 고로 네게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 되도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두고두고 오는 세대를 향해서, 그리고 바로 우리들을 향해서 보고 만져보고 믿는 것보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복 되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얼마나 큰 격려와 위로와 확신을 주는 말인지 모릅니다. 성경만큼 큰 기적은 없습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이 성경,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없습니다. 기적의 덩어리입니다. 이 기적의 덩어리를 제쳐두고 다른 것을 구한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기적이 있지만 성경 안에 있는 기적만큼 확실한 것은 없고 성경 안에 있는 기적보다도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성경은 지금도 살아서 움직이고 지금도 살아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이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 되도다”고 하셨습니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행 20:35). 우리 인간에게는 지배하려고 하는 본성과 함께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끈질긴 본성이 있습니다. 사람이 이 두 가지 본능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때 흔히들 성자라고 합니다.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욕망이 얼마나 질기고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소리를 듣기도 하고 직접 말하기도 합니다. “세탁기가 한 대 있으면 원이 없겠다. 전축이 있으면 원이 없겠다. 중고차라도 한 대 있으면 원이 없겠다. 임대 아파트라도 있으면 원이 없겠다.” 바로 여기에 우리 인간의 함정이 있습니다.

뻔히 들여다보이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습니다. 처녀가 시집가기 싫다는 거짓말, 노인이 빨리 죽고 싶다는 거짓말, 장사하는 사람들이 이익을 못 보았다는 거짓말입니다. 이런 말은 웃으면서 넘길 수가 있지만 웃으면서 넘길 수가 없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어느 정도 부자가 되면, 내가 얼마짜리 집이 있으면, 내가 얼마짜리 자동차가 있으면 그때는 이웃을 돕겠다”는 말입니다. 이런 말은 믿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은 본인 자신도 자신의 말을 믿어선 안 되고 다른 사람도 그 말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속성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톨스토이의 작품에 ‘사람이 얼마나 땅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사람은 얼마나 소유해야 만족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이 적은 돈으로 땅을 많이 살 수 있을지를 궁리하던 차에 어느 지방에서 땅을 값싸게 판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동네로 가게 됩니다. 그 동네 촌장이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가진 돈을 확인한 다음 “이 돈이면 당신이 아침 해가 떠서 해가 질 때까지 돌고 오는 땅을 모두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사람은 그 이야기를 듣고 자기도 부자가 될 것을 생각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말을 타고 해를 보면서 갑니다. 자기가 이제 큰 땅 부자가 될 것을 생각하면서 점심도 잊고 가는데, 갈수록 좋은 땅이 나옵니다. 이제 되돌아가려면 또 좋은 땅이 나옵니다. ‘조금만 더 가면 되겠지’하면서 조금씩 더 가다가 그 사람은 기진맥진해서 돌아왔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간신히 돌아오긴 했는데 너무 지쳐서 그만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빠홈인데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이 의미 있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빠홈은 자기가 누울 땅 두평 밖에 갖지 못했다.” 결국 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가 사람을 죽게 하는 병입니다.

세상에는 채우기만 하는 사람과 주고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네가 주니까 나도 준다는 조건적인 관계입니다. 다음으로는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많이 받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보통사람들은 많이 받는 것이 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끝없이 욕망을 채우려고만 합니다. “남에게 줄 것이 없는데, 많이 갖게 되면 그때 주자. 내가 지금 무엇이 있느냐.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할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는 역설과 아이러니가 있는데 많이 가진 사람이 남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없는 자가 남을 도와준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고 현실입니다. 누가 혹시 남을 도와 줄 때 저 사람은 돈이 많이 있나 보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돈이 많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데 정신 쓰지 않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앙드레 비엘레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남에게 줄 만큼은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누구든지 부자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다. 나에게 무엇이 있느냐”고 말하는 것은 빠홈과 같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조금이라도 도와주어야 한다는 그 결단이 있어야 나중에도 별 보릴 있는 것이지, 지금 이리저리 핑계를 대고 더 생기면 도와 줄 수 있다는 생각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누가 부자입니까? 많이 가진 자가 부자가 아니라 많이 주는 자가 부자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상이 가르치는 부자는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로 측정되지만 성경은 얼마나 많이 주었는가로 부자를 측정합니다. 많이 주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역설이고 아이러니입니다. 가치의 전도입니다.

 

 

이상에서 두 번에 걸쳐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복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이야말로 진정 우리들이 추구해야 될 복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55장 8절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복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복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누가 복을 받은 사람입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복의 내용이 바뀌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을 향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들은 그의 말을 들어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가고가 다를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고 진정한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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