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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교훈/신약 생활의 원리 - 놀만 B,해리슨

3장. 그리스도인의 생활철학 ; 로마서의 진리

by 복음과삶 2008. 1. 16.

 

신약 생활의 원리

(NEW TESTAMENT LIVING)

 

3장. 그리스도인의 생활 철학

 

로마서의 진리

 

(심히 중요한 로마서)

 

NORMAN B, HARRISON, D,D.

 

 

로마서는 전 성경 가운데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책들 중의 하나이다. 이 중요성은 로마서가 기독교 신앙의 기초적 교리를 제시 해주고 있음으로서만이 아니라, 그 배후에 인생의 참된 이치가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로마서의 원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다루시냐의 대한 우리들의 이해의 관건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로마서에 대한 올마른 이해를 획득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대단히 긴요한 일이다. 로마서의 원리는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두 사람의 원조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 하나는 아담이요, 다른 하나는 둘째 아담이라고도 불리우는 그리스도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이 양자 가운데 어느 한편에 속한 것으로 간주 하신다. 출생과 더불어 모든 인간은 아담에게 속한다. 즉 모든 인간은 아담의 피를 받고, 그들의 생명을 그로부터 물려받고, 그와 교통하며 그들의 입장을 아담 안에 두고 있다. 오직 중생을 통하여서만 비로소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게 되며, 또한 그들의 입장을 그리스도 안에 발견하게 된다.

 

동참이라는 말 :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의 가르침을 정밀히 파악하기 위해서 이 말을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는 것이 좋겠다. 아담의 경우,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그의 범죄와 정죄와 주검에 동참한다. 그리스도의 경우, 그리스도는 혈육에 있어 우리의 운명에 동참하신다. 다시 그리스도는 우리의 지상적 생존에 동참하신다.

 

아담이 인류를 파멸시켰다 : (3:20)

인류의 원조라는 그의 특수한 지위로 말미암아 아담은 그가 범죄했을 때 저 한 몸뿐만 아니라, 인류전체를 한 묶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지위로부터 떨어뜨렸다. 이래로 인간은 창조주의 품안을 떠나서 살게 되었다. 로마서 1장 18절부터 32절 사이에 있는 기록은 이 이탈로 말미암아 결과된 인류의 타락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으로서 비로소 우리는 오늘날 더욱 깊어져 가고 있는 인류의 도덕적 부패의 연유를 알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아담이 받은 저주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저들의 운명을 스스로 벗어날 방도란 아무데도 없고, 동시에 하나님과의 친교를 자력으로 돌이킬 수 있는 길도 전혀 없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 하였느니라”(롬 3:9) 구약성경은 인류의 전적인 타락을 단정하고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인간의 언행은 그들이 아담의 자손이라는 것을 선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본성으로 말미암는 그들의 운명은 한마디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롬 3:29) 이런 고로 모든 인간이 구원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 까닭은, 그가 의로우신 하나님의 저주아래 있을 수밖에 없게 된 인류의 일원으로서 태어났다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체적 -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다 : (3:21-5:21)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두 번째의 원조를 주시고자 친히 혈육을 입으시고 인간과 한가지 몸이 되셨다. 이것이 내포하는바 뜻을 한 번 생각 해 보라. 하나님께서 그 자신이 이미 저주해 버리신 인류의 일원으로 스스로 변신하신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냐! 그는 진정 범죄한 피조물인 우리와 운명을 함께 나누시고자 세상에 오신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 (롬 6:23)인 고로 그는 우리의 사망을 지시려는 것이다. 그는 죽으시기 위해서 오셨다. (히 2:14) 이리하여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받으시고자 십자가에 선선히 몸을 맡기셨다. 우리는 이 사실에 유심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정죄하실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계셨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합법적으로 자신에게 돌릴 수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거룩한 보혈과 죄없이 충만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로워짐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은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감당 할 일을 대신 감당해 주심으로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자유를 자신에게 부여하셨다. 이 은혜는 믿음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서 의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을 위시해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범죄한 기록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처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믿음의 대가 하나만으로서, 우리의 모든 허물된 과거를 자신이 맡아 주시고, 스스로의 흠없는 생명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 주셨던 것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

아담과 그리스도 : (5:12-21)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하시는 원칙이다. 이 원칙에는 단 하나의 예외도 있을 수 없다. (모든 독자는 이 원칙을 거듭 성경에서 연구해 보시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검과 부활에 동참한다 :

그리스도인은 흔히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라는 말로 표현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 죽었다는 것일까?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이것이 대답이다. “알지 못 하느뇨?” 6장 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반문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검과 장사와 부활에 동참하고, 그 결과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하나의 기본적, 그리고 이미 이루어진 사실로서 바르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무엇으로서 이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 옛 사람 (아담의 유산인 범죄 한 우리자신)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앎으로서 이다.(6:6)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의 육신을 십자가 위에서, 죽이기 위해서 몸소 우리의 혈육을 입으셨다. 그러므로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육적 주검은 실로 우리들 자신이 그 곳에 못 박혔다는 것과 동일한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주검과 생명은 어떠한 주검과 생명인가? 그것은 죄에 대한 주검이요, 하나님에 대한 생명이다. 그러므로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6:13).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려고 애쓸 것은 없다. 거저 그렇게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면 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함께 살아난 자로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정 하시는 대로 우리 자신을 인정하고, 몸을 일으켜 다음과 같이 살도록 할 것이다.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라”(6:13). 이것은 새로운 생활 방식이다. 즉 우리에게 피상적 행동을 요구하는 율법에서 벗어나 은혜 아래서 사는 생활이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는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시려는 하나님 자신의 은혜 가운데로 들어간 생활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의 주검에 동참한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인가!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다 : (8장)

이와 같이 하여 우리의 새로운 터전이 되어 주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고(8:11),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해 준다. (8:2) 우리는 새로운 근원을 갖게 되었으며, 우리의 안에는 살아 계신 영원한 생명적 실재가 들어와 주셨다. 그 무엇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이다. 이 새로운 구원은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바 육을 좇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생명의 원천이 되는 영을 좇을 때 비로소 실제로 우리의 것이 된다. 그리고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안에 들어와 주신 이상 우리를 한결 육욕의 충동에 묶어 둘 아무런 밧줄도 이제 없는 것이다. 빛나는 해방이다!

 

믿기 어려우리만큼 큰 축복 :

아담에게서 얻어진 우리의 처지는 철두철미 저주당한 그것이었다. 거기에는 한 줄기의 희망의 여지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그 자신의 안에 들어가 살기를 결심한 연고로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내가 와서 너희 안에 거하리라” 이와 같이 놀라운 변화, 사람의 신분이 이처럼 송두리 채 뒤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누가 이야기조차 들어 봤겠는가? 죄로 말미암아 저주당한 이 가여운 몸이 어제는 급변하여 하나님의 신령한 전당이 된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작별 말씀을 생각해 보자. “내 안에 거하라” (요 15:4).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15:4). 이 말씀은 로마서에서는 각각 8장 1절과 동 10절에 발견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되어 주셨다. 우리는 단순히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다. 어떠한 환경이나 처지도 그의 인내와 순결과 사랑과 무한한 능력에 의지하고 있는 우리들을 패배시킬 수는 없다. 주의 이름에 영광이 있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