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바른교훈/신약 생활의 원리 - 놀만 B,해리슨

1장. 주 안에 거하는 생활

by 복음과삶 2008. 1. 16.

 

신약 생활의 원리

(NEW TESTAMENT LIVING)

 

1장. 주 안에 거하는 생활

NORMAN B, HARRISON, D,D.

 

 

생활의 새로운 비결.

“주안에 거하는 생활”이라는 이 어귀 속에는 그리스도인적 생활, 새롭고 활기있는 인생의 본질과 비밀에 관한 예수의 가장 깊고도 근본적인 교훈이 내포되어 있다.

  

놀라운 변동 :

하늘에서 오신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경이에 넘친 삼년 반 동안을 이 땅의 백성들과 친히 동거하시며 함께 거닐고 이야기 하시는 가운데 지나셨다. 이와 같은 인간들과의 친교는 특히, 그가 사도로서 택하셨던 몇몇 제자들과의 사이에서 밀접히 이루어졌었다. 그 다음 종말이 왔다. 그의 주검과 부활과, 그리고 영광의 승천 뒤에 제자들은 슬픔과 고독 가운데 버림을 받았던가?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 14:18).

그 때 예수께서는 힘차게 말씀하시기를 그가 떠나는 것이 그의 양떼를 위해 유익이라 하셨다. 즉 종래와 같은 제자들과의 단순한 육신적 동거로 말미암는 외적 임재의 시기가 왔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장차 예수께서 약속하신 바인 예수 자신의 내재는 물론이요. 그들의 위대하신 스승인 성령을 마음 가운데 맞이할 것이었다.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리니”(요 14:13).

 

새 결합을 표시하는 새로운 용어 :

그리스도의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하나의 새 말이 출현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제자들 간의 새로운 결합 형태를 보다 적절히 나타내기 위한 불가피한 필요에서 생긴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생시에 그를 믿던 사람들은 보통 “제자”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이 어귀는 서한 가운데서는 한 번도 사용된 바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실 때 무리들은 그리스도의 추종자로 불리웠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승천 하신 후에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직접 추종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후부터 믿는 자들은 무언지, 좀 더 밀집하고 만족할만한 것, 즉 보다 깊은 내적 관계에 있어 특징이 있다.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내게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 안에 거하라”고 하는 것이 예수의 말씀이다. 그리고 “안에”라는 이 짧은 낱말은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서도 가장 중요하고 주도적인 용어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 말은 요한복음 14장과 15장에서만도 예수님에 의해서 스무 번이나 사용되고, 에베소서에서는 “바울”에 의하여 마흔 번이나 사용되고 있다. 더욱이 영어성경의 예를 든다면 이 어휘의 사용은 한층 빈번하다. 동일한 뜻에 해당되는 (in")이란 말의 사용도수는 전자에서 31회, 후자에서 104회나 된다.

 

새로운 관계 :

예수께서는 이 내적 관계를 더욱 실감적으로 설명하시고자 자연 속에서 포도나무 줄거리와 그 가지의 관계를 인용하심으로서 실물 교수의 방법을 취하셨다. 실물로서 예시된 이 진리는 참으로 진박 한 것이다.

“안에”라는 말은 그 어떤 내적 결합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신자들은 안으로 굳게 결합되어 있으며 이 결합은 마치 포도나무의 줄거리와 가지의 관계와도 같은 것이다. 이 그리스도의 가르침 가운데는 다음 세 가지 교훈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1. 외적인 일체의 것으로부터 독립된 순수한 내적 관계.

2. 하나(그리스도)로부터 다른 하나(신자)에게로 주입되는 생명의 흐름을 위한 절대의 관계.

3. 필수 불가결의 관계 : “나를 떠나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 즉 그와 격리되거나 그와 따로 하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이 정령 얼마나 절대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가?

 

그리스도(안에) 있어서의 새로운 지위 :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지위의 문제이다. 멀리 “아담”에까지 소급할 때, 인간은 처음 하나님의 거룩한 동산 “안에”서 창조되었다. 그 후 인간은 범죄 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축출하셨다. 이래로 인간은 하나님 밖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품안으로 ---- 그와의 친교 가운데로 되돌아 올 수 있는 것은 오직 한가지 중생을 통하여서만 가능하게 되었다 .선천적으로 모든 인간은 “아담”의 본성과 운명, 곧 그의 악과 저주를 물려 받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인 것이다. 인간은 그들 각인의 인격이나 행위에 의해서 다르게 취급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 같이 범죄 한 “아담”의 후예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일단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중생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전혀 다르게 보아 주신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새 사람으로 나타나며, 하나님께서는 그를 새 사람 받게 새 방법으로 취급하시는 것이다. 그는 새 지위와 새로운 권속과 새로운 종족에 속하게 된다.

 

새로운 소유 -- “내가 네안에” :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그리스도는 참으로 우리들 인간 가운데 살아 계시는 것일까? 그렇다.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13).

모든 믿는 자는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로서 다시 태어남”을 받는 것이다. 그럼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대저 무슨 뜻일까?

다음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설명을 듣는 것이 좋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계 3:20). 그는 문을 두드리며, 맞아 줄 것을 청하고 계신다. 이와 같이 영광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우리와 한가지로 사시겠다는 자신의 뜻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가 만일 우리의 맞아 드림을 받지 못한다면, “홀만, 헌트”의 그림에서와 같이, 밖에서 종내 문을 두드리고만 계신다면 --- 이와 같은 거역은 그의 신령한 구원의 역사를 아깝게도 힘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됨에 있어서도 역시 그 두드리는 소리를 당신과 나는 들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손님을 맞아들이듯 우리는 소리의 주인을 마음의 방 속으로 맞아 들였던 것이다. 그는 들어오셨고, 그 시간 이래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전 존재의 일부요, 측량할 수 없는 보화가 되어 주셨다. 우리는 “바울”과 함께 말할 수 있고, 또한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도 거듭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신다.”

 

생명의 새 근원 :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의 마음 가운데 함께 계신다. 장식물로서가 아니라 새 생명의 근원으로서, 함께 계신다. 또한 이 새 생명을 생활하는 능력의 근원으로서 함께 계신다. 나뭇가지는 모든 생명을 줄거리로부터 받고 있다. 그렇듯 우리도 또한 그리스도 안에 깃 드림으로써, 생명과 및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생명적 특질을 그로부터 분이 받는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참된 생활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때때로 기특한 사람들로부터 듣는 말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은 곧 그가 이것(그리스도인적 생활)을 성공 시키는 일을 제 자신의 힘에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의 능력의 원천은 그 자신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많이 보는 사람들은 이처럼 한갓 선량한 생활로서 참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영적생활에 대처시키려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를 잘못 깨닫고 있다. “네 안에 살고 있는 것은 네 자신이다? 그리스도인가?”

 

새로운 열매 --- 줄거리의 향기를 띄운 열매 :

모든 그리스도의 신자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재현시키며 이를 영속시키고 전파해야 할 과업을 지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데서가 아니라, 그의 생명을 우리의 속에 이식해 받음으로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천 년 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육신 안에 살아 계셨다. 그 결과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답고 비할 곳 없는 생애로서 나타났다. 그런데,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름다움과 영화로움을 다시금 육신으로 땅에서 나타내시고자 인간 가운데 --- 즉 당신과 나의 안에 들어오셨다. 이 핵심적인 진리를 우리가 어떻게 잘못 깨달을 수 있는가? 가장 헌신적이라는 신자가 고작 한다는 말이 여기에 그칠 수가 있겠는데?

“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나의 최선을 바치겠다.”

갸륵하기는 하나. 그러나 이렇게 하라는 말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교훈 가운데는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최선을 바라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그가 바라시는 바는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육신을 빌려서 그 자신의 최선을 나타내시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당신을 통해서 그침 없이 흘러내리게 하기 위하여 우리도 먼저 그리스도 안에 깃 드리기를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할 때에만 비로소 당신의 생명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머물게 될 것이다.

 

상호 의존 :

“네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네 안에 거하리라” 이 교훈의 가르치는 바는 분명하다. 그는 우리가 나무 가지와 같이 우리 자신으로는 생명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다. 우리는 생명의 공급을 위해 전적으로 그에게 의존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무릇 모든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을 얻는 길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가지 길 밖에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이렇듯 그리스도에 의존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자신께서도 이에 못지않게 우리들 인간에게 깊이 자신을 의존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포도는 줄거리에는 맺지 않는다. 반드시 가지에만 맺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줄거리인 그리스도께서 적은 진실이라도 얻기 위해서는 가지인 우리들을 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거룩한 생명의 표현을 전적으로 우리들 인간에게 의존하고 계시는 것이다. 얼마나 송구한 그리스도의 겸손이며, 얼마나 무거운 우리들의 책임인가! 이와 같은 중책을 지고, 은총을 입은 우리들로서, 그리스도의 향기에 넘친 아름다운 생활을 제외하고 아버지 앞에 바칠 것이 또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힘들지 않고 이루어지는 생활 :

신약의 진리가 가르치는 생활이란 인위적 노력이 따르지 않은 생활이라는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데 우리는 너무도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가지는 열매를 맺고자 아무런 제 자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전구가 빛을 발하기 위해서 제자신의 힘을 기울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 분명코 이것들은 아무런 노력의 필요도 갖지 않는 것이다. 오직 생명과 (에네르기) 의 그 무진장한 공급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그것들은 그 끝없는 활력의 원천을 조그만치라도 손상시키거나 마르게 하는 일도 없다. 하물며 그리스도인은 이보다도 무한히 깊고 큰 원천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거대한 근원은 포도나무가 가진 식물적 생명자체를 창조한 근원이요, 전기 (에네르기) 자체를 창조한 바로 궁극의 근원이다. 이 거대한 근원은 우리 가운데 지금 이 시간 살아 계신다. 사실이 이와 같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적은 힘으로 부득 부득 애 쓸 것이 있겠는가?

만일 있다면 그 까닭은 분명하다. 즉 그 사람은 무한대로 이 근원 (안에) 아직도 들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생활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적 생활인지 아닌지를 정확히 판별할 수 있는 시금석은 다음의 전문을 스스로 말해보는데 있다. (나의 생활은 힘이 들고 있는, 노력하는 생활인가? 혹은 그리스도 안에 안주하는 생활인가?)

만약 당신의 생활이 전자에 속한다면, 당신의 생명은 아직도 그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유로이 구비치는, 막힘 없는 통로가 되고 있지는 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