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생활의 원리 (NEW TESTAMENT LIVING)
2장. 내적 생명
혼동될 수 없는 종교와 생명 NORMAN B, HARRISON, 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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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실격 :
종교라는 말은 전 성경 가운데서도 단지 세 번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종교를 뜻하는 (religion) 이라는 영어는 라틴어인 (religio)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religio)는 속박한다, 혹은, 강제한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이것은 우리말인 종교에 있어서도 대동소이하다. 종교는 지상의 가르침이라는 뜻이요, 따라서 하나의 구속이요, 기만이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종교는 의무라는 어의를 띄우고 있다. 그것이 주관하는 세계는 외부의 세계다. 곧 종교적 의식이요, 예배 행사이며, 종교적 행위다. 이 말은 성경에서는 주로, 그리스도 당시에 소위 “종교적인” 것으로 타락되고 말았던 유대교와의 동의어로서 사용되고 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은 다름 아닌 종교였다. 세상의 다른 종교들은 다음의 한가지에 있어 치명적인 결함을 면할 수가 없다. 즉 다른 종교는 생명을 분여 할 수 있는 신령한 인격을 그 가운데 지니고 있지 못한다. 종교라는 말이 예수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예수께서는 새로운 한 종교를 이 땅에 세우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었고 오직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종교는 하나님을 뒤좇아 가며 추궁하는 인간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 안에 하나님을 사람 앞으로 이끌어 서로 대면할 수 있게 하신 것이었다.
생명의 선물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요 10:28) “생명” 혹은 “영생”이라는 말은 요한복음 가운데서만 약 마흔 번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 복음의 기자는 그의 기록을 다음과 같은 인명으로서 끝맺고 있는데, 이 언명은 그의 복음기록의 단적인 목적을 밝히고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 20:31). 생명은 내적인 것이다. 무릇 영생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자신의 생명을 그와 더불어 분유한다는 뜻이다. 분유한다는 것은 나누어 받는다는 뜻이며, 그러면 우리의 육체적 생명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일까? 과학이 아는 바로는 모체의 생명을 나누어 받은 일, 즉 탄생만이 어느 경우에나 새로운 생명의 유일한 근원과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중생”을 인간에 대한 그의 지상명령으로 삼으셨던 것이다.
산상보훈에 나타난 예수의 교훈의 핵심은 : 일체의 소위 종교적 귀의 나 의식 등을 말살해 버리고, 그들 가운데 내재하는 참 생명의 존재를 인간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느끼고 깨닫게 해 주시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참 생명에 합당한 새로운 정신적 기준을 확립해 주시자는 것이었다.
1. 예수께서 복있는 자들이라고 손꼽으신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 심령이 가난한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자. 그리고 마음이 청결한자. 그가 일컬어 복된 자라 하신 것은 이런 사람들이다.
2. 그의 왕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조건으로서 예수께서는 종교적 허식 이상의 의를 요구하고 계신다.
3. 그는 새로운 영적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 오셨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1) 이와 같이 우리가 살인을 삼가 할 때 우리는 율법을 다 지킨 것이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새로운 기준은 진실로 다음과 같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옛 기준은 가음을 금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의 새 기준으로서 이 묵은 규범을 깨뜨려 버리신다. 예수의 말씀은, 대저 우리의 심중에 죄악된 행동을 야기 시킬 만한 요소 자체가 없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면, 그는 아버지께 이미 죄를 범한 것이나 한가지란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들 인간이, 다만 우리의 이웃이나 우리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만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던가? 천만에, 그는 도리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대단히 높은 영적 수준을 바라고 계시는 것이며,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도 실로 이 높은 이상을 감당할 수 있는 새로운 심령을 우리 가운데 창조해 주시기 위하신 것이다.
계명의 준수 :
우리가 만약 십계명을, 다만 이것은 행하고 저것은 행하지 말라는 식의 외적 명령으로서만 해석 한다면, 이것으로서 그 준수가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하겠는가? 예수께서는 이를 부정하시고 그런 것은 한갓 종교적 형식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셨다. 오히려 예수께서 첫째 계명은 사랑 (하나님에 대한) 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둘째 계명도 사랑 (이웃에 대한)이라고 하셨다. 정신적 조건이 구비되지 않고는 어떠한 행위도 다만 형식을 넘을 수가 없다. 즉 율법의 정신에는 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이 말씀은 당시의 율법주의적 종교가들에게 대한 얼마나 통철한 꾸짖음이냐? 또한 금일의 위선적 종교가들에 대한 얼마나 삼엄한 경종이냐?
종교적 위선자 :
거듭 거듭 예수께서는 당시의 소위 종교가들을 진리의 쇠망치로서 강타하셨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들로 하여금, 예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까지 하셨다. 마태복음 23장에서 그는 이른바 종교가라는 무리들을 신랄하게 힐책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 그러면 어떤 것이 위선자라는 것인가? 그것은 연극을 하는 자라는 뜻이다. 곧 종교적 행위로서 자기의 참모습을 감추며, 오히려 참 자기가 아닌 것을 참 자기인 것처럼 보이려는 인간을 종교적 위선자라고 한다. 그리고 이 위선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기만 당하는 것이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 16:7). 예수의 가르침은 인간의 마음의 부패성을 여지없이 파헤쳤다. 그는 중심의 성실성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허위성을 걷어 제치시고, 참 생활의 원천으로서의 깨끗하고 거룩하고 정결한 자기 자신의 생명을 인류에게 나누어 주셨다.
은혜아래 이루어지는 생활 : 율법과 종교는 동일한 단계의 것이다. 즉 이것들은 이면적 것을 취급한다. 그러므로 이두가지는 참마음을 감추는 위선으로 흐르기가 쉽다. 우리는 율법의 정신에 합치되지 아니하고서라도 율법의 요구에 응할 수가 있는 것이다. 모두들 생각해 보라. 오늘날 우리들 자신의 교회 안에도 이 은혜의 생활에 대하여 전혀 몰지각한 사람들이 대체 얼마나 많은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은혜라는 말귀를 거저 입버릇처럼, 다만 직업적으로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면 은혜의 행적은 무엇이냐? 은혜는 하나님을 사람의 형태로서 이 땅 위에 사시게 하고자 그를 영광의 보좌로부터 모셔 내렸다. 그 다음 인간을 그 자신에게로 하시고자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육신의 형상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바 되었다가 그 뒤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사 하늘로 올라가셨다. 이것이 즉 은혜의 행적이다. 그리하여 이제 이 시간, 그 동일한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성령으로서 모든 사람 안에 그를 영접해 주는 모든 사람 안에 다시 나타나시며 그들 한 사람 한 사람과 피로서 맺고 친히 동거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 어찌 놀라운 은혜가 아닌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그 자신의 내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지극히 깨끗이 해주시고 그 곳에 아무런 티끌도 남기지 않으신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은 진실한 것이 되고, 모든 허위는 일소되며, 빛에 대하여 해맑은, 이를테면 투명한 인생이 되어지는 것이다.
갈라디아 주의(형식주의) :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면 이렇게 이렇게 해야만 되고 저렇게 저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식의 행동주의나 형식주의로부터 우리를 이끌어 내는 책(갈라디아서)을 베풀어 주심으로서, 우리에게 갈라디아인 적 오류, 즉 형식주의의 오류를 명시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우리는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 바울은 이 형식주의의 문제에 대해서 다음의 말로서 회답을 삼았다.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갈 5:2).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은혜는 참 생명의 근본이다. 이 은혜의 기초한 인생에는 아무런 강제가 없으며, 오직 신령한 역사의 소산인 슬기롭고 합당한 자유가 있을 뿐이다. 이리하여 은혜아래 살고 있는 참 그리스도인은 훌륭한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그다지 고역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선 한 가지 정직이라는 문제를 들고 보더라도 그렇다. 그는 정직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 할 필요가 없다. 차라리 저의 안에 거하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 그의 정직을 위해서 더 가깝고 확실한 길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백 퍼센트 정직하시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정직을 우리의 마음속에 충만히 주입해주시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은 우리들의 정직 문제에 대한 가장 완전한 보장이다. 우리는 구태여 경건케 되려고 부심할 것도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정결에 진정으로 의지하는 그 시간, 우리의 정결은 지체없이 이루어진 것임으로서 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생활이야 말로 유일한 복된 생활이다. 바울이 지적한 바 은혜에서 떨어진 생활 즉 그리스도 밖에 있는 생활이 율법화된 메마른 인생이요, 타율적 획일주의의 인생인데 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은혜의 생활은 얼마나 눈부시게 탐스러운 인생이냐!
마음 가운데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형상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내적 임재를 가르치셨다. 그러나 이 내적 임재의 실제적 가치를 여실히 증명한 것은 바울이 비로소 한 일이였다. 갈라디아에서 그곳 사람들의 형식주의적 위선을 목격하고 깊이 느낀바 있었던 바울은 그의 사랑하는 신도들에게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명심시키고자 마치 진통하는 여인처럼 안타까이 부르짖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형상이 이루기까지!, 그렇다. 우리의 온 뜻과 사랑과 그리고 생활과 이 모든 것의 원천으로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제는 다름 아닌 다음의 것이 되는 것이다. 즉 동정녀 마리아가 주 예수에게 육신을 부여하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성령 앞에 내어 맡겼던 것처럼, 그와 같이 우리도 또한 우리의 몸을 통 털어 성령에게 내어 맡기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함으로서만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이룩하는 성령의 역사가 성취될 것이며, 우리가 우리들 스스로의 육체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길도 이것 밖에는 없다. 곧 이것만이 우리가 우리들 자신의 혈육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성 육신의 진리를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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