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생활의 원리 (NEW TESTAMENT LIVING)
12장.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은혜에 넘치는 생활)
NORMAN B, HARRISON, 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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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한시 되고 있는 하나님의 한가지 계명 : 일반신자들은 하나님의 이 계명에 통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하물며 성령에 관한 이 계명이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르침이라고는 생각 하려고 하지않는다. 우리가 만약 “정결하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등의 하나님의 계명을 성경에서 읽는다면 이 말씀들을 우리는 지당한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순종하기 위하여는 가진 노력을 아끼지 아니한다. 하나님의 계명은 곧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우리의 능력이다. 그 중에서도 성령에 관한 하나님의 계명 가운데는 우리로 하여금 신약적 생활의 모든 원리에 통달케 해 주시는 하나님의 비밀이 한 묶음으로 해서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지극히 귀중한 계명을 경망하게도 한쪽으로 치워 버리고 마는 것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으로 우리의 마음이 불붙고, 이 소망의 실현이 우리에게 절대로 필요한 일이라는 확신이 우리의 안에 설 때까지 우리가 성령으로 가득 채워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우리 앞에 결코 열리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충만한 생활 : 충만성과 완전무결성, 희랍사상이 동경하여 마지 않던 이러한 특질들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너희는 그 안에서 충만 하느니라” 이는 반쪽과 반쪽이 합쳐서 하나가 된 생활이 아니다. 중생 이전의 묵은 나와 새로운 나의 혼합물도 아니요, 그리스도의 외양만 갖추고 마음은 엉뚱한 곳에 있는 생활도 아니다. 또한 그것은 나의 노력으로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즉 그것은 방자한 방향으로 이끌리는 마음에 재갈을 물리는 의지의 노력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전심전력의 생활이다. 그의 사랑과 생각과 뜻과 계획과, 이 모든 그리스도의 생명의 특질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안에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생활이다. 이것이 생명이요, 이것이야말로 순수 무구한 신약적 생활이다.
충만의 비유적 설명 : 성령의 충만한 생활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한 컵의 물을 비유로 들어보자. 물은 성경에서도 성령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금 여기에 한 컵의 물이 있다. 그러면 이 물은 실지로 컵에 가득 차 있을까? 그렇지 않다. 한 컵이라고는 하지만 실지론 3분의 2컵 밖에는 안 된다. 그러므로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한 컵의 물과 공기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일반 그리스도인들의 실상이다. 그들은 성령으로서 가득 차 있지 않고, 성령에 의한 다스림을 받지도 않고 있다. 그들은 육과 성령의 혼합물이다. 이러한 혼합적인 상태 아래서는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우리의 주인이 될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내가 주전자를 들어 컵의 언저리에 찰 때 까지 물을 부었다고 하자. 그러면 어떻게 될까? 공기는 쫓김을 받고 혼합 상태는 해소 된다. 곧 컵은 비로소 가득 찰 것이다. 우리가 혼합 상태를 면하는데 있어서도 이와 같은 조치가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언저리까지 빈틈없이 성령으로 가득 채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충만한 내적 생명은 이런 것이다 : 성령께서는 인간의 내적 생명의 전부를 송두리째 바꾸어 버리려고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 안에 새롭게 하고 돌이켜 오기 위한 마음의 대청소이다. 그리고 이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분은 오직 성령 뿐이시다. 성령께서는 지난 여러 세기 동안을 우리의 안에서, 이 마음의 대청소를 해 주시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오셨고,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형편들을 구석구석이 알고 계신다. 당신은 이러하신 성령에게 당신의 마음의 방을 임의로 출입할 수 있는 자유를 맡기지 않겠는가? 우리가 감히 그렇게 하기만 한다면,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장식하는 일을 무료로 봉사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가 당신을 위해서 해 주실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일이 무엇이라도 있으면 곧 그를 맞아 드려라. 사람의 마음에는 구분이 세 칸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 정, 의의 세가지 구분이 곧 그것이다. 이 세 가지의 요소들이 합쳐서 사람의 정신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 세 가지는 죄로 말미암아 다 상처를 입고 있다. 성령께서 이 상처를 깨끗케 하심으로서 우리의 마음을 새로운 것으로 개조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우리에게 허락된 목적은 바로 이일의 완수를 위함이다.
성령의 마음 : 이것은 “육의 마음”에 대한 유일무이한 해독소다. 우리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일만을 좇고 있는가? 우리는 천성적으로 육신에 이끌리는 자기중심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것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역시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 육신의 마음과 버티어 봤댔자 소용이 없다. 그것은 곧잘 제자리로 돌아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보람없는 투쟁 대신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아주 송두리째 새로운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면, 그의 역사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깨끗이 뒤바뀌어진다. 우리의 사고방식은 근본적으로 달라지며, 우리의 정신은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우리로 하여금 절로 영의 일을 좇게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기쁨으로 생활로서의 참 면목을 나타내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성령의 의지 : 의지는 한마디로 인간성의 성채이다. 그의 의지로 말미암아 비로소 인간은 그 자신의 주권자일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선택의 권한을 주셨다. 심지어 에덴동산에서 멸망을 택할 권리까지 --- 그야말로 절대적인 선택의 자유를 주셨다. 우리들 그리스도인도 불원간에 우리에게 맡겨진 이 결정권을 포기 할 수는 없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앞에 엎디어 이렇게 기도하셨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 주검을 목전에 두고 진심으로 이렇게 기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지당한 일인가? 인간을 현재의 멸망에서, 그 뿌리 깊은 자기중심에서 구할 수 있는 길은, 다만 하나 성령의 능력이 있을 뿐이다.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께서는 우리의 이기심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서 대치시켜 주신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기뻐 하시는 향기요, 하나님 앞에 선하고 온전한 제물이다. 완전히 하나님의 뜻안에 들어간 생활, 이것은 얼마나 기쁘고 만족한 생활인가?
성령의 사랑 : 인간의 애정은 쉽사리 방자하고 분방하게 된다. 그것은 곧잘 상궤를 이탈하기 일쑤다. 이것은 성경의 말씀을 빌리면 “육신의 정욕”(요일 2:16)이다. 인간은 언제나 이 정욕에 매력을 느낀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금도 번번히 이 정욕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뜨려져 가고 있는가? 방일 한 정욕에서 오는 파탄은 상상할 수 없이 크다. 이에 대한 특효약은 오직 성령의 충만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가슴속에 넘치도록 부어진 성령의 은혜로서, 우리의 안에 묵은 것으로 혁신하는 것이 들어오게 하는 이외의 길은 없다. 인간의 애정을 전혀 새로운 것으로 혁신하는 것이 성령의 목적하시는 바요,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는 성공에 대한 우리의 최상의 보장이다.
찬송의 표현체 : 이와 같이 하여 개조된 우리의 내적 생명은 하나님에 대한 찬송과 감사의 표현체가 되며, 우리의 새로운 정서는 그의 은혜를 흠모하며 찬미하는 끝없는 노래의 원천이 된다. 이것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자의 일반적 표식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심으로서 끝없는 영광을 자신에게로 돌리시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머리에 생각하며 에베소서 5장 18절 이하 20절 까지를 읽어보자. 다윗은 일단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자 하나님을 향한 찬송의 통로가 되었다. 바울도 이와 같았다. 이제 우리도 또한 신령한 노래로서 그들의 뒤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에게 응답하는 마음 : 성령의 충만을 받은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과의 완전하고도 부단한 조화 가운데 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즐기며, 하나님을 순종하는 우리 자신을 기쁘게 생각한다. 우리의 오체는 통 털어 하나님 앞에 가슴을 열며, 우리는 의무에 얽매인 생활을 떠나 하나님의 품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찾게 된다.
환경에 대한 면역 : 부풀은 풍선이 밖으로부터의 대기의 압력을 이겨내듯이 성령의 충만은 인생으로 하여금 일체의 환경에 대하여 불굴하는 힘으로 가지게 한다.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외적 환경에 대하여 탄식하리만큼 민감하다. 어떤 바라지 않는 일이 생길라치면 그는 그 앞에 온통 위축되고 만다. 반대로 또 어떤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는 실망해서 주저앉아 버린다. 그야말로 일희일비의 생활이다. 허나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 가운데 충만케 하라. 그러면 “우리가 넉넉히 이기게” 될 것이다. 여기서 이긴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무엇을 대해 이긴다는 것일까? 이에 대한 회답은 로마서 8장 가운데 있다. 38절을 읽어보라. 그 가운데 열거된 모든 사항들에 대해서 우리는 면역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이 불가분적으로 우리를 그의 것으로 삼아 주시며,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를 가로막을 수 있는 어떠한 권세도 없다. 이는 성령의 안에서 이루어지는 승리의 생활이다.
충만한 은혜의 생활 : 성령의 충만에는 열매가 따른다. 이 열매란 바로 가지 속에서 남아넘치는 생명력이 아니고 무엇일까? 곧 그것은 가지가 그 자체의 생활을 위하여 쓰고 남은 생명력의 결정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그들이 은혜 안에 살고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즉 그들에게는 은혜의 충만이 없고, 남아넘치는 은혜의 여분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와 같은 한 그들의 문제는 아직도 미해결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들은 언제나 도움을 찾고있다. 그러나 은혜로 말미암아 얻어진 신령한 도움을 그들은 저희들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해 버리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조금도 나누어 주지 않는다. 그들은 첫째 나누어 줄만큼 넉넉한 은혜를 저희들이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은 인생으로 하여금 넘치는 은혜로 인도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충만하고 남아 넘치는 축복을 이웃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함이”(요 10:10)라 하셨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멎지 아니하시고 이어 말씀하시기를,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고 하셨다. “풍성히”는 말의 희랍원어는 “들러리”와 “위”라는 뜻을 가진 두 낱말이 합쳐서 된 복합어이다. 컵에 물이 가득 차면 물은 컵의 언저리에 “두루”찬다. 만약 우리가 계속 컵에 물을 붓는다면 물은 언저리의 “위”를 넘어서 밖으로 흐르게 된다. 곧 그 물의 분량은 컵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으로 많아진 것이다. 그러매 예수께서 성령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고 하셨다. 이는 어느 특수한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은혜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수의 강이라는 말은 원어나 혹은 다른 유럽에어 의하면 복수로 되어 있다. 즉 한줄기나 두 줄기의 강이 아니라 여러 줄기의 강이 흘러 내려서,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한 생수의 은혜가 우리 안에 넘쳐흐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넘쳐흐르는 이 축복의 물결은 그 중의 일부는 우리가 이 세상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 나타날 것이요, 또 다른 일부는 저 영원한 나라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땅 위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당면한 긴급사는 그들이 다같이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 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 성령께서는 이 충만한 은혜가 여러분 자신의 체험이 될 것을 진정으로 간구하면서 기다리고 계신다. 여러분의 마음은 이 성령의 갈망에 응답하고 있는가? 곧 여러분은 성령의 충만이 여러분에게 임할 것을 진심으로 갈망하고 있으며, 여러분의 이 목마름이 넉넉히 채워질 날을 안타깝게 바라고 있는가? 만일 이러한 갈망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단 한가지 길이 여기에 있다. 지금 곧 당신의 전부를 그의 앞에 내어 맡겨라. 그리고 그의 충만을 구하라. 당신을 충만한 은혜 가운데로 이끌어 주시도록 당신의 마음 속으로 성령을 맞아 드려라. 그리하여 당신의 모든 마음과 생각을 그의 앞에 내어 놓고, 그로 하여금 당신의 안에 온전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루어 주시도록 엎디어 구하라. 당신의 뜻과 소망을 그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으로 당신의 뜻을 삼아 주시도록 구하라. 당신의 모든 생활을 하나님의 충만하고 깨끗함을 나타내는 통로로서 남김없이 의탁하라. 그리하여 당신의 속 사람을 새롭게 하고 그의 충만으로서 당신의 안에 있는 옛 사람, 곧 육신의 묵은 것을 떠나게 하는 은혜를 구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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