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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승리자의 비밀

15장. 지상에서 천국의 나날들

by 복음과삶 2008. 3. 24.

 

 

승리자의 비밀

 

15장. 지상에서 천국의 나날들

 

- 광야 생활의 우울과 실망으로부터

약속된 땅의 영광과 풍성함으로 -

 

한 무명의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이제 한 가지 고찰해야 할 사실이 남았다.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녀들의 삶의 형태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경계로”

이 이상적인 삶을 다루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의 구속에서 제시되는 객관적인 교훈을 살펴보겠다. 애굽을 탈출해 약속된 땅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경험은 우리의 “거울”이나 모형이 되며 “우리의 경계로” 기록되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고전 10:11). 그들의 경험이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의 실패와 약점들을 통해 우리가 교훈을 얻어 적어도 불신앙이라는 죄로 고통 받지 않기를 원하신다.

애굽은 세상, 즉 죄의 모형이다. 반면, 약속된 땅인 가나안은 성화, 즉 승리하는 삶의 모형인 것이다.

죄가 그러한 것처럼 애굽의 공사 감독은 너무나도 혹독하고 잔인스러웠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수 없었다. 자유하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짐은 더 무거워졌다. 마찬가지로 죄인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그의 투쟁과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다.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때, 피 흘림을 통한 하나님의 구출이 있었다. 유월절 양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5:7).

그 양을 잡아서 피를 흘렸다. 그것은 대속물이었다. “저 양은 나 대신 죽는구나”라고 한 유대인이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 흘림 자체는 아무것도 구원할 수 없었다. 구원을 얻으려면 그 피를 집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발라야만 했다. 말하자면, 희생물을 개인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피를 바름으로 누구든지 죽음에서 구원되었다.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5:6).

그러나 내가 내 죄로 죽지 않으려면 그 대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다음엔 홍해를 건너가는 기적적인 장면이 펼쳐진다.

바울은 홍해를 밥티스마에 비유했다.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밥티스마를 받고”(고전10:2).

실제로 이스라엘 민족들이 구름이나 바다 물결에 잠긴 것은 아니었고, 요단강을 건너서야 비로소 완전히 성화가 되었지만 바울은 그렇게 비유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 사건은 무엇을 이루어 놓았는가?

홍해를 건너기 전, 그들은 양의 피 흘림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적의 수중에서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스도 죽음의 두 가지 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탈출을 저지시켜 다시 노예로 삼으려는 애굽 군사들의 집요한 추적을 당했다. 그러나 홍해를 건너자 그들은 모든 지배와 적의 수중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그 지배의 압박으로 다시 고통을 받지는 않았다. 추적자들은 바다에서 몰살을 당해 그 시체가 바닷가에 널려졌었다.

이는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 주는가? 그리스도의 죽음엔 두 가지 면이 있음을 기억하라.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대속물이 되어 돌아가셨다.

그렇지만 바울은 우리도 또한 그분과 함께 죽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2:20).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롬6:11).

속박 하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피를 흘리고 바름으로 구출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적으로부터 추적을 당한다. 그 적들은 홍해에서 몰살을 당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탈출해서 자유를 얻는다. 애굽은 죄의 세상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애굽에서 우리를 발견하시곤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의 형벌에서 건져 내셨다. 구원을 받은 후까지도 이 죄들-분노, 교만, 질투, 탐욕, 걱정, 정욕-은 우리를 좇아다니고 괴롭히며 좌절과 실망을 안겨주고 때때로 실패하게도 만든다. 진정한 승리가 어디에 있는가? 밥티스마의 장소인 홍해, 즉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다시 삶으로서만 가능하다.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여길 수 있도록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패하는 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해변가에서 애굽 사람들의 시체를 보았다.

어떤 이스라엘 사람은 예전에 자신들의 감독이었던 사람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저기 감독이 죽어 있네.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겠지.”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했으리라.

“저 사람은 내감독이야. 나를 더 이상 학대하지 못할 걸.”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 들어설 때 죄에 대해 죽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분노, 교만, 질투, 탐욕, 정욕 등의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롬6:11)로 여길 수 있다. 지금까지 이러한 죄들은 우리의 감독 노릇을 해 왔다.

그러나 바울은 “죄가 너에 대하여는 죽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추적하던 애굽 사람들은 죽음을 당했지만 애굽 (죄의 모형)은 한 국가로서 여전히 분명하게 존재했던 것이다. “내 개인적인 죄들이 죽은 것으로 여길 수는 있지만, 그 죄들 이면에는 죄란 것이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누군가가 말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계속 범죄하는 이유는 바울이 하는 명령의 반 구절만 따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롬6:13)라고 바울은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까지는 해보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바울은 또 한 마디를 덧붙이고 있다.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그리스도의 죽음이 주님 자신에게 의미했던 바가 바로 이것이었다. 주님은 자신의 의지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렸다.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10:9),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요8:29)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 인생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복하는 한, 죄가 나를 주관하지 못하는 것이다(롬6:14).

 

죄로부터의 구원

유월절(유월이란「넘어감」을 뜻함)은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

홍해 통과는 죄의 권세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러나 광야에서까지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안에서만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함(고후9:8)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쓴 물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애굽의 속박과 권세에서 벗어난 후, 목마르고 지친 그들은 “마라”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그 곳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 한 나무를 던지매 그 물은 금방 달아졌다. 이 사실은 지금도 그러하다. 나무 십자가, 즉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모든 사물로부터 쓴 맛을 제거시키는 매체이다.

이들은 힘 있게 계속 전진을 한다. 달게 하는 과정이 필요했던 “마라”의 쓴 물로부터 “엘림”지방의 달고 풍부한 물을 지나 반석에서 흘러나오는 저 기적적인 물까지. 이 때 “반석은 곧 그리스도”(고전10:4)이며 반석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성령의 모형이다.

 

만나

음료와 함께 음식도 공급되었다. 하늘로부터 내린 떡인 만나가.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 보자. 그리스도는 하늘로부터 온 우리의 떡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찢겨진 그리스도의 몸은 정말로 “하나님의 떡”이며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서 생명을 주는 것”(요6:33)이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에 의해 전적으로 인도되고 식량을 공급받았다. 성령의 모형인 물은 생명을 공급받지는 못하고 다만 유지시킬 뿐이었다. “생명의 떡”의 모형인 만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성령은 “생명의 주시며 공급자”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유지시키실 뿐만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생명의 떡인 것이다.

그러나 이 여러 가지 특권과 축복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했다. 생각해 보라! 그들은 기적으로 구원되었고 인도되었다. 또한 놀라운 식량 공급을 받았고 “그 지파 중에 약한 자가 하나도 없을”(시105:37) 정도로 질병에서도 기적적으로 보호되었다. 그렇지만 불평과 불순종이 있었다. 그들의 삶은 기쁨과 승리에 가득찬 것이 아니었다.

 

인생의 전환점에 처해

기쁨과 승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이상적인 삶으로서 약속한 땅에서만 가능했다.

 

인생의 전환점

이윽고 그들은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다. 승리로운 삶의 모형인 약속의 땅이 바로 앞에 놓여 있었다.

우리가 이 대목을 읽을 때, 기뻐하고 찬송을 부르며 첫 번째로 들어가려고 서로 경쟁하면서 앞으로 뛰어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모세는 백성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모리 족속의 산지에 너희가 이르렀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신1:20, 21).

그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가기를 거부하면서, “우리가 사람을 우리 앞서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자”고 말했던 것이다.

모세는 동의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 결과를 안다. 정탐꾼들은 놀라운 소식과 실과를 가지고 돌아 왔다.

그 중 포도송이를 메고 왔으리라 추측되는 두 사람이 말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에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그러나 다른 열 사람들은 주장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민13:31).

충성된 두 사람은 다시 말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14:7~9).

 

광야에서의 방황

사람들은 열 사람의 주장을 지지 했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거부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며 그들에게 주리라 약속한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른 기회를 주시지 않았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이십 세 이상의 성인은 전부 그 땅을 볼 수가 없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에게는 하나의 중대한 선택의 순간이었다. 그들 뒤에는 마늘, 부추, 양파를 제공해 주던, 그들이 노예 생활을 했던 애굽이 있었다. 그들 앞에는 우유, 꿀, 맛있는 과일 그리고 자유가 있는 약속된 땅이 있었다. 그들은 어느 땅을 선택했던가?

다행히도 애굽(죄의 모형)으로 되돌아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안식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릴 수 있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다니! 그리하여, 그들은 유혹과 “암흑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시91:6)가운데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을 방황했던 것이다. 약속의 땅은 승리하는 삶이다. 우리는 바로 그 경계까지 이르렀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갔는가? 누구든지 하나님을 구주로 신뢰하기를 하나님께서는 바라신다. 그분은 우리가 지금 들어가서 영원히 그 곳에서 거하기를 원하고 계신다. 알고 있는 죄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승리하는 삶의 어려운 점들은, 거대해서 극복해 낼 수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마치 가나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너보다 강대한 나라들”(신9:1)과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명령은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신1:21)임을 믿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승리의 삶이란 너무 높은 것이어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고 외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이 삶을 누리도록 우이를 부르고 계신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민14:8).

이는 우리의 인격과 가진 것 전부를 주님께 온전히 순복함과,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그분이 약속하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단순한 믿음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들어가서 그 삶을 소유하라고 명령하신다. “봉사할 때뿐만 아리라 소유하는 데에도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우리의 것임”을 기억하라.

 

광야 생활의 의미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약속된 땅의 안식과 기쁨이 없는 광야 생활과 같다.

광야 생활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① 불안정

안정된 가정, 거주할 곳, 아무런 재산이 없다.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는 언제나 이동해야만 했다. 이는 하나님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께서 택하신 지도자들, 우리가 택한 운명(광야의 방황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며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에 대해 불만족하고 불평함을 의미한다. 때로는 애굽-죄의 생활-으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을 의미하며, 실제로 돌아감을 의미할 때도 있다.

② 열매가 없음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싸웠지만, 방해 받음이 없이 계속 이동함을 제외하고는, 싸워서 얻은 소득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이 승리의 삶을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이다. 그것은 “하지 않아야 할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춤이나 카드놀이를 하지 않으며 극장에 가지 않는다. 아마, 술이나 담배도 금할 것이다. 그의 삶은 나쁘거나 해로운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러나 약속된 땅의 열매-성령의 열매-즉 사랑, 기쁨, 평화가 거기엔 없다. 은혜 안에서 성장함도 없으며 봉사의 “열매”도 없다. 열매처럼 보이는 것이 있지만 지속되지는 않는다. 주로, “열매”는 승리의 삶을 사는 사람의 소유물이다. 그 사람 안에서 “과실이 항상 있게”(요15:16) 하려는 주님의 바램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즐거움을 포기했지만 죄 자체를 근절시키지는 못했다. 그들은 진정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실수의 가장 뼈아픈 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못 들어가게 하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들어갈 권리가 있었다. 모세도 또한 그러했다. 그러나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은 사람들로 인해 그 두 사람은 사십 년 동안이나 내쫓김을 당했다. 그리고 모세는 곧 그 권리를 박탈당했다.

오! 여호수아와 갈렙이 다수의 의견에 따르기를 거부했다면! 두 사람만이라도 용감하게 행진해 들어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적들을 전멸하셨을 텐데. 그리고 많은 무리가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갔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을 능히 하실 수 있다.

요나단과 그의 병기 든 소년은 이 사실을 알았다(삼상14:6).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모세 혼자 그 일을 해내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를 막지 말라 내가 그들을 멸하여 그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고 너로 그들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리라”(신9:14).

 

네 가지 기억할 사항

당신은 약속된 땅 -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승리의 삶 - 앞에 와 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들어가고 싶은가?

다음 네 가지 사항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는 실패와 불만족과 의심의 광야 생활 보다는 더 좋은 것을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깨달은 죄를 정복해 주시며, 그분과 교제함에서 즐거움을 맛보게 하신다.

우리의 노력과 투쟁으로는 하나님께서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얻어 낼 수 없다.

의심, 두려움, 걱정, 실패, 연약함 등 우리의 죄들, 즉 그리스도인의 죄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주님께서 그 죄들을 도말하셨음을 신뢰하며, 그리스도를 통한 승리를 믿음으로 주장하라.

그러면, 우리는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얻었다. 안식과 즐거움과 열매가 있는.”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사1:19).

 

아직도 망설이고 있다면 그 “땅”-그 삶-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라.

① 그것은 완전한 안식의 삶이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 29)

모든 불안은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② 그것은 완전한 평안의 삶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14:27).

평안 이외의 다른 것을 경험하는 것은 - 반대, 압박, 상실, 사별, 혹은 혼란 등의 상황에서까지도 -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순종 뒤의 승리

③ 그것은 능력의 삶이다.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1:8).

우리가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④ 그것은 열매 맺는 삶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실패의 삶은 그리스도를 욕되게 한다.

⑤ 그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한 삶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기쁨의 삶이다.

광야에서 불순종하고 반역하며 불평하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

그들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자마자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셨다. 여호수아를 위해 싸우는 분이 아니라, 그분의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한 승리를 거두실 수 있는 승리의 지도자로서 나타내셨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고 여호수아가 물었다.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수5:13, 14).

그분은 전에는 오실 수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방황하는 한 이런 모습으로는 오실 수 없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광야 같은 생활을 할 때라도 구름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완전히 순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완전히 채우시고 지배하시며 우리를 위해 모든 승리를 거두신다. 이러한 삶이 승리하는 삶, 바로 기적이 계속되는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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