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설교는 찰스 스펄전(C. H. Spurgeon) 목사가 1866년 12월 23일 영국 뉴잉턴 메트로폴리탄 타버너클 강단에서 주일 오전예배
때 행한 것이며, 출처는 1884년 Fleming H. Revell Co.가 발간한 12 Christmas Sermons의
pp.709∼720이다.
목자들 앞에 주의 천사가 출현하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는 순간 목자들은 몹시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사자들에게 매우 기쁜 소식을 주며 그들을 땅에 내려 보내셨을 때 인간들은 죽음의 천사가 검을 치켜들고 출현한 듯
대경실색했습니다. 한밤의 침묵과 음울한 어둠도 목자들의 가슴에 두려움을 일으키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희열에 찬 하늘의 천사들이 지극히 포근한
은혜의 영광을 옷 입고 나타나자 그들은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목자들이 유달리 소심하거나 무지했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가 그런 상황 하에서 그와 같이 행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은 무지한 목자들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설사 그들이 학식 많은 선지자들이었다 하더라도 동일한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예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시대의 으뜸가는 인물들도 하나님의 특별한 현현 앞에서 덜덜 떨며 큰 흑암의 공포를 느꼈습니다. 사실 하나님에 대한 노예적 두려움은 극히 흔한
현상이었으므로 그로 인해 하나의 전통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보편적으로 진리와 같이 받아들여졌습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현현은 모두 체험
당사자의 비명횡사를 알리는 표징으로 간주돼야 한다는 게 일반적 믿음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 13:22)라는
말은 마노아의 추산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 대다수의 생각이었습니다. 마노아의 아내처럼 보다 명랑한 어조로,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면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라고 추론할 수 있었던 그런 행복한 마음의 소유자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현현이
기뻐해야 할 일이라기보다 무서워해야 할 일이라는 것은, 지혜자와 우매자, 선인과 악인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의 확고부동한 신념이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런 전통을 생성했던 정신은 율법 시대에 의해 크게 진작되었습니다. 그런 정신은 기뻐하는 아들들보다 두려워 떠는 종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예의 정신이었으며 속박을 낳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로 나오고 시내산에서 율법이 선포될 때, 백성들은 멀리 떨어져 서 있어야
했습니다. 산 주변에 경계를 정해 만일 산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짐승이든 사람이든 돌로 쳐죽이거나 화살로 쏘아 죽여야 한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던 공포와 떨림의 날이었습니다. 시내산의 영은 두려움과 떨림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었습니다. 또 양자의 영을 받지 못했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말할 수 없었습니다. 백성은 속박의 영
아래서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주님이 자신들 가운데서 특별한 영광으로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실 때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이 모든
노예적 두려움의 근저에는 죄가 놓여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노예적 두려움의 이 무서운 악몽을 인간의 가슴에서 제거하기
위해, 그 지독한 영향력이 영혼의 지극히 고상한 열망들을 억누르고 있던 마당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던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주님이 파괴하러 오신 마귀의 일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성육신 강림에 관한 기쁜 소식을 선포하러 왔습니다. 그들의 노래
가운데 나온 첫 음절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자들에게 그리스도가 찾아오실 때 일어나는 달콤한 현상의 맛보기였습니다. 천사는 마치 두려움의
시대가 끝나고 희망과 기쁨의 날들이 도래하였다는 듯, “무서워 말라”고 말했습니다. “무서워 말라.” 이 말은 떨고 있던 목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저를 위한 것이며 또 기쁜 소식을 들을 열방을 위한 말씀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노예적 공포의 대상으로 삼지 마십시오! 더
이상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서 있지 마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들 가운데 함께 살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불의 울타리, 입 벌린 만(灣)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버려야 할 두려움과 버려서는 안 될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가운데는, 우리가 내어 버려서는 안 될 어떤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것은, 피조물이 창조주에 대해,
신하가 임금에 대해, 아이가 부모에 대해 당연히 가져야 할 합법적이고 필수적이고 칭찬할 만하고 훌륭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 거룩하고
효성스런 두려움은 죄를 무서워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도록 우리를 재촉하기 때문에 더욱 깊게 배양돼야 합니다. 이것은 “지혜의 근본인
여호와에 대한 경외”입니다. 우리의 지극히 거룩하고 공평하고 의롭고 자비로운 천부께 대해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속박이 아니라 특권입니다.
경건한 두려움은 “형벌이 있는 두려움”이 아닙니다(요일 4:18). 온전한 사랑은 경건한 두려움을 내어쫓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두려움과 유쾌한
조화를 이루며 그와 함께 거합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완벽하게 사랑하지만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때 날개로 얼굴을
가립니다. 우리도 영광 중에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해질 때 겸손하고 공손하게 그 무한하신 위엄을 쉼 없이 숭배할
것입니다. 거룩한 두려움은 성령의 사역입니다. 이를 소유하지 않는 자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마음대로 허풍을 떨도록
내버려두십시오. 그가 “두려움(기탄) 없이 먹는”(유 12) 것은 위선의 표식입니다.
우리가 피해야 할 두려움은 노예적
두려움입니다. 그런 두려움은, 사라에게 하녀와 그의 아들이 추방당하듯이 온전한 사랑에 내어쫓깁니다. 그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게 만들며, 하나님을 우리와 교통할 수 없는 미지의 영으로, 그리고 우리에게 벌만 내리고 우리를 돌보지 않는 존재로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 두려움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고 가능하면 그의 무서운 면전으로부터 도피하게 됩니다. 이런 두려움은 때로
하나님의 위대함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때 사람의 마음에 발생합니다. 무한자의 거대한 심연을 오래 동안 들여다보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영원하고 자존적이며 무한하신 분에 대한 생각에 마음이 몰두하면서도 먼저 외경심으로, 다음으로 공포심으로 가득 차지 않을 수
있을까요? 나는 무엇인가? 하나님과 비교해 본 나의 존재는, 인간들의 세계와 비교해 본, 장미꽃 봉오리 위에 기어다니는 진딧물보다 더욱 초라할
것입니다. 나는 무엇인가? 여호와 앞에서 인간이 가지는 위상보다는, 지극히 민감한 저울도 미동하게 하지 못하는 한 알의 먼지가 인간 앞에서
가지는 위상이, 더 클 것입니다. 기껏해야 우리는 무(無)와 공(空)보다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위상을 이보다 더욱 더 낮추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례하게도 이 위대한 분의 의지에 불복종했습니다. 선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본성은 하나의 격류와 같습니다. 죄악적 인류는 그
격류를 거스르고자 헛되이 애만 씁니다. 그 불가항력적 격류는 자기 진로를 갈 수밖에 없고 모든 대적을 압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에게, 자신을 짓뭉개려 하는 거대한 바위, 혹은 자신을 삼키려 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바다 말고 달리
무엇으로 보이겠습니까? 신의 위대함을 정관(靜觀)하다 보면 인간은 저절로 공포심이 가득 차 오르며 말할 수 없는 비참함에 빠져듭니다! 그런
주제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욥처럼 여호와 앞에서 떨 것입니다. 하나님이 땅을 흔들면 땅이 제 자리를 벗어나고 땅의
기둥들이 요동합니다.
하나님의 엄격한 속성들이 모두 또한 유사한 두려움을 일으킬 것입니다. 별들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생각해
보세요. 손으로 입을 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구름을 헤아리고 하늘의 법령을 제정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생각해 보세요. 이런 속성들 가운데 어느
것이든 명상해 보세요. 특히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끊임없이 죄를 향해 타오르는 그 소멸의 불에 대해 명상해 보십시오. 영혼에 두려움이 가득
차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한편 죄 의식이 커다란 철사 채찍으로 양심을 때리는 날에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 그 자체만으로도 무서워 떨
것입니다. 이것은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양심의 목소리가 주는 짐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사려 깊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인간의 자연적 유산이자 죄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두려움은 지극히 슬프고도 해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노예적 두려움이 생길 때마다 그것은 인간을 아주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악한 본성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잔인하며 가혹하고 무서운 존재라는 상상은 우리의 증오심의 불에 기름을 끼얹습니다. 우리가 노예적으로 두려워하는 자들을 우리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어린 자녀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가득 차 있다면 자녀가 여러분에게 사랑을 보일 수 없을 것입니다. 자녀가 여러분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무서워하고 여러분의 음성만 들어도 깜짝 놀란다면 여러분을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두려움 때문에 어떤 거대한 야만인에게
복종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미운 그림을 그려 놓음으로써 인간을 속이는
것은 사탄의 걸작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간은 공포스러운 존재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이를 잘 알기 때문에, 은혜의 하나님을, 용서할 줄
모르는 가혹한 존재, 회개자를 용납하지 않고 슬퍼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 그런 존재로 색칠해 놓았습니다. 성령께서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성품을 인지하도록 도우신다면 그 마음은 하나님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이 비천하고 타락하고 부패해 있지만 위로부터 빛을 받아
하나님을 올바르게 판단한다면 인간의 가슴은 신적 사랑의 따스한 광선 아래 녹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사탄의 걸작이 있습니다. 사탄은 인간의 오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탁월한 성품을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애씁니다.
인간의 가슴은, 오성이 사랑할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을 떠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대해 편견을 가지게 합니다. 오늘 아침 이 자리에는, 자신이 종교적이라면 불행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된 신앙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예수님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께 대한 복종은 비참함 그 자체라는 것이 런던 시민들 절반의 확고부동한 신념입니다.
세속적인 사람은, “아, 내가 만일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나의 즐거움을 포기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까지 날조된 중 가장
사악한 중상모략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도처에 이런 신념이 만연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이 행복이고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것은
불행이라는 것이 인기 있는 신학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비참한 일이라고 믿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그런 사람들의 생각이
어떠하겠습니까! 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섬김을 노예생활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 분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것은, 피조된 존재들에게 있어서 가장 높고 가장 행복한 지위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 이 두려움은 구원받는
문제를 마음에서 멀리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관대하지 못한 존재로 생각하면 하나님을 멀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설교에서 가끔 모종의 달콤한 매력을
느끼고 양심에 부드러운 감동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 선한 욕구는 결코 실제적 결심으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리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지 못하고 소멸하는 불로서만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일어나 소멸하는 불로 가리라”라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만 있다면 지극한 행복 속을 유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반대로 운 나쁘게 하나님이 계신
곳에 있을 수밖에 없다면 자신들에게 비참함과 불행만 남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 악한 공포는 흔히 사람들을
죄의 극단까지 몰고 갑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의 위엄에 맞서 더욱 많은 반역을 쌓아 올리지 않으면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듯,
하나님에 대해 악의와 반역심을 품고 이런 범죄 저런 범죄를 서슴없이 섭렵해왔습니다. 그들의 가슴속에는 불타는 사탄적 공포심이 증오심과 뒤섞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그 반역자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신다는 사실, 죄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긍휼이 끓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파악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죄인의 죽음을 원하지 않고 죄인이 자신에게 돌아서서 살아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그들이 한번 믿기만 한다면,
확실히 그들 삶의 진로는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신이 그들의 눈을 멀게 만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허다한
질환을 일으키는 이 악은 아주 많은 사악한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악은 하나님의 명예를 손상시킵니다. 오, 빛이 되신, 그리고 어두움이라고는
조금도 없으신 우리의 하나님을 무서운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수치스럽고 악랄한 짓입니다. 그것은 지옥 같은 소행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여호와를 악마로 색칠해 놓는 것은 최고의 마귀적 행위입니다. 오, 어둠의 왕의 뻔뻔스러움이여, 거기에 동의하는 인간의
광기여! 하나님을, 용서할 줄 모르는 존재, 불친절하며 가혹하고 잔인한 존재로 묘사하다니요.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최고도로, 그
무엇보다도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정의롭습니다. 그러나 정의롭기 때문에 가일층 더 큰 사랑을 지니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십니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죄를 형벌하십니다. 하지만 죄를 형벌하지 않고 방치해 두는 것이 선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죄를 벌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받아
누리는 피조물의 입장에서 시혜자를 헐뜯는 것은 감사를 모르는 비열한 짓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가해진 악은 사람에게 되돌아옵니다.
이 두려움에는 형벌(고통)이 있습니다(요일 4:18). 하나님을 자신의 무자비한 원수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괴로운 불행도 세상에는 없습니다. 한
동안 양자(養子)의 영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이여, 하나님을 멀리 떠나 방황하는 여러분이여, 주님이 여러분을 추방하고 다시 받아들이시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보다, 여러분에게 더 고통스런 것은 없을 것입니다. 믿다가 낙심한 이들이여, 하늘 아버지에 대한 공포심만큼 여러분을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노예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님을 여러분이 진실로 알기만 한다면 여러분은 자녀가 여러분에게
나아오듯 하나님께 나아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 아버지여, 내가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아버지여, 내 죄로 난
안절부절못하며 슬퍼합니다. 나를 용서하소서. 나를 주의 품에 다시 받아주시고 주의 강한 은혜로 나를 도우사 이제부터 주의 계명 가운데 행하게
하시며 주의 뜻에 순종하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영적인 삶에 대해 무언가를 아는 이들이여, 하나님에 대한 달콤한 생각이 위로부터
여러분에게 불어 들어오고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여러분의 가슴속에 넓게 흘러들 때, 그 때가 여러분이 가장 거룩해지는 순간이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도덕적, 영적으로 사랑스럽게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은혜로운 하나님을 높이고 존중하며 하나님의 고귀한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불타도록 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였습니까?
우리가 어린 아이처럼 되는 것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에게 바라는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택한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일으키는 게 바로 이런 정신입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유업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이런 어린아이 정신을 소유해야 합니다. 노예적 두려움은 어린아이 정신과 상반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린아이 정신에 살모사의 독과
같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은 우리 안에 있는, 어린아이다운 것보다 어른다운 것을 죄다 몰아냅니다. 그것은 우리를 부추겨 그 무서움의 대상에
저항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두려움을 내어쫓고 우리 안에 어린아이 같은 모든 것을 가져다 줍니다. 만일
내가, 나 자신이 가련하고 어리석고 연약하며 미약한 아이임을 의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의 선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 나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할 수 있다면, 또한 하나님이 자비롭고 지혜로운 분임을 믿고서 자신의 원대로 나를 인도하시도록
내가 허용한다면, 나아가 내가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전적으로 안식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다면, 나는 피조물로서 지극히 높은 지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이 내 안에서 일으키는 역사입니다. 그렇게 될 때 나는 천국에 어울리는 사람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천사와 함께 “무서워 말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두려움이 이런 은혜에 반하고 이것을 막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전한 소식은
기쁜 소식입니다
천사가 선포한 두려움의 치유책에 주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이것이 치유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 하나님이 육체를
입으신 것 말이죠. 천사의 노래로부터 이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목자들이 무서워 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천사가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내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2:10). 하지만 이 복음이 무엇이었습니까? 더 나아가서
읽어보면, 그 복음은 곧 그리스도가 태어나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태어나셨다는 것, 하나님이 인성을 자신과 결합시켜
인간으로 강림하셨다는 것은, 인간들에게 좋은 소식이라는 겁니다. 확실히 이것은 기쁜 전갈입니다. 하늘을 창조하신 분이 구유 속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네, 하나님이 반드시 인간과 원수지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군요. 이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하나님이
사실상 인성을 신성과 결합시킨 것이니까요. 양 본성간에 영구한, 만성적인, 뿌리깊은 적대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적 본성이
인성을 취해 신성 자체와 본질적인 연합을 이룩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사실 안에 위로가 없습니까? 당신은 정도에서 벗어난 가련하고 미약한
인간입니다. 당신이 주를 무서워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인간간에 적의가 존재한다는 이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적개심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창조주가 인성을 취해 자신과 결합시켰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사실을 발견할 수 없을까요? 영원자는
우리에게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분은 무한하고 우리는 초라한 피조물입니다. 창조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거대한 만(灣)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보세요. 하나님이신 그분이 또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들의 본성을 취해 자신과
결합시키셨다는 소리는 우리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천사 사이에 무한한 거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인성을
취해 자신과 연합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커다란 만(灣)은 없습니다. 반대로 기이한 연합이 있을 뿐입니다. 신성이 인성과의 혼인 관계에
들어갔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그 분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바로 그 말씀입니다. 육이 되신 그 분은 우리와 같이 모든 일에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물론 죄가 없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두려움을
추방할 수 있는 첫 번째 위로의 말입니다.
두려움을 제거해 주는 또 하나의 사실은, 하나님이신 이 분이 인간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천사의 말에 주목하십시오. “너희를 위하여 나셨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에서 아담보다 더 인간다운 인간이셨습니다.
아담은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아담은 유아기의 위험과 연약함을 통과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소아기의 상태를 알지 못했습니다. 성인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은 유아와 어린 시절을 보낸 나와 공감을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얼마나 인간다운지요! 그분은
구유 속에 누웠습니다. 우리처럼 요람에서 자라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담처럼 성인기로부터 출발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처럼 유아기의 고통과 나약함과
연약함 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무덤까지 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너무나도 달콤한 위로입니다. 지금 하나님으로 계시는
그분이 한 때는 어린아이였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걱정거리들이 작고 사소하고 상대적으로 유치하다 하더라도 나는 그분에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분도 한 때는 어린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큰 자들이 가난한 어린아이를 보고 조소하면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너는 너무 초라해,
너의 곤란거리는 가련히 여길 가치도 없을 만큼 시시하다구.” 저는 겸손한 기쁨으로 하늘의 왕이 포대기에 싸여 한 여인의 품 안에 안겨 있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분에게 모든 슬픔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유아였다는 사실, 그럼에도 세세에 찬송 받으실 만유 위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저는 이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거룩한 아이 예수님과 나 사이의 복된 끈이
모든 두려움을 제거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그들에게 예수님의 탄생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직무에 대해서도 무언가를 말해 주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신 목적은 바로, 우리를 죄에서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두렵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죠? 우리가 죄 가운데 빠져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가요? 그렇다면 여기에 기뻐하고 또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왔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시켜 놓았던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구하기 위해 인간이 되셨던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방탕한 삶을 보내며 악한 행실 가운데 자신의 아버지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생각하면 저는 울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들은 되돌아오기가 두려울 것입니다. 주님이 자신을 받지 않으실 것이라고, 자기와 같은 죄인에게는 자비가 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할 겁니다. 아, 하지만 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하러 오셨습니다. 그분은 구원하기 위해 태어나셨습니다.
만일 주님이 구원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헛되이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의 탄생의 목적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구주가 되지
않으신다면 그분을 지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명은 표적을 잃고 말 것입니다. 잃어버린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 그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이 구주의 신분(person)에 대한 언급도 잊지 않았습니다.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그리스도.”
여기에 인성이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그는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주시니라.” 여기에 신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발을 딛고 서야 할 견고한
진리입니다. 나사렛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동정녀의 뱃속에 잉태되어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태어난 그분은 지금, 그리고 과거에도 언제나, 세세에
찬송 받으실, 만유를 다스리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복음은 없습니다. 위대한 선지자가 태어났다고 누가 내게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게 별로 기쁜 소식이 아닐 것입니다. 위대한 선지자들은 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결코 진리에 대한 선지자들의 증언에 의해
악에서 구속받지 못했습니다. 금후로도 결코 구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태어나셨다고,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성품을 입으셨다고,
하나님이 우리의 성품을 취해 자신과 결합시키셨다고 제게 말해 주세요. 그러면 제 가슴속의 종(鐘)은 즐거운 소리를 울릴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게
오셨으므로 저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하지만 천사가 말한 것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여러분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 대해 개인적 관심을 느끼기 전까지는 결코 그 분에게서 진정한 위로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의 무리에 소속해 있다면, 예수님이 하신 것은 무엇이든 당신을 위해 행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할례 받은 일이든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이든, 그리스도의 죽음이든 그의 삶이든, 그리스도가 무덤에 묻힌 일이든 부활하신 일이든, 그가 행한
모든 일, 그의 존재의 모든 상황에 여러분은 참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주는 위로와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인성을 가지고 하늘로 올라가셨지요? 그리스도는 나를 거기로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조상 아담이 타락했습니다. 나도 타락했습니다. 내가 그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나도 부활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의 모든 택자들도 십자가에 못 박히고
고난 당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무덤 속에 놓이실 때 그의 백성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무덤 속에 잠들었습니다. 레위가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듯이 그리스도의 백성은 그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실 때 그리스도의 백성도 부활해 미래에 일어날
자신들의 부활을 미리 맛보았습니다.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들도 역시 살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늘에 올라가 보좌를 획득하셨으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영혼에게도 그 보좌를 획득해 주셨습니다. 오, 이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그렇다면 내가 어찌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있겠습니까. 이 순간 믿음으로, 무가치하고 가련한 죄인인 나는 예수님을 신뢰하면서 담대히 내가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있노라고 말 수 있습니다.
제가 이 귀중한 성육신의 교리를, 마음으로 원하는 만큼 좀더 강력히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이를 묵상하면
할수록 더욱 행복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육을 입고 오셨다는 이 사실을 가장 중요한 진리로 받아들입시다.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가 한 분 계십니다. 그 분은 우리와 같은 참 인간이십니다. 또한 그 분은 우리의 형제이며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오,
하나님이 이처럼 인성을 취해 자신과 결합시키셨으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죄 때문에 하나님을 너무나 멀리 떠나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생각하기가
무서운 사람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의 친구”로 불리는 이상, 가련한 영혼이여, 그대는 그리스도를 당신의 친구로 생각하십시오. 오!
하나님의 성령께서 당신의 어두운 눈을 열어 주사, 당신 자신의 잘못된 생각말고는 당신이 하나님을 떠나 있을 이유가 없음을 보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스도가 당신을 구할 수 있으며 전심으로 기꺼이 구하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범죄와 불의와 죄악을 쾌히 간과하시는
그리스도의 선하고 은혜로운 성품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은혜의 달콤한 감화력이 바로 이 아침에 당신이 그리스도께 나오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들기를 빕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여러분 안에 이루어지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이렇게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아멘
출처 : http://lloydjones.org/zbxe/?mid=Puritan05&category=94&page=2&document_srl=17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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