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
우리의
생명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가장 큰 유익이 됩니다. 이 사실을 잊기 때문에
속인(俗人)들은 안일하게 살아가고,그리스도인들은 방심합니다. 우리가 주의 오심을 경성하여 기다리지 않으면 세속(世浴)이 곧 우리 영혼을 좀먹듯이
들어옵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그대가 현세에서 부하거든, 그것이 그대의 안식처가 아님을
기억하고, 부의 안위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마십시오. 반대로, 만일 그대가 빈곤하여 구차하게 지내거든, 그것 때문에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 가벼운 고난은 잠깐이며,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물건들은 없는 듯이 보십시오.
그대들은 항상 변하고 있는 하나의 큰흐름의 한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늘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의무는 신랑이 도착하는 시간을 대비하여 등의 심지를
늘 밝게 다듬는 일뿐입니다. 이 스데반의 죽음의 광경은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우리도 또한 멀지 않아 반드시 맞이하게 될 우리의 최후의 그시간을
예비하는 우리의 명상을 도울 것입니다.
이 본문은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상세히 기록된 순교의 기록입니다. 물론
신약성경에는 이외에도 순교한 성도들에 관한 기록이 있기는 하나 이곳처럼 자세히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 성령께서는 아마 모든 성도들의 승리의
임종시에 꼭 필요한 교훈이 이 기록 하나만으로도 족하다고 사려하신 듯 합니다. 성령님은 성도들이 매일 스데반처럼 살아감으로 그들이 죽음의 준비를
늘 해야 함을 잘 알고 계셨던 것같습니다. 또 더 나아가서 아마도 성령께서는 이 하나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차라리 우리의 죽음의 자리에
대해서보다는 우리의 삶의 성질에 대해서 더 주의하라는 뜻을 나타내신 것도 같습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처럼 죽는것보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 주의 명령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순종하는 일이 우리의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우리의 임종시의 증거는 그 시간에 주시는
은혜로 감당하면 됩니다. 우리의 죽는 은혜는 죽는 시각에 받을 것이고, 지금 이 시각 우리의 받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은혜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복음을 모든 경우에 들어내는 일뿐입니다. 그러나 이 스데반의 죽음의 기록이 유일하게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만큼 우리는 그 뜻을 더욱 상세하게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사역중에 일어난 죽음
스데반의 죽음의 일반적 성격에서 첫째로 우리를 감동케 하는 점은 그것이 그의 사역중에 일어난 점 입니다.
그는 예루살렘교회의 집사직에 임명되어 특히 성도들의 연보가 바르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직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직임을 잘
감당해서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만 전무하도록 사도들을 잘 도왔습니다. 나 자신은 못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라도 잘할 수 있도록
서로 돕는일은 가장 귀중한 성도의 의무입니다. 더 나아가서 스데반의 가난한 이들을 돌본 직임은 성도들 사이의 상심(傷心)과 분쟁을 막는
일이었으니, 그 직임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까지 맡게
되었고, 그는 큰 능력으로 그 일도 잘 감당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교회의 초창기에 가장 유능한 일꾼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따라서 가장
유능한 하나님의 일꾼을 제일 먼저 주목하여 박해하는 원수들의 표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스데반은 주의 군대의 최일선에 서게 됐는데, 그러나 그는
죽었습니다. "모를 일이야"라고 어떤 이들은 말하지만, 나는 "큰 특권이다!" 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죽는 시기로 이 이상의 좋은 시기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직 유용할
때 죽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도움이 되기보다는 짐이 될 때까지 죽기를 기다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사역 도중에 떠나게 되더라도
도리어 감사함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역으로 많은 사람들이 믿게되고, 기적들이 일어나고, 우리가 교회에 필요한 듯한 그때에 죽는 것,
이것이 좋지 않습니까? 이를 통하여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택하신 사람을 통하여 얼마만큼의 일을 하시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칠 수 있으며
둘째로, 하나님은사람을 의존하지 아니하심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생이 하나님의 교훈 중 하나를 가르치고, 우리의
죽음이 하나님의 교훈중 하나를 가르쳤다면, 우리 삶은 잘 살았고 우리는 잘 죽는 것일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향력이 다 쇄해버린 적막한
겨울까지 죽기를 지체하는 것보다 훨씬 바람직한 일입니다. 주께서는 그의 종들이 없어도 일하실 수 있으며, 또 그는 지금 있는 종들 대신 다른
종들을 일으키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교회에 가르치시는 일에 우리의 죽음이 이바지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까? 거하거나 떠나거나 그의 존재로
주의 뜻을 성취하는 종들은 복됩니다.
혈육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
스데반의 죽음에는 혈육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따랐습니다. 스데반은
애통하는 벗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죽지 못하고, 그를 향해 이를 가는 원수들 앞에서 죽었습니다. 편안한 베개 대신 단단한 돌덩어리들이 날아와서
그의 머리와 온몸을 쳐서 그를 숨지게 한 후에야 그는 주의 품에서 깨어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더 큰 위로를 받습니다. 스데반이 그 큰
고통중에서도 그렇게 온전한 평화와 기쁨과 승리중에 죽었다면, 우리들이야 얼마나 더 평화롭게 즉을 수 있겠습니까? 스데반이 그 무서운 무리들에
둘러싸여서도 그렇게 주님의 도우심을 받으면서 죽었다면, 우리들은 더욱 주님 존전에서 약한 자를 온전케 하시는 주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모든 형편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주의 은혜를 신뢰합시다. 스데반이 날아드는 돌 앞에서 평화롭게 죽었으니, 우리는 우리
침상에 둘러선 벗들의 고별 앞에서 더욱 평화스럽게 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임종의 순간은 고요와 평화, 확신, 기쁨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노한 무리 앞에서 겁내지 않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오히려 즐거움을 주는 듯한 어조로 그 명백한 진리를 전했습니다. 그들이 노할 때
스데반은 두려워하지 않았고, 입이 떨리거나 한마디의 말이라도 약해지지 않고, 더 명료한 어조로 그들의 가슴을 파고들듯이 말했습니다. 그의 얼굴은
하나님의 용기를 지닌 부싯돌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설교인 줄을 알았던 그는 양날(兩刀 )가진 검 같은 말로 청중의 영혼을
찔렀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격노하건, 이를 갈건, 그는 상관치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를 성밖으로 끌고 나갈 때도 스데반은 그의 머리
위의 하늘빛처럼 침착했습니다. 성문 밖에서 그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그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했을 때도 그는 그의 평온을 잃거나, 적들의 자비를
애원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의 머리를 정통으로 맞춘 돌이 그를 땅에 쓰러트리자 그는 다시 일어나 않아서 자기를 치는 자들에게 주의 자비를
구하고 나서, 그후에 긴 여름날 놀이에 지친 아기가 어머니 품에서 잠이 들듯이 잠들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믿으십시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면, 이렇게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울린서 태어나지만, 우리 옆 사람들은 모두 웃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죽을 때, 우리 옆 사람들은 울어도 우리는
웃으며 죽을 수 있습니다. 신자가 하늘로 떠나는 임종의 자리에서는 죽는 당사자인 신자는 그 실내의 누구보다도 침착합니다. 그는 그가 지금 누리는
평안과 앞으로 그가 기대하는 바를 벗들에게 말하면서 고요히, 영광 속으로, 미끄러지듯 옮겨집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이유가무엇입니까?
스데반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요, 스데반의 믿음을 우리도 이미 가졌으며, 장차 더 큰 믿음을 우리는 가질 수 있고, 스데반에게 계시던 성령이
우리에게도 계시니, 우리의 분신 이외에 그의 능력을 우리에게서 막을 것이 그 무엇입니까? 우리도 더 큰 믿음을 가지게 됨으로써 우리의 정한
시간이 왔을 때, 스데반과 동일한 영혼의 안면에 들어갈 것입니다.
고양된
스데반의 마음
스데반의 마음은 고양(高場)되었습니다.
첫째로,스데반의
마음은 하나님의 자비심과 같은 자비심으로 가득찼습니다. 그는 과거나 현재의 이스라엘의 범죄를 지적하면서도 증오심으로 하지 않고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심정으로 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이미 지상의 모든 죄악을 승리한 천상의 성도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도 매일 가질 수있는 마음입니다.
둘째로,스데반에게는 분노가 없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는 그의 기도가 이를 보여줍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렇게 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음같이 모든 이웃을 용서하며 살수 있습니다.
셋째로, 스데반은 승리자로 죽었습니다. 그의 이름 '스데반'의 뜻은 '왕관'인데, 과연 그날
그는 주님으로부터 승리의 월계관을 받고 교회의 첫 순교자가 됨으로써 교회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그날의 승리자는 그의 원수들이 아니라
그였습니다. 그는 그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승리자가 됐습니다.
스데반 죽음의 특수한 성질들
스데반
죽음의 특수한 성격은 한마디로 그의 죽음이 예수로 충만한 점입니다.
첫째,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는 열려진 그의 영안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그 우편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인자'라고 불렀는데(행 6:56), 이 이름은 예수님 자신만이
자신에게 쓰신 이름이요, 제자들은 쓰지 못했던 이름입니다. 스데반이 예수님과 밀접한 거리에 도달한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마태 26:64)하셨던 예수의 말씀을 스데반은 일찍 체험했습니다.
둘째, 스데반은 예수께서 '서신 것 '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그의
고통받는 종을 그의 팔로 붙드시고, 그가 숨지면 즉시 두팔에 받아 안으시려는 자세로 영광중에 일어나셨습니다. 나는 임종하는 성도들이 그들의
지식으로 보든지 경험으로 보든지, 어떤 책이나 타인에게서 들은 것으로도 믿어지지 않는 광경을 그들이 보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여러차례
있는데, 이는 확실히 성도들의 임종시에 하나님은 전보다 더 큰 믿음을 그 자리에서 그들에게 주셔서, 죽음의 공포에서 그들을 도와주시는 증거라고
생각됩니다. 스데반은 그런 은혜의 첫 표본으로서 우리가 생전에는 볼 수 없던 천상의 영광을 홀연히 열린 휘장 틈으로 목격했던
것입니다.
오, 주님이 나를 맞으시려 오실 때, 내 영혼은 두려움 없이 날개를 펴,
죽음의 철문을 향해 날아가리라. 그 문을
지나가는 두려움을 내 영혼은모르리.
여러분, 스데반을 따라서 우리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셋째, 스데반은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한 바와 같이 스데반은 예수님의
신성(神注)을 믿고 그에게 호소했습니다. 임종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심할 걱정이 없습니다. 스데반이 그 순간에 예수님을 신뢰할 수
있었던 사실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스데반은 자신의 선행이나 공로를 한마디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설교나
기적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님만을 전폭적으로 의지합니다. 예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는 삶 외에 바른 생활, 즐거운 임종의 길이
없습니다.
넷째, 스데반은 예수님을 의지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스데반은 자기 영혼이 미지의 세계로 떠나야 함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나의 그 순간을 생각할 때마다 느끼는 자연스런 두려움이
그에게도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벗은 영혼을 예수의 못자국 난 손에 맡기는 순간, 그의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그는 더이상
자신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었고, 원수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잠들었습니다. 이것이 순결하고 고상한 죽음의 기술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예수의 손에 맡기면, 그 순간 한날의 일은 끝났고, 문은 닫히고, 문빗장은 걸리고, 야경군(夜景軍)이 거리를 지켜줄
터이니, 이제 우리는 잠들면 그만입니다. 임종시에, 예수님을 보고, 그를 믿고, 의지하면 죽음도 감미롭습니다.
다섯째, 스데반은 예수님을 닮은 죽음을 죽었습니다. 작은 일들에서도 그의
죽음은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그도 예수님처럼 성문 밖에서 죽었고, 그도 기도하고 죽었고, 그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주께 맡깁니다" 라고
말하고 죽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죽음도 예수님의 죽음을 재연한다면,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혜롭게 준비해야 할 죽음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우리의 죽음을 지혜롭게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첫째,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삶의 한부분이 되어야 합니다. 스데반은 생시에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듯이 임종시에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생시에 담대했고,용기
있었고, 침착했듯이, 그의 죽음에서도 날아오는 돌 앞에서 그러했습니다.
저는 어떤 유명한 분들의 장례식 설교에서 고인의 평소의 생활과 임종시의
생활이 매우 달랐던 것 같이 전해지는 것을 듣고 의아하게 여기곤 합니다. 그것은 사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삶은 임종시에 얼마동안의
질병이나 고난을 통해서 갑자기 되어지지 않습니다.
은혜도 한 단계식 전진하는 것이 좋듯이 영광에 들어가는 것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매일 아침 조반을 들기 전에 매번 죽음의 연습을 해서, 막상 죽음이 왔을 때, 그것이 생소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죽음은 우리 삶의 끝에 오지만, 그것은 역시 우리의 삶의 한부분입니다. 흙처럼 살다가 금처럼 죽지는 못합니다. 조반을 세상과 함께 먹고, 저녁을
하나님과 함께 먹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주의 집에 거해야 합니다.
둘째로, 죽음은 우리 생애의 완성이길 바랍니다.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일생의
노고끝에 모통이 돌을 놓음 같이, 우리의 생애의 완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매일의 생활이 언제 끝날을 맞이해도 황급한 일이 없도록 항상
정돈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휫필드(Whitfield)는 밤에 침상에 들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내 손장갑 한 켤레도흩어진 채
두지 않는다. 내가 오늘 밤 죽어도 내 모든 신변사는 이제나 영원이나 정돈되어 있다. " 정거장에서 열차의 출발 신호가 울릴 즈음에야 허겁지겁
차에 오르는 식의 죽음 준비는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속에서 구원을 받는 사람들의 생활입니다. 성도는 언제나 허리띠를 매고, 지팡이를 손에
잡고, 출발시간을 예비해야 합니다. 신랑이 올 시간이 가까우므로 신부는 등불을 밝히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임종이 경황(驚惶)스럽지
않은, 단순한 일상사와 같기를 바랍니다. 유명한 주석가 벵겔(Bengel)은 그의 죽음이 소란스럽지않게, 마치 일터에서 일을 마친 사람이
길거리로 나서듯이 고요하기를 기도했는데, 그의 기도대로 그는 그의 책 교정을 임종의 직전까지 보다가 고요히 잠들었습니다. 이렇게 가는 것이
좋지않습니까? 우리도 아무 후회함 없는임종을 준비합시다. 죽기 어려운 죽음을 죽지 맙시다. 선 과실을 억지로 따듯이 원치 않는 죽음을 죽는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여러분은 구원의 확신을 임종 이전에 준비해야 합니다. 임종의 고통이
더해지고, 두뇌가 피곤해지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여러분의 벗들이 여러분의 구원을 의심하면서 여러분의 관 곁을 떠나지 않게 합시다. 어떤 사람이
휫필드에게 임종시의 증언을 들려달라고 청했는데,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아니오 모르긴 하지만, 나는 임종시에는 증언을 아니하겠습니다.
나는 사는 동안 매일 증언하기 때문에 죽는 시간에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 이 천사와 같은 설교자는 그의 말대로, 별세하던 날 오전에 설교하고
오후에 자신의 침실에 들어 가서 고요히 운명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생전의 말을 듣고 그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임종시에 어떤
말을 하든지 말든지 여러분의 평소의 말로써 여러분이 무엇을 믿었으며, 누구를 섬겼는가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십시오 끝으로, 우리는 우리의 죽음마저도
유용한 것이 되기를 바랍시다. 스데반의 죽음과 사울의 회심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어거스틴은 '스데반의 기도가 없었더라면, 사울의
설교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스데반의 죽음이 사울을 회심시켰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울의 회심은 다메섹 문전에서 그에게 나타나셨던
그리스도에 의해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마음의 옥토를 예비하는 데 있어서 스데반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사울은 후년 그의 설교에서
스데반의 설교를 늘 기억했던 것 같습니다. 두분의 설교를 비교해 보십시오. 스데반이 할례의 언약을 말했는데, 바울도 그 주제를 자주 말했습니다.
바울은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한다"고 말했는데, 스데반도 여자적 (如字的)으로 같은
말을 해습니다. "천사들을 통해 받은 율법"이라는 말도두분이 같이 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에서 바울이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재(灰)에서
불사조(不死鳥)들이 날아 나온다면 우리의 죽음은 얼마나 유용하겠습니까? 우리들이 비록 세상에서는 변변치 못한 그릇들이었더라도 우리의 죽음을 통해
우리보다 나은 그릇들이 태어나기 바랍니다! 나의 꺼져가는 불꽃이 장차 세계를 비칠 복음의 큰 봉화들에 옮겨붙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님을 잘 섬길 수 있기에 말입니다. 나는 우리의 재(灰)에서도 꺼지지 아니하는 불이 남아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죽은 후에도 말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이여, 너희는 그의 은혜를구하라,
그의 노염을 너희는 감당 못해도 죽으시는 주의 얼굴을 바라보라,
그리고 거기서 구원을 찾으라.
출처 : http://lloydjones.org/zbxe/?mid=Puritan05&category=94&document_srl=27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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