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4. (주일예배). 부르심의 의미. 창세기 12:1~4.
노량진 강남교회 (고문산 목사)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창세기 12:1~4)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상태에 따라 일하시는 방식을 바꾸신다고 그랬어요. 그것을 경륜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12장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늘 인간과 반응적인 방식으로 혹은 대응적(reactive)인 방식으로 일을 하셨어요. 예를 들어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짓게 되죠. 그럴 때 그 죄 짓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노동의 고통이라든가 출산의 고통이라든가 앞으로 흙을 통해 관계하면서 얻게 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통해 심판을 내리시게 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는 것을 보고 반응적으로 일하시는 거죠. 4장으로 들어가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 않습니까?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생 아벨을 죽이게 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너는 앞으로 이 땅에 정주하며 살 수 없다. 유리하며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심판을 내리십니다. 역시 반응적으로 일하시는 겁니다.
창세기 6장부터 9장까지의 내용을 보면 인간 땅에 죄가 관영하게 됩니다. 노아를 통해 홍수 심판을 감행하시게 되죠. 반응적으로 일하시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창세기 11장으로 들어와 보면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하늘까지 닫고자 했던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이 땅에 강림하셔서 그들을 다 흩어버리시는 심판을 내리게 되죠. 역시 반응적으로 일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어떠한 죄를 짓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심판하시고 구원하시는 방식으로 일하셨어요. 그게 창세기 12장 이전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2장으로 들어와 보면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방식이 완전히 달라지는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이죠. 이제는 하나님께서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먼저 찾아오시는 거예요. 그냥 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초청도 안 했는데 하나님께서 방문하셔서 그에게 말씀하시고 또한 그를 본토, 친척, 아버지 집에서 억지로라도 이끌어 내시죠.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그 땅, 아직 어딘지도 모르는 그 땅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데려가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일생은 주도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에 의하여 이끌리는 삶,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삶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그러나 과거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느냐는 신앙의 세계에서는 사실 중요하지가 않아요. 하나님이 부르신 그 순간부터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어떻게 조성해 가시느냐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이제 이 부르심을 시작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시는가를 볼 수 있는 재미있는 하늘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어요.
창세기 3 ~ 11장 | 창세기 12장 ~ 말라기 |
대응적 · 반응적 경륜의 방식 | 적극적 · 주도적 경륜의 방식 |
죄에 따른 심판과 구원 | 부르심을 시작으로 만들어 가심 |
창세기 3장에서 11장까지는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하신다고요? 대응적이고 반응적으로 일을 하십니다. 죄에 따라서 심판과 구원을 내리신다는 말씀이죠. 창세기 12장부터 이제 구약 말라기까지 가보면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일을 하십니다. 개인에게나 공동체 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부르심을 시작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세요. 그러면 신약시대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실까요? 따라서 하겠습니다. 폭발적으로 일하십니다. 폭발적으로 이루세요. 하나님의 경륜의 방식에 우리가 말씀을 받고 순종하게 되면 정말 놀라운 역사가 폭발적인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아브라함입니까? 여러분 왜 하필이면 아브라함이에요? 최불암도 아니고? 아브라함, 아브라함 하니까 참 최불암이 떠오르더라고 여러분! 이거 너무 당연한 겁니까? 궁금하지 않으세요? 왜 하필이면 아브라함입니까?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입니까? 왜 하필이면 여기 앉아 있는 우리 모두입니까? 어떤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그 부르심에 창세기 12장 본문을 읽어보면 그 이유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아요. 성경은 오히려 아브라함은 자격이 없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격이 없었다. 대표적으로 여호수아 24장에 가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입을 빌려 직접 말씀하시는 대목이 나와요.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 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 (여호수아 24:2~3)
여기 분명히 나오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강 저쪽에서 뭐 하던 사람이다?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자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이끌어 내셨다 그 말이에요. 본인이 스스로 대견한 생각을 하고 거룩한 생각에 도달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던 것이 아니라 어떤 중립적인 상태에 놓여 있던 사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그런 가문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럼 아브라함의 가문이 도대체 어떤 신을 섬겼는가? 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우르라고 하는 곳에는 달신을 섬기는 문화가 있었어요. 이 달신을 그 나라 수메르어로는 난나라고 그래요. 난나, 난나, 난나예요. 외우기 쉽지 않습니까? 이 난나가 달신인데 이게 나중에 아카드 시대(아카드국, 또는 아카드 제국(영어: Akkadian Empire)은 수메르 북부의 고대 도시인 아카드를 중심으로 성장한 고대 제국으로, 메소포타미아 최초의 제국이자 인류 최초의 제국으로 여겨진다. 아카드 제국 시기는 기원전 2334년 무렵부터 2154년 무렵까지 약 2백여 년으로 추측된다)로 가면 이게 신이라는 말로 바뀝니다. 그러니까 우리 한국말로 신 아닙니까? 그 신이라는 말로 바뀌어요. 다른 고대 근동에서 군대로 상징되는 별들을 이끌어가는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 신 아누가 있고 바람 신 엔닌이 있는데 그 세 번째 넘버 3가 누구냐 바로 이 난나라고 하는 달신입니다.
여러분 우리 이제 추석이 다가오지 않습니까? 동양에서는 초승달을 좋아해요? 보름달을 좋아해요? 보름달 좋아하잖아요. 빵도 보름달 빵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풍성한 뭘 보면서 야 우리 집안도 좀 이렇게 풍성해졌으면 좋겠다. 내 인생도 뭔가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 또 우리 며느리 아기가 들어왔는데 그냥 이렇게 그냥 만삭이 됐으면 좋겠다. 보름달을 보잖아요. 그런데 이들의 종교에서는 초승달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초승달이 매달 그믐달이 되어가지고 없어졌다가 이제 손톱 모양처럼 점점점 자라나는 것을 보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간다. 없었던 생명이 이렇게 생성되고 성장한다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여러분! 지금 근동 지방의 이런 국기들 보세요. 뭐가 제일 많습니까? 초승달이 많아요. 초승달 그죠? 그 이유가 뭡니까? 그것을 숭배하는 거예요. 문화권에 여전히 남겨져 있습니다.
여러분! 창세기 신학이 정말로 위대한 점은요! 당시에 사람들이 절대자라고 믿었던 해나 달이나 바람이나 이와 같은 것들을 누가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단순히 피조물일 뿐이다라고 선언한 점이 상당히 과격하고 어떻게 보면 파격적 선언이라고 할 수 있어요. 누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걸 지으신 겁니까?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냥 주신 것일 뿐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성경밖에 없어요. 그때나 지금이나요! 이에 근거하여 신명기 저자가 일월성신을 섬기지 말라고 우리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또 그리하여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의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 (신명기 4:19)
이제 명절 찾아오면 이 나라에도 가정별로 집단적으로 얼마나 많은 우상숭배가 성행하는지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를 위하여 마치 집에 전구 이렇게 위치 전구 꽂아놓은 것처럼 너희들 밝으라고 밤에도 밝으라고 또 물이 움직이고 또 생명의 어떤 기운을 위해 너희들을 위하여 배정했을 뿐이지 절대로 그것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있죠.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런 달을 섬기고 있었던 가문의 아들이었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 아브라함에게 찾아가셔서 아브라함을 끄집어내지 않았더라면 그냥 그 자리에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다고 하는 거예요. 자기가 지금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살지만, 성공하려고 살지만, 결국에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죽음을 향하여 가는 인생 가운데 하나님께서 찾아가셔서 의도적으로, 주도적으로 이끌어 내셨다. 이렇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르와 하란이라고 하는 지역은 당시에 달신을 섬겼던 대표적인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매우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이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하란이라고 하는 곳에 머물렀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요.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아브라함이 당시 사람들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었던 달신 이 난나와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어요. 그래서 아버지 데라는 이런 어떤 우상을 만드는 제조업자라고까지 알려져 있어요. 그러니까 얼마만큼 철저한 우상숭배의 집안입니까? 그것을 암시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 11장 31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데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창세기 11:31)
여기까지 말씀만 보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떠나라고 했으니까 고향 땅 우르에서 떠났나 보다 그리고 약속의 땅을 정확히 명시해 주시지 않았으니까 가다가 보니까 하란이라는 곳이 있어서 잠시 쉬어가려는 마음으로 거기에 있었겠구나 하는데 성경의 정보는 그렇지가 않아요. 이 부분을 스데반 집사님이 설교하면서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 스데반 집사님의 말씀 읽어볼까요?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내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사도행전 7:2~4)
마지막에 뭐라고 나오죠?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어떻게 하셨다고요? 옮기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하란에 머무르고 싶었던 것이죠. 우르를 떠났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떠나갔지만 하란이라고 하는 지역도 여전히 우르 지역과 비슷한 장소로서 나름 안정감을 누리고 여긴가보다 하고 거기 눌러앉아 살았다 그 말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다는 거예요? 이 땅으로 옮겨놓으셨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을 부르심이라고 하는 사건 가운데에 아브라함은 그 사람의 어떤 장점이나 가치나 자격이 전혀 반영되어 있질 않아요. 오히려 성경은 우상 숭배자로서의 아브라함의 자격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마치도 본받아야 되는 것처럼 지금까지 배웠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어떤 대단한 자격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처럼 우리도 은연중에 느낄 수가 있지만 오히려 성경은 그 반대를 말하고 있다는 거죠. 왜 아브라함을 불렀는가? 자격 없기 때문에 불렀다는 거예요. 부를 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불렀다는 거죠. 무가치하기 때문에 그냥 세상에 놔두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치 있는 존재로 부르셨다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르심 그 자체가 은혜일 수밖에는 없는 거죠. 부담으로 가지시면 안 돼요. 또 일 시키려고 날 부르는가 보다 그런 게 아니고 은혜, 부르심 그 자체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다 하는 거예요.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출생과 죽음만큼은 마음대로 할 수 없잖아요. 그죠? 우리 중에 자기 마음대로 태어난 사람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요! 내가 태어하고 싶어서 태어났냐고? 막 부모한테 원망하고 그러잖아요. 그럼 부모님은 날짜 정해놓고 태어날 걸 알았어요? 여러분들이 그럴 줄 알았습니까? 몰랐지? 그죠? 출생과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이죠. 인생 자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살아보면 자신감이 있을 것 같지만 살수록 자신감이 없는 게 인생 아닙니까? 인간의 본질이죠.
독일의 신학자인 게하르트 에벨링이라고 하는 사람이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출생, 죽음과 같이 부르심 역시도 인간의 의지가 조금도 들어갈 수 없는 전적인 하나님의 영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시작과 끝 그리고 인간 너머에 있는 저 영원한 세계는 하나님이 열어주시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는 세계라고 하는 것이에요. 여러분이 여러분의 의지를 가지고 이 안으로 들어오셨습니까? 여러분이 어느 날 나 예수 믿겠다고 결심하고 들어온 분들도 간혹 있다고 하지만은 이 영적인 세계로의 이런 들어옴은 하나님이 직접 열어주시지 않으면 절대 못 들어와요. 그래서 이것을 계시라고 하여 revelation 베일을 벗겨낸다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인간 쪽에서는 절대로 그 문을 열고 그쪽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마치 출생과 죽음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처럼. 그러니까 부르심이 은혜지요. 부르심은 참으로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부르심의 근거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어요. 왜 나를 불렀을까? 왜 하필이면 나를 나 같은 인간을 부르셨을까? 왜 하나님은 지금까지 놔두셨다가 왜 인생 마지막 부분에 나를 부르셨는가?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래서 신비예요. 은혜예요. 사도바울은 이 부르심이 오직 하나님만의 무조건적인 은혜(Unconditional Grace)임을 선포하고 있어요. 무조건적이다. 한번 말씀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에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에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26~29)
아멘. 누구를 택하셨다고요? 여러분의 부르심을 한번 보십시오. 지금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바울파, 베드로파, 심지어는 예수파로 나눠져서 은사가 다양한 공동체 안에서 네 은사가 옳으니 내 은사가 옳으니 더 크니 작으니 섭섭 마귀 들어와 가지고 인정받지 못하고 막 분열의 공동체 안에서 오늘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말하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께서 어떤 여러분을 부르신 겁니까? 세상적으로 볼 때 무가치한 사람들을 부르지 않았습니까? 망한 사람들을 골라서 부르질 않았습니까? 물론 우리 중에는 여전히 망하지 않은 분들도 가끔 있습니다. 부자도 좀 있고요! 배운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보십시오. 다 가난한 자들을 멸시받는 자들을 모욕당하는 자들, 무시당하는 자들을 세상적으로 아무런 가치 없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오히려 교회 밖에 있는 세상 밖에 있는 저 강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한 거예요.
여러분! 교회 안에서 자랑할 게 뭐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인정받아야 될 게 더 이상 뭐가 있습니까? 내가 좀 남들한테 인정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 아닙니까? 여러분! 그걸로 충분한 거 아닙니까? 왜 교회 공동체 안에 분란이 일어나야 합니까? 네가 크니 내가 크니 내가 너보다 낫고 너보다 많이 일했고 너보다 똑똑했고 그런 말을 어떻게 공동체 안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부름받은 사람들인데요! 부르심은 무조건적인 주님의 은혜다라고 하는 것이에요. 이 은혜 의식이 회복되는 우리 강남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씨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고 있어요. 이제 앞으로 하나님의 나라는요!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해서 부르심이라고 하는 방식을 통하여 형성될 것입니다. 뭐라고요? 부르심! 오직 부르심! 다른 거 없어요. 부르심으로 영원히 앞으로 하나님의 나라 이 땅에 존재하는 한 부르심의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예표가 되는 것이 구약의 이스라엘을 애굽의 오랜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사건이에요. 호세아가 출애굽 사건을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어요.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호세아 1:1)
언제 불러냈어요? 어렸을 때, 좌우 분간할 수 없을 때, 어떤 노예 근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런 열망도 없고 그냥 여기서 눌러서 노예로 죽을 수밖에 없는 좌우 분간하지 못하는 그런 어린아이 같은 이스라엘을 내가 업어서 날개에 달아서 어떻게 했어요? 불러냈다, 구원했다라고 말하지 않아요. 구출했다고 말하지 않아요. 뭐라 그래요? 불러냈다! 나와! 거기서 나와! 말씀하셨다는 거예요. 부르심의 방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형성해 가십니다. 나중에 모세 보세요. 모세야! 모세야! 떨기나무 가운데서 부르시잖아요. 여호수아를 부르시고요, 다윗을 부르시고요,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꼬? 주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사야를 하나님 부르시고, 예레미야도 민족의 선지자로 부르심의 방식을 통하여 이스라엘 지도자가 됩니다. 물론 나름의 능력을 갖췄었죠. 남들보다는 어떤 기반이 있겠죠! 그러나 여러분 성경에 보면 그 기반이 부르심의 조건이 되지 않아요. 오히려 없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왜요? 자랑하지 않도록! 내가 했다라고 자랑하지 않도록 사람이 했다고 드러내지 않고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인정하도록 능력 없는 사람을 골라서 뽑아내세요. 그게 하나님의 나라예요. 신약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잖아요. 뭐 이렇게 설득하는 과정도 없어요. 따라와! 따라오너라! 그럼 그냥 그물 버리고 따라가는 거예요. 이유도 없이 영문도 없이 그냥 따라가는 거예요. 부르심의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죠. 예수를 핍박하다가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사도가 되잖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를 소개할 때 유난히 이 부르심이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대표적으로 로마서 1장 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로마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뭐라고 하죠?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이렇게 나오잖아요.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전서 1:1)
고린도전서 1장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뭐예요?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부르심을 받았다는 거. 그러니까 바울은 부득불 이 사명을 감당한 거예요. 왜? 자기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 아니에요. 자기가 어디 신학교 들어가서 자격증 따서 나는 이제 하나님의 일을 할 만하다 그렇게 자부심을 가지고 했던 것이 아니고 하필이면 예수를 핍박하던 자를 하나님이 부르시고 죄인 중에 괴수를 부르셨기 때문에 그는 일평생 선교사로서 목회자로서 부득불 일을 한 거예요. 하나님의 일이 할 만하다고요? 목회가 할 만하다고요? 선교가? 전도가? 할 만한 일이라고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억지로 하는 거예요! 억지로! 저를 또 너무 이렇게 걱정스럽게 보시는데! 다 그래요. 여러분! 그게 제대로 하는 종이에요. 그렇게 해놓고도 나는 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게 부르심을 받은 종의 특징이에요.
아브라함 이후에 모든 인간들은 이렇게 부르심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언제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언제 누구를 통하여 부르심을 받았나요?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친구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고 그랬잖아요. 일요일 날 그 외로운 골목길에서 문산아! 부르는 그 친구의 음성을 따라 개척교회를 따라 들어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친구가 부른 게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신 거였어요. 여러분! 여러분이 작정하고 그 이름 쓰고 기도하는 사람들! 여러분이 이름 불러가며 기도하는 그 사람들!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로 불러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부르심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형성해 간다 하는 겁니다.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은 부름 받은 존재가 부른 자의 것이 된다는 의미예요. 다시 말하면, 부르심이 어떤 의미냐 하면 부름 받은 존재가 불러준 자의 것이 된다는 뜻이에요. 여러분을 누가 불렀다고요? 하나님이 부르셨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누구 거? 하나님거!
그러니까 죽음을 대기하고 있는 인간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신다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났다는 뜻이에요. 살아났다. 이걸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알잖아요! 그러면 여러분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제는 살아났다는 뜻이에요.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랬잖아요. 나사로야! 나오너라! 장사된 지 3일 됐으니까 냄새가 납니다. 이미 죽었어요. 그런데 주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름 부르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살아나와 버리잖아요. 아직도 감격을 안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불러주신다는 건 뭐냐 하면 너 내 거야! 내가 너를 불렀어! 그리고 내가 너를 구원했어! 그러니까 말이야 너는 이제부터 내 거야. 그 생명이 네 생명이 아니라 내가 쥐어지고 있는 생명이야. 이제 살아났으니 날 좀 좋아해 주겠니? 내가 너를 살려놨으니까 너의 인생은 너의 것이 아니니까 이제 좀 나를 좋아해 주겠니? 사랑해 주겠니? 나를 찬양하겠니? 나를 예배하겠니? 라는 뜻이 이 부르심의 의미 속에 들어있다 하는 거죠. 어떻게? 그렇게 사시겠어요? 내 인생 내 것인 양! 책임질 수도 없으면서 그냥 내 인생 내 것인 양! 내가 다 책임지려고 하고 걱정과 근심 염려 가운데서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돼버리고 결국에 나중에는 해결되지도 않고 맨날 힘들고 자기도 힘들고 가족들도 힘들게 하고 주위에 있는 이웃들까지 힘들게 하는 인생 살지 마시고 나는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이 알아서 책임지신다. 네. 하나님이 알아서 하세요. 알아서 하세요. 마치 그냥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그냥 엄마 아빠 앞에서 그냥 막 울고 해결해 달라고 하는 아이처럼 그렇게 사세요. 그게 행복한 거예요. 이사야가 이 부르심의 의미를 정확하게 서술해 놨습니다. 우리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이사야 43:1~3)
여러분! 집에 돌아가셔서 이 너라고 하는 이 인칭에다가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서 읽고 이름을 넣어서 기도하세요. 문산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문산아 너를 지으신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문산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문산이를 구속하였고 내가 문산이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문산이는 내 것이라. 여기다가 자녀들의 이름도 배우자의 이름도 그리고 여러분이 작정한 영혼들의 이름도 넣어서 한번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이 반드시 책임지시는 역사가 경험될 줄로 믿습니다. 계속해서 읽어볼까요?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사야 43:3~7)
할렐루야!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독한지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은 인간의 말로 표현하면 미친 사랑이에요. 너밖에 안 보인다는 뜻이에요. 너를 아무도 건드릴 수 없게 만든다는 거예요. 내가 너를 건지기 위해서라면 주위에 있는 모든 민족까지도 다 희생시키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 아닙니까? 너희 자녀들에 대해서, 너희들의 손주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 내가 때가 되면 다 불러모을 거야. 하나님께서 치료하실 거야. 네가 책임지는 거 아니야! 너의 병도 너의 재정적인 문제도 너의 자녀들의 문제도 네가 내 것이기 때문에 너와 관계되는 모든 일들은 내가 관여할 일이야! 내가 해결할 일이라 말씀하시는 거예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반드시 해결할 줄로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오랜 기간 대를 이어서 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말씀은 유일한 희망의 말씀이었어요. 우리나라도 일제 치하에서 언제 해방될지 모를 때에 크리스천들은 이 말씀을 붙잡고 해방의 그날을 기도했던 것이에요. 그러나 여러분, 지금 우리 인생 가운데도 영적인 어둠이 찾아와 있죠?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 부모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길이 없는! 이 자녀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될지! 내가 사랑하지만 사랑할 능력이 없는 나에게 어떻게 될지! 가장들도 이렇게 그냥 멀거니 앉아 계시는 것 같지만 내가 어떻게 이 가족들을 이끌어가야 되나! 나이는 점점 들어가는데 도저히 어떻게 나의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가! 얼마나 막막합니까? 그럴 때 여기에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한 그 사랑, 그 간절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부름 받았다는 것은요!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았다는 뜻이에요. 그냥 하나님께서 불러놓고 모른척하시겠어요? 그런 하나님입니까? 여러분을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사랑하셔서 그 예수 안에서, 성령 안에서 오늘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고! 여러분의 가정을 부른다면 여러분은 죽음의 권세에서 이미 벗어난 존재이고, 내가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나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제 날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그분만을 좋아하고 찬양하며 살아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부르심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의 죽음 가운데 빠져 있던 아브라함을 부르심의 방식으로 살려내고, 이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셨다는 뜻이에요. 형성하셨다는 뜻이에요. 앞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계속해서 이렇게 확장되어 나가는 역사가 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이후에 오는 모든 사람들, 우리 포함해서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방식 외에는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죽음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구원받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백성도 될 수 없다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우리에게,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전부입니다. 불러주신 그 하나님을 기뻐하시고 찬양하시고, 여러분의 삶에 새로운 빛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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