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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하란에서 떠나십시오 -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by 복음과삶 2023. 10. 2.

2023.10.01. (주일예배). 당신의 하란에서 떠나십시오. 창세기 12:1~5,

노량진 강남교회 (고문산 목사)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창세기 12:1~5)

 

지난 시간에 부르심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 함께 말씀을 나누었는데 오늘 두 번째 시간으로 이 부르심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깊이 더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이야기할 때에 그 아버지 데라를 놓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아버지 데라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을 해놓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은 이 아버지 데라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해서 아브라함이 과연 어떠한 순종을 하였는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일생을 한 네 가지 정도로 요약을 할 수가 있어요.

 

첫째, 데라는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에서 달신난나를 섬기던 사람이었다 하는 겁니다. 여러분! 메소포타미아라고 하는 곳은 지금도 풍요로운 지역으로 알려져 있어요. 애굽 지역도 그렇지만 반대쪽에 있는 메소포타미아라고 하는 지역은 그 당시에도 풍요의 땅으로 알려져 있는 곳인데 거기서 데라는 그 당시에 달신을 섬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는 겁니다. 이것을 입증하는 말씀이 여호수아 242절 이하에 나오고 있어요.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여호수아 24:2). 이렇게 나오고 있는 거죠.

 

두 번째는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데라의 족보를 보면 데라에게 아들 3명이 있었어요. 누굽니까? 아브라함, 나홀, 하란 이에요. 근데 이 중에 막내 아들 하란은 갈대아 우르에서 나오지 못하고 거기서 죽게 됩니다. 여러분 하란이라고 하는 이름은 데라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가족들이 머물렀던 장소의 이름이기도 해요. 이게 이제 창세기 112절에 나오는 데라의 족보에 나오는 내용이고요.

 

세 번째로는 데라는 가족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가고자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거처를 옮겼다라고 하는 사실이에요. 이 말씀이 창세기 1131절 이하에 등장하고 있어요. 여기 보면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창세기 11:31)

 

누가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아버지 데라가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32절로 가보면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창세기 11:32)

 

어디서 죽었어요? 하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르에서 나왔지만 하란을 떠나지 못하고 하란에서 죽었어요.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다는 것이 네 번째 아버지 데라에 대한 정보입니다. 이 네 가지 중에 가장 주목해야 되는 대목은 바로 세 번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 아들 아브라함인 것이 분명한데 오늘 보니까 가나안으로 가려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거처를 옮긴 사람은 바로 누구였다는 거예요? 아버지 데라였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신약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서는 다르게 설명이 돼 있어요.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우르에 있었을 때라는 말이죠.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그가 누구예요? 아브라함이죠?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사도행전 7:2~4)


이렇게 나와요. 여러분 지금 사도행전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에서는 아버지 데라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갈대아를 떠났다. 이렇게 기록이 돼 있다는 거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게 된 주체가 아버지 데라가 아니라 아들 아브라함이었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오른쪽에 있는 바벨론 우르 메소프타미아 하란 여기가 아브라함 가족들이 살았던 지역입니다. 우르가 원래 살았던 데고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곳은 하란이에요. 나중에 하나님께서 저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신 거죠. 저 밑에는 이집트가 등장합니다. 이런 이동 경로를 통해서 볼 때에 아브라함은 적어도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정작 가족을 데리고 나온 어디로부터? 우르로부터, 데리고 나온 주체를 창세기 말씀에서는 아버지 데라라고 말하고 있고 여호수아서나 신약에서는 그 아들 아브라함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 정도만 아셔도 성경을 상당히 많이 아시는 겁니다. 왜요? 대부분 아브라함이 부름 받고 아브라함이 가족을 데리고 나온 걸로 다 알고 있거든요. 물론 그것조차 모르는 분들이 많지만, 여러분들은 이것 정도는 구별을 할 수 있어야겠죠?

 

여기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을 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인 창세기 121절에서 4절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떠난 장소가 어디라고 나와 있어요? 메소포타미아 우르가 아니라 하란이라고 나오고 있다는 거예요. 4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창세기 12:4)

 

이렇게 나와요. 여호수아 24장과 특별히 사도행전 7장에서는 분명히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내셨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란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떠난 걸로 돼 있단 말이에요. 헷갈릴 수 있잖아요? 도표로 정리를 해봤어요.

 

갈대아 우르 하란
아브람을 부르심 (24, 7) 아브람을 부르심 (12)
데라가 하란으로 (11)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12)
아브람이 하란으로 (7)  

 

갈대아 우르, 하란 두 지역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 24장과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창세기 12장에 보니까 하란에서 또 아브라함을 부르셨어요. 그런데 창세기 11장의 족보에 보면 아버지 데라가 가족을 하란으로 옮긴 걸로 나와 있는데 오늘 본문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옮긴 것으로 거기에다가 사도행전 7장에 가보면 원래 그 우르에서 아브라함이 가족들을 하란으로 옮긴 것으로 소개가 되어 있다고 하는 거예요.

성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난제를 던져주고 있는데,

 

첫째,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곳이 과연 우르인가 아니면 하란인가?


둘째, 아니면 우르에서도 부르셨고, 또 하란에서도 부르셨는가? 두 번 부르셨는가?

 

셋째, 우르를 떠난 때 주체는 아브람이었는가? 아버지 데라였는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메소포타미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주체가 아브라함인지 혹은 아버지 데라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우르를 떠나 하란에 정착한 것만은 사실이에요. 그리고 하란에서 아버지 데라가 죽자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곳을 떠나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명령을 하셨고 이에 순종하여 아브라함이 결국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몇 번 부르심을 받았다고 봐야 돼요. 성경 전체로 정리해 보자면? 몇 번 부름 받았어요? 성경을 정리해서 종합해 보면 아브라함의 정황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정리해 볼 수가 있어요. 첫째, 읽어볼까요? 시작.

 

1) 아브람은 데라의 아들이다. (창세기 11, 여호수아 24).

 

어때요? 이의 없으시죠? 창세기, 여호수아가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그만큼 영향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읽겠습니다. 시작.

 

2)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에서 데라와 함께 달신을 섬기던 사람이었다. (여호수아 24)

어때요? 이의 없으시죠? 왜 그러냐 하면 여호수아가 24장 이 부분에서 너희 조상을 얘기할 때 아브라함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어요. 아버지 데라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아브라함을 강조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그냥 아버지하고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 철저한 우상숭배자이며 심지어는 우상 제조업자인 아버지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은 아들이었다라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시작.

 

3)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족들을 이끌고 나왔다. (여호수아 24, 사도행전 7).

우르에서 누가 가족들을 이끌고 나와요? 아브라함이, 여호수아와 사도행전이 증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네 번째, 시작.

 

4) 하란에서 부르심을 받고 가족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향했다. (창세기 12)


아브라함은 몇 번 부르심을 받았다고 할 수 있어요? 두 번.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아무런 자격 조건이 없다고 하는 것이며, 오히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아니라 저주와 심판의 대상이었다고 하는 거죠. 왜냐하면 아버지와 함께 우상을 섬기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내신 거예요.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잡아서 이끌어내신 거예요. 억지로 끄집어낸 거죠. 거기서 그냥 아버지 따라서 가문을 따라서 얼마든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불러내신 겁니다. 그것을 성경이 강조하고 있어요. 특별히 여호수아 2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끌어내셨다라고 하는 표현을 볼 때에 적어도 아브라함은 우르에서는 벗어나야만 했던 그런 사람이었죠.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누가 주도적이었던 간에 갈대와 우르를 떠나 하란에 정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지점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우르를 떠났는데 지금 아브라함의 위치는 어디에 있어요? 하란에 있다고 하는 거예요. 우르를 떠나 하란에 정착했을 때에 아브라함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지 몰라요. 그래 여기가 나에겐 최선이야! 더 이상은 너무 위험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기까지 내가 왔으니까 익숙했던 고향 땅을 떠나 이토록 낯선 땅에 왔으니까 더 이상은 못 가! 여기가 우리의 최선이야라고 생각했을지 몰라요. 아니면 아버지 데라가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죠! 아범, 이 정도면 되지 않았어? 아범이 만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모르겠지만 이 메소포타미아라고 하는 지역을 완전히 벗어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야! 아범한테 최선이야! 여기까지만 하게! 그렇게 아브라함을 설득했는지 모르죠! 이 지점, 여기가 바로 하란이라고 하는 곳이에요. 아브라함 자신이 메소포타미아를 완전히 벗어나기 두려워했는지 아니면 아버지 데라에게 설득을 당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하란이라고 하는 장소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아브라함의 따름이라고 하는 이 관계 안에서 바로 아브라함 안에서의 절묘한 타협점이라고 하는 사실이에요. 제가 절묘한이라는 말을 붙였어요. 기가 막히는 타협점.

 

하란에서 데라가 죽자 아브라함이 다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하셨던 말씀 기억나시죠? “레크 르까무슨 뜻이죠? “너 혼자 가라너 혼자 가라고 하는 이 말씀이 왜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지 그 의미를 우리는 점점 더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가족들하고 같이 떠났다고 그랬어요. 다 같이 떠났어요. 아버지하고도 떠났어요. 아버지는 그의 인생에 얼마나 든든한 기반이 되었겠습니까? 얼마나 훌륭한 조언자가 되었겠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레크 르까” “너 혼자 가라그 말씀이 지금 하란에서 주어지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신앙은 이 하란에서 다 출발하셔야 돼요. 다 떠나셔야 돼요. 대부분이 다 하란에 머물러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는 하란에 머물러 있어요. 한국교회는 하란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심하게 말하면 이 시대만큼 풍성한 시대가 있습니까? 이 시대만큼 똑똑한 시대가 있습니까? 그러나 거기는 하란이래요, 하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땅은 메소포타미아를 완전히 벗어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 메소포타미아 끄트머리에 거해도 거기는 가나안 땅이 아니에요. 아무리 집을 나왔고 아무리 자신의 안전 체계를 벗어났다 할지라도 메소포타미아 그 끄트머리는 절대 가나안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아브라함은 지금 메소포타미아 끄트머리 하란에 정착하고 말았다고 하는 거죠. 상황과 환경을 돌아보면 가장으로서 너무나 고민해야 할 것이 많았을 겁니다. 정착하고 있던 땅과 친척과 혈통이라고 하는 안전망을 한 번 떠났어요. 이제 여기서 이 낯선 땅에서 나름의 안전 체계를 구축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서조차도 떠나야 된다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큰 두려움인지 모릅니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설득하고 또 자신에게 설득당하면서 하란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괜찮아, 아브라함. 남이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너만 그런 거 아니야, 자기 스스로를 계속 설득합니다.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는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다시 찾아오셔서 하란에서 불러내신 거예요. 하나님의 부르심과 내가 그 부르심에 순종해서 내가 어느 죄의 자리건 과거의 자리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아의 자리건 간에 떠나는 관계 안에서 이런 일들이 상당히 많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순종 앞에서 우리는 우리 생각 속에서 절묘한 타협점을 찾아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는 100%의 순종을 요구하시는데 그래야 사는 것인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이 정도면 됐다. 그래 이게 100%.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자기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한 게 아니에요. 그런데 자기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회 생활도 그렇게 하잖아요. 교회 생활도 이게 교회생활이야, 이런 건 너무 심해, 이렇게까지 할 게 있나, 하나님도 이 정도면 이해하실 거야. 헌금 생활도 그렇게 하시잖아요. 봉사 생활도 그렇게 하고,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우리 스스로가 다 규정해 놓고 있잖아요. 성경 말씀에 나오지도 않는 이야기들을 여기저기에서 소문 듣고 제일 중요한 건 자기 생각이 그것을 정리해 놓고 그것을 100% 순종이라고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의 하란이에요. 우리가 떠나야 할 하란입니다. 거기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순종하라고 할 때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를 죽이시기까지 사랑하시면서 나 좀 사랑해 줄래? 할 때에는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죠! 아닙니까? 하나님께 순종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 부르심에 순종한다고 하는 것은, 그 기준이 나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 그 말씀 자체예요. 예수님도 말씀 따라 그냥 가셨어요. 말씀대로만 하셨어요. 자기 생각대로 하지 않으셨어요.

 

이미 고인이 되신 옥한흠 목사님께서 설교하다가 강단에서 자주 우셨대요. 그러니까 어떤 권사님이 찾아오셔서 목사님 성도들도 힘들어요! 강단에서 그렇게 울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 이렇게 좀 웃으세요! 그랬더니 그다음 설교 때 여러분 제가 왜 우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날 위해 죽으셨는데 날 위해서 사랑하신다는 말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주셨는데 나는 하나님을 목숨 바쳐 사랑하지도 못하고 힘을 다해 사랑하지도 못하고 이 마음을 다해서도 자랑하지 못하니까 이게 설교할 때마다 느껴져서 눈물이 나는 거예요. 그렇게 말씀하셨대요.


여러분! 하란이라고 하는 땅은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이 아닙니다. 하란이라고 하는 곳은 아브라함이 들어가 정착할 땅이 절대 아니었어요. 아버지 데라가 하란에서 죽자 다시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떠나가라” “레크 르까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은 떠나는 그 자체의 의미와 함께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까지도 놔두고 떠나는 것을 의미해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잔인하죠. 왜요? 잘라내야 되니까! 그 끝은 머리라도 잘라내야 되니까! 그 하란이라고 하는 불순종의 장소가 결국에는 모든 것을 불순종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그 하란의 끄트머리가 잘려나가지 않으면 절대로 변화되지 않아요.

 

여러분 100% 순종이 있느냐! 불순종이 있느냐! 둘 중에 하나지, 어중간한 순종, 90% 순종하고 10%는 내 마음대로 하는 거 불순종이에요. 안타깝지만 힘만 빼는 거예요. 시간만 낭비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그랬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아브라함을 우르에서 하란으로 밀어내신 거예요. 뭐 자기가 믿음을 가지고 출발을 해요! 그리고 이제는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밀어내시는 거예요. 억지로 떠밀어내시는 거예요. 여러분 그게 믿음이에요. 그게 믿음의 세계라고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떠남의 근거가 아브라함 믿음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떠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이끄심이에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징그러운 인도하심, 지긋지긋한 인도하심, 한번 물면 놓지 않는 그 이끄심이 아브라함을 인도하는 거죠.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어서 떠난 게 절대 아니에요.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게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을 어떤 것인지, 믿음이 과연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는 샘플이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된 거지, 아브라함이 남들보다 더 순종 잘하고 더 과감하고 용기 있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게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하여서 지금 믿음의 세계로 억지로 떠밀려가고 있는 거예요. 부르심의 본질 중 하나가 드러나고 있는 거죠.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한번 부르신 사람을 절대 놓지 않으세요. 한번 부르시고 택한 사람 있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세요. 그러니까 빨리 돌아오세요. 제발, 어차피 돌아올 건데 똥꼬집 부리지 마시고 그냥 명절 특집으로 두 손 바짝 들고 지금 자수하고 나오세요. 그래야 시간 낭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줄다리기 할 필요 없어요. 왜 이렇게 줄다리기 합니까? 하나님하고 왜 자꾸 거래합니까? 이거 해주실 때까지 나 기다렸다가 그때 하나님 믿을랍니다. 순종할랍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기다리시잖아요. 설득하시잖아요. 또 상황을 만들어 가시잖아요. 그러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의 사람이 되게끔 만드시는 분이 누구냐? 바로 그게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은 사실은 나의 능력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랑할 게 없어요. 나 믿음이 있다고 어떻게 자랑합니까? 이제 겨우 믿어놓고 이제 겨우 하나님 따라가면서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내 안에 계시는 그 예수로 인하여 내가 모셔드린 그 하나님 성령으로 인하여 믿음의 능력이 드러나는 거지, 내가 이런 믿음 가졌다고 막 자신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이 선물을 다시 한번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주도적인 이끌어가심으로 인해 마침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 5절의 말씀 우리 함께 읽어볼까요?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창세기 12:5)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더라.” 마침내라고 해석한 히브리어는 와우라고 하는 접속사인데 그냥, 그리고, 그러나, 그러므로 하는 앞의 사건과 뒤에 문장을 이어주는 접속사의 역할이에요. 앞에 이러 이러한 일이 있었으므로 결과적으로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 할 때에 이 와우라고 하는 접속사를 쓰는데 한글 개혁 성경은 기가 막히게 이것을 마침내마침표를 찍었다는 말이잖아요. 마침내는 누가 찍으신 거예요? 이 마침표의 주인공이 누굽니까? 아브라함이 들어간 겁니까? 하나님이 들어가게 하신 겁니까?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브라함은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란으로 떠났어요. 그리고 완전히 순종하지 못하여 하란에 정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기다리시다가 적어도 언제까지? 아버지 데라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또다시 부르셨어요.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는 거죠. “마침내주인공은 아브라함도 아니고 아버지 데라도 아니고 하나님이셨다 하는 거죠.

 

부르심이 시작되면 하나님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다고 야단치는 경우가 없어요. 여러분! 하나님께 진짜 야단 맞으셨습니까? 여러분 야단 맞으면 큰일 나요. 사실은 하나님 다 참고 계시는 거예요. 여러분이 잘못한 걸 일일이 다 들춰내 가지고 여러분이 여러분 자식에게 하는 것처럼 한번 해보세요. 우린 다 끝장났을 거예요. 하나님은 야단도 안 치세요. ! 그렇게 할 거면 그만둬! 이렇게 혼쭐도 안 내세요. 그냥 기다리세요. 계속 기다리세요. ? 하나님이 다 하셨고 하나님이 앞으로 다 하실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다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시작하시면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끝까지 가십니다. 한번 물면 놔요? 안 놔요? 안 논다니까요. 한번 부른 사람은 딱 물면 절대 안 놔요. 끝까지 책임지세요.

 

사도바울이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이 말씀 꼭 기억하셨으면 좋겠어요.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6)

 

여러분도 확신하십니까? 시작하신 분이 누구예요? 하나님이세요! 여러분이 시작한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믿으려고 시작한 게 아니었단 말이죠. 하나님이 오늘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완성하실 거예요. 우리 성도들의 삶에, 명절에도 고난이 찾아옵니다. 어쩌면 명절의 고통이 더 커요. 더 슬퍼요, 감당할 길이 없어요. 신앙인들이 더 고난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그러나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지막 인생의 마침표는 여러분이 찍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찍으실 줄로 믿고 찬송하며 기뻐하며 새로운 날을 시작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