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5. (주일예배). 복의 의미(3). 창세기 12:1~5
노량진 강남교회 (고문산 목사)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창세기 12:1~5)
사람은 누구나 복을 받기 원하고 또 이왕이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죠. 복이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바램이라고 할 수 있고 또 철학의 끊임없는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관건은 이 복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예요. 행복이라고 하는 것을 과연 어떻게 정의하느냐 한번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나는 도대체 뭐를 복이라고 생각할까? 누군가가 당신은 뭐를 복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어볼 때 무엇이라고 대답을 할 것이냐?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결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복은 밖으로부터 주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노력하거나 애쓰는 것 이 외에 어떤 초월적인 세계로부터 초월자에 의하여 복이 위로부터 내려온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복을 뭐라고 그러죠? 받는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받는다! 그리고 운이 좋다! 행운이 좋았다! 대박이다! 이런 표현을 쓸 정도로 약간 우연적 요소라고 복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복을 구한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인간의 심성 안에 연약한 인간이 뭔가 초월자에 대해서 복을 구한다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고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복을 구하는 존재다! 이렇게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죠.
그런데 그 복이 욕망의 충족이라고 하는 어떤 이기적인 목적과 그 복을 얻어내기 위해서 하나님까지 이용하려고 하는 이른바 기복 신앙이라고 하는 게 문제예요. 이 기복 신앙은 얼마나 무서운지 기독교가 제시하는 신학과 신앙을 완전히 무력화시켜버립니다. 더 쉽게 말하면 내가 얻고자 하는 복만 받으면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없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내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심지어는 부활하셨다는 사실조차도 별 관심사가 없어지는 겁니다. 기복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그토록 기독교에 큰 해악을 미쳤던 것이 사실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복을 구해야만 한다라고 하는 이 기복신앙과 하나님께 복을 구하면 안 된다라고 하는 이 기복 신앙에 대한 거부감 사이에 성도들과 교회들이 나눠지고 있어요.
예를 들면 어떤 특수 교단은 이 복 자체를 너무 강조합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엄청난 부흥을 이루었어요. 그런데 여러분 또 반면에 그 외의 교단들은 그런 어떤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복 자체를 하나님께 구하지 않는 거예요. 그냥 지성적으로 머리로만 이해를 하는 거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구나! 하나님이 예수님 때문에 내 죄를 사하여 주셨구나! 그러니까 평안하구나! 그리고 죽으면 천국 가겠구나! 하는 머리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거예요. 그거를 기독교 지성주의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한쪽은 복만 강조하고 한쪽은 아예 복 자체를 터부시하고 구하지 않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됐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 강남교회는 어느 쪽인 것 같아요? 복을 구하는 쪽이에요? 아니면 좀 복을 구하는 것에 대해서 꺼려하는 쪽이에요? 짬뽕이에요? 이도저도 아니에요? 균형 있게 구하고 있습니까? 할렐루야! 우리 강남교회는 균형 있게 구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러나 성도들 중에는 이 양극단으로 치우쳐 있는 모습을 보게 돼요. 그래서 이와 같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오늘은 그동안 한국 사회에 뿌리 내리고 있는 역사적인 종교의 층들을 한번 살펴보려고 해요.
여러분 대표적인 종교가 뭐가 있습니까? 우리나라에 들어온 종교! 무속 신앙이 있습니다. 가장 강력하다고 봐야 돼요. 그리고 불교가 들어왔고요. 나중에 유교가 들어옵니다. 가장 최근에 들어온 종교가 사실은 기독교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 기독교가 앞에 들어온 종교, 대표적인 세계 종교에 대부분 영향을 받게 된 거예요. 그래서 기독교가 말하는 복!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을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이 종교들, 세 가지를 좀 비교하려고 합니다.
먼저 무속 신앙입니다. 여러분 무속 신앙 잘 아시죠? 이거는 인간의 어떤 생사화복(生死禍福)이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신들의 의사에 달려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럼 신들이 뭐냐? 하여간 갖다 붙이면 다 신이에요. 대표적인 신은 뭐냐! 하늘을 주관하는 천신이 있고 땅을 주관하는 지신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됐는데 그걸 인신이라고 말합니다. 처녀귀신, 몽달귀신, 조상신이 다 여기에 포함되어 그 외의 신들이 뭐냐! 다 잡귀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들이 인간 세상 속에서 인간들의 복을 주관한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이 신들을 위로하고! 그렇죠? 위로하고 달래고 잘 섬겨드려야 되는 거죠! 그 조상신을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게 바로 무속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들과 인간을 중계해주는 역할을 하는 존재가 있어요. 그게 바로 무당입니다. 여자를 무당이라고 하고 남자를 뭐라고 그러죠? 박수라고 합니다. 박수 무당! 박수 무당인데 이 사람들이 복을 중계한다고 봅니다. 그래가지고 이 박수 무당이 점복을 쳐요. 어떻게 해요 쌀 같은 거! 그렇죠? 쫙 뿌려가지고 비 오는 날 가지 마! 뭐 이렇게 물가는 가지 마! 그리고 몇월 며칠날 어느 쪽으로 가라! 이렇게 쌀점을 쫙! 이 점복을 무당이 합니다. 그리고 이제 공수라고 하는 게 있어요! 이렇게 푸닥거리하다가 갑자기 뭐가 확 입에 왔구나. 이렇게 해가지고 돌아가셨던 아버지 목소리 갑자기 무당 목소리로 들리는 거예요. 그리고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아이 목소리가 여기서 들리는 거예요. 그러면서 신의 뜻을 보통 사람들에게 전하고 길과 흉이 뭔지를 정하는 그런 역할을 누가 한다고요? 무당이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실행을 위해 푸닥거리 같은 걸 하는데 그게 뭐냐? 이게 굿이라고 하는 겁니다. 굿을 하는데 무속에서는 복이라고 하는 것은 굿을 통하여 온다고 봐요. 그래서 무속 신앙에서 중요한 개념이 뭐냐 하면 기양흉재(祈禳凶災)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재앙을 풀고 축복을 비는 제의(祭儀)예요. 그러니까 예배도 이런 식으로 드리는 분들이 있다는 거예요. 예배를 마치 화를 면하고 축복을 받기 위한 어떤 제사처럼 예배를 드린다는 거죠. 그래서 보통 굿은 문제가 생겼을 때 합니다. 뭔가 삐걱거릴 때 요즘에 일이 잘 안 풀려! 아무래도 굿을 해야겠다! 그래서 깨진 조화를 무당을 불러가지고 신의 도움으로 질서를 바로잡는 거예요. 이게 굿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 굿이라고 하는 게 화를 물리치고 복을 초대한다는 의미의 제재초복(除災招福)을 너무나 강조하면 나머지, 그러니까 이거 안 하면 화를 입을 것 같은 거야. 그러니까 두려워! 겁이 나! 그러니까 무당도 자꾸 겁을 주죠.협박을 하죠. 너 그거 안 하면 큰일 나! 막 이러면서. 그러니까 이런 쪽으로만 굿이 넘어가다 보니까 무속신앙이 세속화되고 타락화되는 현상을 한국 사회에서 보이게 됩니다. 무교에서는 어떤 복을 추구하냐면 세 가지인데요. 재물! 장수! 평안의 복이에요. 여러분? 이 복은 우리도 추구해요? 안 추구해요? 이거 우리가 똑같잖아요. 그죠? 근데 이것이 기본적인 복이에요. 그런데 이거는 현세적입니다. 이 땅에서만 필요한 거예요. 그리고 복 자체가 너무나 노골적이야. 그러니까요. 복을 그 사람이 정성을 다해 가지고 하면 복이 더 점점 커져요. 아주 노골적입니다. 이승적이고 물질적이고 현실에 강조점을 두고 있어요. 그래서 인간 본연의 욕망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어요. 그런데 반면에 윤리관이나 어떤 구원관이나 내세관은 굉장히 희박합니다. 그래서 종교로서의 가치는 좀 과소평가되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가장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친 특히 기복 신앙의 최대의 영향을 미친 종교를 무속 신앙이라고 종교학자들이 보고 있어요. 막 심하게 말하면 목사를 무당으로도 생각하는 데도 있어요. 본인이 기도해서 본인이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해서 복을 받으시면 되는데 자꾸 목사를 마치 그런 식으로 복을 주는 존재로 자꾸 세운다. 중세가 이것을 악용했죠. 그러니까 중세 신학에도 무속 신앙이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타락하고 망한 거예요. 이게 무교입니다. 무속 신앙 이해하셨죠?
두 번째로 가면 이제 불교입니다. 여러분 불교하면 생각나는 게 뭐예요? 불교 어떤 사상 생각나지 않아요? 업보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업보! 도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업보를 타고났길래 저 인간을 만났나! 이런 말 많이 하죠? 여러분은 안 하시겠지만 저는 많이 들었어요. 여러분 윤회사상(輪廻思想)아시죠? 오늘 이제 사람이지만 다음에 개로 태어날지도 몰라! 미물로 태어날지도 몰라! 그리고 어떤 사람을 보면 당신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어?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얻었습니까? 그런 말 쓰죠? 불교적 용어입니다. 불교는 큰 두 축이 있습니다. 하나는 업보 사상과 또 하나는 윤회설이라고 합니다. 그렇기때문에 사실은 현실에서 복을 구한다는 건 모순이에요. 왜 정해졌는데 과거에 정해졌는데 무슨 복을 구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에 관련한 이런 개념이 있습니다. 선인선과(善人善果) 악인악과(惡人惡果)라는 개념이 있어요. 이거는 그렇게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선한 원인은 선한 결과를 낳고 악한 원인은 악한 결과를 낳는다. 그 말이 너무 당연하죠. 근데 이게 업보 사상과 연결되면 무슨 말이냐면 지금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이미 과거에 전생에 어떤 업에 의해서? 선한 업에 의해서 정해졌다 그 말이에요. 복을 구할 수가 있어요? 없어요? 사실은 못 구해요. 왜? 왜냐면 정해졌기 때문에 그리고 미래의 어떤 것은 지금 현재가 결정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해되세요? 좀 어렵죠? 이미 과거에 의해서 모든 게 결정됐어요. 그런데 원래 불교는요!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복을 추구하기보다는 이 세상은 고해의 바다이기 때문에 석가는 원래부터 무슨 생각을 했냐면 여기서는 복을 구할 수 없다. 여기를 탈출해야 된다. 여기를 초월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지복이다. 이렇게 말을 했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불교가 이걸 뛰어넘지 못한 거예요. 대표적으로 대승불교 같은 경우에는 성불(成佛:깨달음에 이르러 부처가 되는 것)을 하기 위해서 두 가지 요소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하고 좀 비슷한 면이 있어요. 하나는 지행, 불경 공부를 잘해서 깨달음을 얻어야 된다. 그다음에 두 번째 복행, 깨달은 바를 머리로만 알면 안 되고 살면서 실제로 실천해야 된다. 그래서 지행과 복행이라고 하는 두 가지가 이종승행, 두 종류가 결국 성공적으로 실천되게 되면 그때 가면 그야말로 해탈(解脫)과 열반(涅槃)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 이거는 현세적 복이 아니라 현세를 초탈하는 초세상적 복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불교가 이러한 목표가 퇴색되고 오직 이 땅에서에만 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치중되어버린 것에 문제가 있어요. 더 본질적인 문제는 뭐냐 이겁니다. 복을 만드는 건 누구다? 결국 자기 자신이에요. 왜? 업이니까. 내가 과거에 업을 잘 쌓아야 오늘을 잘 살 수 있고 오늘 업을 잘 싸야, 일종의 행위 구원론입니다. 이게 본질적인 문제예요. 복은 자신의 행위에 의한 당연한 결과지 감사할 것도 없어요. 왜? 내가 잘해서 내가 얻은 건데, 또 내가 잘못해서 내가 화를 입는 건데, 거기에 무슨 감사와 원망이 있겠어요! 불교도 사실은 팔자대로 사는 거예요. 그래서 복에 있어서 우연이라는 요소가 절대 없습니다. 필연이에요. 다 필연이에요. 그리고 여기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절대자가 제3자가 개입할 여지가 있다? 없다? 전혀 없어요. 불교가 그래요. 근데 불교 신자들은 복이 밖으로부터 주어진다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그 복은 하늘의 어떤 인격체, 신이라고 하는 인격체로부터 주어진다는 신앙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요즘에 경주 불국사에 가보면 발 디딜 틈이 없어요. 그리고 온갖 천장에 애들 이름을 다 수험생 이름들 전국 수험생 이름들 거기 다 적혀 있어요. 왜? 불교가 이런 현상을 일으켰는가! 현세 지향적이지 않은 종교인데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것이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변한 겁니다. 여러분 지금도 인도나 캄보디아 동남아시아 쪽 불교 세계를 가보면 이 사람들은 복을 잘 구하지 않아요. 그냥 팔자대로 사는 거예요. 한 끼만 먹어도 이 사람들은 좋아요! 행복해! 어차피 업이니까 지금만 죄 짓지 않고 잘 살다가 다음 생애에 좋은 존재로 태어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불교가 유교로 들어오면서 천(天)사상이라는 것과 결합이 됩니다. 천사상이 뭐냐 하면 자인자과(自因自果) 자업자득(自業自得) 똑같은 원리입니다. 내가 하는 대로 하는 건데 원인과 결과 사이에 신적 존재가 개입을 해요. 이게 중국이 만들어낸 아주 희한한 불교 종교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이 모든 걸 판단하고 복과 화를 결정하는 최종자는 바로 신이다. 주제신이다. 천명이다. 이렇게 말한 거예요. 중국에 들어오면서 변형이 됐고 중국에 있는 불교가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어떻게 됐겠어요? 더 탈바꿈을 했습니다. 무속 신앙과 불교 나중에 유교하고도 짬뽕이 되고요.제가 볼 때는 요즘에는 불교가 기독교를 흉내내고 있어요. 불교에서 제자 훈련한다는 소리 들어보셨습니까? 전 들어 봤어요. 제자 훈련을 해가지고 어느 강남권에 절은요 엄청나게 부흥했어요. 그런데 불교는 원래가 그런 종교가 아니라는 점이에요. 이것이 중국에서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변형되었다. 복을 위로부터 구할 수는 원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상과 짬뽕이 되면서 비나이다가 된 거예요.
여러분 유교는요? 천명과 천리를 따라요. 하늘에 이치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인간이 어떤 개인의 욕구 때문에 복을 구하면서 천리에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존재예요. 그 이치대로 살면 돼요. 가난하게 태어났던 부자로 태어났던 무슨 복을 구해 가지고 내가 인생을 바꿔보겠다! 사실은 이게 유교에 맞지 않는 원리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공부를 해보니까 유교에도 복에 대한 개념이 하나 나와요. 그게 뭐냐? 복선화음(福善禍淫)이라고 하는 개념이예요. 이게 뭐냐 하면 말 그대로 선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음란한 행위를 하면 화를 입는다는 거예요. 기독교에도 약간 비슷한 게 있어요. 남들이 볼 때 착한 일을 하는 것 같아. 그런데 두 마음이야. 자기를 위한 거예요. 이기적으로 하는 거예요. 그것을 하늘이 보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복선화음이에요. 착한 일을 하면 복받고 음란하게 하면 화를 입어요. 그런데 사실은 이게 유교하고 어울리지 않는 건데 이 개념이 왜 나왔냐! 당시에 부처에게 복을 빌면 부처가 복을 준다는 불가가 성행했고 그다음에 또 한쪽은 뭘 복을 구하냐 사람은 말이야 원래 태어날 때부터 간지에 따라 여러분 12간지 들어보셨어요? 들어보셨죠? 여러분! 간지 있어요? 없어요? 여러분한테 다 있어요. 저 닭띠란 말이야. 닭띠! 열두 띠가 있잖아요. 저 닭 띠거든요. 몇 시에 태어나셨어요? 간지에서는 이 시간도 되게 중요해요. 그래서 저희 할머니가 뭐라 그랬냐면 너는 남들이 부지런히 닭처럼 일하는 새벽에 태어나야지 복을 받는 거지! 어중간한 시간에 태어나 가지고 복을 못 받는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술가(術家:음양, 복서, 점술에 정통한 사람)에서 말하는 도교나 주역을 주장하는 술가에서 말하는 주장이에요. 이 양대 주장이 성행했을 때입니다. 유교에서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겠다. 그래서 얘기한 게 복선화음이다. 복은 인간이 구하는 게 아니라 그 인간이 선을 행하고 덕을 쌓을 때에만 하늘이 그것을 인정하여 복을 내려준다라고 하는 개념을 만들어낸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결국에는 무슨 말입니까? 복은 누가 주는 거예요? 내가 주는 거예요. 내가 하기 나름이다 그 말이에요. 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화를 누가 일으키는 거예요? 내가 일으키는 거예요. 결론은 뭐냐! 복과 화의 원인이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다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복유덕(天福有德)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늘은 덕이 있는 자를 복되게 한다 그 말이에요. 이것을 주장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 이 개념이 개인을 뛰어넘어 국가 이념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유교가 조선사회나 중국에서 성행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냐! 이게 통치 이념으로 제일 좋은 거예요. 그래서 왕이 된 사람은 하늘의 이치에 따라 천명에 순명하게 되면 오복을 받게 된다 그랬어요. 오복이 뭐냐! 5가지 복인데 장수, 재물, 건강, 기본 3종 세트에다가 덕을 갖추는 것, 나중에 잘 죽는 것, 이걸 5가지 오복이라고 봤어요. 왕이 이런 오복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이 복이 누구에게로? 백성들에게로 쫙 흘러간다고 그렇게 본 겁니다. 정리하자면 이런 겁니다. 복은 자신의 행위에 관련이 돼 있어요.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복을 받기도 하고 화를 입기도 해요. 그런데 천명에 순명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이 말은 무슨 말이냐면 하늘의 뜻에 속이지 않고 끝까지 착하게 잘 살면 그 복과 화가 어디로부터 임한다? 하늘로부터 임한다. 이게 유교인데 유교가 여기서 끝나면 괜찮은데 복선화음을 주장했는데 현실은 그래요? 안 그래요? 한번 물어보세요. 여러분! 착한 사람이 잘 살아요? 못된 사람이 잘 살아요? 그러면 여기 잘 사는 분들 다 못된 거예요. 그러나 대체로 여러분들도 현실을 보면 이상하게 저 사람 복을 받아야 되는데 저렇게 착하게 살면 복을 받아야 되는데, 저 인간은 저렇게 못되게 사는데 왜 벌을 안 받지? 이런 질문이 생기잖아요. 그게 욥기의 주제이기도 하잖아요. 유가에서도 유교 안에서도 문제가 생겼어요. 아니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음란한 행위를 하면 화를 받는다는 게 이게 하늘의 원리인데 현실을 보니까 그렇지가 않네! 이것에 대한 대답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유교에서 나온 대답이 뭐냐! 이런 대답이에요. 뭐예요? 시간이 지나면 결국 그 원리는 드러나, 공자도 지금은 핍박받고 무시당하지만 결국에 공자의 뜻이 온 세상에 펼쳐지지 않았느냐 조금만 기다려라. 그래서 여기에서 군자사상이라는 게 등장합니다. 군자는 자고로 자신이 선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 복을 받지 못하고 화를 경험한다면 이것은 일종의 시련의 훈련이니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군자일지니라. 그래서 이런 사상이 조선 선비사상과 연결이 됩니다. 조선 선비사상의 대표적인 게 뭐냐! 안빈낙도(安貧樂道)! 청빈이죠! 그냥 책 읽다가 거지 되도 그냥 사는 거예요. 도를 깨달았으니 오늘 죽어도 좋다! 근데 안 죽어! 그 다음 날, 또 살아야 돼! 그러니까 이것이 안빈낙도와 결합해서 청복(淸福)이라고 하는 사상으로 발전됩니다. 여러분 청복이 뭐예요? 앞에 뭐가 붙었어요? 깨끗할 청자가 붙었어요. 여기서 청빈론, 청부론이 나옵니다. 저는 청빈론이나 청부론이 귀하다고 생각해요. 그냥 무작정 자신의 욕망을 따라 부를 구하는 거, 저는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청빈론과 청부론도 그렇게 성경적이지는 못해요. 왜요? 앞의 이런 영향을 받았어요. 그래서 세상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그냥 주어지는 대로 사는 거예요. 여러분! 나는 자연인이다! 있죠? 여기서 나온 거예요. 여러분 되게 좋아 보이죠? 3일만 가서 살아봐요. 자연인이다! 해방이다! 굉장히 막 스스로 만족하고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렵습니다. 다 여기서 나온 사상이에요. 결국 뭐냐! 결론은 유교 역시도 복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 자체를 인식하는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진다. 이렇게 마음의 문제로 복을 환원시켜버렸어요.
어때요! 여러분! 이거 복이에요? 대체로 성도들에게 물어보면 어떤 복을 구하세요? 그러면 다 평안의 복을 구합니다. 목사님, 가난해도 괜찮아요! 저는 평안하기만 하면 돼요. 병 들었으면 어떻습니까? 평안하면 좋죠! 근데 한쪽 구석은 왠지 찝찝해. 여러분!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복은 복이 아니에요. 여러분! 성경에 명시돼 있어요. 그 복을 받으셔야 돼요.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종교와 기독교는 복에 대해서 어떻게 다른가 하는 거예요. 이거 정리하셔야 될 거 아닙니까?
첫째 뭐예요? 시작.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맞죠? 불교에서는 선인선과 악인악과라고 하여서 복의 근원이 자신의 행위에 달려 있어요. 다시 말하면 자기가 그 복을 책임져야 돼요. 심지어는 사후관계까지도 자기가 책임져야 돼요. 다 자기가 쌓아놓은 곳이에요. 여기에는 일체의 초월적인 존재 하나님을 상정(想定:어떤 정황을 가정적으로 생각하여 단정함 또는 그런 단정)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무교가 초월적인 존재를 인정하는데 자연과 정령을 신적 존재로 인정하고 있어요. 그래서 자연이 인간에게 복을 줘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지 이거 성경과 정반대죠?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께 복받아서 자연을 복되게 하는 존재지 자연으로부터 복을 받는 건 아니에요. 기독교는 그럼 뭐냐? 기독교는 유일하신 궁극적 실체이신 하나님,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스스로 존재하시는 영원토록 존재하시는 그 하나님이 상대적 실체인 피조물을 만들어냈어요. 그 피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내려주신 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복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복을 주는 분과 복을 받는 존재가 엄연히 구별이 돼 있어요. 질적 차이를 인정합니다. 여러분! 복이라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나보다 좀 뛰어난 존재가 주는 거예요. 그런데 기독교는 이 존재 자체가 비교가 안 돼요. 비교할 수 없는 창조자가 피조물인 인간과 자연계에게 내려주는 것! 그것을 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인간 자신이 복의 근원이에요. 무교는 자연이 복의 근원이에요.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일종의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불교는 신이 없어요. 그냥 자기가 신이야! 자기가 자아가 신이에요. 그냥 자기가 열반하면 다 그래서 그냥 뭐 불상도 엄청나게 많아지는 거야. 그냥 다 신이에요. 다 신! 없다고 봐야 돼요. 무교 자연적인 존재, 최고의 존재로 그냥 이렇게 질서를 잡아놓은 것일 뿐이지 실제로 복을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존재는 아니다. 기독교는 다 이것을 우상이라고 말하고 우리가 내가 너를 복되게 하겠다! 내가 너의 이름을 창대케 하겠다! 내가 너를 통하여 모든 열방을 복되게 하겠다! 하시는 그 하나님만이 복을 주시는 줄로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오늘 딱 결단하셔야 돼요. 복은 누가 준다! 내가 만들어내는 거 아니다. 그러니까 자꾸 애들을 위해서 뭐 너무 많이 하지도 마세요. 너무 책임감 갖지 마세요. 하나님이 복 주세요. 하나님께 맡기세요. 아멘이시죠?
두 번째, 기독교의 복, 시작. 복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복이 나타난다. 불교나 유교는 복이 정해졌잖아요. 그죠? 업보 사상에 의해서 자기 자신에게서 복이 나와요. 복을 주는 자가 복을 받는 자하고 똑같아요. 그 사이에 어떤 관계가 존재할 수가 없어요. 그냥 자아밖에는 없어요. 유교! 아까 복선화음, 청복, 이런 하늘의 복이 내린다고는 말을 했지만 인격적이지가 않고 하나의 원리, 이치일 뿐이에요. 아침에 일어나서 하늘님! 뭐 이렇게 교제하고 그런 게 없어요. 그냥 복만 받으면 이치로 끝나버리는 거예요. 인격적 관계가 아니에요. 무교! 약간 인격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그 신들을 그냥 이용할 뿐이에요. 기능적으로 작용할 뿐이에요. 무섭긴 하지만 교제 없어요. 협박은 받지만 복 받으면 그만이에요. 끝나는 거예요. 점치고 나면 끝나는 거예요. 어떤 인격적 관계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죠! 아브라함아 부르시죠! 아브라함에게 순종을 요구하시죠! 뿐만 아니라 나중에 아브라함 언약 이후에 시내산 언약으로 바뀌는데 아브라함 언약은 일종의 일방적 언약이에요. 이제 성경 보세요. 아브라함이 잘못해도 복 준다니까요. 또 그랬더니 그거를 또 따라가서 그냥 그래 범죄 저질러도 되겠구나. 그건 아니에요. 일단 보세요. 다 일방적 언약이에요. 부인을 팔아먹든 뭐 하든 무조건 복 받고 나와! 거짓말해도 복 받고 나와요. 일방적 언약이에요. 그런데 시내산으로 가면 이렇게 조건적 언약으로 바뀝니다. 너 이거 하면 복 받고 이거 안 하면 벌 받아요. 이건 왜 그런 거냐 하면 혼인 언약이기 때문에, 여러분! 결혼 관계로 들어가면 부부로서의 도리를 지켜야 복을 받는 거예요. 결혼 안 하면 모르지만 일단 결혼을 했으면 남편으로서 아내로서의 기본적 도리를 지켜야지요. 그래야 복을 받는 거죠. 이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신부로 부르세요. 사랑하는 관계로 부르세요. 인격적 관계로 부르세요. 그래서 목적이 복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돼 있어요. 그래서 시편 기자가 뭐라고 말했냐면 이렇게 고백하죠.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시편 73:23)
여러분 믿으십니까? 부모 잘 만난 것도 복이고 자식 잘 둔 것도 복이고 배우자 잘 만나는 것도 복이지만 가장 일차적인 복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인 줄로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이게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에요.
마지막 세 번째, 시작, 복의 내용은 물질적인 것을 넘어 영적인 것을 포함한다. 여러분 무교는 다 현실적인 거라고 그랬잖아요. 인생에만 필요한 것들이라고 그랬죠? 오직 관심이 현실에만 집중돼 있어요. 불교, 열반이나 해탈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복을 기대한다는 건 참 어렵습니다. 유교는 아까 오복도 말하고 청복도 말했지만 이것은 면면히 살펴보면 진짜 복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일종의 이것은 마음을 바꿔서 삶의 태도를 바꾸는 일종의 처세술이라고 말하는 게 맞습니다. 종교도 아니고 복을 구하는 것도 아니에요. 기독교만 복을 구할 수가 있어요. 아멘이시죠? 그럼 왜 복을 안 구하세요? 복이 구해봤자 잘 안 와요? 여러분이 기대하는 복이 아니에요? 여러분! 기독교 복이 얼마나 구체적인 줄 아십니까? 구약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복은 그냥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복이 아니에요. 이 복은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은 죽었던 자도 살아나고 그 집안이 흥왕케 되고 그리고 다산하게 되고 물질적인 복, 땅의 복, 이 모든 복합적인 복들을 다 받아 누립니다. 그리고 그 복이 나중에 영적인 차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내는 토대가 돼요. 그래서 개인적 차원으로 끝나지 않고 개인과 가정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나라 영적 차원까지 확대되는 역사가 구약에서부터 벌써 일어나고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지금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돈도 구하시고 건강도 구하시고 관계 회복도 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넘어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적인 차원으로 더 확대되고 강조됩니다. 이제는 죄사함의 축복을 받고 해방과 자유함을 누리면서 내 안에, 이 심령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심령천국의 축복을 받게 돼요. 그래서 이제는 예수가 나의 왕이 되고, 예수가 내 가정의 주인이 되시고, 나라와 민족 간의 왕이 되셔서 결국에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 복이 되고, 그분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이 나라가 복된 나라, 세상 전체가 복 받는 세상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복을 주신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종교이고, 또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랑과 순종의 관계 안에서 그 모든 복을 누리고, 물질적인 복뿐만 아니라 영적인 복까지도 누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는 진정한 복의 종교인 것입니다. 이 복을 받아 누리시는 전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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