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27. (주일예배).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 창세기 12:10~20
노량진 강남교회 (고문산 목사)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창세기 12:10~20)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내려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그냥 심심해서 내려간 거 아닙니다. 여행 삼아 간 것도 아니었고요. 오늘 본문 10절의 말씀에 보니까 가나안 땅에 심한 기근이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근이 보통의 기근이 아니라 매우 심하다. 히브리어로 카베드(כָּבֵד)라고 하는 단어를 쓰고 있어요. 마치도 무거운 돌덩어리가 사람을 짓누르듯이 그런 엄청난 기근이 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생겨나기 시작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근을 피해서 이집트로 갈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니까 아브라함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거기서 이집트 왕 바로에게 직접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받게 됐어요. 그러니까 결국 매우 심한 부자가 되어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참 희한한 이야기죠. 심한 기근 때문에 애굽 땅으로 갔는데 심한 부자가 되어서 이 땅으로 돌아왔어요. 여러분 어떠세요? 심한 부자 되고 싶지 않습니까? 아니 그냥 보통 부자, 부자라는 말 들었으면 좋겠죠. 근데 아브라함은 심한 부자가 된 겁니다. 그 결과가 13장 1절에서 2절에 나오는데, 여기 보면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창세기 13:1~2) 성경은 보통이면은 풍부하다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엄청난 부자가 된 것이죠. 원어적 의미를 다시 살려보자면 아브라함은 심한 기근(카베드 하라브)으로 이집트에 들어갔으나, 결과적으로 이집트를 나올 때는 극심한 부자(카베드 메오드)가 되었다. 그러니까 엄청난 부자가 돼서 나온 겁니다.
여러분 어때요? 이런 부자 되고 싶지 않으세요?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이거 참 엄청난 일이다, 대단한 일이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도 왠지 찝찝함을 금할 수가 없죠. 왜 그렇습니까? 성공한 이유가 우리의 상식과는 너무 맞지를 않아요. 비상식적입니다. 이집트로 들어가기 전에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에게 아주 비열하고 몰상식한 제안을 하게 되죠. 뭐라고 얘기합니까? 당신은 아름다우니 당신을 나의 아내라고 한다면 분명히 이집트 사람들이 나를 죽일 것이오. 그러니 내 동생이라고 합시다.
이런 몰상식한 남편이 어디 있어요. 물론 또 아내를 인정해 준 거 아니에요. 그죠? 당신은 들어가도 걱정 없어, 뭐 이거보다야 그죠? 여보 진짜 내가 봐도 당신 진짜 너무 뷰티풀이야. 너무 아름다워. 그러니 나 걱정돼. 나 들어가면 당신 때문에 죽을 것 같아. 그러니 이번 한 번만 내 누이라고 하고 목숨이나 연명합시다. 남자가 참 구차하지 않습니까? 이 제안이 실제로 실행됐어요. 사래는 결국 그 아리따움으로 인하여서 이집트 왕 바로의 궁까지 들어가고 나중에 바로의 고백에 의하면 바로와 동침할 뻔한 위기를 겪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비윤리적인 행동이 아브라함 자신과 가정의 위기를 몰고 오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예민하고 중요한 문제는 비윤리적인 아브라함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에요. 도무지 하나님을 이해할 길이 없어요. 아브라함이 지금 말도 안 되는 꾀를 부리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꿈에 나타나서 네 이놈 네 아내한테 그러면 안 된다! 그러지 말아라! 이렇게 혼을 내시거나 아니면 이런 끔찍한 일을 벌인 아브라함을 나중에 가서라도 따끔하게 혼을 내시거나 말이죠. 아니면 그냥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다가 그냥 죽게 만들어 버리던가, 차라리 처음부터 약속의 땅 가나안에 그 엄청난 기근이 오지 않도록 하시면 될 일 아닙니까? 도무지 하나님을 이해할 길이 없어요.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한마디도 하지 않아요. 일언반구(一言半句) 없어요. 아무런 반박이 없어요. 마치도 아브라함을 부자로 만들어 놓으셔 가지고 이집트를 탈출하도록 만드시잖아요. 내보냈다라고 하는 말은 나중에 출애굽기에 보면은 애굽 사람들이 그 노예 생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금을 다 붙여가지고 내보냈다. 출애굽의 전형적 용어입니다. 구원의 용어입니다. 이러한 내용만 놓고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죄를 그냥 못 본 척하신 정도가 아니라 마치 더 잘했다는 듯이 지금 부자로 만들어서 내보내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이런 하나님을 어떻게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이해하고 싶으세요? 원래 하나님은 그런 분이에요? 오히려 억울한 건 누구냐면 이집트 왕 바로 아닙니까? 아니 바로가 무슨 죄가 있어요? 어느 날 신하들이 막 몰려와서 왕이시어 들어보셨습니까? 진짜 대박 예쁩니다. 이집트에서 이런 아리따운 여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어떻게든지 알랑방귀 뀌려는 그 신하들이 왕을 부추겨서 사래를 데리고 온 거 아니에요? 그래가지고 어떻게 돼버렸어요? 하나님이 직접 바로에게 임했어요. 이거 엄청난 일입니다. 이 신적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고대 근동 사람들에게 최고의 두려움이에요. 그래놓고 또한 온 애굽 땅이 큰 재앙이 임하게 되었더라. 이렇게 나오죠.
여러분! 잘못한 건 누구예요? 아브라함이잖아요. 그런데 혼은 바로가 당합니다. 애굽 땅이 당합니다. 내용 전체가 우리의 상식과 정의와 도덕에 맞지를 않아요. 비윤리적인 아브라함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 문제의 초점은 이런 표현을 사용해도 될지 모르겠으나 좀 불경스러운 표현인데 비윤리적인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윤리적이지 않아서요. 도무지 도덕적이지 않고 우리의 정의관에 맞지 않아요.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그러면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복을 받는다. 어때요? 여러분! 아멘 이십니까? 이 뉘앙스에서 아멘하면 큰일 나요, 여러분! 지금 문맥이 그런 문맥이 아니잖아요. 그죠? 이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신앙이 아니잖아요.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설교 준비를 하는데 이런 하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 이런 하나님이 이해되세요? 저는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막 마음에 화도 나더라고요. 이게 뭐야? 원래 하나님 이런 분이었어! 가정을 망치고 사랑하는 아내를 내 팽개쳐도 부자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어려울 때면 자기 방법, 자기 꾀를 따라가는 사람을 결국 부자로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신가! 하는 의문이 내 안에 막 들었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와 비슷한 내용이 누가복음 15장 비유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일명 탕자의 비유지요? 어떤 부자에게 두 아들이 있었어요. 둘째 아들이 멀쩡히 살아있는 아버지한테 유산을 청구합니다. 당시 문화에서 지금도 마찬가지고 아니 멀쩡히 살아있는 건강한 아버지한테 유산을 달라고 하는 말은 무슨 말이에요? 빨리 죽으라는 말이나 똑같은 거예요. 그 아버지한테 유산을 그 목숨 같은 살림살이를 받아내서 며칠 후에 그것을 다 싸들고 야반도주 합니다. 어디로 갔어요? 창녀가 있는 곳으로 유흥가로 가서 그냥 재투자한 것도 아니에요. 사업 재투자한 것도 아니에요. 그냥 흥청망청 쓰고 완전히 성경에 보면 허랑방탕하여 이렇게 나와요. 거지가 되어서 돌아오지요. 아버지가 어떻게 합니까? 마을 어귀에 미리 벌써 매일 나갔던 거야. 사실은, 나가는 날부터 계속 거기서 기다렸던 거예요. 저 멀리서 아들 둘째 그 모습이 보이자 그냥 기다리지 못하고 좇아가서 그 냄새 나는 그 아들을 그냥 품어버리고 입맞춤을 하고 집에 가자마자 종들에게 빨리 옷 내와라. 옷을 입히고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우고 맨발에 신발을 신기고 어떻게 했어요? 오늘은 잔치를 베풀리라. 송아지를 잡아라. 어린 송아지 잡아서 온 동네 사람 다 모아서 잔치를 벌이자.
여러분! 우리가 이 이야기를 그냥 습관적으로 읽게 되면, 아무런 의심 없이 읽게 되면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무조건적 사랑! 이 정도의 이야기로 이해할 수가 있겠어요.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좀 더 냉정하게 윤리학적 관점에서 신앙과 신학의 문제로 들어가 보면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왜 그렇죠? 앞으로 우리는 바르게 살 필요가 없어요. 그렇잖아요. 뭐 하러 착하게 살아요. 경건하게 살 필요도 없어요. 그냥 내 마음대로 살다가 망해도 결국에 언젠가는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기 때문이죠. 지금 솔직히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속에 그런 심리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부끄러운 구원이라도 받아야겠다. 아니, 아예 처음부터 부끄러운 구원을 작정하고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만 그렇게 사나! 사람들 다 그렇게 살던데! 영화도 보니까 그렇던데! 마지막에 내가 이 세상에서 마음대로 돈도 벌고 내 마음대로 살다가 인생 마지막 때 두 손 딱 들고 오면 되는 거죠. 그런 심리가 우리 가운데 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은 둘째 아들처럼 착하게 살 필요가 없는 거예요. 문제는 비윤리적인 아들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그 비윤리적인 아들 뒤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비윤리적인 아버지가 본질적으로 있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더 본질적인 문제예요. 어차피 사람은 다 비윤리적이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나 오늘 둘째 아들이나 다 똑같은 거 아니에요? 윤리적인 사람 어디 있어요? 똑바로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거는 이해 한단 말이죠. 그러면 그 아버지는 뭐냐는 거예요? 예수님의 오늘 비유에 의하면 우리는 둘째 아들처럼 모두 세상에 나가 마음대로 살다가 쫄딱 망해도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어쩌면 쫄딱 망해야 더 큰 은혜가 임하니까 망해 버려야 돼. 이상한 심리를 가질 수가 있지 않겠어요? 어쨌거나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환영해 주시고 다시 아들 삼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에요. 이게 복음입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비윤리적인 삶에 대한 신학적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거예요.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비윤리적으로 사는 거예요. 특히 기독교인들의 값싼 복음, 아주 값싼 복음, 싸구려 복음, 비유해서 이러한 문제를 지적한 사람, 이러한 상황을 바로 잡으려고 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첫째 아들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딴생각 안 하고 그냥 아버지 집에서 열심히 땀 흘려 일했던 요 아들 있지 않습니까? 요 아들만 정신이 똑바른 사람이야. 아버지 정신 나갔고요. 둘째 아들 말할 것도 없고 그 잔치에 참여한 모든 동네 사람들 다 정신 나간 사람들이에요. 유일하게 냉정하게 이 상황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지적했던 사람이 누구냐? 이게 누구예요? 첫째 아들이에요. 아버지 지금 뭐 하십니까? 아버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당신의 그 목숨값 살림살이를 가져가서 창녀와 함께 나눈 이 동생을 위하여 원문에는 뭐라고 나와 있는가 하면 이 아들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이 자식 놈 그런 뜻이에요. 이 자식을 위해 아버지 잔치를 베푸신다고요? 정신 있으십니까? 아버지? 도대체 뭐예요? 아버지는 도덕도 없고 윤리도 없고 정의감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이렇게 큰아들이 말하고 있는 거죠. 나한테는 하나도 안 해주고, 나를 위해서는 염소 한 마리도 안 잡으시더니 친구들하고 잔치도 안 벌이시더니 아니 이런 배은망덕하고 허랑방탕한 이 아들을 위해서 이 엄청난 잔치를 벌이신다고요? 비윤리적인 아브라함 또 오늘 비윤리적인 이 둘째 아들 뒤에 문제의 본질은 비윤리적인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이해할 수 있어요. 그죠? 심한 기근이 있었잖아요. 가장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판단을 결정을 내렸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나님께서 이끌어가신 곳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약속의 땅이었잖아요. 자기가 가고 싶어서 갔던 것이 아니었죠. 하필이면 하나님은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그 비옥한 땅과 당시의 최강대국인 애굽 이집트를 사이에 둔 그 가나안 땅을 지목하셨어요. 하나님이 정하신 땅이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약속하셔서 정하신 땅이라서 말씀 따라 그곳으로 갔는데 거기에 하필이면 기근이 난 거예요. 약속의 땅에 기근이 일어났어요. 이 상황을 아브라함으로서 가장으로서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까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여기 앉아 계신 가장분들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런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부르심을 받고 따라왔는데 심한 기근으로 도무지 살 수가 없어요. 더욱이 이제 막 하나님의 신앙으로 입문한 아브라함의 입장입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야 하는지 더더욱 알 수가 없어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지만 이 당시에 무슨 믿음이 있었겠어요? 우리는 메소포타미아의 왕도 지배하시고 이집트의 왕까지도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광대하심을 경험하거나 배웠지만, 아브라함은 이제 초자란 말이에요. 민린이예요. 믿음의 어린이 민린이. 그렇잖아요! 험하고 거친 그 이방인의 여정 가운 가운데서 아브라함이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의 꾀와 능력으로 생존 전략을 세우는 것밖에는 없었어요. 이것은 바름과 바르지 않음, 혹은 옳음과 틀림, 윤리와 도덕과 같은 의의 문제가 절대 아니에요. 이거는 사느냐 죽느냐의 생존의 문제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말씀을 따라 자신의 오랫동안 살았던 삶의 근거지를 떠나 아브라함으로서는 이 기근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거예요. 왜요? 하나님이 침묵하셨거든요. 이 하나님의 부재 상황에 대해서 신앙인들은 이해할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과연 계시긴 한 건가? 왜 하나님은 계시다고 하는데 왜 아무 말씀도 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는가? 그것에 대한 섭섭함과 그 분노 그리고 내가 영원토록 이 기근 안에서 나와 내 가족들이 완전히 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 공포감 그 좌절감이 일시적으로 압도해 들어오고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이해할 수 있어요.
아브라함에 대한 이해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와 정확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이후에 고난이 없습니까? 아무런 시련이 없던가요? 희한하게도 하나님을 믿은 이후에 더 크나큰 고난이 찾아옵니다. 예상하지도 않았던 시험이 우리에게 찾아오는데 시험과 고난 그 자체는 어쩌면 문제가 아니에요. 그 시험과 고난 뒤에 도대체 하나님의 의도가 뭐냐 하는 거예요. 하나님 꼭 이런 방식으로 해야 하는 거죠! 하나님은 도대체 무슨 계획을 갖고 계시는가! 그 하나님 존재에 대한 질문이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 앞에서 너는 복이다! 너는 복의 근원이다! 내가 너를 통하여 온 만민을 구원받게 하시겠다고 약속해놓고 이제 심한 기근을 허용하시고 그 심한 기근을 피하는 방법이라고 하는 그 비열한 말도 안 되는 그 방법으로 목숨을 연명하게 하시는 이게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에요. 도무지 하나님을 이해하기가 참 어려워요. 그래서 아예 중세 어떤 신학자는 “우리는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을 알 뿐이다”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겠어요?
심한 기근 속에 있었던 아브라함은 자신의 꾀로 살아남으려고 했지만 결국 그 아브라함의 꾀가 가정을 위기로 몰아놓고 말았어요. 가정을 어떻게든지 가정을 좀 살려보려고 하다가 결국 가정의 위기로 몰고 가버린 거예요. 여러분 우리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가장들도 마찬가지죠. 다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심지어는 접대하고 사람들 밑에서 알랑방귀 뀌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뭡니까? 가족들 살리려고! 가족들 먹여 살리려고!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 때문에 내가 합리화했던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 나는 내 가족을 살리려고 그런 거 한 겁니다라고 하는 그 명분이 결국에는 가정 자체를 위기로 몰고 가는 사례들이 굉장히 많잖아요. 가난 때문에 가정은 망하지 않아요. 병들었다고 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이유가 아니에요. 내 꾀 때문에 그런 내 꾀 때문에 가정을 살리려다가 가정에 위기가 와요.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것은 단순히 아브라함 가정의 위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을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걸로 축소 시켜선 안 돼요. 지금 신앙생활이 너무 개인적이 되다 보니까 어떻게 좇아가야 될지를 모르겠어요. 신앙 상담을 해보면 도무지 성경적인 믿음인지 이게 말씀에서 온 믿음인지 기도를 하시고 생겨난 믿음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어요. 개인의 심리예요. 너무 힘들어요. 그리고 자신의 모든 일을 가정의 위기로만 축소 시켜서도 절대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가 않아요.
오늘 이 위기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바로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이끄심 그리고 그 아브라함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틀어질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비상사태가 일어나고 새로운 경륜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방식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시려는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 아브라함에 의하여 지금 공격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약속받고 순종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형성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약속을 받은 사람에 의하여 공격당한다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 의해서 무너지지 않아요. 교회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 의하여 무너지지 않아요. 교회는 교인들 때문에 망하는 거예요. 교회는 목사나 장로들 때문에 망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 받은 사람들이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자기 꾀를 부리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공격당하고 위기를 당한다는 사실을 아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아브라함을 구원하셔야만 되는 이유가 있다면, 그의 비열함과 그의 몰지각한 그러한 삶에도 불구하고 그를 구원해야만 하는 이유, 그의 가정을 살려내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자신과의 약속, 하나님 자신에 대한 미쁘심, 하나님의 신실하심(God’s own faithfulness) 밖에는 없는 것이에요. 여러분이 이걸 믿으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기도도 그렇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이 있지요! 하나님 나라가 있지요! 그 관점에서 이 기도 드립니다. 들어주시옵소서.
아브라함은 한없이 연약하고 흔들리는 존재였습니다. 아직 하나님을 완전히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도 비열하고 나약한 존재예요. 오늘 이 사건은 그가 역시나 언약의 조건에 아무런 합당한 사람이 아니다. 역시 조건 부적합, 능력 부족함, 이것이 다시 한번 입증되는 사건이라고 볼 수가 있는 거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참으셨어요. 하나님 당신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을 구해내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 약속을 이루어 가시고 있는 중이죠. 진행 중이죠. 내가 약속했잖아. 그럼 내가 이루는 거야. 아브라함을 살리신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고, 우리를 참아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 때문이에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참아 주시는 줄 아세요? 뭐가 이뻐서 참아주시는 거예요? 뭐가 예뻐서! 무슨 가능성이 있길래 계속 참아주시는 거죠? 왜 살려놓으시는 거죠? 이름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이유로 끝까지 이루어 가시는 거죠. 인간은 그 어떠한 조건도 허락되지 않는 영역입니다. 하나님이 다 아세요. 그렇기 때문에 시인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3)
누구의 이름을 위하여요? 자기 이름이 누구 이름이에요? 희한한 말 아닙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나는 불의하지만 나는 아무런 자격도 없고 능력은 없고 때만 되면 다 배신할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인간이지만 하나님!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옵소서.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자 참아주심의 근거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은혜예요. 그 약속 때문에 아브라함을 참아주셨고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오늘날 우리를 또 참아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야만 하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말씀이 또한 모든 기도의 근거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속성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다. 따라서 해볼까요?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믿으십니까? 아멘.
그러면 말씀을 근거로 기도하셔야죠? 맞습니까? 요즘에 기도하십니까? 안 하십니까? 기도 안 하는 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왜 기도를 안 하십니까? 그랬더니 어떤 분이 안 해봐서요. 기도를 왜 안 하시냐면! 물론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 모르시겠죠. 그러나 기도를 하다가도 왜 금세 포기하느냐! 기도할 거리가 없어요. 나중에 한 번 기도해 보세요. 내가 원하는 거 내가 바라는 것 한번 새벽에 나와서 철야 시간에 나와서 한번 기도해 보세요. 며칠만 기도하면 바닥납니다. 왜? 이게 나중에 지겨워져! 그래서 사람들이 기도를 안 하는 거예요.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셔야죠. 뭘 붙잡고 기도하셔야 된다고요? 말씀 붙잡고! 하나님 약속하셨잖아요. 하나님이 성경에 약속하셨잖아요. 이 말씀대로 나에게도 이루어지게 도와주세요. 이 말씀이 내 말씀이 되게 해주세요. 성령 하나님! 이 말씀이 내 말씀이라고 믿어지게 해주세요. 이 말씀을 따라 상상력을 가지고 살아가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언제까지? 마음에 평안으로 응답이 내려올 때까지! 성경에 약속의 말씀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 66권의 말씀 속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많이 담겨져 있습니까? 우리 강남교회 3~4천 명의 성도들이 이 말씀 한 구절만 붙잡고 기도하게 된다면 그 말씀이 내 말씀이 되는 역사가 있다면 이 노량진 땅은 반드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약속이 은혜예요. 말씀이 은혜예요. 그게 참아주심의 유일한 근거예요.
오늘 창세기 12장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모습이 얼마나 비열하고 비참한 모습입니까? 아직 제대로 믿음 세계에 들어오지 못한 믿음의 초보자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15장만 가봐도 아들을 주시겠다 하는 그 약속을 굳게 믿고 그 믿음을 의롭다 여기셨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어요.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자신이나 아내나 도무지 아이를 얻을 수 없는 불가능한 상태에서 아들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여러분! 어떻게 이렇게 변화되었을까요? 오늘의 사건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창세기 22장으로 가보면 약속으로 받은 그 유일한 약속의 후손 그 자손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사랑과 신뢰감을 가지고 그는 아들 이삭까지도 바침으로써 결국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반열에 오르게 되고, 나중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 가운데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드러내는 명확한 주인공이 되게 되죠. 단번에 변했을까요? 아니죠. 어떻게 오늘 이집트 왕 앞에서 벌벌 떨며 목숨을 연명하고자 아내까지도 팔아먹으려고 했던 아브라함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다. 누가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죠?
하나님은 비윤리적인 아브라함을 옹호하시는 비윤리적 하나님이 절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그 무명한 자를 불러내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지금 계속 참고 만들어 가시는 중이다. 아브라함 그렇게 하면 안 돼. 아브라함 안 되는 거야. 다음엔 그렇게 하지 마. 이번만은 내가 봐준다. 이거예요. 나중에 성경을 읽어보면 잘 이렇게 안 봐주세요. 아브라함은 깨달았겠죠. 물질은 누가 주신다? 여러분은 언제 이것을 깨달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은 물질은 내가 버는 거지, 물질은 내가 벌어서 나눠주는 거지라는 이 사고방식에서 언제 여러분 벗어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거구나. 아브라함이 여기서 깨달은 거죠. 메소포타미아 땅이 아니라 우르나 하란이 아니라 이 애굽 땅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이 바로 복의 땅이구나 하는 것을 오늘의 이 사건을 통해 그는 깨달았던 거죠.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왕도 다스리시는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구나. 이런 상황에서조차도 하나님은 약속을 지켜내시는 분이구나 하는 걸 깨닫고 지금 점점 믿음의 사람으로 변해 가고 있는 중이죠.
신앙생활에 양극단이 있습니다. 하나는 난 더 이상 변할 필요가 없다. 나는 이제 완전한 사람이고 나는 완전한 의인이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다라고 하는 그런 분이 계시고, 또 한 부류는 난 절대 할 수 없다. 나 같은 게 뭘 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다 사탄이 주는 생각들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 모습 이대로를 그대로 사랑하세요. 그죠?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사랑해요. 그러나, 하나님의 바람이 있다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변해가기를 원하셔요. 맞습니까? 우리 자녀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잖아요. 아니 자식이 있으면 그냥 보기만 해도 배부르고 좋잖아요. 들어오기만 해도 살아서 돌아오면 그러나 성장하지 않고 자라지 않고 맨날 그 자리에 있다면 부모 가슴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 말씀 때문에 그 하나님 말씀 안에 우리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여러분 꼭 믿으시고 하나님 기뻐 받으시는 사람들로 점점 더 익어가시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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