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03. (주일설교). 눈을 들어. 창세기 13:1~18
노량진 강남교회 (고문산 목사)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창세기 13:1~18)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든 민족을 복되게 하시겠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 사람을 통하여 세상 전체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시겠다 하는 것이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입니다. 이 계획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면 12장 2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여기다 여러분의 이름 넣으시면 되는 거예요. 그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보기에는 그 약속은 오래가지 못할 것처럼 보였던 것 같아요.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약속의 땅에 기근이 들자마자 아브라함은 그 땅을 벗어나서 애굽 땅으로 들어가게 되고, 자신의 꾀로 인해서 하마터면 아내 사라를 바로 왕에게 빼앗기게 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죠. 이 과정에서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무엇입니까? 정말 이 사람이 믿음의 조상일까? 우리가 부러워하는 것처럼 믿음의 대단한 선배일까? 그렇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도 도덕성이나 윤리성에도 문제가 있고 사람됨의 수준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형편이 없었다라고 하는 것이 입증되었던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그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키신다고 하시는 그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을 애굽으로부터 구출해 내셨던 거죠. 구출만 하셨습니까? 떼부자로 만드셨어요. 극심한 그 기근을 피하여 들어갔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극심한 부자가 되게 하셔서 나오도록 하셨다는 거예요. 아브라함 때문이 아니라 언약의 말씀을 하신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부르심을 받고 이끌림을 받은 이후에 아브라함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리와 책임하에 놓이게 됐어요.
어쩔 수가 없어요. 자신이 살아온 그 땅을 떠나야 했습니다. 두 번이나 떠났고요. 이제 낯선 땅에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부까지 경험했어요. 그러니까 이젠 전적으로 모든 인생이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겁니다. 관건은 이 사실을 아브라함이 과연 믿을 수 있느냐는 거예요.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잖아요. 얼마든지 내가 실수했지만 우연히 그렇게 됐나 보다 할 수 있잖아요. 우리 신앙인들도 다 하나님의 필연이라고 말은 하지만 우연으로 넘어가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관건은 과연 이 사실을 아브라함이 믿느냐! 아니면 믿지 않느냐! 아브라함의 믿음에 이제 문제가 남아 있어요. 오늘 본문은 그것과 연관된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 인물에 대한 성경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유의할 점이 있어요. 성경에는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이삭이든 야곱이든 다윗이든 여러 신앙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인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초점을 인물 자체에 두면 안 됩니다. 그 임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떠한 계획을 이루시는가, 어떠한 경륜을 이루어 가시는가에 집중할 수 있어야 돼요. 그 사람됨이 어떤가? 윤리적으로 훌륭한가? 믿음이 좋은가? 나쁜가? 이런 것을 따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어떤 구속의 경륜을 이루어 가시는가에 집중할 수 있어야 돼요. 그래야 성경의 통일성을 발견할 수 있어요. 하나님은 사람과 관련 없이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면면히 이루어가시는구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마다 상황마다 그 인간의 한계로 모든 상황들이 뒤죽박죽이 되기 때문에 성경의 통일성을 발견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들도 여러분 중심으로 신앙생활하지 마시고 여러분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하며 신앙생활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일꾼들 목자들과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일꾼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없을 때는 싸우지도 않았는데 이제 다들 부자가 되니까 가축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근데 그 가축을 물 먹이고 풀 먹일 땅은 한정돼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함께 동거할 수가 없어요. 공존할 수가 없어요. 만날 때마다 싸우는 거예요. 여기 내가 먼저 왔다. 나는 원래 아까 왔었는데 잠깐 자리 비운 거다. 하여간 싸우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 문제가 터지게 됐어요. 이 문제를 과연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결하느냐! 여러분!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지난주만 해도 어떤 인간이냐 하면 비열한 인간, 자기의 목숨을 아내에게 맡길 정도로 아주 연약하고 초라한 가장이었어요. 하나님보다도 바로 왕, 왕을 더 두려워했던 정말 믿음의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하찮은 그러한 사람이었는데 오늘 이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거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창세기 13:8~9) 완전히 대인배로 변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을 과연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롯에 대해서 평소에 이와 같은 어떤 아주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는가? 그 애정 때문에 조카 롯에게 모든 것을 양보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가 된 것인가?
여러분! 그렇게 보기에는 이 사안이 너무나 커요. 왜요? 자칫 잘못하면 롯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의 땅을 차지할 수도 있는 상황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롯에게 모든 것을 양보해버립니다. 인격의 성숙이 일어난 것인가? 안 본 사이에 변화가 된 것인가? 아니면 갑자기 부자가 돼서 여유가 생긴 건가요? 도대체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됩니까? 조카에 대한 애정도 아니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다라고 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제공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게 됨으로써 자신의 삶에 특별히 가까운 가족과 친족과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 아주 뚜렷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이죠. 애굽의 사건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깨달은 것은 아! 하나님은 자신이 계획한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맞습니까? 내가 실수해도 내가 꾀를 부려서 하나님의 나라에 위기 상황을 몰고 가도 하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 내신다. 아브라함이 믿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내가 어느 쪽으로 선택해야 유리할까! 이런 상황에서 저 사람에게 이걸 주고 내가 이걸 가져가는 게 유리할까! 이런 계산 자체를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는 거죠. 왜요? 인간의 계산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라고 하는 사실을 아브라함은 깨닫기 시작한 겁니다. 인간의 계산이 이 땅에서의 삶의 어떤 투쟁이나 몸부림이나 심지어는 부의 축적이라고 하는 것이 아무 부질이 없고 이 모든 것도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이 드디어 깨닫게 된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긴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기꺼이 선택권을 양보한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우리한테 자랑하고 계시는구나! 봤지? 너희들 아브라함 변하는 거 봤지! 내 사랑이, 내 기다림이, 내 기대가, 이 아브라함에게 통하는 거 봤지? 너희들 봤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자랑스러워하시는 것 같아요. 하나님이 이걸 얼마나 보고 싶어 하시는지 아십니까? 이 땅속에서 이 땅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크리스천들에게 너 봤지? 저 사람 봤지? 작년에만 해도 이런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지금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봐봐. 교회 안에서 말하는 게 아니야. 일터에서 가정에서 그가 지금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한번 봐봐. 변했잖아. 지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자랑하고 계시는 거예요. 왜요? 자신의 전략이 통했다는 것을 기뻐하시는 거죠. 난 말이야. 지난주에 고 목사한테 비윤리적 하나님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어. 비도덕적인 하나님이라는 얘기까지 들었어. 이해가 안 된다고 하더구만. 그런데 봤지? 아브라함이 변하고 있잖아! 뭐가 죄인을 변화시킵니까? 뭐가 과연 인간을 변화시킵니까? 인간이 스스로 변화될 수 있습니까? 올 한 해가 다 지나가는 날 동안에 지나온 시간 들을 가슴 치며 후회하고 내년부터는 절대로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한다고 그 사람 변합니까? 절대 변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그 기다리심! 그 하나님의 사랑을 온몸에 쏟아부음 받는 것처럼 경험하지 않으면 변화되지 않아요. 아브라함은 지금 자기도 모르게 변화되어 가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랑할 만한 분들로 변화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언제까지 응석만 부리고 언제까지 애기처럼 사실 겁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남들 앞에 다 자랑할 수 있는 모든 강남교회 성도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선택권을 가진 롯이 10절에 보니까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요단 지역이라고 하는 말은 요단 평원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성지순례 갔다 오신 분은 알겠지만 가이드 분들이 잘 보이는 곳에 가서 요단 평원을 한번 보여줍니다. 진짜 멋있어요. 거기는 광야나 사막은 아닌 것 같아요. 푸른 초장이 쫙 펼쳐져 있고 양들도 있고 또 어떤 곳에서는 물이 막 콸콸 쏟아집니다. 그런 곳을 지금 보고 있는 거예요. 롯이 본 땅이 어떤 땅이었느냐? 10절 끝에 보니까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무슨 말입니까? 풍요로웠다는 뜻이에요. 아름다웠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누가 보더라도 이 땅은 선택의 여지가 있어요? 없어요? 고를 필요가 없어요. 그냥 보면 갖게 되어 있는 그런 땅이다. 그 말입니다. 롯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근거로 즉 그 눈을 믿고 11절에 가보니까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이렇게 나옵니다. 보고 선택했습니다. 누구라도 당연하죠. 그러나, 여러분! 여기서 보았다, 그리고 선택했다 라고 하는 이 표현은 창세기 말씀에서는 매우 불길한 징조를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을 보고(라아) 선택(바하르)하거나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좋음을 보고 취했고요. 나중에 창세기 6장에 가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취하였다 아내로 취하였다 이렇게 나오고 있잖아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은 물리적인 세계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을 선택한 인간들은 항상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의 길을 걸어가곤 했어요. 이게 성경의 증언입니다. 눈이 문제인데 타락한 인간의 눈은 하나님의 눈과는 다르기 때문이죠. 그리고 롯 역시도 그 눈으로 선택한 이 판단으로 인해서 이제 약속의 땅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의도한 건 아니에요. 롯은 아브라함에게 붙어 있어야 복을 받아요. 맞죠?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아무리 고생을 하고 동거하기 어려워도 롯은 아브라함에게 붙어 가야만 복을 받게 돼 있는 존재예요. 그런데 의도하지 않게 이제 아브라함의 곁을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롯은 불행하게도 아브라함의 곁을 떠나게 됩니다. 다시 한번 12장 7절의 말씀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창세기 12:7)
뭐라고 그랬죠? 네 자손에게, 내 씨앗에게 주리라 그 말이에요. 다른 씨앗이 아니라 친족일지라도 그걸 통하여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네 몸에서 날 너의 씨앗에게 복을 주리라 하시는 이 말씀이 다시 한번 이 사건을 통해 확증되게 됩니다. 원죄의 재료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왜 먹음직도 했는지, 왜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고 성경 저자가 증언하고 있는지 우리가 한번 깊이 생각해 봐야 돼요. 나중에 사도 베드로가 인간의 모든 죄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말했는데 왜 그렇게 말했는지 우리는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눈은 바로 욕망의 통로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보려고 보는 건데 왜 보냐면 마음이 그래서 그런 거예요. 자꾸 마음이 그쪽으로 가요. 그러니까 눈은 항상 내 마음이 있는 곳으로 가게 돼 있어요. 계속 그것만 봐요. 그런데 사람들은 착각을 하죠. 내 눈에 보였다고 말하는 거예요. 자기 마음이 그리로 가고 있는데 그래서 성경은 눈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보이는 것을 그대로 보고 그것을 근거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가 되는 멸망의 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뭘 어떻게 봐야 되나? 또 어떻게 판단하고 선택해야만 하는가? 그것이 이제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그 해법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눈을 들어 땅을 바라보았어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스스로 눈을 들어본 게 아니죠.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눈을 들어라, 그리고 바라봐라, 이렇게 명령하셨어요. 그러니까 명령하신 그 말씀에 순종하여 본 겁니다. 아브라함의 눈을 사실은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거예요. 여러분! 조카 롯이 바라보는 눈이나 아브라함이 바라보는 눈이나 육체적인 눈은 똑같아요. 그러나 보게 하시는 게 달라요. 그리고 그 보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을 다시 한번 확증해 주십니다. 14절 이하에 보면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이렇게 나오죠.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창세기 13:14)
눈을 들어라. 너도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 남쪽 그리고 동쪽 서쪽을 바라보라! 이렇게 명령을 하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명령의 말씀을 듣고 순종을 한 거예요. 그때 다시 한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을 확정하십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창세기 13:15~17)
여러분! 이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말씀과 지금 땅을 보여주시면서 하시는 이 말씀은 동일한 말씀이지만 아브라함이 이것을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차원이 달라지는 말씀이 되는 거예요. 사람의 눈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눈이 되는 거죠. 인간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은 항상 애굽 땅이나 에덴동산같이 풍요를 보고 풍요를 선택하고 취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눈은 말씀하시고 명령하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선택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여러분! 이거 땅투기가 아니에요. 롯에게 양보했기 때문에 그냥 막연한 땅을 보상해 주는 게 아니고 그 땅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을 그 약속을 아브라함은 다시 한번 이 상황에서 선택하게 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육신의 눈이요? 아니요. 영의 눈이 결과는 어떻습니까? 극단적으로 갈립니다. 인간의 눈이라고 하는 것은 요단 동편까지만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지만 하나님의 눈은요? 동서남북 다 볼 수 있어요. 왜요? 하나님의 눈이니까 요따만큼만 보는 게 아니에요. 이건 인간의 눈이죠. 당장의 이익만 봅니다. 인간의 눈이죠. 그러나 하늘의 관점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이제 아브라함은 동서남북 어디도 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실 땅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눈으로 판단한 인간의 선택은 결국 멸망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본 약속은 생명이에요. 아브라함의 눈을 열어주신 하나님께서 이제 아브라함에게 약속과 생명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12장까지 보면 아브라함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사람이에요. 왜요?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죠. 여러분의 삶을 무엇이 그렇게 두렵도록 만드십니까? 뭐가 그렇게 슬프고 뭐가 그렇게 두려우세요? 하나님입니까? 돈입니까?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예요. 그런데 오늘 13장에 와보면 단 한 장의 변화인데 아브라함은 인간의 관계 안에서 관용과 너그러움을 보여주고 있어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가장 두렵게 만들어요. 그죠? 특히 자식들 사랑하니까 어떻게 될 것 같고 얼마나 두려운지 몰라요. 가장들은 가족들이 제일 두렵습니다. 사실 그래서 세상에서 그냥 빡빡거리며 사는 거예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변화됐어요. 왜요?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진짜 믿음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가능했는가? 하나님의 기다려 주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때문이었고, 자신이 말씀하신 바는 하나님 자신이 이루어 가신다는 그 신실하심 때문에 오늘 아브라함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죠.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 다 버리고 떠났어요. 풍요의 땅을 버리고 떠났어요.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현실의 조건 다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얻은 것이라고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무엇이든지 양보하거나 포기할 수가 있고, 또한 그 어떠한 것도 두렵지 않게 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왜요? 하나님의 약속이 변하지 않는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게 지켜지는구나! 하는 것을 그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점점 더 풍요롭게 배워가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변화된 눈을 가진 사람의 결과가 뭐냐? 자신의 능력으로서의 선택하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땅이 주어지게 됩니다. 어떻다고요? 이 눈꺼풀이 벗겨지면 내가 선택하고 내가 노력하고 그런 거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을 받게 돼요. 약속과 함께 주어지는 부라고 하는 거 이거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지는데 여러분! 이걸 받으셔야 돼요. 우리 가장들 잘 들으세요. 여러분들이 고생하는 건 제가 잘 압니다. 저도 가장이니까요. 근데 여러분들이 삶의 방식을 안 바꾸면 가정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노력을 안 해서가 아니에요. 정말로 관점을 바꾸셔야 돼요. 여러분! 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에 할머니하고 어머니가 기도하셔서 지금 이 자리에 있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의 세계를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방식으로 바꾸세요. 나는 내가 노력해서 내가 악착같이 선택하고 취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선물로서의 복을 받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시길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뭐라고 표현했냐면 갈라디아서 3장 18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갈라디아서 3:18)
은혜로라고 하는 말을 가로친 것은 개혁 성경에는 안 나와요. 근데 은혜로 주신 게 맞아요. 원문상 카리스 은혜 선물 공짜 속량으로 주셨다. 만약에 내가 유업으로 받은 것이 상속받은 것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무슨 말이에요? 내가 노력해서 내가 애써서 공로를 세운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아니란 말이에요. 내가 한 거지.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뭘 주셨다? 약속을 통하여 은혜로 주신 것이다. 공짜로 주신 것이다. 노동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이 땅의 노동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상속자인 줄로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죽어라고 일만 하다가 그 노동의 대가를 받고 그 땀의 대가를 받고 그냥 남들보다 조금 더 잘 살다 가는 인생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삶의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롯은 스스로 눈을 들어 땅을 바라보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눈을 들어보라고 하셨어요. 롯의 눈은 육신의 눈이고 아브라함의 눈은 영의 눈입니다. 이곳은 당장 눈에 보이는 풍요를 찾아가다가 결국에는 멸망의 도시인 소돔을 향해 갈 수밖에 없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눈을 들어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를 축복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15절을 다시 보면 “눈을 들어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창세기 13:14~16) 다 주리라고 그랬어요. 네 자손을 티끌보다 많게 해주리라. 차라리 먼지를 세는 게 낫지. 너희 자손들은 못 셀 거야. “일어나 그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창세기 13:17) 그야말로 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쏟아지고 있습니다. 쏟아지는 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이게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아브라함! 나를 신뢰하기 시작했어. 그거 쉬운 일 아닌데! 그걸 조카 롯에게 양보했어! 그거 분명히 나를 신뢰하는 마음이지! 너는 어떤 것을 선택해도 내가 복 주는 것을 믿는 거지! 그러니까 그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하늘의 복을 쏟아부어 주시도록 약속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하늘이 보여주시는 엄청난 복 쏟아지는 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하나님의 나라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을 믿기 시작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복을 쏟아부어 주세요. 이 땅에서의 생존과 풍요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절대 아니에요. 특별히 하나님 믿는 백성은 하나님께서 복을 선물로 내려주셔야만 합니다. 은혜의 신앙, 선물의 신앙을 회복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비밀을 말씀하셨는데 우리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분명히 말씀하셨죠? 하나님 나라 백성의 복 받는 길이 뭐냐? 첫째 영의 눈이 열리고 그래서 영적인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고 그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지식적으로만 듣지 않고 생존하시는 하나님!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영원히 인도하시는 그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될 때에 그다음에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해요? 이 땅에 필요한 모든 것들은 다 쏟아부어 주실 줄로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브라함 역시도 하나님을 경험했어요. 하나님 나라 방식을 맛보았기 때문에 그가 이제 하는 일은 뭐냐? 모든 이야기의 결론은 다 예배드리는 거예요.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 앞에 예배합니다. 오늘 18절에도 보면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창세기 13:18) 어떻게 했어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처음 있는 일입니까? 아니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처음 들어왔을 때에 12장 7절에 보면 거기서도 단을 쌓아요. 지난번에 애굽에서 구출를 받고 나와서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 단을 쌓고 예배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오늘도 롯과 헤어진 다음에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립니다. 왜 그렇죠? 아브라함이 이제 깨닫기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예배드리라는 말 아직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브라함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게 예배밖에 없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을 깨달으셔야 됩니다. 예배가 나를 좀 편안하게 하고 나를 부자 되게 만들고 하나님께 벌 받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예배는 다 무너져요. 왜? 내가 필요하지 않으면 안 하니까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 됩니까? 예배드릴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만드셔야 되는 거죠.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거구나!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겠구나! 오늘도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기억하는 가장이 돼야겠구나. 돈 계산할 것이 아니라 내일 나가서 얼마나 열심히 일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가장인 나에게 이 가정을 맡겨주신 가장인 나에게 어떤 말씀을 주셨는가를 기억하는 시간이 바로 예배 시간입니다. 하나님! 이 말씀 나에게 주셨죠? 사장님들도 잘 들으세요. 기업이나 가게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맡기신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셔야 돼요. 예배 현장 속에서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구나! 이 말씀을 하나님이 나의 삶의 현장에서 가정에서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감사하고 찬양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시간이 예배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망해도 그리고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해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올 수밖에 없어요. 왜? 하나님의 말씀! 그 언약의 말씀을 다시 한번 들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내가 할 유일한 일이구나. 그게 복 받는 일이구나. 그게 내가 복 되는 일이고 내가 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일이구나.
여러분! 인생 앞에 화와 복이 있어요. 다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의 기다리심, 그 하나님의 사랑하심, 심지어는 아브라함을 만들어 가시는 그 만드심을 하나하나 경험하면서 아브라함의 인생의 그 육의 눈이 영의 눈으로 이렇게 열려지는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한 겁니다. 눈을 들어 바라보라! 하시는 그 사랑의 음성 가운데 우리의 생명과 미래가 들어있습니다. 시인이 이 영적 원리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죠.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편 121:1~2)
산에 여호와의 성전이 있고 여호와의 성전에 하나님이 계셔서 사람들은 어려울 때마다 힘들 때마다 산을 향하여 보았어요. 하나님을 바라봤다는 거예요. 여러분!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힘든 상황이 있을지라도 다른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만 따라가셔서 복 받는 쏟아지는 복을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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