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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고문산 목사(노량진 강남교회)

전쟁 그리고...- 노량진 강남교회 (고문산 목사)

by 복음과삶 2023. 12. 11.

2023.12.10.(주일설교) 전쟁 그리고... 창세기 14:1~16

노량진 강남교회 (고문산 목사)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 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한지라. 제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진을 쳤더니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이 곧 그 다섯 왕과 맞서니라.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창세기 14:1~16)

 

 

오늘 성경에 전쟁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조카 롯이 머물던 소돔 지역 연합군이 상대방 연합군에 패해서 롯이 포로로 잡혀갔어요.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상대방 연합군을 쳐부수고 롯과 그의 가족들과 재물들을 다시 구해왔다 하는 그런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가나안 변방에 머물던 아브라함이 이 중동 세력 전쟁에 뛰어들게 되었고 그 전쟁에서 승리해서 갑자기 중동 최강자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백성이 최초의 전쟁 승리라고 할 수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제1 경륜의 시대 창세기 11장까지는 인간이 잘못을 저지르면 뒷수습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셨어요. 그런데 이제 아브라함을 창세기 12장에서 부르시고 나서는 새로운 경륜의 방식으로 일하기 시작하시는데 하나님의 백성이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일을 하십니다. 전쟁에서 싸워 이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권입니다. 여러분도 이 특권을 가지고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보였던 아브라함의 모습과는 이제 완전히 다른 모습이죠. 아브라함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나십니까? 자신이 살려고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고 이집트 왕에게 아내를 넘길 뻔했던 그 비열하고 약한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었어요. 근데 오늘의 모습은 완전히 다른 아브라함입니다. 이미 살펴본 창세기 13장에서는 조카 롯과의 영토 분쟁에서 자신의 권리를 그냥 대담하게 대인배처럼 롯에게 선택권을 넘기는 그런 모습을 보여줬어요. 자신이 이제 어디 있건 간에 그건 상관없다. 당장에 무슨 손해가 있든지 간에 상관없이 아브라함은 이렇게 양보를 한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점점 변해가는 거예요. 그리고 오늘 14장에 와서는 가나안 이방인이었던 아브라함이 중동 연합군과 싸워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적군의 포로로 끌려갔던 조카 롯을 구출하는 그런 놀라운 일을 일으키게 되죠. 이 연약하고 소심한 한 사람이 이제는 대범하고 강력한 족장의 모습으로 이런 표현이 맞을까 모르겠는데 영적 진화를 하고 있는 거예요. 점점 변화되어 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핵심은 아브라함이 변화하고 성숙해지고 있다. 지금 성경 저자는 여러 가지 정황을 통해서 지난번에는 그 땅 분배 사건이었다고 하면 이번에는 땅에서 일어나는 전쟁 사건을 통하여서 아브라함이 점점 믿음의 사람으로 변하고 성숙해가고 있다 하는 것을 알려주려고 하는 것이고, 더 결정적인 핵심은 그 변화와 성숙이 어떻게 이루어졌느냐 하는 거예요. 그냥 시간이 지나니까 저절로 성숙한 건가! 나이가 드니까 변한 건가!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essence)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과 그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역(ministry)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으로부터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꼭 경험하고 그뿐만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서 일하시는 것을 경험함으로 여러분의 삶에도 인격에도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해 자신의 생존을 아내의 외모와 이집트의 권력에 의지했던 사람이에요. 그러나 아브라함을 지켜줄 것 같았던 그 인간적 기대가 하루아침에 무너지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존재와 하나님께서 그 일하심으로 인해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내가 일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렇게 그가 깨닫게 된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라고 합니다.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타고나는 게 아니에요. 저 사람은 겸손을 가장하는 거지 실제로는 겸손한 사람이 아니에요. 언젠가는 그 겸손이 다른 모습으로 터지게 돼 있어요. 진짜 겸손이 뭐냐! 나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구나! 내가 일한다라고 하는 것,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그것을 아브라함은 지금 깨닫게 됐다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신실하심(faithfulness)을 인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먹이시고 아브라함을 지켜주시고 심지어는 아브라함을 부하게 하신다. 어느 정도 부하게 하셔요? 극심한 부자를 만드신다! 하는 것을 이제 아브라함이 점점 깨닫게 되었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이 애굽의 사건을 통해서 두 가지를 크게 깨닫게 되는데 첫째는 아브라함의 생존과 풍요는 사람의 머리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깨달은 겁니다.

 

두 번째로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당시 최강대국 이집트 왕까지도 다스리시는 온 우주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가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깨달음 생존과 풍요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깨닫고 믿음으로 보여준 행동이 뭐냐! 그게 지난번 살펴봤던 13장의 땅의 양보 사건인 것입니다. 연결돼 있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있는 아브라함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만왕의 왕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담대한 믿음을 보여준 사건이 바로 이제 다루게 되는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중동 연합군과의 전쟁 승리인 것입니다. 무엇이 자신의 소유를 양보하게 만드는가! 무엇이 계산을 뛰어넘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가! 무엇이 담대하게 전쟁까지도 치르게 하고 승리하게 만드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도 이 믿음을 가지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이 전쟁이 어떻게 시작됐느냐 하는 것이죠. 왜 롯은 이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는가! 그리고 변방에 있는 아브라함이 왜 중동 전쟁 그 중심에 서게 되었는가! 우린 질문 해야만 하죠. 기억을 더듬어서 지난번에 아브라함 조카 롯과 아브라함이 어떻게 됐어요? 서로 헤어졌죠? 왜 헤어졌어요? 아주 간단했습니다. 서로 보는 눈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서로 보는 눈이 달랐어요.

 

창세기 1310 창세기 1314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0절에 보면 롯은 눈을 들어 비옥하고 풍성한 요단 지역을 바라보고,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눈을 들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어요. 그 둘의 차이는 간단해요. 눈을 들었다는 건 똑같아요. 육신의 눈을 가지고 있어요. 눈이 남다른 사람 없어요. 똑같습니다. 그런데 대상이 달랐던 겁니다. 롯은 자신의 눈을 들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았고, 자신의 눈에 좋은 것을 선택했어요. 반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눈을 들라고 하시니까 눈을 들었는데, 눈을 들었을 때에 자신의 눈에 좋은 것을 뛰어넘어 위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사를 가도 그렇고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도 그렇고, 또 어떠한 땅으로 갈 때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그 자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스며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발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 자녀들의 인생길도 마찬가지예요. 그 아이가 어느 대학을 가건, 어느 직장을 가건 이 아이가 도대체 하나님의 어떠한 말씀을 품고 가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죠. 아브라함은 지금 약속을 보고 있는 거예요. 눈은 마음이라고 그랬어요. 아브라함과 롯은 같이 눈을 들었지만 아브라함은 당장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을 두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셨기 때문이에요. 새로운 세계가 보이는 거예요. 똑같은 땅을 바라봐도 거기에 약속이 얹어져 있으면 그 땅이 완전히 달라 보이는 거죠. 이런 역사가 일어나야 돼요. 가장의 눈에 똑같은 직장을 나가도 내가 은혜를 받고 나가면 그 똑같은 직장이 똑같지 않아요. 달라 보입니다. 정말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되면요. 내가 매일같이 반복되고 왔다 갔다 하는 그 일상의 현장들이 완전히 새롭게 변화됩니다. 꼭 성지 안 가도 돼요. 꼭 선교지 안 가도 돼요. 내가 살아가는 그 일상이 바로 거기가 선교지 아닙니까? 그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롯은 항상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봐요. 그리고 그것을 선택합니다. ? 그게 내 생존에 도움이 될 것 같거든요. 이것이 나의 풍요를 보장해 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언제나 마음이 어디 있냐면 세상에 있어요. 그에게는 세상의 현실이 보이는 거죠. 우리 신앙인들 중에도 현실적인 분들 많아요. 교회 생활하고 직장생활 다르다는 거예요. 물론 다르죠. 같아서는 안 되겠죠. 직장생활하고 가정생활은 다르다는 거예요. 애들의 미래는 학교 생활하고 교회 생활은 다르다는 거죠. 그러나 여러분 신앙인이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느냐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하고는 달라야 돼요. 보는 눈이 달라져요. 롯처럼 되면 안 돼요. 그런 눈에 대하여 성경이 다음같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13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이 말을 왜 합니까? 롯이 이리로 들어갔다는 거예요. 결국 그의 선택의 결과가 여기였다는 거죠.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멸망하려고 하는 그 장소로 점점 이동하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뭐 때문에? 눈 때문에 그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또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약속의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창세기 13:12) 그다음 말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창세기 13:13) 영어에도 Sodomite(남색자)라는 말이 있잖아요. 타락, 그 자체입니다. 아주 음란하고 하나님 대항적이고 그러니까 인간 자체가 어떤 외적인 것으로 부로, 신이 돼버리는 그 만물이 지배하는 철저하게 지배하는 그 도시 문화의 그 정점 끝점이 어디냐! 바로 그 소돔이라고 하는 거죠. 그 눈이 그 마음이 이끄는 대로 결국 갔던 그 장소는 바로 하나님이 멸망하시려는 소돔의 장소였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예요. 그리고 마음의 문제는 곧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으면 보는 게 똑같아요. 믿음이 없으면 마음도 똑같아요. 항상 그래요. 변화가 없어요. 교회 안에 들어와도 상관없어요. 교회 생활 아무리 오래 해도 믿음이 없으면 그 마음은 저절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그 말씀에 대한 체험이 없으면 말씀이 내 삶에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결국은 멸망으로 가는 겁니다. 과연 누가 나를 먹이느냐! 도대체 나는 내 눈과 마음을 무엇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느냐! 무엇 때문에 행복해야 하느냐! 무엇이 나의 과연 자랑거리인가! 이거 다 믿음의 문제 아닙니까? 마음의 문제고 또한 눈으로 선택하는 눈의 문제이기도 해요. 아브라함은 점점 더 나를 먹이시는 존재가 누구다? 하나님이다라는 쪽으로 지금 변해가고 있는 거예요. 점점 더 나의 자랑과 기쁨이 되는 존재는 누구다? 하나님이다. 결국 나의 생명이 되는 존재는 바로 하나님이다라고 하는 것을 지금 구체적인 일상을 통하여 고백하고 있는 것이고, 롯은 세상의 현실이 나의 생존과 부의 근거다. 나의 기쁨이다. 나의 자랑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이러한 고백은요. 사도 요한이 지적했던 죄의 세 가지 양태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요한일서 2:16)

 

어디서부터 왔다고요? 세상으로부터. 세상에 누가 있는데요? 세상에 권세를 잡은 자. 공중 권세 잡은 자. 사탄이 계속해서 던져주죠. 이거 봐. 이거 먹어. 이거 가져. 계속 던져준단 말이죠. 그래놓고 나를 자랑스럽게 하고 나를 교만하게 하고, 또 그것을 얻지 못하면 아주 비참하게 만들고 자존감 떨어지게 만드는 그런 일을 하는데, 그건 누가 하는 거다? 세상이 하는 것이다. 지금 롯은 과거 아담과 하와가 걸어갔던 그 길을 똑같이 걸어가고 있는 것이죠. 죄라고 하는 게 뭡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그 탐스러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열매를 먹는 거예요. 롯도 마찬가지예요. 그냥 자기가 좋은 거 선택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금식하시고 시험받으실 때 이 세 가지를 정확하게 똑같이 유혹받습니다. 사탄이 와서 배고픈 예수님한테 이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 그리고 높은 성전에 올라가서 뛰어내려라. 그리고 만물을 다 보여주면서 뭐라고 그랬어요? 내 앞에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그랬어요.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아요? 1 아담은 그 시험에 실패하였지만, 2의 아담이신 예수님은 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뭡니까? 곧 하나님이에요.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분, 살아계신 하나님, 그리고 나의 인생을 책임지시고 나를 통하여 이 땅의 구원의 역사, 구원의 비전을 이루실 그 하나님만 의지하고 시험을 극복해 나가죠. 롯이 바라본 풍요는 눈으로 본 게 아니라 사실은 마음으로 본 거고, 곧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믿음의 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죠. 믿음은 마음에만 머물지 않아요. 마음이 당기는 대로 끌려가게 되어 있어요. 롯은 벧엘 동편으로 들어가 도시에 머물다가 점점 더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들어갔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요. 이것이 전쟁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롯이 중동 전쟁에 휘말리게 된 원인이 된 거예요. 육신적인 눈이 그 믿음 없는 마음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던 그것이 결국에는 전쟁에 휘말리는 영적 원인이 되었다. 그의 눈이 그의 운명을 결정한 거예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에요. 필연이었어요.

 

오늘 본문에 보면 시날 왕, 엘라살 왕, 엘람 왕, 고임 왕 4개국 연합군, 소돔 왕, 고모라 왕, 아드마 왕, 스모임 왕, 소알 왕, 표로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엘람 연합군 (승리) 소돔 연합군 (패배)


엘람 왕 그돌라오멜
시날 왕 아브라벨
엘라살 왕 아리옥
고임 왕 디달

소돔 왕 베라
고모라 왕 비라사
아드마 왕 시납
스보임 왕 세메벨
소알 왕 벨라

 

 

엘람 연합군이 그돌라오멜이라는 사람이 최고 사령관입니다. 최고의 왕입니다. 나머지는 다 분봉 왕들이고 그다음에 이쪽에 소돔 연합군이 있어요. 5개국입니다. 여기 패배했고 여기 승리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냐면 엘람 왕 그돌라오멜를 중심으로 강대국들이 앗수르 위쪽에 위치하고 있었어요. 맨 위쪽 다메섹 부근에 강대국들이 형성이 돼서 가나안 지역에 있는 크고 작은 나라들의 곡물을 받았습니다. 시대가 지났는데 자꾸 곡물을 안 바치니고 그 위에 있는 4개국 연합 강대국 왕들이 치고 내려온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저 차례차례 위쪽부터 하나하나 다 치고 내려온 거예요. 그래놓고 나중에 저 가운데 소돔 연합군이 있는 그 싯딤 골짜기까지 밀고 내려온 것입니다. 여기 소돔 연합군, 여기 소돔에 누가 있어요? 소돔에 롯이 살고 있어요. 이런 상황입니다. 결국에는 소돔 연합군에게까지 승리하게 돼요. 가나안의 사해 지역에 있는 모든 나라들을 다 일시에 치고 내려온 그돌라오멜 연합군이 소돔 지역에 있었던 그 연합군도 완전히 치고 소돔에 살고 있었던 그 조카 롯을 포로로 또 가족들 재물까지 그냥 다 몰수해서 가져가 버립니다. 이 소식을 들었던 아브라함이 그동안 자기 집에서 키우며 훈련 시켰던 318명의 정예부대를 끌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처부셔 버립니다. 빼앗겼던 재물 다 찾고 롯을 구해 왔다. 승리했다 하는 것이 14절에서 16절까지 나오는 오늘 본문의 최종 전쟁 보고서입니다.

 

오늘 이 전쟁의 의미는 상당히 중요해요. 엘람 왕 그돌라오멜 연합군이 가나안 사해 지역을 완전정복했고 소돔 왕 베라 연합군에게까지도 승리했기 때문에 이제 그돌라오멜이라는 사람은 이 지역의 최강자로 자리잡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바로 그 그돌라오멜를 누가 이긴 거죠? 아브라함이 이긴 거예요. 그러니까 챔피언은 그돌라오멜이였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챔피언 결정전에 원래 못 나가는 인물이에요. 순위에 안 들어요. 도전자 자격도 없어 끄트머리에 있단 말이에요. 완전히 끄트머리 말도 안 되는. 그런데 이 아브라함이 챔피언을 이겨버렸어요. 그럼 누가 챔피언이에요? 아브라함이 챔피언이죠. 역학적으로 보면 그 시대에 육적으로 가장 강한 자를 아브라함이 이겼기 때문에 아브라함이야말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지역 최강자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가나안 변방에 있던 아브라함이 국제 전쟁 가운데 최종 승자가 된 것이죠. 하나님의 복으로 부름받은 아브라함이 중동의 강대국들과 지역 세력들에 밀려서 소멸되지 않고 큰 민족이 될 것이라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서광이 비춰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라와 왕을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아브라함의 담대하고 용감한 믿음이 전쟁의 승리를 이끌었던 것이죠.

 

여러분 이게 믿어집니까? 아브라함을 둘러싸고 있는 국제적 역학관계 안에 보면 아브라함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관심도 가질 만한 대상이 아니었어요. 지금 동쪽에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서남쪽에는 이집트 문명이 그 강력함을 세상 앞에 자랑하고 있었고, 가나안 근동의 그 안에서도 9개의 부족 국가가 치열한 세력 확장 경쟁을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어요. 그럼 아브라함은 뭐 하고 있었냐? 가나안 변방 헤브론에 머물고 있었던 첫 사람입니다. 이방인입니다. 성경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무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창세기 13:18)


여러분! 우리는 이게 뭔지를 알지만 이거 얼마나 초라한 일입니까? 그냥 어디 수풀에 가서 좀 그늘 댈 만한 데 가서 겨우 한 게 뭐예요? 제단 쌓고 하나님 앞에 예배한 거예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냥 찬송하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자가 중동 연합군 전쟁의 중앙에 들어가서 그 강대국들을 격파할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도대체 뭐가 아브라함을 승리로 이끌었던가? 뭡니까? 아브라함에게 뭐가 있었던 것입니까?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약속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약속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 강남교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시겠다고 하는 그 약속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으면 교회가 아무리 커도 소용없어요. 성도가 하나님의 약속 없잖아요? 아무리 부자로 살아도 소용없어요. 미안한 말이지만 자식들 아무리 잘 나가도 소용없어요. 세상 사람들은 그런 면에서는 더 잘 나가요. 아브라함에게는 뭐가 있었어요? 약속이 있었어요. 세상은 강력한 권력과 무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지만, 오직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 자, 바로 아브라함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고 합는 거예요. 성경은 열방의 강력함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아브라함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어요.

 

저는 기도할 때마다 이 노량진 땅이 강남교회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상상력을 가져요. 이 대한민국 땅이 우리 강남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돌아가는 꿈을 꿔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약해서 이 세상의 나그네와 이방인으로 사는 게 아니에요. 능력 면에서 볼 때도 그들이 힘이 없어서 세상을 소유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해 더 큰 것을 사모하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이 땅의 모든 것들이 선물로 주어지는 인생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가 정치 참여를 잘못하면 큰일 나는 거예요. 무슨 정치에 참여해서 세상을 바꾸겠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순서가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교회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그 약속을 따라 기도하면서 세상이 변화되기를 기도하고 참여할 수 있지만 믿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 다수를 가지고 정치에 참여해서 정치를 바꾼다? 중세 교회가 그렇게 했던 거 아닙니까? 역사를 통해 우리는 알잖아요.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이 약속을 받고 우리 강남교회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선물로 받고 하면 세상은 변화될 줄로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약속의 말씀 다시 한번 읽어볼까요?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창세기 13:15~17)

 

어때요? 13장에서 했던 약속이 지금 14장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 자들이 바로 이 땅의 승자이고 이 땅의 주인공임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약속이 주어진 자들에게는 이미 승리가 확보된 거예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영적 전쟁은 이미 승리한 전쟁임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이제 우리는 재방송을 볼 뿐이에요. 벌써 이겼어요. 예수님이 다 이기셨어요. 근데 마치 이미 진 사람처럼 이 세상에 피해자인 것처럼 사는 것은 우리에게 승리를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고, 십자가의 죽음의 권세까지 이기신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예요. 예수님께서 우리가 승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어요.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내가 세상을 이길 것이다? 이기었노라. 이미 이기었노라. 환란은 있을 것이다. 믿는 사람들이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고난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란 앞에서 절대로 두려워 떨지 마라. 담대해라. 안심해라. 왜요? 내가 이미 이기었고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너의 인생길 앞에 앞장서셔서 이기게 할 것이다. 약속하고 계시는 거예요. 예수님 한 분이 이 땅에 오셔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어요. 예수님을 따르는 소수의 제자들로 인하여 이 땅이 복음화됐습니다. 아브라함의 318명이 그 당시 최강대국을 무찔렀던 것처럼, 오늘 이 땅의 소수의 제자들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너무나 소수이고 변두리에 빠져 있는 교회 공동체이지만 그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은 세상을 이기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뭐냐!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믿는 거예요. 하나님만 믿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만 믿는 거예요. 믿고 기도하고 선포하고 나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오늘 아브라함 보세요. 하나님의 약속만 있다면 이 땅 어떤 것도 상관없다라고 믿고 양보한 후에, 또 하나님의 약속만 있다면 이 땅에 어떠한 막강한 권세도 이길 수 있다라고 믿은 후에 비로소 아브라함은 이제 신비의 인물 멜기세덱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다음 시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