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고문산 목사(노량진 강남교회)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 -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by 복음과삶 2023. 12. 27.

2023.12.24. (주일설교).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 누가복음 1:46~55

노량진 강남교회 (고문산 목사)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누가복음 1:46~55)

 

아브라함 이야기를 계속해서 함께 나누고 있죠. 오늘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신약에 나오는 마리아의 이야기와 연결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창세기에 보면 달라졌다고 말씀드렸어요. 1장부터 11장까지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12장부터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하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그랬어요. 그것을 경륜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1장부터 11장까지는 하나님이 사람이 어떻게 하는가 잘 보고 있다가 잘하면 복 주고 잘못하면 벌주기도 하는 대응적 방식으로 일을 하셨고 급기야는 홍수 심판까지 인류가 받게 되죠.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립니다. 최종적으로는 민족끼리 다 단합을 해서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분위기로 마무리가 돼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생각을 하신 거예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11장에서 12장 넘어가는 게 너무 쉽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얼마나 고민이 됐겠어요. 내 형상을 따라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최고의 존재로 창조해 놨는데 결국에 모여서 한다는 게 뭐냐 하면 그 창조주를 대적하는 일이란 말이에요. 이거 어떻게 해야 할까! 혼내도 말을 안 듣는데 그래서 안 되겠다. 이제부터는 내가 혼자 다 해야겠다.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내가 어떻게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하면서 일방적으로 해나가야겠다 라고 시작하신 것이 아브라함과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의 마음대로 만들어 가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때로는 협력도 하고 순종도 하겠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크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식들에 대해서 큰 기대 안 하잖아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예요. 안 되겠다. 그래서 제2의 경륜이 시작되는데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시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3요소가 있다고 그랬죠? 주권, 영토, 국민인데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땅,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만들어 가시는지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탄의 의미가 그냥 어느 날 이 땅에 하나님이 갑자기 오신 그런 사건이 아니라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된 그 언약의 말씀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진 실현된 사건이다 하는 것을 우리가 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본토 친척 집에서 잘살고 있는데 불러내셨어요. 메소포타미아 그 풍요의 땅에서 일부러 불러내셨어요. 그리고 뭐라고 약속하시냐면 창세기 122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 이렇게 약속하셨어요. 여러분!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는 말은 1차적으로는 네 몸에서 자식을 낳게 하고 또 아들을 낳기 위해서 아들이 아들을 낳고 계속해서 씨를 번성해서 그 가문을 일으키고 거기서 왕족도 나오고 민족도 일으킨다 그런 뜻 아닙니까? 근데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그 약속이 곧바로 이루어졌어요? 안 이루어졌어요? 성경을 읽어보면 안 이루어져요. 10년이 넘도록 안 이루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당장 이루어지면 기도 안 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기도는 금방 이루어지질 않더라고요. 그러니까 이 가정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언약의 말씀이 주어졌는데 안 이루어지는 나이는 점점 먹어갑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할머니가 어떻게 애를 낳습니까? 할아버지가 어떻게 애를 낳습니까? 그러다가 창세기 15장으로 넘어가 보면 아브라함이 급기야 자신의 집에서 길린 엘리에셀이라고 하는 종을 언약의 상속자로 삼고 하나님 앞에 제시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에게 복을 주시려거든 어차피 나는 안 되니까 우리 집에서 그래도 성실하게 잘 자라난 이 엘리에셀을 나의 상속자로 후계자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도 이 엘리에셀을 통하여 이루어 주옵소서.’ 이렇게 제안을 한 겁니다. 어때요? 여러분!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나도 안 되고 부인도 안 되니까 종을 통하여 언약을 이루십시오. 얼마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입니까? 이때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창세기 15:4)

 

마치 아브라함이 이런 제안을 할 거를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이 그 말을 듣고 아니야. 너 그거 아니야 네가 하는 방법 아니야. 네 몸에서 날 자가 너의 후계자가 될 거야라고 하나님이 말씀을 확정해 주셨어요. 또 시간이 흐릅니다. 이제 누가 나섭니까? 창세기 16장으로 넘어가 보면 그 남편의 그 아내 사래가 등장을 합니다. 사래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궁리궁리하다가 생각해낸 게 뭐냐! 내가 나의 소유인 여종 하갈을 대신 남편한테 집어넣어서 거기서 자식을 낳아가지고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자로 삼아야겠다. 제가 볼 때는 여자가 남자보다 나아요. 더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집에서 자란 종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그러는데 그게 아니라 적어도 나는 안 되니까 여종 하갈을 통해 씨를 얻게 하겠다 이런 생각을 한 거예요. 얼마나 합리적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또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창세기 17:16)


하나님도 다 계획이 있으신 거죠. 아브라함에게 사래에게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여종 하갈을 통해서 아니야. 너의 부인 네 아내 바로 그 몸에서 날 거야.’ 이렇게 확증해 주시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래에게 확정해 주셨던 그 말씀을 그대로 이루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의 방식이 아니라 그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비하고 기적적인 하나님의 방식으로 씨를 주셨던 거예요. 결국에 사래는 약속대로 아들 이삭을 낳습니다. 이삭이라고 하는 이름이 뭐냐 하면 웃다이런 뜻이에요. ‘웃다이 말이 어떻게 나오는지 아시죠? 천사가 와서 앞으로 사래를 통해 아이를 낳을 거야. 아브라함. 너를 통해 아들을 낳게 될 거야그거를 엿들었던 그 사래가 어땠어요? 비웃었단 말이죠. 이게 무슨 뜻이에요? ‘나하고 내 남편이 애를 낳는다고? 안 돼. 하나님이라도 안 돼.’ 그렇게 비웃었던 사래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아들을 낳고 다음과 같이 웃음에 겨워 행복에 겨워 노래하듯이 이렇게 읖조립니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창세기 21:6~7)


이건 비웃음이 아니에요. 이건 기가 막힌 웃음이에요. ‘세상에나 어떻게 내 인생에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가! 어떻게 내가 어린아이를 낳아서 젖을 먹이는 여인이 되고 이 노경의 할아버지한테서 애를 얻었는고!’ 자기도 웃고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웃는 거죠. 이건 비웃음이 아니죠. 찐 웃음이죠. 이 찐 웃음 진짜 웃음이고 행복이고 기쁨이고 주체할 수 없는 노래인 것이죠. 사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만이 하실 때 우리 인생에도 진정한 기쁨이 찾아오는 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사람의 자랑이라고 하는 거는 한계를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난 자랑할 거 하나도 없고, 이건 정말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고백할 때에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자랑거리가 되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찬송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포기하고 낙심하는 자조 섞인 웃음 있잖아요. 그러니까 습관적으로 하는 거, 되기는 뭐가 돼! 그렇지 뭐! 하나님이라고 이런 일 하시나 뭐! 그냥 시간 흘러가는 거지! 되는 대로 사는 거지! 하는 그 자조 섞인 웃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참된 기쁨의 웃음으로 찬양의 노래로 바뀌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같은 일이요. 나중에 한나라고 하는 여인에게 또다시 발생하게 됩니다. 사무엘상 1장에 가보면 한나라고 하는 여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나는 가정 형편이 좋은 여인입니다. 유력한 집안에 시집을 갔어요. 뿐만 아니라 남편의 각별한 사랑도 받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죠? 애를 못 낳아요. 이 당시에 애를 못 낳으면 말을 못해요. 사람 구실을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늘 마음의 짐이에요. 근심 걱정이에요. 그런데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사무엘상 1:5)

 

남편이 그녀를 사랑했지만, 불임이었어요.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임신을 못하게 하는 것을 알고 있어요? 모르고 있어요? 몰라요. 막연하게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 주시니 내가 어떻게 해! 그러나 성경 저자는 한나의 태를 막으신 분이 하나님이다라고 명시하고 있어요. 이렇게 고통 어린 삶 속에, 근심 어린 삶 속에 불을 지른 여자가 있었으니 그 여자가 바로 브닌나라고 하는 여자입니다. 브닌나가 애를 얻은 거예요. 잘났다고 까불고 애 못 낳는 여자라고 핍박하고 조롱하고 멸시하고 저주하고 말이죠. 이 브닌나라고 하는 뜻이 번개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한나가 당하고 경험했던 그 실제적인 게 뭐였냐면 마치 폭력처럼 느껴졌다는 거예요. ‘더 이상 나는 못 살겠다. 나 죽겠다.’ 그래 가지고 성전으로 올라가 통곡하며 울며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마음에 응답을 주시는데 이렇게 성경이 기록하고 있어요.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사무엘상 1:19)

 

생각하다라고 하는 말은 자카르(זָכַר)라고 하는 히브리어로 기억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나를 기억하고 계셨어요. 여러분 뭘 기억하셨어요? 물론 한나의 고통을 기억하셨죠? 한나의 그 통곡어린 기도를 기억하셨겠죠? 그러나 더 원초적으로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냐 하면 태의 문을 하나님 당신이 의도적으로 닫으셨음을 기억하고 계시는 거죠. ? 한나를 통한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까, 그녀의 고통을 통하여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니까 그 한나라고 하는 여인 한 사람의 인생이 아니라 그 한나가 속해 있는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아니 세상 전체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그 하나님의 뜻이 있으셨기 때문에 그 기도 이후에 하나님이 그것을 기억하심으로 한나가 아들을 얻게 됩니다. 그 아들의 이름이 뭐죠? 바로 그 유명한 사무엘이라고 하는 시대의 지도자입니다. 영적 암흑기를 빛으로 인도했던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이 당시에는 계시가 끊겨버렸어요. ‘이가봇’(אִי־כָבוֹד) ‘카보드’(כָּבוֹד)가 떠나가 버렸다.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히 떠나가 버렸다.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공동체가 완전히 와해 됐습니다. 타락하고 부패했습니다. 물질만 추구하고요. 장로들을 위시한 정치 공동체가 완전히 박살 났습니다. 전쟁에 나갔다가 하나님의 법계를 이용하려고 했다가 전쟁에 패배하고 민생은 밑바닥을 치고 있고 완전히 영적 암흑, 총체적 암흑기에 빠져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심으로 그 말씀을 이루심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세워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시고 하나님의 나라 꺼져가는 등불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겁니다. 그때 부른 노래가 뭐냐? 그 유명한 한나의 노래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노래입니다. 어떻게 이런 노래를 변방에 살아가는 한 여인이 불임에 빠졌다가 기도하여 응답받고 아들을 얻었던 그 여인이 어떻게 이와 같은 위대한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굉장히 충격적인 노래입니다. 개인적인 억울함을 하나님이 풀어줬을 뿐만 아니라 그 화가 나게 하는 그 여자를 복수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질서를 완전히 뒤집어 엎는 그 역전의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게 한나의 노래에 나오는 겁니다.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한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사무엘상 2:4~5)

 

여러분! 이와 같은 역전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죠? 한나는 그냥 단순히 아들을 받은 게 아니에요. 남들이 못 낳는 자식 하나 얻게 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겁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그녀의 인생이 그 비참했던 인생이 변화되는 거예요. 완전히 변화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녀가 기도하는 그 노래 속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함으로 말미암아 개인적 차원의 기도가 공동체적 차원으로 범 우주적인 차원의 기도로 확장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려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능력을 희망하는 노래로 바뀌게 된 거죠. 당장 나의 고통이나 가정의 고통의 문제가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을 가지셔야만 합니다.

여러분!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안 믿는 사람도 다 당해요. 이 땅에 사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사실은 나이 들어가면 또 고통이에요. 그러나 적어도 믿는 사람들의 고통은 뭔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의 고통은 뭔가? 이거는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을 가지셔야 돼요.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기도하셔야 돼요. ‘하나님! 이게 당신의 나라와 어떤 연관성이 있습니까? 나의 사업이 나의 자녀의 문제가 나의 건강의 문제가 나의 영적인 문제가 하나님의 나라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주님 불쌍히 여기시고 당신의 나라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여 주옵소서.’ 그러면 나중에 내 문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내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펼쳐나가고 확장되는 역사 가운데 쓰임 받게 될 줄로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한숨 어린 한나의 기도가 오늘 노래로 바뀌었듯이 여러분의 고통도 기도로 바뀌시고 또 기도가 응답됨으로 찬양의 노래로 바뀌시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랜 세월 지나서 드디어 이 노래를 이어받아 부른 여인이 누구냐? 바로 처녀 마리아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와서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누가복음 1:31) 그랬어요. 여기 우리 젊은 분들도 계시는데 결혼 정년기에 계신 분도 계시고 그러니까 아직 결혼 안 한 자매들만 한번 대답해 보세요. 누군가가 찾아와서 여러분한테 뭐라고 하냐면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랬어요. 그럼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멘! 그럽니까? 할렐루야! 나 결혼도 안 했는데 애를 낳게 생겼네. 뭐 이럽니까? 충격이죠. 충격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예요. 그러니까 마리아가 뭐라고 말합니까?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누가복음 1:34) 여러분! 얼마나 합리적인 질문입니까? 너무 당연한 질문 아니에요? 마리아는 믿음이 없는 거예요? 너무 당연한 질문이죠. 너무 합리적인 질문이죠. 이에 천사가 뭐라고 말합니까?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누가복음 1:35) 굉장히 비현실적 대답입니다. 신비로운 대답입니다. 합리적 질문에 대한 비합리적 대답입니다. 현실적 질문에 대한 비현실적 대답입니다. 그러나 신비적이고 기적적인 방식의 대답이죠. 하늘에서 내려오는 성령으로 인간의 방법이 아니라 오직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방식으로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이 땅의 거룩한 자, 죄 없는 자, 유일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아들을 너에게 주리라. 하나님이 다시 한번 말씀해 주셨어요. 그러니까 마리아는 이 말씀이 도무지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하나님께서 이루실 줄로 믿고 아멘한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천사 가브리엘을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마리아로 하여금 엘리사벳이라는 여인을 만나게 합니다. 엘리사벳이 어떤 여인인 줄 아시죠? 한나나 사래와 똑같은 입장의 사람이었어요. 노년의 무자하고 더 이상은 자식을 낳을 수 없을 정도로 늙었더라 이렇게 나와요. 근데 이미 임신 몇 개월이 된 겁니다. 그런 여인을 만나게 하셔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마리아로 하여금 듣도록 하시죠.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이 있으며 네 태중에 아이도 이 있도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이 있도다.” (누가복음 1:42~43)

 

천사가 전했던 말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통하여 이미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진 사람의 증언을 통하여 천사의 말을 마리아도 확증받고 있는 거죠. 그래서 소그룹이 중요해요. 이 소그룹이라는 게 교회 공동체라는 게 그래서 중요한 거예요. 신앙생활 혼자 하면 위험할 수밖에 없어요. 연약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그 모임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실제로 살아내고 그 말씀의 능력을 경험했던 사람의 증언을 듣는 것이야말로 나의 신앙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런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마리아의 입에서 그 유명한 마리아의 송가(Magnificat)’가 이제 터져 나오게 되는 것이죠.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누가복음 1:48)


이스라엘 변방에 있던 한 여인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낳는 복된 삶으로 변화된 것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마리아는 그 오랜 세월 전에 한나처럼 역전의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누가복음 1:50~52)


참 충격적인 선언 아닙니까? 로마의 압제(壓制)에 있는 이스라엘의 현실 가운데 그것도 아이를 도무지 생리학적으로는 나올 수 없는 상태에 있는 한 여인, 그 연약한 자기 입으로 나는 비천한 여종이라고 말했을 정도의 한 여인의 입에서 어떻게 국가 질서와 사회 질서, 우주 질서를 완전히 뒤집는 기도의 언어가 나올 수 있느냐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성령의 충만함으로 가능한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 때문에 그 말씀이 믿어지기 때문에 내 능력이 아니라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그 영적 실존 때문에 이와 같은 놀라운 기도와 고백이 나올 수가 있는 것이죠. 과거에 사무엘을 통하여 암흑기였던 이스라엘을 구원해내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예수를 통하여 로마의 압제에 있는 이스라엘과 죽음의 권세 아래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것을 마리아가 애를 낳기 전에 미리 노래해 버린거예요. 이런 꿈을 꾸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언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환상을 보시기를 축원합니다. 현실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생생하게 보여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여인이 되셔야 되요. 이 노래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누가복음 1:54)

 

여기 아브라함이 나오고 있죠. 이스라엘을 기억하시되 아까 한나를 생각한지라 그 말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이스라엘을 계속 생각하고 있어요.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바벨론 400년이라고 하는 엄청난 시간 동안 종살이를 하고 한때는 신약으로 넘어오는 시간 동안에 계시가 완전히 끝나버렸던 상황도 있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잊지 않고 계셨어요. 자기 말을 잊지 않으시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기억한다고 하는 건 나를 기억한다라고 하는 건 뭐냐하면 이스라엘에게 하신 당신의 말씀을 기억한다는 뜻이에요. 이 교회를 끝까지 기억하고 계신다는 건 뭐냐하면 이 교회에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계신다. 교회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말해도 교회의 시대는 끝장났다고 말해도 내가 너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 내가 너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라고 하신 그 언약의 말씀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반드시 다시 한번 일어나게 되는 줄로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저 머나먼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잊지 않고 기억하셔서 오늘 이것이 마리아의 노래가 되도록 하셨다 하는 것입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은 것도, 한나가 아들을 낳은 것도, 그리고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을 낳은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으로 이루신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여인의 불쌍한 삶을 돌아보시고 아들을 선물로, 자식을 선물로 주심으로서 비웃음을 진짜 웃음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비천함을 고귀함으로, 낙심을 희망으로 바꾸시는 그 역전의 하나님으로 우리 앞에 서시게 된 겁니다. 개인과 가정의 슬프고 아픈 운명뿐만 아니라 어둠과 죽음 가운데 있는 세상 전체의 운명을 뒤바꾸시는 그 역전의 하나님을 여러분도 이 성탄의 계절에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말씀을 따라 예수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초대교회 공동체가 한나와 마리아처럼 이 역전의 하나님을 그대로 노래하고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에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27~29)

 

원리가 똑같잖아요. 하나님의 일하심이 똑같죠. 이 고백은 바로 우리의 고백이죠. 내가 비천한 자고 내가 가난한 자고, 내가 세상에서 하나님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자고, 그런 자를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성령을 말씀을 선물로 주심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떵떵거리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다 부끄럽게 만드셨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성령 안에서 심령 가운데 모셔드리게 될 때 그 사람과 공동체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드러나게 됩니다. 인생의 역전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 만나는 거예요. 인생의 역전이 어디 있느냐? 예수를 내 안에 모셔드리는 거예요. 다른 방법 없어요. 성령을 내 안에 모셔드리는 거예요. 말씀을 받는 거예요. 그리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는 인생, 역전하는 인생입니다. 어떤 교회가 세상을 바꾸는가? 어떤 교회가 이 지역사회와 나라의 민족과 열방을 바꾸는가?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님 말씀 받고 성령 받고, 예수 받고 그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때 그 공동체가 바로 그런 공동체가 되는 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아주 독특한 하나의 고백을 노래하고 있어요. 인간의 삶을 역전시키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6~8)

 

자기를 비워내셨어요. 의도적으로 그리고 일부러 사람의 형체를 취하셨어요. 일부러 하신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결국에는 이 땅에 출생하시고 사시고 죽으시는 그런 아주 독특하고 주도적인 방식으로 언약의 말씀을 이루어 내신 겁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있는 개인과 심판받아 멸망당 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생명과 구원으로 역전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역전시키셔야만 했습니다. 우리의 교만과 우리의 불순종과 우리의 무지함이 우리 인생 자체를 죽음의 밑바닥까지 결국에는 이 무덤의 밑바닥까지 저 끝도 알 수 없는 저주의 골짜기로 내려갈 수밖에 없는 그 인생을 하나님께서 끌어올리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하나님과 동등되게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저 높은 보좌를 의도적으로 버리고 이 육신의 몸을 일부러 취하여 그것도 모자라서 종의 형체를 취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낮아지고 낮아지고 더 낮아져서 결국에 저 무덤의 골짜기까지 내려가시고 무저갱까지 내려가시는 그 낮아짐으로 인하여 우리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거예요.

 

할렐루야! 여러분! 성탄은 혁명의 시간입니다. 성탄은 모든 것을 뒤집어 엎는 시간입니다. 역전의 시간이고요.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충격적인 날이에요. 언제가요? 바로 내일이. 우리 인생이 완전히 뒤바뀐 날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성탄은요!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날입니다. 단순히 그냥 아기 예수를 감정적으로 낭만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날이 아니라 그 오래전에 말씀이 말씀으로 이루어진 사건이에요. 뿐만 아니라 내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나라의 역사가 하나님의 주도하심으로 역전되는 그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날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말씀대로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앞으로 말씀대로 다시 오실 것을 그 재림을 기대하는 날 그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이와 같은 하나님, 역전하시는 하나님, 여러분의 인생을 찾아오시고 여러분의 얼굴에 그 우울한 모든 부정적 상상력에 의한 그런 근심어린 모든 것들이 다 떠나가고 사랑의 그 진짜 행복한 웃음이 회복이 되고 하나님과 함께 행복한 인생으로 역전되는 인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믿음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말씀 한 구절만 읽고 마치겠습니다.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이사야 60:22)

 

이 말씀의 주인공들이 다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