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7. (주일예배). 멜기세덱 – 하나님의 제사장. 창세기 14:18~20
노량진 강남교회 (고문산 목사)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세기 14:18~20)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잖아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그리고 예수님이 복이고 그 예수님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 복이고 또 그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복의 통로다라고 믿는 사람들이죠. 그런 관점에서 올 한 해는 우리가 다른 거 하지 말고 예수님을 깊이 모셔드리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명확하게 드러내는 중요한 사건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첫 단추로 해서 이 주님을 내 안에 깊이 모셔드리므로 삶의 모든 영역들이 회복되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아브라함이 중동 연합군 전쟁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 하는 말씀을 함께 나누었죠. 가나안 땅을 중심으로 9개국 연합군이 서로 패권 다툼을 하는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 전쟁 중에 결국 최종 승자는 당시에 가나안 땅 변방에 있었던 가나안 땅으로 볼 때는 이방인에 해당하는 아브라함이 갑자기 중동 패권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 사건을 우리가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어떻게 일어났을까! 창세기 12장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말씀드렸죠. 창세기 12장은 하나님의 구속 경륜, 우리를 향하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이야기에 아주 중요한 획을 긋는 사건입니다. 12장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내용이 1절부터 9절까지 등장하고, 10절부터는 기근을 맞이한 아브라함이 자기의 꾀로 어떤 꾀였어요?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연명하려고 했던 그러한 사건이 있었죠. 그런 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만드셨어요? 부자로 만들어버렸단 말이죠. 그냥 부자도 아니고 극심한 부자로 만드는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희한한 사건을 하나님께서 일으키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뭐냐 하면 그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점점 더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으로 변해요? 믿음의 사람으로 변한단 말이에요. 믿음을 아직 몰라요. 믿음의 세계가 어떤 건지 모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아직은 잘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재미나고도 동화스럽고 어떻게 보면 우리의 상식에 맞지 않는 일상의 에피소드를 통해 아브라함을 점점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시켜가고 있다 하는 것이죠.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으로 변했다는 증거가 13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그 첫 번째 사건이 뭐라 그랬죠? 조카 롯과의 땅 분쟁 사건이었습니다. 롯에게 과감하게 양보하는 그런 아브라함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요.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나서 14장으로 넘어가 보니까 아까도 말씀드린 중동 연합군 전쟁에 과감하게 참여해서 결국 승리하게 되는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롯도 구하고 재산도 찾게 되죠. 풍요와 안정과 승리가 오직 누구로부터 온다?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그가 믿음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믿음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그 순간에 믿음의 사람으로 바뀌는 그런 측면도 있지만 점점 더 믿음에 믿음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초보일 때는 아주 초보적 단계로 증거를 주십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믿게 하려고 그래서 성경에도 보면 개유(開諭;사리를 잘 알아듣도록 잘 타이름)한다는 표현이 나와요. 하나님이 우리를 개유한다. 쉽게 말하면 우리를 꼬신다는 뜻이에요. 겁도 주기도 하고 또 기도하면 들어주시기도 하고 이렇게 하면서 어떻게든지 하나님께 붙잡아두려고 하는 그런 섭리의 역사가 있다는 거죠. 아브라함이 그와 같습니다. 애굽의 사건을 통하여서 이거 하나님이 하시는 거네. 그러면서 땅도 양보하고 또 전쟁에도 참여해서 승리도 해보고 그러면서 어떻게 돼요? 아브라함이 믿음의 믿음을 더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 승리 이후에 또 다른 전쟁이 하나 있었어요. 물리적 승리 이후에 영적 전쟁이 있었습니다.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 앞에 소돔 왕 베라와 살렘 왕 멜기세덱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는 거예요. 어떻게 했어요? 패전한 소돔 왕 베라에게는 하나도 받는 것이 없었죠. 사람만 돌려보내고 네가 취한 전리품은 네가 다 가져가라. 베라가 이렇게 제안했지만 아브라함은 어떻게 합니까? 난 너한테 실오라기 하나라도 안 가질 거야. 너 같은 존재에게는 난 부자 되고 싶은 마음이 없어. 나중에도 너 때문에 부자 됐다는 소리 안 들을 거니까 다 가져가! 이렇게 했죠. 소돔 왕 베라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해버립니다. 반면에 처음 보는 듣도 보도 못한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는 떡과 포도주를 받아먹어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와 같은 분이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 하나님에 대한 신학을 이 멜기세덱한테 처음으로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요? 십일조를 드리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십일조 왜 드린다고 그랬습니까? 이 전쟁에 승리하게 해줘서 고마워서? 내가 다 갖기 미안해서? 아닙니다. 나는 소속이 중동 연합군 9개국에 속한 사람이 아니요. 또 풍요의 땅 메소포타미아와 심지어는 애굽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이 살렘 나라와 같은 곳, 의의 왕이 다스리는 이 세상과는 구별된 하나님의 나라에 소속된 자입니다라고 선언하는 게 그게 뭐라고요? 그게 바로 십일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이 멜기세덱이 누구냐 하는 거예요. 여러분! 알고 있어요? 도대체 멜기세덱이 왜 갑자기 등장한 겁니까? 아니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갑자기 멜기세덱이 나타나서 아브라함에게 말한 것, 아브라함에게 행한 것, 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거죠. 도대체 멜기세덱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거야? 멜기세덱의 혈통적 기원은 과연 어디인가? 성경은 오늘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왜 하필 이 시기에 제사장 멜기세덱이 등장해야만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결국 궁극적으로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으로 이제 모아지게 돼요. 성경은 멜기세덱에 대해서 철저하게 신비주의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알려줄 것 같으면서도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그분이겠구나! 하지만 그분이다! 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멜기세덱은 오늘 본문 창세기 14장에만 잠깐 등장하였다가 사라져버립니다. 그리고 구약에 보면 시편 110편에 가서야 다윗의 노래에 잠깐 언급되기만 합니다. 구약의 전부입니다. 그게 이제 신약으로 가보면 신약 성경 중에 어렵다고 알려져 있는 히브리서에 5장, 7장, 10장에만 오늘 멜기세덱의 설명이 등장하고 있어요. 그러나 이 역시도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밝히기가 어렵다.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우리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히브리서 5:11~14)
여러분! 멜기세덱에 관한 설명이 쉽다는 거예요? 어렵다는 거예요? 어렵다는 거죠! 이거는 어린아이가 먹는 젖입니까? 아니면 어른들이 먹는 단단한 음식입니까? 단단한 음식이에요.
오늘 본문의 정보는 뭐냐 하면 멜기세덱을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8절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창세기 14:18)
여러분! 이 말씀이 당연하게 읽히십니까? 여러분 이상하지 않아요? 제사장이라고 하는 게 뭡니까? 하나님과 인간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직접 나갔다가는 죽어버려요. 왜? 부정하기 때문에! 정결한 존재 앞에 가면 마치 죽음이 생명 앞에서 떠나가는 것처럼 빛이 어둠과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이 죄 된 상태에서 하나님께 직접 나가면 다 죽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중재자를 인간으로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거잖아요. 그래서 제물을 받으시고 이 제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받으시고 제물 바친 백성이나 성도를 용서하신다. 그러니까 매개자란 말이죠. 근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제사장 제도가 언제 생겼느냐 하는 겁니다. 언제 생겼어요? 창세기에 기록된 아브라함 당시에 제사장 제도가 이미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이 제도는 아브라함이 죽고 난 이후에 수백 년이 지나서야 모세 시대에 비로소 생겨난 제도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게 나중에 생겨난 제사장 제도인데 왜 벌써부터 창세기 14장에 기록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증손자, 이삭 야곱까지 가서 그 야곱의 아들 중에 레위가 있잖아요. 그 레위 지파 때 가서야 부여된 직책인데 오늘 본문은 이 아브라함이 제사장 제도가 생겨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하는 멜기세덱을 통하여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시편 110편 이에 대하여 아주 놀라운 설명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다윗의 고백이 이제 등장합니다. 굉장히 길지만 여기 색깔을 잘 구별하셔야 돼요. 이 두 색깔은 존재가 또 다르다는 거예요. 다르다고 생각하고 a와 b라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고 한번 읽어보세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 세대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길가의 시냇물을 마심으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시편 110:1~7)
다윗이 마치 천상회의에 들어가서 실제로 목격한 바를 지금 우리 후대의 성도들에게 노래로 남겨놓은 거예요. 욥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오죠. 다윗이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고 또 다른 한 존재 즉 다윗이 주님이라고 부르는 존재가 있었다고 하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른 한 존재이신 그 주님께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너의 원수들이 박살 날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어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이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분에게 너의 원수를 박살 내라.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거예요. 우편에 앉아 있으라는 말은 뭐냐 하면 나의 전권을 다 우편에 앉은 자에게 위임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너의 원수를 박살 내거라. 여기서 원수를 박살 내는 권한은 이미 창세기 3장에 예언된 대로 여자의 후손, 즉 단수, 한 존재에게 주어진 권한이죠. 그 뱀에게 사탄이 인간을 꾀여 죄를 짓게 했을 때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시잖아요. 거기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crush)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세기 3:15)
여자의 후손, 후손들이 아니라 그 한 존재가 언젠가 이 땅에 와서 너의 대가리를 박살 낼 것이다. 그런 말이에요. 다윗이 기도 가운데 이걸 본 것이죠.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절대적 고난을 지금 다윗이 주님이라고 부르는 분께 주셨고, 그 주님은 그 권한을 가지고 원수를 완전히 박살 내는 종말론적 사역을 감당하게 되시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윗이 주님이라고 하는 그 존재, 그 존재가 다름 아닌 멜기세덱과 연결이 되어 있다. 다윗은 이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브라함 당시에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 그 멜기세덱이 어떻게 이분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그는 깨닫게 되었을까 하는 거죠. 4절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시편 110:4~5)
다윗이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분은 제사장으로서 레위 지파, 즉 사람의 계통을 따라 세습적으로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늘 창세기 14장에 나타났던 그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 제사장이라고 설명하면서 그 인간 타락 시에 하나님께서 예언하셨던 그 원수, 그 사단 마귀를 박살내는 종말론적 사명을 감당할 분이라고 다윗은 지금 선포하고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 다윗은 예수님을 봤어요? 못 봤어요? 다윗은 하나님을 봤어요? 못 봤어요? 안 봤는데 어떻게 기록을 해요? 안 봤는데 어떻게 이렇게 생생하게 기록을 해요? 보고 듣고 한 것을 지금 기록하고 있다는 거예요. 다윗이 대단하다는 거는 전쟁을 잘하고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나중에 이스라엘 전역을 통일시켜서 대단한 게 아니고 성전을 준비하고 그 아들에게 성전을 이 땅 가운데 위대한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했다는 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고 다윗이야말로 이 땅에 신령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 사람이었어요. 그가 하프를 치면 악령이 떠나가는 역사가 일어났어요. 그리고 기도하면 천상회의를 통하여 앞으로 오실 그 주님을 그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 대화하는 내용을 듣고 보고 그것을 기록하고 알리는 사람이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레위 지파 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 계열의 제사장, 다윗이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 존재가 필요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히브리서 7:11)
이건 몰라서 질문하는 게 아니죠? 우리 보고 깨달으라고 반어법으로 질문하는 거예요.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 사람으로 세우는 아론의 세습을 따라 세우는 이 직분이 사람을 온전하게 할 수 있었다면 굳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었겠느냐? 이렇게 질문하고 있죠. 그러니까 인간의 제사장 아론의 계통으로 내려오는 그 인간 제사장은 충분하다? 충분하지 않다? 충분하지 않다! 충분한 분은 따로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이와 관련하여 구속사적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스스로 답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히브리서 7:16~19)
아멘이십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충분한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께만 갈 수만 있다면 그것이 복이에요. 더 이상 뭐가 있습니까! 여러분! 인간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창조돼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 만큼 큰 복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게 해주는 존재다. 인간 제사장은 무익하고 연약하지만 아론의 반차를 따라 인간의 제도 안에 있는 그 제사장은 연약하고 무익하여 사람을 온전하게 할 수 없지만,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한 제사장은 충분하다. 아론 계열의 사람은 자기가 육신의 한계에 갇혀 있는 사람이에요. 자기가 죄도 짓고 나중에 죽음도 경험합니다. 그러니까 심지어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예물을 드려야 돼요. 제사를 드려야 돼요. 그러나 멜기세덱 계열의 유일한 제사장은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르는 제사장으로서 더 좋은 소망을 가지고 어떤 소망이겠어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인간이 죄를 벗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더 좋은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존재다. 그리고 히브리서가 이 존재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최종 선언하게 됩니다.
“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제사장 된 그들의 수요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니라.” (히브리서 7:20~27)
할렐루야! 끝났다는 거예요. 구약의 모든 종교적 활동과 제사적 활동은 다 끝났다는 거예요. 어디에서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자기가 대제사장이고 자기가 제물이 되어서 자기가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단 한 번으로 모든 속죄 사역을 끝장내셨다. 할렐루야! 그럼 예배 때 와서 뭐 해야 됩니까? 여러분! 너무 슬퍼도 하지 마세요. 그냥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하나님 앞에 고백하세요. 하나님! 또 죄를 지었네요. 어떡해요? 그러셔도 돼요. 여러분이 뭐 그렇게 가슴을 찢고 심각하게 죄를 호소한다고 그것이 해결됩니까? 그 행위 자체로 해결이 됩니까? 해결 안 돼요. 여러분! 손금이 달아지도록 빌어보세요. 마음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하여 그 구속의 역사를 어떻게 면면히 이어오셨고,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그것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멜기세덱이 누구냐? 불멸의 제사장이라는 거예요. 인간의 그 한계 자신의 죄와 죽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그 제사장 효과의 한계를 극복한 유일한 제사장이다. 멜기세덱은 사람의 그 제사장, 사람의 제사가 온전히 이루지 못하는 그 제사 제도, 하나님과 화해하는 그 제도를 완전하게 이루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그리고 더 좋은 소망을 준다. 그러니까 너무 쉬워졌어요. 영적으로는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은 번거로운 제사 절차를 밟을 필요가 없어요. 그냥 따라서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줄로 믿습니다. 그래도 된다는 거죠. 놀라운 복음이죠. 사람들은 믿지 않지만 뭐 그런 게 있냐고! 어떻게 그렇게 쉬운 일이 있냐고! 그럼 인간이 어떻게 어렵게 해야 죽음의 권세에서 생명으로 넘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좋은 언약을 만들었어요. 더 좋은 소망을 얻으셨어요. 예수의 이름만 의지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어요. 그리고 나서 완벽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히브리서 7:28)
누구를 세웠다고요? 아들. 이제 와서야 히브리서 저자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대제사장 되신 그분이 누구다? 아들이시다. 멜기세덱으로 출연하셨던, 멜기세덱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던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그의 인생 가운데 그의 기도 가운데 그의 예배 가운데 멜기세덱으로 나타나셨던 그분이 바로 하나님께서 구속의 경륜을 이루시려고 하는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다. 이렇게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그냥 세워진 종교가 아니잖아요. 교양 종교도 아니고 엄청난 하나님의 구속 역사로 이루어진 종교입니다. 이 뼈대만 우리가 밟아가도요. 삶이 놀랍게 변화됩니다. 이 구속의 경륜 복음의 경륜을 밟아가지 않으니까 자꾸 이상한 걸 믿는 거예요.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거예요. 성경에서 말하지도 않는 것을 자기 신념을 가지고 믿는 거예요. 교회는 이래야 된다! 그리고 목사는 이래야 된다! 예배는 이래야 된다! 고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성경대로만 하세요. 아브라함이 걸어간 길, 다윗이 걸어간 길만 그대로 따라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도표를 보시겠습니다. 제사장 멜기세덱이 있고 레위 지파 사람의 제사장이 있죠? 그죠? 수백 년 후에 생겨난 제도라고 그랬어요. 창세기 14장, 시편 110편, 히브리서밖에 없어요. 출애굽기, 레위기 중심으로 이 제사 제도가 나옵니다. 제사장 제도가 한쪽은 영원히 온전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고 한쪽은 아론, 모세의 형, 아론 계열의 사람 제사장을 말합니다. 한쪽은 온전하게 구원하시는 분, 한쪽은 연약하고 무익한 인간일 뿐이에요. 다만 하나님께서 인간 제도를 통해서라도 구원을 받아라 하셨기 때문에 필요는 했다 그렇게 이해하시고 이것은 맹세의 말씀으로 이것은 율법을 통해 그리고 이것은 자신이 친히 제물 되십니다. 백성을 위해 제사와 예물을 따로 드리게 됩니다. 단 한 번만 드리면 끝납니다. 이것은 매일 계속해서 드려야 합니다. 영원하고 완전한 제사이고 한쪽은 죄에 대해서 불완전한 제사라는 것이죠.
제사장 멜기세덱 | 레위지파(모세와 아론)의 제사장 |
창세기 14장, 시편 110편, 히브리서 5,7,10장 | 출애굽기, 레위기 |
영원히 온전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 아론(모세의 형) 계열의 사람 제사장들 |
온전하게 구원하시는 분 | 연약하고 무익한 인간 |
맹세의 말씀 | 율법 |
자신이 친히 제물이 되심 (히브리서 10:10) | 백성을 위해 제사와 예물을 드림 |
단 번에 드림 (히브리서 10:10) | 매일, 계속 (히브리서 10:11) |
영원하고 완전한 제사 (히브리서 10:12) | 죄에 대한 불완전한 제사 (히브리서 10:11) |
이제 마지막으로 정리를 해드리겠습니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이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알려주는 구원의 매뉴얼이에요. 성경을 왜 읽어야 할까! 성경 공부를 왜 해야 될까! 성경을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 들어야 될까! 간단합니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예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구원받기 위해서! 나 죄인이니까! 그러니까,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 관심을 어디에 가져야 되냐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셨는가에 초점을 맞춰 성경을 읽으셔야 돼요.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극악한 죄인을 어떠한 방법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셨는가에 초점을 맞춰 성경을 읽으셔야지 그거는 안 읽고 다른 것만 읽으시면 안 돼요. 아브라함이 부자 되는구나. 거짓말해도 부자 되는구나. 떼 부자가 되네. 그것은 성경을 완전히 잘못 읽는 거예요. 예수 믿으면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치료되네. 그것만 보는 거예요. 그것만. 십자가는 보지 않는 거예요. 그 옷자락을 찢고 십자가에 못 박은 자신의 살을 찢는 그 역사까지는 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냥 늘 옷자락만 붙잡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냥 치유만 일어나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구별이 안 돼요.
여러분! 다른 종교도 귀신이 역사에서 얼마든지 치유의 역사도 일어나고 방언의 역사도 일어납니다. 십자가까지 가지 못하면 그건 올바른 신앙이 아니에요. 그리로 가기 위해서 믿음의 초보에 있는 자들에게 먹을 것도 주시고, 치료의 역사도 일으키시고 기적의 역사도 일으키시는 거예요. 최고의 기적은 뭡니까?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히는 거예요. 우리 인생의 최고의 기적은 그분과 못 박혀 죽고 그분과 함께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 부활의 역사가 우리 일상 속에서 매일매일 일어나는 것 그것이 최고의 기적입니다. 그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성경은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의 도구로 제사장과 제사 제도를 마련해 놓은 거예요. 필요한 일입니다. 있어야만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구약 율법의 시대에는 인간 제사장과 제사 제도가 존재했다고 말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레위기를 읽으셔야 돼요. 레위기를 반드시 통과해 가지 않으면 복음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레위기를 예수와 함께 잘 들어가시면 곳곳마다 다 예수님이예요. 여기도 예수님, 저기도 예수님, 다 예수님이예요. 은혜가 넘쳐납니다. 거기서부터 벌써 십자가가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 구약 율법, 인간 제사장 제도는 이제 신약 복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궁극적이고 온전한 참 제사장의 모형일 뿐이다. 그럼 우리는 모형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실체를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여전히 모형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착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배를 제사처럼 드립니다. 안 드리면 벌 받을 것 같고 왠지 드려야 복을 받을 것 같고 그 모형 시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께서 이미 다윗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참 제사장으로 준비해 놓으셨고, 그 역사의 흐름 가운데 구속의 역사의 흐름 가운데 때가 찼을 때 그 순간의 완전한 구속을 위하여 섭리하실 것입니다. 그대로 이루셨잖아요. 다윗이 기도 가운데 만난, 천상회의 가운데 만난 그 주님을 여러분들도 생생하게 만나고 증언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은 새로운 경륜의 시대, 부름받은 그 시대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하고 점점 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하시고자 하는 구원의 그림이 무엇인가를 멜기세덱을 통해 살짝, 그러나 분명하게 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을 잘 이해하셔야 돼요. 분명하게 본 거예요? 안 본 거예요? 살짝 보면 안 본 거예요? 본 거예요! 아브라함의 이 영적 체험이야말로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아무리 부자 되게 해보세요. 믿음이 생기나! 생겼다가도 없어져요. 건강하게 만들어 보세요. 어차피 죽을 거예요. 언젠가는!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오늘 어디서 오신지도 모르는 그 멜기세덱을 만나 떡과 포도주를 받고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란 가르침까지 받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게 하시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 소속되게 하신다는 확신으로 십일조까지도 드리게 만드는 그 하나님의 존재를 실제적으로 그가 체험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하나 질문해볼게요? 예수님의 조상은 아브라함 맞습니까? 예수님의 조상은 다윗입니까? 마태복음 1장 1절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태복음 1:1)
예수님의 조상은 누구예요? 아브라함이에요. 또 한 명의 조상은 누구예요? 다윗이에요. 누가 먼저예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고 동시에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렸던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중적이죠? 여러분! 예수님 보셨습니까? 예수님 보셨어요? 저는 중학교 3학년 수련회 가서 예수님을 봤어요. 저 때문에 피 흘리시고 내가 너 때문에 아파한다. 예수님을 기도 가운데 분명하게 만났어요. 말씀 선포되는 중에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예수님께서 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계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과 유대인들 간의 논쟁 장면에 아브라함을 언급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한복음 8:51~56)
여기 분명히 나오죠?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봤어요? 못 봤어요? 봤어요! 보고 기뻐했다니까요. 그리고 또다시 그분이 이 땅에 오실 것을 기다리다가 이 땅을 떠났다. 우리가 아브라함과 다윗보다 부족한 게 뭡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르셨어요. 놀라운 선언입니다. 왜요? 내 안에 왕 같은 제사장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이 확신만 가질 수 있다면 2024년도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그 예수를 의지하여 기도하게 될 때 어둠의 권세가 떠나가고, 병마와 죽음이 떠나가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적 날개를 달아주셔서 비상하여 날아오르는 기적의 한 해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 하나님 깊이 만나시고 그 하나님 증언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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