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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고문산 목사(노량진 강남교회)

기도 외에 -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by 복음과삶 2024. 1. 2.

2023.12.31.(주일예배). 기도 외에. 마가복음 9:14~29.

노량진 강남교회 (고문산 목사)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9:14~29)

 

오늘 이 사건은 한 아버지가 귀신 들린 아이를 데리고 오면서 시작이 됩니다. 병행 본문에서는 이 아이를 외아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어요. 이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귀신이 들렸는데 갑자기 그냥 거꾸러져 거품 흘리고 때로는 막 부모 앞에서 이를 갈고 파리해지는 거예요. 문제는 뭐냐하면 예수님이 없는 상태에서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낼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에요. 18절에 보면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그러니까 귀신과의 영적 대결에서 제자들이 실패하고 말았던 거예요. 반면에 나중에 이곳에 오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냐면 귀신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셨고, 왜 그러냐면 말 못하고 못 듣게 하는 귀신아이렇게 정확히 이름을 지칭하셨거든요. 그런 다음에 그 귀신을 꾸짖고 명령하십니다. “더러운 귀신아 그 아이에서 나와라. 다시 들어가지 마라.” 이렇게 혼내고 명령하세요. 그러자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귀신이 떠나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귀신의 정체를 파악하고 귀신을 꾸짖고 명령하고 그러자 귀신이 떠나 갔다. 축귀( 逐鬼, exorcism) 사건의 전형적 패턴입니다. 결론으로 말하면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고,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냈다는 거예요. 제자들은 능력도 없는 일에 나선 꼴이 되어버렸고, 믿음이 없다라고 하는 질책까지 예수님께 듣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이 사건의 본질을 믿음으로 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이 없는 상태에서 능력도 없으면서 무모하게 귀신을 내쫓으려고 덤볐을까?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이미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능력도 받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에요. 6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죠.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마가복음 6:7) 13절로 가보면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마가복음 6:13) 누가 한 일이에요? 예수님이 하신 거예요? 제자들이 한 거예요? 제자들이 한 거예요. 분명히 성경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는 했고 지금은 못 했단 말이에요. 이유가 뭘까 하는 거예요. 이것이 문제의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이런 상황이 매우 심각했던 것 같아요. 내려가 보니까 못 고쳤어? 괜찮아! 내가 고칠게. 사역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이렇게 안 하시고 굉장히 탄식하시며 이 문제를 영적으로 다음과 같이 진단하셨어요.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마가복음 9:19)

 

속상한 마음이 그냥 느껴지지 않아요? 누구에게 한 말입니까? 이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이와 같은 귀신 들린 상태에 있지만 기도도 못하고 아무런 치료의 능력도 없는 그 믿음 없는 아버지를 지칭할 수도 있고, 정작 데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능력도 없이 귀신도 쫓아낼 수 없었던 제자들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할 것이고, 그뿐만 아니라 헛된 논쟁에 빠져서 옆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아무런 관심이 없는 그런 서기관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을 지칭하는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께서 아주 독특한 말을 쓰셨어요. “믿음이 없는 세대여이 믿음이 없는 세대(Generation). 그것은 거기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온 세상을 지칭하는 말이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여기에 포함되고 있다는 거죠. 믿음이 없다. 여러분! 믿음이 있어요? 없어요? 도대체 무슨 믿음을 말하는 거예요? 아니 제자들이 믿음이 있으니까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거 아닙니까? 집도 떠나고 직업도 버리고 전적으로 예수님만 따라가고 있는 길이에요. 믿음이 없다고 말할 수 없어요. 아니 마가복음 6장에서 귀신 내쫓았을 때는 믿음이 있는 거고, 오늘 본문 9장에서 귀신을 전혀 내쫓지 못했을 때는 그 믿음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겁니까? 그때의 믿음과 지금의 믿음의 차이는 과연 뭐냐 하는 것이죠. 더 본질적으로 말씀드리면 도대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시고 그 믿음을 소유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믿음이라는 거를 어떤 분들은 자기 신념으로 유지하는 분들이 많아요. 난 믿음이 이렇다 듣고 보면 자기 신념일 뿐이에요. 성경에 나오지도 않고 예수님도 그렇게 한 적이 없어요. 우리는 예수님의 믿음을 본받는 사람이 돼야 돼요. 그런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이란 뭔가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바로 이 말씀입니다.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마가복음 9:19)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그냥 이 말씀을 좀 더 쉽게 말하면 이런 말이잖아요. “아니 나 외에는 아무도 귀신을 쫓아낼 수 없는 거야? 아니 나 없이는 너희들끼리 이런 일도 못해? 이거 꼭 내가 해야 되는 일이야? 이거 너무한 거 아니야?” 이 말이 이런 뜻이죠. 결국에는 예수님은 제자들이 스스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어야만 했다라고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제자들은 이미 귀신을 쫓아냈던 경험이 있었다고 말씀드렸어요. 뿐만 아니라 제자로 처음 부름 받았을 때부터 그 부르심의 목적 중 하나가 바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예요.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마가복음 3:13~15)

 

분명히 나오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이 뭐예요? 나와 함께 하게 하면서 제자 훈련도 하고 말씀도 가르치고 기도란 이런 것이야 이런 거 가르치기도 하고 이제 실습을 내보내는 거예요. 나처럼 너희들도 권능을 가지고 귀신을 쫓아내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라.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 부르신 목적이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그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무능력한 상태에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더구나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사건 이 바로 직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때 얼굴이 변형되죠. 완전히 천사처럼 바뀌어버려요. 처음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냅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죽을 것이고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는 예언을 이때 말씀을 하세요. 여러분! 바로 이 사건이 있는 다음에 오늘 사건이 이어지고 있는 거죠. 어떤 상황입니까?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예요. 임박했다는 거예요.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온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는 그 놀라운 구속의 사건이 점점 더 임박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아직도 자신의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을 전혀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그 사실에 대하여 지금 예수님께서 탄식하시는 거죠. 그러면서 말씀하신 게 뭐라고요? 내가 얼마나 너희들을 참아야 하겠느냐? 도대체 예수님은 얼마나 우리를 향해 참으셔야겠습니까? 이 한국교회를 향하여 얼마나 참으셔야만 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교회는 이제 망했다. 교회 때문에 세상이 망한다라고 하는 이 시대 앞에 도대체 우리 주님은 얼마나 참아야겠습니까? 여러분의 각자 한 명 한 명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얼마나 참아내셔야만 합니까? 내가 너희를 생명으로 불렀고, 어둠에서 빛으로 불렀고, 이제는 너만 살 뿐만 아니라 네 가족들도 살리고 이웃들도 살리는 사람으로 세상을 살리는 사람으로 불렀는데 도대체 지금 뭐 하고 앉아 있는 거냐! 달력은 넘어가고 있는데 2024년은 다가오고 있는데 내년은 어떻게 살 거야? 너는 작년에도 그렇게 살았잖아! 이러시면 우리는 뭐라고 답해야 될 거냐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문제를 풀 것이냐는 거예요. 도대체 무슨 믿음으로 갈 것이냐 그 실마리가 바로 오늘 이 아이를 고치는 사건 속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이에게 들어간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셨을 때 이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소리 지르며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고 했어요.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에게이로, Ἔγειρε) 이에 일어서니라(아니스테미, ανιστημι).” (마가복음 9:26~27)

 

마가는 이 부분을 아주 중요하게 바라보고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어요. 이 아이는 지금 살았어요? 죽었어요? 여기 성경에 뭐라고 써 있어요? 죽었다고 그랬어요? 살았다고 그랬어요? 죽었다는 말은 있고 살았다는 말은 없어요. 죽었다는 말만 있지. 이 아이 죽은 거예요? 안 죽은 거예요? 죽었던 아이예요. 10명이 보고 10명이 죽었다 그러면 죽은 거예요. 맞죠? 누가 살린 거예요? 예수님이 살린 거죠. 죽었다. 그런데 손을 잡고 일으키니 그 아이가 일어서더라. 일어서다라는 말은 부활하다는 뜻이에요. 다시 살아난다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어요. 오늘 특별히 예수님께서 죽었던 아이를 손잡아 일으킨다는 에게이로 동사와 다시 이 아이가 살아났다는 아니스테미 동사는 철저하게 부활과 관련된 동사입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할 때에 사용되는 동사예요. 부활 용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았잖아요. 누가 일으키신 거죠? 하나님께서 일으키셨다고 나오잖아요. 그 아들을 이렇게 일으켰다고 그러잖아요. 그 외아들을 살리셨다고 그러잖아요. 로마서 14절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αναστασις, 일으키심을 받으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로마서 1:4)


다시 살아나셨다. 다시 일으킴을 받았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아이에게 해당하는 동사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어요. 골로새서 2장에 보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는데요.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Ἔγειρε)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Ἔγειρε).” (골로새서 2:12)

 

손을 잡고 일으키는 에게이로라는 동사를 이 부활의 용어로 또 예수 믿는 자들이 예수 안에서 세례받게 될 때에 과거가 죽고 현재와 미래로 살아나는 이 놀라운 개념을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동사와 똑같이 사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믿음이라고 하는 게 뭘까? 기도라고 하는 게 과연 뭘까? 왜 하필이면 귀신 들린 아이를 치료하는 사건이 내가 죽고 살아날 것이라고 하는 이 예언의 말씀 세 번이나 선포하는 이 말씀 한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지 우리는 주목해야만 합니다.


표를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올라가실 때마다 세 번을 고지하셨어요. 8장에서 죽임당하고 4일 만에 살아날 것이다. 또 변화산에서 내려오시는 길에도 뭐라고 말씀하냐면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 또 오늘 사건이 끝나고 10장에 들어가면 또 역시나 죽을 것이나 그는 3일 만에 살아나리라 살아난다라는 동사가 바로 아니스테미 동사입니다. 똑같은 동사입니다.

마가복음 831 마가복음 99 마가복음 1033~34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왜 이 사건을 여기에 위치시켰을까요? 관계가 있으니까 그러겠죠. 그죠? 그냥 한 건 아니겠죠. 예수님의 그 죽으심 없이는 악의 세력이 절대 멸망할 수 없다. 구속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악의 세력을 물리치셨어요. 이거 이미 일어난 일이에요. 그리고 현재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지 않으면 우리 또한 악한 영의 세력을 절대로 이길 수가 없다. 구속사적 현상이라고 말해요. 이미 일어난 일을 기반으로 하여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그 믿음대로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그 일이 우리의 삶 속에도 그대로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죠. 그거를 이 아이를 치료하는 사건을 통해 보여주고 계시는 거예요. 히브리서 저자가 이 부분을 아주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는데요.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히브리서 2:13~15)

 

희한한 선언인데 예수님께서 마귀를 이기시는 방법이 뭐냐 하면 자기의 몸으로 죽는 방법이에요. 마귀의 권세를 박살 내는 방법이 뭐냐 하면 스스로가 육신을 입고 그 육신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거예요. 그렇게 죽은 이유가 뭐냐? 피와 살을 가지고 있는 우리 때문에 그와 같은 죽으심의 방법으로 죽음의 권세, 마귀의 권세를 깨부셨고, 일평생 죽기를 두려워하며 노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방시키셨다. 이렇게 말씀하시죠. 정리하면 본문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이 모든 구원의 완성이고 모든 구원 사역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동일한 원리를 가지고 이 아이의 죽고 살아남이 예수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하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에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을 근거로 하지 않으면 인간에게 그 어떠한 죽음과 다시 살아남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아요. 육체적으로는 죽을 수 있어요. 그러나 죽고 살아나는 일은 예수님이 한 번 역사 속에서 이루신 이 일이 없었더라면 아무리 사람이 애를 쓰고 노력해도 다시 죽고 살아나는 일은 없다 하는 것이죠. 그것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어떠한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다. 뭐가 기적인가? 갑자기 떼부자 되는 게 기적인가? 그게 기적이 아니죠. 예수님께서 그토록 자신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을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가르쳐주신 이유가 그겁니다. 계속해서 올라가면서 계속 이 말을 하세요. 난 죽고 살아날 거야. 난 죽고 살아날 거야. 그리고 그것이 제자들에게 진짜로 믿어지도록 오늘 이 아이가 죽은 상태에서 다시 살아난 것을 실제로 제자들에게 지금 보여주고 계신 거예요. 그렇다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방법이 뭐냐는 거죠! 뭐죠? 기도밖에 없다.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 다른 사본에서는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 그랬어요. 도대체 무슨 기도입니까? 한번 따라서 읽어볼까요?

 

기도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을 경험하는 은혜의 통로이다.”


기도가 뭐라고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을 경험하는 은혜의 통로. 그럼 기도를 안 하면 어떻게 돼요? 기도를 안 해요. 어떤 이유에서든지 기도를 안 한단 말이죠. ? 기도할 필요가 없으니까. 기도 안 해도 살 만하니까. 또 어떤 분들은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는 것 같고 기도를 해도 내 삶의 돌파구가 없는 것 같으니까 미리 기도를 포기해버려요. 기도를 안 해요. 그럼 기도를 안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예수의 그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경험되지 않는다 그 말이에요. 무얼 통해서만 경험돼요?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해요. 금식을 통해서만 가능해요. 도대체 기도와 금식이 뭐길래요? 내 자아를 죽이는 거잖아요. 기도가 내 자아를 강화시킨다면 그건 잘못된 기도예요. 기도하면 할수록 나를 자랑하고 나를 드러내고 큰소리치면 그거는 기도가 잘못된 거예요. 내가 살아있는 기도 하나님 받지 못하십니다. 내가 예수와 함께 죽어져버려야 돼요. 하여간 죄든 어떤 욕망이든 꿈이든 간에 내 자신을 자꾸 드러내려고 하는 그것을 완전히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버릴 때 그 기도가 주님 앞에 상달되고 내 자아가 죽어진 그 현장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합니다. 누구에게요? 죽은 사람에게요. 그게 기도입니다. 그게 금식이고요. 기도가 뭐예요? 금식이 뭐예요? 곡기를 끊는 거예요. 육체적 양식을 끊어버리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의 은혜 없으면 죽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닙니다라고 하는 결단이고 고백이고 이제는 육신에서 나오는 말은 금하겠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내 입에 붙여주시는 말, 성령께서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그 말만 하고 그 하라고 하시는 행동만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기도요 바로 금식이다 하는 거죠. 원리가 똑같아요. 예수가 죽고 살아나셨어요. 오늘 본문을 통해 아이가 죽고 살아났어요. 똑같이 내가 죽고 내가 살아난다 이런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느냐? 기도 외에는 안 일어난다는 거예요. 기도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제자들은 귀신 쫓아냈던 경험 때문에 이번에도 당연히 될 줄 알고 마치 그 능력이 자신의 소유권이 양 자만했던 거죠. 하나의 매뉴얼(manual)로 고착화돼서 통용에 왔던 수식처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갈지어다 기도도 제대로 안 하고 이렇게 한 거예요. 여러분! 자신의 자아와 자신의 노하우로 매뉴얼로 영적 세계에서 이길 수 있습니까?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까? 여러분을 사로잡고 있는 이 악한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이 자녀 세대들 도무지 이해할 길 없고 점점 더 어떻게 할 줄을 모르는 상황에서 무엇으로 이기겠습니까? 여러분! 기도를 통해 내가 예수와 함께 죽어지고 기도와 함께 새로운 자아가 예수와 함께 살아가는 그 기도의 능력의 역사, 그 부활의 역사만으로 가능할 줄로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뭐냐? 다시 한 번 정리하면

 

기도가 바로 죽고 살아나는 부활의 연속된 과정이기 때문이다.”

 

죄와 함께 기도로 죽어야 돼요. 그래서 기도해야 되는 거예요. 기도하지 않고 말을 하니까 문제가 돼요. 기도하지 않고 사역을 하니까 문제가 된다고 말씀드리잖아요. 목사도 마찬가지고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예요. 예수로 인하여 날마다 날마다 새로워져야 돼요. 날마다 기도하고 날마다 나를 죽이고 날마다 예수와 함께 살아나는 그 부활의 영성 기도의 영성이 없이는 개인도 가정도 공동체도 살려낼 수 없습니다. 오늘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에게도 믿음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아이의 아버지 한번 말을 들어보세요.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마가복음 9:21~22)

 

어릴 때부터였습니다. 이 말씀을 읽는데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애가 그냥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랬다는 거예요.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결국에는 예수님 앞에 하는 말이 뭐냐면 할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시옵소서. 개혁 성경 번역은 정중하게 느껴지죠? 그죠? 예수님한테 정중하게 부탁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원문을 보면 만약 당신이 능력이 있다면 이런 말이에요. 굉장히 이상한 질문이에요. 아니 예수님이 치료하실 줄로 믿고 그분이 치료할 줄로 믿고 정작 와 놓고 한다는 소리가 뭐예요? “할 수 있거든우리가 그래요. 하나님 다 알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붙잡고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줄로 믿고 기도하면서도 우리의 마음속 한구석에 무엇이 있냐면 하실 수 있으면 하시고요. 그것까지도 하시겠어요! 그러자,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기도할 때마다 꼭 유념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9:23)


아이의 아버지 역시도 믿음의 문제라고 보신 거예요. 여러분! 믿는 자가 할 일이 뭡니까? 믿는 거예요.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다. 하나님이 나에게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신다. 어떻게 해요? 믿는 거예요? 이 아이의 아버지에게도 믿음이 필요한 거죠. 어떤 믿음입니까? 우리에게는 그렇습니다. 아멘!” 하는 믿음만 필요한 거예요. 아이의 아버지가 이걸 깨달았어요. 그러자 말이 바뀌었어요. 뭐라고 바뀌었나? 한번 읽어볼까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마가복음 9:24)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할 수 있거든 도와주세요. 했던 그가 뭐라고 말합니까? 도와줄 대상이 바뀌어버려요. 우리가 아니라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옵소서.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사실은 참 이상한 말이에요. 그런데 기도하는 분들은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믿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옵소서! 믿음만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하시면 하나님이 그대로 이루신다. 우리에게는 믿음만이 필요하다. 제자들에게 없었던 것, 오늘 이 아이의 아버지에게 없었던 것이 뭡니까?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그 승리에 대한 믿음이 그 기대감이 하나도 없었어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믿음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믿음의 기도가 있습니까? 병든 자를 보면 하나님이 치료하실 줄로 믿고 기도하는 그 믿음의 기도가 있습니까? 죄 때문에 헤매이고 공동체를 흔드는 그런 악한 사람들조차도 믿음으로 기도하면 치료된다는 속함을 받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여러분 기도하고 있습니까? 믿음이란 뭔가? 능력 있는 기도는 뭔가? 딱 두 가지로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능치 못하신 일이 없으시다. 이걸 믿는 거예요.

 

둘째, 그 능하심은 오직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산 나의 기도를 통해서 흘러간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다. 이 믿는 게 복이에요. 내가 복 되는 길이에요. 그리고 그냥 그것을 내 안에만 갖고 있지 말고 어떠한 문제든지 간에 하나님은 치료하신다. 하나님을 일으키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내 자아가 기도 가운데 죽고 예수로만 살아나는 기도를 드리게 될 때에 그 복이 흘러나가 여러분의 가족들을 치료하고 이웃들을 회복시키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새해를 이제 기도로 시작하세요. 다른 건 못해도 기도는 할 수 있잖아요. 기도만 안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새해에 꼭 이 믿음의 기도를 드리셔서 모든 삶의 영역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