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고문산 목사(노량진 강남교회)

사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by 복음과삶 2024. 3. 11.

2024.03.10.(주일예배). 사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창세기 16:1~6

노량진 강남교회 (고문산 목사)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창세기 16:1~6)

 

 

창세기 16장의 말씀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사래가 계속해서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드디어 오늘 16장에 들어와서 일을 저지르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남편이 자기를 누이라고 해서 딴 남자에게 갈 뻔한 위기 때에도 성경은 이 사래가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요. 그리고 131415장에 이르는 시간까지도 사래는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사래가 놀라운 제안을 남편 아브람에게 하게 되고 아브람은 그 제안을 그대로 수용하여 드디어 애굽 여자 하갈를 통해서 그 첩을 통해서 아들을 낳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분명히 네 몸에서 날 자, 즉 아브람 네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약속을 해주셨는데 그 약속이 10년이 지나도록 이루어지지 않자 드디어 사래가 스스로 인간적인 해결책을 내놓은 것입니다. 마치 이전 장에서 남편 아브람이 차라리 우리 집에서 키운 종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시죠라고 제안했던 것처럼 이제 그 제안도 안 되니까 이제 사래가 나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해결책이라고 봐야겠죠. 우리가 이것을 보고야 사래 이상하다 뭐 이상한 여자다 부도덕한 여자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거는 너무나 자연적인 인간의 해결책이기 때문에 그렇죠. 하지만 성경은 이것을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죄다 즉 원죄에 해당한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그 원죄를 드러낸 죄라고 단호하게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우리가 개역 성경을 그냥 읽으면 이 이야기는 한 여인의 기구한 이야기로 읽어낼 수가 있어요. 그냥 가정사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거 있을 법한 일이지라고 그냥 읽고 넘어갈 수가 있어요. 하지만 성경 저자의 입장은 다르다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내용을 좀 복습해 보면 오늘 본문 161절에서 3절에는 말하다‘ ’듣다‘ ’취하다‘ ’주다라고 하는 동사가 배열되어 있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 동사가 과거 창세기 3장에 나타난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의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는 동사의 배열이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오늘 본문을 보시면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말하죠. 그러니까 아브람이 사래의 제안을 어떻게 해요? 들었다 수용했다. 청종했다. 이렇게 나옵니다. 사래가 애굽 여자 하갈를 마치 물건처럼 딱 취하여서 데려다가 아브람에게 첩으로 줍니다. 왜냐? 소유주가 사래니까요. 이러한 모습은 과거 창세기 3장에서 뱀이 여자에게 말을 걸고 또 여자가 뱀에게 말을 하고 그 말을 사람이 듣고 하와가 자기만 선악과를 먹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취하여 남편에게 가져다 주었다라고 하는 그 내용에서 그대로 이 동사의 배열이 반복되고 있다는 거죠. 여러분! 무엇을 나타내는 겁니까?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 또다시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이 사래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 것이죠. 한 가정의 부부의 삶을 통해서 잊혀졌던 그 아담과 하와의 죄악, 스스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자기 자아가 부추기는 그 소리에 순종하여 행동하려고 하는 그 원죄적 욕망이 다시 한번 일어나고 있다는 거예요. 하필이면 그것도 언약식을 거행한 이후에 일어나고 있다. 마치도 결혼식을 했는데 외도를 한 거나 똑같은 거죠. 짐승을 쪼개어 불을 지나가게 하면서 내가 앞으로 이 모든 걸 책임질거야라고 하는 일방적 언약식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사래를 통하여 아담의 죄가 다시 한번 드러나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신앙인들에게도 일어나는 이 모든 문제의 본질은 다른 목적 다른 시선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목적이 달라요. 뭔가를 열심히 사는데 달려가는 방향이 달라요. 나름 깨끗하게 삽니다. 나름 정직하게 삽니다. 그런데 목적이 달라요. 하나님의 목적과 지금 사래의 목적 아브라함 이 부부의 목적이 서로 엇갈려버렸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목적이 뭡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분명하죠. 하나님 뜻은 뭐예요? 아브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거죠. 맞죠? 아브람을 선택하셔서 이제 새롭게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 이게 하나님의 분명한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람의 뜻은 뭐예요? 하나님을 통해서 누구의 나라를 만들려고 해요? 아브람 자기의 나라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이용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거예요. 내 욕망을 이루고자 하나님을 자꾸 이용하는 거예요. 종교의 이름으로 신앙의 이름으로 때로는 열심의 그러한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을 자꾸 이용해서 자기 목적을 이루려고 한다. 이게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본질입니다. 아브람은 목적을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브람의 나라로 바꿔버린 거예요. 사래와 아브람의 이러한 행동을 성경이 매우 심각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명심해야만 합니다. 그냥 단순한 개인사나 가정사로 치부하기가 어려워요. 왜냐하면 이 16장의 위치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왜 이 아브람의 또 사래의 부부 이야기가 여기에 기록이 되어 있는가! 우리는 유념해서 읽어야겠죠. 사래가 남편 아브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데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창세기 16:2)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여러분! 그때나 지금이나 자녀를 얻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물론 요즘에 본성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 젊은이들이 결혼은 하지만 애를 안 낳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서로 달리 산 어떤 존재가 서로를 사랑해서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되면 그 열매가 맺어지는 것은 자연의 원리인 거죠. 맞죠? 아닙니까? 결혼하시고 애 낳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연적인 일이란 말이에요. 인간의 본성입니다. 어쩌면 사래는 그 시대의 풍습에 걸맞은 현명한 판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비난할 수가 없어요. 심지어는 여자로서 자기 자신을 포기한 거잖아요. 자기 헌신 아닙니까? 내가 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내 모습을 희생해서라도 가문을 세워야겠다. 대를 이어가겠다. 얼마나 대견한 생각입니까? 그녀의 생각과 입장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는 것이죠.

 

그러나 성경 저자는 이러한 사래의 제안과 아브람의 수용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래가 했던 말 속에 들어있어요.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하는 이 말입니다. 자녀를 얻다라고 개역 성경이 번역해 놓은 이 부분. 특이하게도 하필이면 사래는 히브리어 동사 바나’(בָּנָה)를 사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원래 히브리어에 얄라드라고 하는 말이 있어요. ‘임신하다’ ‘애를 낳다여기서 이제 족보라는 말이 나옵니다. ‘톨레도트’(תּוֹלְדָה)라는 말이 나오는데 물론 바나라고 하는 동사에도 ’(בֵּן)이라고 하는 아들의 의미가 파생됐어요. 따님들은 섭섭하겠지만 대대로 아들을 낳아서 아들을 통하여 가문을 세운다는 의식이 인류의 기본적 사고방식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얄라드가 아닌 바나라고 하는 이 동사를 여기에서 사용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참 어울리지 않는 사용법입니다. 왜냐하면 이 동사의 본래적 의미는 건설하다’ ‘재건하다’ ‘성취하다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이 동사가 지금까지의 용례를 통해 본다면 이 동사는 과거 가인이 성을 쌓을 때 사용했던 동사예요.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애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애녹이라 하니라.” (창세기 4:17)

 

여기서 성을 쌓다라고 하는 말이 지금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하는 바나라고 하는 동사와 동일하다는 거죠. 여러분! 가인이 애녹성을 쌓았을 때의 상황이 어떠한 것인지 여러분 아시죠? 자신의 힘과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 없이도 자신의 안전 체계를 구축하겠다라고 생각하고 성을 쌓았을 때 그때 사용된 동사가 바나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인간들이 공모하여 바벨탑을 쌓을 때 이 동사가 다시 한번 등장합니다.

 

또 말하되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창세기 11:4)

 

이 뉘앙스가 어떤 뉘앙스인지 아시겠죠?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맥에서 등장하고 있는 동사입니다. 물론 긍정적 의미로도 사용이 되어 노아가 하나님께 단을 쌓을 때, 그리고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 단을 쌓을 때에도 이 동사는 사용이 됩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창세기 8:20)

 

노아가 여호와께 어떻게 했어요?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다. 그러니까 예배드리는 겁니다. 모든 심판 이후에 살려주심에 감사하고 그 언약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 인생은 이제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내 가족들은 다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라고 하는 결단으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 예배할 때 제단을 쌓을 때 이 동사가 사용돼요. 그리고 아브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세기 12:8)

 

부르심을 받고 나그네처럼 낯선 땅에 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뭐냐 단을 쌓는 거였어요. 내 인생은 내 가족들의 운명은 오직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제단을 쌓았어요. 이게 바로 바나라고 하는 동사가 가지고 있는 용례입니다. 그렇다면 정리해 보면 이 바나라고 하는 동사는 둘 중에 하나죠. 자신을 위한 성과 가문을 세울 때 사용되든가 아니면 하나님께 제단을 쌓을 때 사용되는 동사죠. 그러니까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다라고 하는 의미는 뭐냐 하면 내 힘으로 내 인생을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내 힘으로 내 가족을 내 가문을 세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라고 하는 고백을 드릴 때 제단을 쌓는 것이죠. 그렇다면 오늘 이 사래의 입에서 나온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라고 하는 이 바나라고 하는 말은 어떤 맥락에서 사용됐겠습니까? 물론 개역 성경은 이것을 자연스럽게 번역을 했어요.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뭐 당연하지 하지만 이 특이한 의미의 동사가 이 본문 가운데 사용된 의도는 너무나 명확합니다. 사래는 과거 하나님을 대적해 자신의 가문과 왕국을 세우려고 했던 그 가인이나 또 서로 공모하여 바벨탑을 세워서 이름을 내려고 했다가 흩어져 버렸던 그 무리들과 똑같은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여전히 또 자기 힘으로 내 가문을 세워보겠다라고 하는 생각이 사람의 마음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약속이 주어졌고 또 그 약속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언약식이 치러졌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사래와 아브람의 마음속에 과거 지나갔던 그 가인과 바벨탑의 속성이 다시 한번 드러나고 있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성경 저자는 바로 이 의도와 계획을 원문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데 원문에 맞게 해석해보자면 이런 의미예요. 영어 성경도 이렇게 의미를 살려놨는데 한번 읽어보시죠.


가서 내 여종과 자라! 그럼 내가 내 가문을 세울 수 있을 거야! (Go, sleep with my maidservant; perhaps I can build a family through her.)

 

그러니까 지금 자식도 없고 아무런 후손도 없어서 가문에 대한 미래가 막막한 이 상황에서 당신이 만약에 이 여종과 잠을 잔다면 이 가문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Build a family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다시 세울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래는 지금 적나라하게 아주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사래 자신의 가문, 사래 자신의 일가, 즉 사래 자신의 나라를 세우고 싶었던 거예요. 성경 저자가 이것을 지금 드러내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가 무엇이냐! 이 사래의 제안과 아브람의 순종에 따라 결국 여종 하갈이 임신을 하게 됩니다. 이 부분만 놓고 본다면 처음에는 모든 것이 그들의 계획대로 잘 되는 것만 같았어요. 사래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드디어 내가 생각한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구나! 역시 내가 헌신하니까 내가 희생하니까 이런 좋은 날이 오는구나! 생각하지 않았겠어요? 그러나 곧바로 그 계획이 엉클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4절의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창세기 16:4)

 

멸시했다는 말이 뭐예요? 째려봤다는 뜻이에요. 깔봤다는 말이에요. 이런 장면은 사무엘상 1장에 가보면 그 아이를 낳은 브닌나가 아이를 못 낳는 한나를 대하는 태도와 똑같습니다. 사래는 이러한 결과를 예상했을까요? 아니 갑자기 임신한 걸 알고 이 애굽 여자 이 종이 감히 여주인의 그 얼굴을 깔보는 그것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거죠. 이어지는 5절에 보면 사래는 남편에게 다음과 같이 하소연하고 있어요.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창세기 16:5)

 

모욕을 당했어요. 여러분! 어떻게 하는 게 모욕당하는 거예요? 도대체 하갈이 사래 여주인에게 뭐라고 모욕을 한 거예요? 여러분 상상할 수 있는 모욕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너도 여자냐? 애도 못 낳는 것이! 그랬겠죠. 모욕을 했다는 거예요. 그 계획의 결과가 뭡니까? 남은 것은 멸시와 모욕밖에는 없었다는 거예요. 과연 사래가 처음부터 생각을 했겠느냐? 오늘 아브람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과거 창세기 12장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을 때처럼 또다시 무능하고 불의한 불신의 사람으로 돌아왔어요. 아브람이 사래에게 하는 말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창세기 16:6)

 

여기는 당신을 강조해서 읽어야 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당신이 알아서 하라 그 말이에요. 당신이 저지른 일이니까 당신이 알아서 하란 말이예요. 같이 공모해서 같이 일을 벌려놓고 이제 문제가 생기니까 다 당신이 책임지라 그 말이에요. 마치 창세기 3장에서 그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는 그 인간의 모습과 동일하죠. 바로 앞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그랬어요. 너 의인이야! 너 옳아. 그랬던 그 의로움은 온데간데없고, 남자로서 남편으로서 가져야 될 기본적 의리마저도 완전히 상실한 아브람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요. 결국 아브람의 묵인하에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게 되었고, 하갈은 그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버립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서 뭔가 자식을 낳아서 그 자식을 얻어서 가문을 세우려고 했던 이 사래의 계획은 완전히 무너져버려 남는 것은 그저 상상할 수 없는 주인으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그 여종의 멸시와 모욕, 또 남편의 이 회피, 무능함, 그걸로 인한 억울함, 학대당함, 폭력, 헤어짐, 상실, 결핍, 이거밖에는 남지 않았다, 총체적 난국에 봉착했다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거죠.

 

여러분! 보십시오. 처음에도 말씀드렸지만 이것은 상식적인 선택이라고 그랬어요. 일상적이고 심지어는 본성적이고 자연적인 선택입니다. 이것을 누가 죄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이것은 현명하기까지 합니다. 심지어는 자기 희생적입니다. 자기 헌신적입니다. 하나님이 나한테 약속을 주셨으니까 내가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한번 도와봐야지 하는 자기 열정이고 자기 헌신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데, 그러한 계획의 결과는 항상 이렇게 귀결된다는 거죠. 자기에게도 상처를 입히고 결국에는 남들까지 심각한 피해를 주게 되는 거죠. 가정을 위해서 가정을 세우려고 했는데 결국에는 가정을 해체시키는 역할을 해요. 교회를 위하는 것인데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 것인데 결국에 나중에 보면 교회를 망가뜨려요. 뭐가요? 그 사람의 열정이, 그 사람의 과도한 헌신이, 그 사람 스스로의 인간적 계획이 모든 것을 다 망가뜨린다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는 여기 이러한 성경의 이야기에서 무엇을 교훈 받아야겠습니까? 10년이 지나도 10년 전에 했던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요. 내가 한번 해봤고 그래서 실망하고 낙심하고 망가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또다시 나의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내 열심을 내세우고 있어요. 그리고 심지어는 그것을 자녀 세대들에까지 가르치고 있어요. 그 자녀들은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죠.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무엇이 교회의 회복을 갖고 올 수 있을까? 무엇이 다시 한번 이 절망의 세대에 희망을 주고 교회에 부흥을 가져올 수 있을까? 우리는 본질적인 부분에서 출발해야 해요. 열심이 없어졌다고요? 아니, 없어져야 됩니다. 우리 한국교회를 잘못 세웠던 그 열심들은 그 인간적 욕망들, 교회가 잘못 가졌던 그 세속적 야망들은 이번 기회에 다 없어져 버려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그 일이 우리의 삶 가운데 다시 경험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여러분! 이러한 파멸은 사래가 내가 내 일가를 세우리라! 마음먹었을 때부터 예견되었던 결과였어요. 모든 일에 내가 주인 될 때 나라고 하는 이 나의 자아가 주인 되었을 때에 망가지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바로 내가 생각했던 나의 나라가 망가지는 거예요. 이래서 교회가 되겠는가! 뭐 이래서 나라가 되겠는가! 자기 열심을 가지고 자기주장만 하고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막 무너질 것 같지만 또 그렇지는 않아요. 나의 나라가 철저하게 무너지는 것이죠.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라고 하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가 신앙적으로 오히려 위험한 순간이에요.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다 넘겨주셔야 돼요. 목회도 그렇더라고요. 이제 좀 할 만하다. 이제 좀 해보니까 이렇게 하면 되겠다. 그때가 제일 위험한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 개인도 살고 그게 개인의 부흥이고 가정의 부흥이고 그게 교회의 부흥인 줄로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계속 기다리고 계시는 거잖아요. 인간은 왜 하나님의 약속이 이렇게 이루어지지 않으실까라고 안타까워하고 있지만,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아브람과 사래를 기다리고 있는 거죠. 언제까지? 나라고 하는 주어가 완전히 하나님이라는 주어로 바뀔 때까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라고 주어가 바뀔 때까지 하나님이 기다리고 있죠. 완전히 항복할 때까지. 그리고 나중에 성경을 읽어보면 사래가 헛웃음을 칠 때까지! 나중에 헛웃음을 치잖아요. 내가 무슨 내가 무슨 애를 낳아! ! 저 양반하고 내가 무슨 애를 낳아! 라고 헛웃음을 칠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거죠. 그때가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할 때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오늘 16장 이 불신과 파멸의 시간이 흐른 뒤에 이어지는 창세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도권을 계속해서 강조하십니다.

 

내가, 내가, 내 언약을, 내 언약을, 내 언약을 하는 거예요. ‘수도 없이창세기 17, 오늘 돌아가서 한번 밑줄 쳐보세요. ‘내가, 내가, 내가, 할 거야. 내 언약이 말이야.’ 이런 거예요. 대표적으로 창세기 1716절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사래)에게 복을 주어 그(사래)가 네(아브람)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창세기 17:16)

 

하나님의 방식이죠. 내가 말이야 네 아내를 통해서 너의 씨를 너에게 줄 거야. 이게 나의 방식이야. 그리고 21절에 가보면 이렇게 말씀하시죠.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창세기 17:21)


그 방식과 시기까지 하나님이 다 정하시죠. 내가 할 거야. 네가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 거야. 네 방식이나 네 계획대로 하는 게 아니라 내 언약을 따라 내가 이루는 때에 할 거야라고 17장에서 계속해서 반복해서 말씀하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초자연적인 방식과 시간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라고 하면 도둑질하고 속이고 막 음란하게 죄짓는 이것만을 죄라고 생각해요. 여러분!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사람은 이 부분에서 뭐라고 말하냐면 진짜 죄는 자연적인 죄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게 참 충격적인 선언인데 내가 생각할 때 이건 누구나 아는 거예요. 당연한 거예요. 자연스러운 거예요. 죄라고 말하기 힘든 일이에요. 그런데 그 속에 죄가 숨어 있다고 하는 거죠. 죄의 본질은 내 자아, 내가 뭔가를 하려고 하는 이 기질, 이게 자연적인 방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들을 나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들을 좌초시킨다는 거예요. 여러분! 뭐가 문제인지 아시겠죠?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먼저 스스로 하나님이 되겠다. 나는 내 힘으로 내 삶을 살아가야겠다라고 하는 그 아담적 방식, 그리고 가인적인 삶의 방식, 그리고 그 바벨탑의 사고 방식,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아브람과 사래의 그 사고방식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일하세요. 그러니까 이게 완전히 무너져야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뭔가를 세우세요. 이게 먼저예요. 그러니까 회개가 먼저예요. 내가 어디에서부터 잘못 여기까지 왔는가를 돌아보고 그것을 반복하지 않아야만 해요. 그게 여러분의 영적인 새해고 그것이 여러분의 영적 새 봄날이 될 것입니다. 달력 넘기고 달력 찢고 봄날 찾아오고 꽃 피면 뭐 합니까? 내 영혼이 변화되지 않는데요. 무너져야 합니다. 이 지겹도록 이어지고 있는 아담 때부터 가인 바벨탑을 통과하여 심지어는 이 아브람과 사래의 집안에까지 엄습해 오는 이 스스로 하려고 하는 이 원죄적 욕망이 완전히 무너지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일하신다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 어떻게 일하시는가! 계속해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셨던 바로 그 예수님의 순종을 통해 일하신다. 정리되시죠. 아브람과 사래의 그런 기질을 무너뜨리시고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 순종의 방식으로 오늘도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죠? 뭐라고 기도하셨어요?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누가복음 22:42)

 

누구의 원대로요? 아버지의 원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그리고 예수님은 이 땅에서 평생동안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셨어요. 평생 기도 제목이었어요. 마태복음 6장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태복음 6:10)


하나님의 나라! 나에서 하나님으로 주어가 바뀌어질 때에 그 순종의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너무 오래 기다린 나머지 여러분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것은 없습니까? 주님이 하시는 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주님을 돕는다는 생각으로 오늘 사래처럼 과도한 자기 헌신 내지는 자기 희생을 가장한 그런 불순종의 모습은 우리들에게 없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나의 나라 내지는 나의 가문을 세우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너무 신앙이 가족 중심으로, 내 자식 중심으로 바뀌다 보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안중에도 없는 그런 어리석은 신앙생활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내 가문을 세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뜻대로 원대로 세우려고 순종할 수 있다면 나머지 모두는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 주실 줄로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적과 그 시선과 순서를 완전히 바꾸시는 은혜의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