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4.(주일예배). 순종의 완성, 그리스도. 창세기 16:7~15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창세기 16:7~15)
오늘 성찬으로 나가기 전에 하나님 말씀 함께 나누면서 특별히 창세기 16장에 나타나 있는 순종의 문제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람과 사래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자기의 나라를 만들려는 계획을 가졌는데 결국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본문은 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인 애굽의 한 여자 하갈의 고통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갈을 포함해서 아브람과 사래의 입과 눈과 귀를 통하여 망가진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입과 귀와 눈은 대리모로 임신하여 학대받아 도망가고 있는 이 하갈을 향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받는 자의 신음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틀어서 하나님의 백성이든지 아니든지 심지어는 교회를 다니든지 교회를 안 다니든지 예수를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간에 하나님의 모든 것이 이 땅에 고통받는 자들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지금 광야 술 길 샘 곁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을 발견했다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갈이 요청한 것이 아니고 광야에 있는 하갈을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신 겁니다. 먼저 찾아오셔서 발견을 한 것이죠. 그리고 거기서 하갈에게 질문을 합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창세기 16:8)
이 질문은 하갈에게만 주어지는 질문이 아니라 사실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에게 주어져 있는 삶의 근본적인 질문이죠.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결국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하는 이 질문입니다. 하갈이 여주인 사래를 피해 도망하고 있고 또 지금 어쩔 수 없이 자기가 나왔던 고향인 이집트로 가고 있다는 것을 과연 하나님이 모르시고 이렇게 질문했을까? 오늘 하갈을 뭐라고 부르고 있어요? 사래의 여종 하갈아! (창세기 16:8) 이렇게 부르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이 하갈이 사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고, 지금 하갈을 발견한 장소가 술 길 샘 곁이라고 본다면 이 길은 애굽으로 향하는 길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누구도 다 알 수 있다 하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하갈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질문하고 있어요. 이미 사래의 여종 하갈아! 8절에서 말하면서 그가 사래로부터 왔음을 알고 또 하갈 자신도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창세기 16:8) 라고 답을 하고 있죠. 그러니까 분명히 하갈은 사래로부터 지금 피해 온 것입니다. 여주인 사래를 피해서 온 것이 분명한데 하나님은 다시 묻고 있는 거죠. 너 도대체 어디 출신이야? 너의 근본이 무엇이야? 그리고 너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니? 살려고 가는 거니? 죽으러 가는 거니? 생각이 있으면서 가고 있는 거니? 라고 질문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나 오늘 하갈은 갈 곳에 대해서는 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애굽 땅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추측으로 충분히 추측할 수 있지만 그 곳으로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처지가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 거죠. 답을 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이 가야 할 곳을 사래의 수하다라고 정해주고 있죠. 우리 9절의 말씀 한번 다시 읽어볼까요?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창세기 16:9)
그동안 사래의 여종으로 살아왔는데, 사래의 학대를 피하여 지금 광야 길로 나왔는데 하나님께서는 다시 사래에게로 돌아가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참 힘든 요구죠. 그죠? 시어머니한테 핍박받고 나온 며느리한테 너 다시 돌아가라. 남편한테 핍박받고 나온 사람한테 돌아가라. 아버지한테 맞고 하는 자식한테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라. 핍박받는 민족, 식민지의 민족에게 다시 그 민족의 강탈 속으로 들어가라 하는 요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이 질문과 답이 어떠한 특정 지역이 아니라 누구의 소속이라고 하는 점이에요. 사래의 소속을 떠나 도망가고 있지만 다시 사래 소속으로 돌아가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 말은 어쩌면 사래 학대를 피해 도망가고 있는 하갈에게는 매우 잔인한 요구죠. 더구나 가서 사래에게 복종하라라고 하는 이 복종에 해당하는 단어가 6절에 나타난 사래가 하갈에게 했던 그 학대라고 하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아나’(עֲנָה)라고 하는 ‘고통’이라고 하는 단어인데 한글 개역 성경은 점잖게 번역을 했어요. 다시 복종해라. 네가 종이니까 주인한테 가서 복종해라 그런 말이지만, 원문상으로 번역해 보면 ‘너를 학대했던 여주인에게 가서 그 아래에서 학대를 스스로 견뎌라’는 말이에요. 굉장히 잔인한 명령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하시겠어요?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더 어려운 점은 바로 이러한 요구 직후에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지고 있다는 점이에요.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창세기 16:10~12)
이스마엘에 관한 얘기죠. 씨를 번성케 해줄 것이다. 이거 지금 하갈에게 하는 약속이에요.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성경에서 씨의 번성에 관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나타내는 전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타락 전에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을 주시냐면 다음과 같은 축복이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창세기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8)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복을 주실 때 반드시 그 후손에 대한 번성을 축복으로 주시죠. 나중에 홍수 후에 노아에게도 주신 복을 보면 동일합니다.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창세기 8:17)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세기 9:1)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창세기 9:7)
그냥 주어진 말이 아니에요. 축복의 후렴구처럼 그냥 주어진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은 반드시 그 후손과 연결이 되어 있어요. 영적 자손들과 연결돼 있어요. 그것도 번성하리라 약속하고 있어요.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아브람에게도 하나님은 똑같은 언약을 주셨어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세기 12:2)
큰 민족을 이루어주겠다.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 너는 복 자체가 될 것이다. 그리고 15장에 보면 똑같은 언약입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세기 15:5)
무슨 말이에요? 번성시키겠다 그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 이 복을 이집트의 여인 그것도 종 하갈에게 주어지고 있다고 하는 점이죠. 이것은 그냥 읽으면 아브람의 복이 하갈에게 왔구나! 이렇게 그냥 읽을 수 있어요. 불쌍히 여기셔서 하갈을 이렇게 해 주셨구나!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점에서 굉장히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아니! 어떻게 종에게 그것도 애굽 여자에게 이러한 약속을 줄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 네가 사래에게서 왔으나 사래의 아래로 돌아가 스스로 고통을 당해라 하는 이 말과 너의 씨가 번성하고 셀 수 없이 많아지는 복을 주시겠다 하는 이 약속이 여러분! 어울려요? 어울리지 않아요? 너 고통당한 그 학대당한 주인에게로 다시 돌아가 학대 당해! 하는 말과 네 씨를 번성하게 하리라는 이 축복의 말이 서로 어울리냐는 말이에요. 전혀 어울리질 않잖아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아니 고통을 당하라고 해놓고 또 복을 주시겠다는 거예요.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지. 처음부터 고통이 없이 살도록 하시지. 그리고 복이나 주시지. 뭐 고통당하라고 그러고 또 복을 주신다고 그래요. 도대체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이 뭡니까? 왜 학대당한 그래서 도망 나온 그 여인에게 왜 도로 들어가서 학대를 당하라고 말합니까? 하갈이 받은 복은 앞으로 무엇입니까? 도대체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죠. 하갈은 지금 고통받아서 학대받아서 도망쳤으나 여호와의 사자는 다시 그 고통 학대를 받으라고 지금 명령하고 있는 것이 명령이에요.
그러나 ‘사래에게 받았던 이전 고통’은 앞으로 ‘사래에게 받을 이후 고통’ 그 학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되는 것입니다. 가해자인 인간 사래가 변할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예언하는 말이 아니에요. 돌아가 봐라! 네 주인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그런 말 없어요. 성경에 또한 피해자인 이 인간 하갈로 하여금 어떤 인격적인 변화, 네가 참아야지! 참을성을 가져야지! 흔들리지 않는 어떤 품성을 네가 소유해야지라고 성경은 요구하지를 않는다는 점이에요. 왜요? 성경은 애시당초 인간에게 그 어떠한 가능성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갈은 그런데 분명 변했어요. 여러분! 뭐가 변한 거예요? 하갈의 변화는 인격의 변화가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환경의 변화도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나를 바꿔 주세요. 저 사람을 바꿔 주세요. 저 인간을 바꿔 주세요. 환경을 바꿔 주세요라고 기도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하갈의 변화는 상태의 변화다. 무슨 변화라고요? 상태가 변화! 그랬어요. 오늘 성찬에 참여하면서 여러분! 영적 상태가 완전히 변화됐음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하갈의 인격이 변화된 게 아니잖아요. 인간의 변화가 아니에요.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하갈을 향한 사래의 어떤 처우가 변화된다! 아니에요. 환경 변화되는 게 아닙니다. 다만 하갈은 약속 밖에 있던 자에서 이제 약속 안에 있는 자! 로 영적 상태가 변화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사람이 왜 이렇게 안 변하나? 안 변해요. 사람에게 기대하지 마세요. 상처만 받아요. 상태가 바뀐 거예요. 언약 밖에 있다가 언약 안으로 들어온 거! 이전에 하갈은 약속 밖에 있는 자로서 사래의 학대 아래에 있었어요. 그러나 이제 하갈은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은 겁니다. 그게 달라진 거예요. 이 약속이 이루어지는 조건이 뭐냐? 그게 바로 순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사래 아래 들어가 고통을 당해야 하지만 그것은 이제 하나님이 보시는 고통, 하나님이 들으시는 고통,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고통으로 바뀌었다는 거예요. 이 고통을 견디는 순종이야말로 약속 밖에 있던 하갈이 약속 안에 있는 자로 신분이 변하는 조건입니다. 뭐가 변하는 거예요? 신분이 변하는 거예요. 상태가 변하고 신분이 변하는 거예요. 그 사람의 인격이 변화되거나 환경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상태, 영적 신분이 약속 밖에 있던 자에서 약속 안에 있는 자로 변화되는데 그것을 경험하는 유일한 조건이 뭐냐! 그건 바로 순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약속과 약속에 대한 순종을 통해 이제 사래의 소속에서 하갈은 하나님의 소속으로 바뀌어버린 거예요. 이것이 바로 하갈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복을 받은 분들인지 아시겠죠? 왜 나는 예수 믿어도 복을 못 받나? 나는 지지리도 복이 없다. 무슨 복인지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그 복이 얼마나 엄청난 복인지 몰라서 그런 거예요.
난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그것을 할 의지조차도 없었는데, 하나님은 어느 날 내 인생 가운데 찾아오셔서 나 같은 자의 신분을, 나의 앞으로의 상태를, 완전히 바꿔 주셨다고 하는 사실! 할렐루야! 하갈은 이제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들어와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돌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 안으로 들어오게 된 거예요. 이제 아브람도 사래도 그 누구도 하갈을 해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갈이 하나님의 소속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이제 앞으로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으로 입증되신 거예요. 비록 하갈에 의해서 앞으로 태어날 아들, 이스마엘의 운명이 12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매우 거칠지언정 그의 삶은 하나님 안에 있다. 당장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들의 후손조차도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다. 그리고 더욱더 놀라운 것은 하갈과 같은 이방인이 이 영적 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신약의 놀라운 축복의 약속이 열리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축복의 언약을 깨닫고 하갈이 드디어 자기 입에서 말한 게 뭐냐!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다. 나를 살피시는 나는 이렇게 억울하게 내 인생 팔려온 것처럼 그동안 생각하고 살았는데 나는 내가 원하지도 않는 주인의 집에 아이를 임신해서 학대당해서 억울하게 광야에 쫓겨나왔는데 그리고 나는 앞으로 갈 길이 막막하고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모르는데 그러한 광야에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그가 또한 발견하게 되었다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돼버린 거예요. 주인집 하나님이 아니라 남의 하나님이 아니라 내 하나님이 돼버린 거예요. 내 하나님! 그리고 내 자식의 하나님이 돼버린 것이고 내 가정의 하나님이 되고 내 민족의 하나님이 돼버린 것이죠.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과연 이 순종을, 이 복종을 믿을 수 있겠느냐 하는 거예요.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이 의롭게 되는 조건은 그의 믿음이라고 했어요. 그렇죠? 그의 믿음을 보고 의롭다고 여기셨는데 오늘 본문 16장에 이 하갈 사건을 통해서 아브람은 어떤 사람으로 입증됐어요? 이 사람 믿음 있는 사람입니까? 의로운 사람이에요? 스스로 하나님 돼서 스스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자기 나라를 구축하려고 했던 그 아내의 제안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나중에는 그 사건이 터졌을 때에 하나도 책임지지 않은 무능하고도 불의한 인간으로 입증되었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이라고 하는 게 뭐냐는 거예요. 믿도록 설득하시고 그 믿음을 의롭다고 인정하실 분, 아브람의 믿음, 인간의 믿음이라고 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하갈은 어떻습니까? 하갈의 순종은 어떻습니까? 인생에 극에 치달아서 광야에 홀로 서 있는 그 여인의 삶에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그녀를 일방적으로 약속 안으로 불러주시고 결국에는 그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그 하나님의 신실함만이 유일한 희망이 되는 것이예요.
도대체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의 무가치한 믿음, 이 인간의 불완전한 순종의 문제를 과연 어떻게 해결하셨는가 하는 거예요. 성경은 하나님이시자 인간이신 그 유일한 한 존재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 구원의 조건을 충족시키셨습니다. 하갈의 순종(인간의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시며 자기가 우리에게 허락하신 계시를 완성하신다 하는 거죠. 이 계시의 비밀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선포하고 있어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5~8)
원래 하나님이세요. 누가 뭐래도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나 하나님이야! 나 하나님 대접받아야겠어! 라고 주장하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마치도 내가 그것을 취하면 도둑질하는 것처럼 여겨서 오히려 그것을 비워내고 사람의 형상을 입으시고 사람의 모양을 갖추시고 자신을 낮추시는데 어느 정도까지 낮추셨냐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약속 밖에 있던 자들이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조건인 순종이 완성되었습니다. 이 복종이 이 순종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조건입니다. 유일한 구원의 조건입니다.
여러분! 내가 잘나서 내가 잘해서 들어가는 게 아니고, 내가 순종을 잘해서 하나님께 인정받아서 가는 것이 아니고, 이 아들의 믿음, 이 아들의 순종을 나의 순종으로 나의 믿음으로 고백하는 모든 자들을 이 하나님께서 약속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날 대신하여 모든 고통 다 당하시고 나의 죗값을 치르시고 십자가에 달려 복종하여 죽으신 그 놀라운 은혜가 오늘 이 성찬과 고난 주간에 여러분의 삶을 지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삶... > 고문산 목사(노량진 강남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엘 샤다이 -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0) | 2024.04.08 |
---|---|
예수께서 살아나셨다 -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0) | 2024.04.01 |
사람의 눈, 하나님의 눈 -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0) | 2024.03.18 |
사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1) | 2024.03.11 |
끝까지 남김없이 -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0) | 2024.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