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7.(주일예배). 사람의 눈, 하나님의 눈. 창세기 16:7~14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창세기 16:7~14)
여종 하갈을 통해 아브람의 씨앗을 만들려고 했던 사래의 계획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래의 계획을 두 가지로 판단 내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것은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원죄다.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일상사(日常事)지 이게 무슨 심각한 문제인가 생각할 수 있는데 성경 저자는 본문 1절에서 3절을 통해 사래가 이렇게 말을 하고 또 그 말을 듣고 또 무엇인가를 취해서 남편에게 갖다 주는 일련의 행위가 결국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했던 그 아담과 하와가 보여줬던 행동과 동일하다라고 지적하면서 내가 하나님 되려고 하는 원죄에 해당한다고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이것을 가인과 바벨탑의 무리들과 같은 죄로 판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까지 심각할까! 하필이면 이 사래가 사용했던 용어, 내가 이 하갈을 통하여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는 그 단어가 과거에 가인이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성을 쌓을 때 그리고 나중에 온 민족이 담합을 하여 하나님을 대적하여 바벨탑을 쌓을 때 사용했던 동사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성경 저자는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판단하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래는 결국 이러한 계획과 실행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자기의 나라 자기의 가문을 세우려고 했음을 저자가 지금 고발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래의 행동이 결국 처참한 결과를 불러오게 되었죠. 사래 자신에게는 여종에게 멸시와 모욕을 당해야만 했어요. 예상하지 않았던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편 아브람은 그 추악한 불의함을 드러내고 말았어요. 결국 남편과 아내 사이가 틀어져 버리고 말았어요. 그전에도 그렇게 썩 좋았던 것 같지는 않지만 하여간 이 상황을 통해서 부부 관계가 와해가 됩니다. 함께 공모해서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입니다. 급기야는 임신한 하갈을 학대하여 도망가게 함으로써 처음에 자손을 얻으려고 했던 계획마저도 수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죠. 희한한 일이죠. 어떻게든지 자녀를 얻으려고 자기를 희생해서 과감한 시도를 했는데 나중에는 그 임신한 하갈을 그냥 쫓아내 버리는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리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다 그렇다 하는 것이죠. 이제 남은 것이 하갈이라고 하는 거죠. “하갈” 성경 저자는 오늘 이 하갈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어요. 어찌 보면 갑자기 등장한 인물인데 하갈은 도대체 무슨 죄입니까? 애굽 땅에서 종으로 팔려서 여주인을 평생 섬기다가 그 남편의 대리모로 이용이 되었다가 그 결과로 학대를 당하고 도망가는 신세가 돼버리고 말았어요. 참으로 기고한 인생이죠. 아무것도 없고 이제는 뭐 아무도 주위에 없어요. 광야에 홀로 서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하갈이 자기가 나왔던 고향 땅 애굽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렇게 말했지만 여러분! 돌아가는 일이 쉬울까요? 한국말에 환향녀라는 말 있죠? 들어보셨죠? 그게 무슨 뜻입니까? 외국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고향 땅으로 귀환하는 여자를 말하는 건데 그냥 용어가 아니죠. 하갈의 입장에서 어떻게 애굽으로 다시 돌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광야에 홀로 서 있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은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는가 하는 거예요. 왜 하갈과 같은 존재가 이 가정에 인간의 삶에 발생하게 되었을까? 더 크게는 이 여인을 통하여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하는 역사가 시작됩니다. 왜 이런 문제가 도대체 발생했는가!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하나님은 어떻게 해결해 가시는가를 구조적으로 전략적으로 우리들에게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본문은 유독 인간의 입, 인간의 귀, 인간의 눈을 주목하고 있어요. 그것을 구조적으로 배치해서 삶의 문제를 발생시키는 마음의 모든 죄는 바로 인간의 눈과 귀와 입에 연결되어 있다 직결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을 신랄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거예요. 정리를 다시 한번 해보죠.
첫째 사래가 아브람에게 여종 하갈에게서 아들을 낳으라고 입으로 말을 하죠(아마르, אָמַר). 갑자기 말한 겁니까? 아니죠. 평소에 마음에 두었던 것을 입으로 표현을 하는 거예요. 자기의 계획을 야! 이거는 된다. 이렇게 해야 된다라고 하는 마음에 있던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이 되는 거죠.
두 번째, 아브람은 여종 하갈를 통해 아들을 낳으라고 하는 아내 사래의 말을 어디로 들어요? 귀로 듣습니다(샤마, שָׁמַע). 그냥 들은 거예요? 청종하다는 뜻이라고 그랬죠? 순종하다는 뜻이죠. 마음에 들었어요. 아내 사래의 제안이 평소에 마음에 갖고 있던 자기 생각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임신한 여종 하갈은 자신의 주인인 사래를 어떡하죠? 눈으로 저주했다(아인, עַיִן). 멸시하였다고 나오죠? 그게 원문상 눈으로 깔보다라는 뜻입니다. 사래를 높여본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종 다루듯이 그렇게 무시하고 깔봤다. 성경 저자가 이것을 강조하고 있어요.
마지막 네 번째 보면 이에 대한 아브람의 해결책이 뭡니까? 눈에 좋은 대로 했다(아인, עַיִן). 여보! 당신 눈에 좋을 대로 하시오.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책임을 다 떠넘겨버립니다.
성경 저자가 무엇을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합니까? 사래는 그냥 말한 게 아니라는 거죠.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서 말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생각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생각을 얘기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자기가 하나님 되는 거예요. 아브람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서 그 말을 듣고 해석하였다. 여종 하갈 역시도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행합니다. 그죠? 아브람도 사래에게 뭐라고 말했어요? 눈에 좋을 대로, 무슨 말이에요? 마음대로 하라.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본문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기들 마음대로 말하고 마음대로 듣고 마음대로 보고 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라고 성경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성경에 보면 인간의 눈과 귀와 입은요. 정확히 인간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말을 하는 거는 마음이 말을 하는 거예요. 마음이 보는 것이고 마음이 듣는거다 하는 거죠. 듣고 싶은 걸 듣고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항상 사람은 보고 싶은 것을 선택하여 보게 되어 있다 하는 것이죠. 성경이 이에 대해서 어떻게 증언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마태복음 15:18~19)
더러운 게 어디서 나온다고요?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다 원래 어디서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평소에 마음먹었던 것을 입으로 말하게 돼 있다는 거예요. 사람은 그러니까 입을 이렇게 닫으셔야 돼요. 적어도 말을 하지 않으면 자기의 생각을 남한테 전하지 않을 수 있죠. 저 사람을 혐오하는 마음가짐, 비난하는 마음가짐, 심지어는 모함하고 남들에게 거짓 증언해서 그 사람을 감옥 가게 하고 심지어는 사형 언도(言渡) 받게 하는 이 모든 것들이 그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 입을 통해서 전해진다는 거예요. 그다음 말씀도 한번 읽어보죠.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사도행전 28:27)
귀가 둔해지는 이유, 왜 안 들을까! 하나님께서 그토록 반복해서 말씀하시는데 왜 안 들어요? 마음이 둔해져 버렸어요.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을 보려고 하지 않아요. 눈을 감아버려요. 말씀으로, 이적으로, 그분을 통해 역사하시는 변화되는 사람들의 모습에 다 눈을 감아버려요. 왜냐? 마음이 둔해져 버렸어요. 그래서 혹시나 하나님이 내 삶에 개입할까 봐, 내 인생에 들어와서 내 인생을 바꿔 버릴까 봐, 내가 더 이상 내 인생의 주인이 되지 못하도록 할까 봐, 걱정이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거절하였다. 뭐예요? 마음이 굳어버렸어요. 자기가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눈과 귀와 입이 다 망가져 버리는 거죠. 또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10)
여러분! 오늘 세례받으신 분들, 학습, 입교, 받으시는 분들 마음으로 믿는 거예요? 마음은 안 믿는데 그냥 입술로만 예라고 답한 거예요? 마음으로 믿은 거예요. 마음으로 믿어지지 않으면 예라고 답할 수 없어요. 여러분! 이 문제는 억지로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지금 입술로 나는 주님을 고백합니다. 주님을 믿습니다. 나는 이렇게 안 살고 앞으로는 하나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하는 것은 입술이 말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뭐가 말하고 있는 거다. 마음이다. 그래서 이런 말씀도 있죠.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9)
마음과 입이 직결이 돼 있어요. 마음과 귀가 직결이 되어 있고, 마음과 눈이 직결이 되어 있어요. 만약에 어떤 분이 목사님 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믿지만 교회는 나가기 어렵습니다. 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다 믿지만 내 입으로 찬송하고 기도는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거짓말이에요. 자기 마음을 점검해 보셔야 돼요. 진짜 틀린 말입니다. 마음과 우리의 입, 마음과 우리의 눈, 마음과 우리의 귀는 직결되어 있다 하는 것을 드러내고 있죠. 이것을 가장 잘 아는 존재가 누구냐? 사탄입니다. 사탄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가장 본질적인 죄의 특징인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 그거를 딱 끄집어내서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 되어 말하도록 해요.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 되어 듣도록 해요.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어서 바라보도록 만든다는 점이죠. 여기에서 이제 모든 인간의 불화와 갈등, 분열의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물론 오늘 본문에는 사탄이나 뱀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3장에는 뱀이 등장하고 사탄이 등장하지만 창세기 16장에는 등장하지 않는데, 마치도 사래가 하나님인 것처럼 아브람이 하나님인 것처럼 그들이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보고 말하고 듣고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성경 저자가 집중하고 있는 거죠. 사탄이 개입한 거죠. 따라서 문제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다음과 같이 말하죠.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23)
생명이 어디에서 나온다고요? 근원이 어디 있다고요? 마음에 있다. 말을 잘못해서 인생이 망가지는 사람들이 있어요. 다른 사람의 말에 잘못 귀를 기울였다가 그 사람 말 듣고 홀랑 사기당하고 망한 사람도 많아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그 보는 것에 끌려가서 인생이 망가진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체 기관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그것도 자기가 자기 인생의 하나님 되려는 마음, 망해도 내가 내 인생 내 거다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문제다. 그걸 잘 지켜야 한다. 인간으로 하여금 마음을 지키지 못하게 만들고 그냥 마음대로 말하고 마음대로 듣고 마음대로 보게 하는 것이 사탄이 일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그 말이에요. 아니, 내 입 가지고 내가 말하는데 누가 뭐라 그래! 아니 내가 내 귀 가지고 내가 듣는데 누가 뭐라 그래!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건데 누가 뭐라 그래! 위험한 일입니다. 여러분! 듣고 보고 말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사탄의 도구로 악용되지 않도록 영적으로 깨어 계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 저자는 이것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하갈 같은 존재, 하갈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하는 존재가 생겨났다라고 보고 있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 것이냐 하는 거죠. 오늘 본문을 보면 문제의 당사자들인 아브람과 사래에게 하나님은 침묵을 하십니다. 잘했다! 잘못했다! 말도 없어요. 너희들 앞으로 혼날 거야! 그런 게 없어요. 침묵을 하시는데 반면 하나님의 입과 눈과 귀가 고통의 자리에 있는 이 한 여인 하갈에게 집중되고 있음을 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말을 해요. 오늘 본문에 보면 하갈에게 나타나서 이르되 또 이르되 또 이르되 또 이르되 그러니까 말하는 그 하나님의 그 입술이 계속 반복이 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다고 그랬어요. 마치 인간에게 귀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귀로 들으셨다라고 성경이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죠. 또한 하나님은 눈으로 하갈을 보셨어요? 발견하시고 보셨어요, 하갈은 또 자신을 보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이렇게 성경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구조적으로 ‘인간의 입과 귀와 눈’을 ‘하나님의 입과 귀와 눈’과 대조시키면서 이 한 여인의 고통뿐만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가시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표로 정리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입 귀 눈 | 하나님의 입 귀 눈 | |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2) |
말하다 (입) | 여호와의 사자가 이르되(8, 9) |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2) |
듣다 (귀) |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11) |
하갈이 그의 여주인을 멸시(눈)한지라(4) |
보다 (눈) | 내가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다(13) |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6) |
보다 (눈) |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14) |
인간의 입, 귀, 눈이 있죠? 또 여기는 하나님의 입, 귀, 눈이 있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한다. 입, 그죠?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말하고 또 아브람이 그걸 듣고 또 네 고통을 들으셨다.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뜻이죠. 하갈이 멸시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하갈을 살피고 계세요. 아브람이 아내에게 네 눈에 좋을 대로 하시오. 이렇게 말했는데 하갈은 자신의 인생을 살피시는 보고 계시는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여기서 발견하게 되죠. 대조적이죠. 같은 기관이라도 하나님의 입은 고통받는 자를 부르시는 입이며, 하나님의 귀는 고통을 들으시는 귀이고, 하나님의 눈은 광야에서 헤매는 자들을 보고 찾고 계시는 눈이라고 할 수 있죠. 그 인간의 입은 결국 멸망의 원인이에요. 왜요? 그 마음에 나쁜 것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입은 생명의 시작이에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다 살리는 말이에요. 죽이는 말이 없어요. 인간의 귀는 죄를 만들어내지만 하나님의 귀는 고통을 듣습니다. 인간의 눈은 사람을 멸시하고 죽이지만 하나님의 눈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살려요. 그러니까 어느 날 내 인생에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 물론 이렇게 생생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그때 배웠던 말씀이 마치 또 내 말씀인 것처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순간이 있어요.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 말 들으면 끝나는 거예요. 그 사람 인생은 그냥 사는 거예요. 살아가는 날 동안에 하나님의 음성을, 말씀을 한 번도 듣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어느 날 내 인생을 누군가 들어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나의 부르짖음을, 나의 한숨을 지금 누군가가 귀를 기울이고 있다라고 하는 확신이 드는 순간 그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는 거예요.
나를 보고 있다. 나는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고, 나는 어쩌면 부모에게도 버림받고, 나는 이 사회에서 버림받았지만 내가 이 광야 같은 세상에 혼자 살아가는 것 같지만, 나를 과거부터 지금까지 보고 계시고 미래까지도 책임지실 그 어떤 분이 나를 계속해서 관찰하고 계시다는 이 영적 느낌이 드는 순간 그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되는 거죠. 그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이 찾고 구해야 할 건 뭐냐? 하나님의 입이에요. 과연 내 입이 하나님의 입으로 사용되고 있는가? 내가 듣는 이 습성이 하나님께서 듣는 방식인가? 내가 보는 것들이 하나님이 보는 그런 관점과 시선과 동일한가! 우리는 항상 마음을 거기에 쏟아야겠죠. 정작 하갈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과거를 계속해서 보고 계셨다. 뿐만 아니라 지금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자신을 듣고 계신 것 같다 하는 것을 아마 하갈 자신은 그렇게 깊이 깨닫지는 못했을 거예요. 고통의 핵심인 아이의 출산을 해결할 그 미래까지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정작 하갈은 잘 모르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그 입과 눈과 귀를 고통 속에 있는 한 여인을 위하여 모두 사용하고 계세요. 과거, 현재, 미래 이 모든 차원에서 하갈의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삶도 그렇게 주관하고 계시는 줄로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주의 깊게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여호와께서 고통을 들으셨다는 표현인데요.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창세기 16:11)
여러분! 애굽 여인 하갈처럼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또 언약의 자리에서 벗어나 있으며 입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자들의 마음을 들으신다는 거예요. 처음 나오는 표현입니다. 성경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갈의 하나님도 되심을 보여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고통받는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지금 선언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이 선택되어 이스라엘의 나라가 된 것은 결국에는 이스라엘을 사용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으신 경륜 가운데 계획된 일이었음을 우리는 보게 돼요. 이렇게 언약 밖에 있던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언약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여러분의 신음의 간고를 듣지 않으실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켜보고 계시고, 우리의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시며 생생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만 믿고 따라가시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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