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1. (주일예배). 믿으니 의로 여기시고. 창세기 15:4~7.
노량진 강남교회 (고문산 목사)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창세기 15:4~7)
노아의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창세기 6장을 보면 죄가 이 땅에 관영(貫盈)하여서 모든 인류가 홍수로 심판을 받게 되는 내용입니다. 노아의 이야기가 창세기 6장에서 9장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끝까지 읽어보면 두 가지 결론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께서는 의인은 심판하지 않고 반드시 살리신다(구원하신다)는 겁니다. 창세기 6장 8절 9절에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 시대의 유일한 의인으로, 완전한 자로 등장하고 있고, 또 7장 1절에 가보면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모든 인류가 멸망당할 때에 살려내시는 역사를 일으키셨다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노아의 이야기 끝에 가면 어떤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까?
두 번째 결론은 이거예요. 결국 노아는 완전한 의인은 아니었다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9장 20절에서 21절에 가보면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씁쓸한 결론을 맺고 있어요. 이 사건으로 인하여 자녀 중에는 저주를 받는 자녀가 생겨났고, 결국에는 이 노아 역시도 완전한 자가 아니었다. 완전한 의인이 아니었음이 밝혀지게 된 것이죠. 그 어떠한 인간도 스스로 죄인의 신분을 벗어날 수가 없고 반드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이 이 노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확인된 것입니다.
성경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원죄!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 내 인생은 내 것이다, 내 마음대로 하겠다, 죽어도 내가 죽는다 하는 것이 바로 원죄인데, 그 죄의 본질은 바로 모든 인간의 죄인이다.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이 죄로 인하여 죽음이라는 심판이 내려졌음을 성경이 인류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바로 피조물의 원죄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그 원죄의 결과는 죽음이에요. 사도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선언을 했어요. 죄의 결과, 죄를 짓는 인간이 최종적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죽음이다 이렇게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처음으로 죄와 심판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는 거예요. 인간이 의인이 되는 방법을 지금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뭡니까? 하나님을 믿으면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겠다고 하는 최초 성경의 선언입니다. 완전히 새롭고 놀라운 개념이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그 사람을 평가할 때에 인품이 어떤가! 그 사람의 행실이 어떤가! 살아온 삶이 어떤가를 보고, 야! 이 사람 잘살았네! 의로운 사람이네! 법 없이도 살겠네! 천국이 있다면 이 사람이 들어가겠네! 이렇게 사람들은 그 사람의 외적인 것으로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소를 가지고 평가를 안 하신단 말이에요. 여러분! 이걸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품이나 그 사람의 행동이나 삶으로는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시고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사람을 의로운 존재로 바꿀 수 있다! 이렇게 선언하고 있어요. 누구를 믿으면 된다고요? 하나님만 믿으시면 돼요. 행위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이걸 꼭 믿으셔야 돼요. 믿음만이 우리가 죄인이 아닌 의인이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문제는 성경에 기록된 이와 같은 기본적인 진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진리를 머릿속에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인 삶에서는 또 속고 있다는 거예요. 믿음이 신앙의 행위와 같은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일성수를 한다거나 기도 생활을 한다든가 혹은 헌금 생활이 여기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자꾸 믿음의 영역을 행위의 영역으로 해석을 하고 바꿔버려요. 오늘 명절인데 어디 안 가시고 이 자리에 오신 이유는 뭡니까? 여러분! 너무 도발적인 질문입니까? 목사님 뭐 당연한 거 아니냐고 그럴 수 있겠죠! 그러나 이것이 여러분의 행위가 되면 안 돼요. 내가 이거 안 하면 혹시나 있던 복을 하나님이 뺏어가는 거 아닌가! 있던 복이 달아나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내 행위를 입증하기 위해서 마치 출석부 도장 찍듯이 그렇게 착각하며 해석하는 경우가 신앙인들 가운데 있다는 것이죠. 헌금도 마찬가지고요. 구제 봉사는 말할 것도 없고요. 믿음의 영역을 다시 행위의 영역으로 바꿔버려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름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해도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는 아무래도 믿음이 부족한 것 같아! 나는 믿음이 없는 것 같아! 하는 그런 죄의식 속에 사로잡혀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기쁨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기쁨이 있을 수가 없어요. 늘 두려운 마음에 벌 받을지 몰라! 빼앗길지 몰라! 늘 나는 부족해! 그러니까 이런 부정적인 의식 속에서는 기쁨과 감사가 있을 수가 없어요. 누구에게 집중돼 있는 거예요? 자기 자신에게 집중돼 있는 거 이러한 착각은 믿음을 행위로 바꿔버리는 착각은 세 가지의 치명적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이 땅에서 의인으로서 누리는 자유와 해방의 기쁨이 사라져버려요. 여러분! 기쁘세요? 무조건 기뻐해야 돼요! 근데 이 절대적 기쁨이 없어져 버렸어요. 그러니까 자꾸 내가 해서 뭔가를 얻어내야 된다! 행동을 해야 한다! 행동의 결과물을 가져야만 된다는 착각 속에서 근본적인 기쁨과 자유로움이 신앙인들에게 사라져버리고 말았어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냐면
두 번째는 의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행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대표적인 권세가 뭐냐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로마서 8:37) 모든 일에 그것이 경제적인 일이든 건강의 일이든 관계의 일이든 자녀 손의 일이든 간에 그 모든 일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모든 일들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냥 이기는 정도가 아니라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런 권세가 여러분들에게 있음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이런 말씀도 하고 있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린도전서 15:57) 이것은 믿음의 영역이에요. 행위의 영역이 아니에요. 내가 잘해서 하나님이 너 잘했구나! 그 보상으로 승리를 주시는 게 아니라 내가 믿고 있는 예수를 봐서 그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하며 나가게 될 때 반드시 하나님이 승리를 주신다! 이걸 믿으셔야 돼요. 이게 우리의 권세입니다. 근데 자꾸 믿음을 행위로 바꿔버리면 이런 권세를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결국에 세 번째로는 우리가 평생 의인이 아닌 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법적으로는 의인이에요. 지식적으로는 나는 죽어도 천국 간다. 내가 아무리 더러운 죄를졌지만 예수로 말미암아 나는 반드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에 간다라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 일상의 삶에서는 의인답게 살아가지 못한다는 거예요. 어떤 착각 때문에? 믿음을 행위로 바꿨을 때는! 믿음만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뭘 했다고 자꾸 자랑하지 마세요. 뭘 못했다고 자괴감에 빠질 이유도 없어요. 주님이 다 이루시는 줄로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사탄의 전략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것을 선물로 여기지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사탄의 전략은 공짜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거를 이거 내가 이렇게 받아도 되겠나! 하나님의 선물로 나의 그 추악한 더러운 죄가 완전히 벗겨졌음을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게 사탄의 전략이에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날 대신하여 못 박혀 죽으심으로 나의 죄가 완전히 속해졌다는 걸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게 사탄의 전략이에요. 정말 그런가? 정말 그걸 믿음으로 내 죄가 씻어지는 거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3일 만에 부활하셨는데 그 부활의 생명을 내가 영원히 이 땅에서 누리고 이 일상의 상황에서도 누릴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게 누가 하는 일이에요? 사탄이 하는 일이에요. 네가 뭘 했는데? 도대체 네가 뭘 했길래 그런 엄청난 복을 누려! 너도 뭔가를 해야지! 새해에는 내가 무엇인가를 좀 해야 되지 않겠는가! 내가 그동안 열심을 안 내서 믿음이 없어서 내가 복을 못 받나! 이런 사고방식에 죄의식으로 부채감에 책임감에 가득 차 있는 종의 모습으로 되돌려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사탄의 전략입니다. 이런 인간의 본능, 즉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하는 내가 의로운 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바울은 철저하게 배격하면서 격정적으로 다음과 같이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꿰더냐” (갈라디아서 3:1) 여기까지 뭐라 그래요? 도대체 갈라디아 사람들아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열심으로 너희를 가르쳤더냐! 너희들이 그 가르침을 받고 예수가 날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을 너희들이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명확한 믿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누가 너희를 꿰더냐! 누구겠어요? 사탄이 깬 거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계속해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갈라디아서 3:2~5)
여러분에게 질문해볼게요. 여러분! 성령 받으셨습니까? 여러분! 성령 받은 건 여러분이 뭔가를 잘했기 때문에 받은 겁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받으신 겁니까? 믿음으로 받았죠. 그런데 왜 갈라디아 사람들아! 이제 와서 육체적인 것을 주장하느냐? 너희가 성령 받은 게 헛되냐? 지금까지 성령 안에서 고난받은 것이 헛된 일이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분의 일이, 그러니까 여러분 안에 지금 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아니면 듣고 믿음에서 온 것이냐? 여러분! 어떤 거예요? 듣고 믿음에서입니다. 어떤 것을 내가 하기 때문에 내가 주일 성수하기 때문에, 내가 주일날 헌금을 많이 하기 때문에, 내가 이런 봉사를 하고 저런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가 아니라, 너는 처음에 듣고 성령께서 깨우쳐 주셔서 생명의 세계로 들어온 것이 아니냐? 그런데 갈라디아 사람들아! 왜 이제 와서 율법의 행위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냐?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전히 할례를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안식일 준수는 말할 것도 없고 십일조, 제사 제도를 강조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 나라 백성의 표지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래요. 이런 기준이라면 지금 하나님 나라 백성 못하는 분도 있을 거예요. 왜? 십일조 못하는 분도 있으니까요. 그건 하나님 나라 백성의 표지는 아니에요. 그런데 이 당시에는 이거를 강조했다는 거예요. 여전히 강조했다는 거죠. 그러나 바울은 강력하게 할례가 성령 받는 이유가 아니고 십일조로 예수의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 나라 백성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 된다 이렇게 지금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으로요? 믿음으로! 문제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이죠. 왜냐면 할례를 받지 않고 아브라함의 혈통도 아닌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게 된 겁니다. 이게 제자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제자들 자신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기 때문에 아니 어떻게 더러운 개 같은 이방인이 예수를 믿고 또 예수의 영이신 성령을 받는다는 말인가? 과연 이들도 하나님 나라 백성이 맞는가? 선택된 민족인가? 질문하게 된 거죠. 그래서 분명히 하나님 나라 백성인 것 같은데 율법의 표시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나온 결론이 뭐냐? 예수 믿고 성령을 받았지만 다시 할례를 받아라! 성령을 받았지만 또한 정결 의식을 하라! 강요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문제를 유대인들이니까 어차피 유대인들이니까 한계가 있어서 그렇겠구나! 바울 당시에 갈라디아 교인들이나 그렇게 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현대 신앙인들에게 심각한 도전을 주고 있어요. 이미 우리가 성령 받고 예수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뭔가를 자꾸 덧붙이려고 해요. 그러니까 이게 덧붙여지지 않으면 이 본질적인 것에 만족하지를 못합니다. 성령을 받았고 예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하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뭔가가 있어야 되지 않겠나! 뭔가가 하나 더 덧붙여야 되지 않겠나! 나의 행위가 하나 더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하는 사고방식을 은연중에 우리도 갖게 된다는 것이죠. 이에 바울이 왜 성령으로 시작했는데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느냐라고 분노를 했던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왜 분노했을까요? 그것은 복음을 완전히 무효화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탄의 가장 강력한 침공이기 때문에 그렇죠.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데 예수 그리스도 믿는 자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데 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고 조건을 붙이고 노력하느냐 지금 질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믿음만으로 충분합니까? 아멘이십니까? 오늘 아브라함으로 시작하는 창세기 12장부터 말라기까지 구약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선택하여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 만들어 가시는 제2의 경륜 시대라고 말씀드렸어요. 이 시대 안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생겨나서 형성되고 유지되는지를 가시적으로 보여주셨어요. 그 가시적으로 보여주시는 방법이 뭐냐? 그게 바로 율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고 있는 그 율법 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만이 약속의 자손인 게 맞아요. 그 순간에는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 순간만큼은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들만이 지구상의 선민인 것 거룩한 백성인 것 맞습니다. 왜냐?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 나라의 그 매뉴얼(manual)을 그들이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으로 인하여 형성된 이 새 언약의 시대에서는 그동안 하나님 나라의 유지 역할을 해왔던 율법이 소멸되고 더 이상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적 혈통적 신분 안에 갇혀 있지 않게 됩니다. 이제는 예수의 복음을 믿는 전 세계의 모든 믿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성경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것을 하나님께서 언제부터 시작하셨느냐? 창세기 12장부터 시작하셨다 그 말이에요. 아브라함을 필두로 해서 지금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까지 하나님의 계획이 계속해서 성취되어가고 있다는 것이죠. 그 믿는 자의 공동체는 구약의 율법 공동체가 아닌 신약의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깊고 놀라운 경륜을 밝히면서 이제 구약의 시대, 율법의 시대, 행위의 시대가 지나가고 신약의 시대, 성령의 시대, 믿음의 시대가 열렸다라고 지금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느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아시겠죠? 지금 무슨 시대라고요? 신약의 시대! 새로운 언약의 시대란 말이에요. 성령의 시대예요. 믿음의 시대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사람들아! 어찌하여 복음으로 시작하여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하느냐! 여러분! 주일성수 율법적으로 지키지 않습니까? 혹시 헌금 생활 율법적으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봉사하고 직분 받는 거 혹시 율법적으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을 향해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한탄하고 계시는 거예요. 내 아들을 주었건만 내가 성령을 주었건만 내가 나의 전부를 너에게 주었건만 왜 너희들은 이 시대 가운데 그걸 누리지 못하고 여전히 너희들의 사고방식 속에 너의 행위 속에 갇혀서 그렇게 우울하게 암울하게 살아가느냐 말씀하고 있는 거죠. 복음의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바로 내 자아예요. 내가 뭔가를 하려는 것. 그러니까 어떤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목사님 진짜로 아무것도 나는 안 해도 되는 겁니까?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진짜로 아무것도 안 해도 됩니다. 그랬어요. 뭘 할 수 있습니까? 믿음이 오기 전과 믿음이 온 후가 어떻게 바뀌는지 우리 말씀에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라디아서 3:23~29)
여기 말씀에 보면 믿음이 오기 전과 믿음이 온 후를 나누고 있죠. 율법이라고 하는 초등교사가 우리를 그동안 믿음으로 이끌어줬어요. 율법을 지키다 보면 이거 내 힘으로 안 되는구나! 도무지 시키는 건 못 지키는 거구나! 하나님 사랑할 수 없구나! 믿음으로 가능하구나! 희미하게나마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시는 그러한 역사를 일으켜 주셨는데 이제 믿음이 온 후로는 무슨 말이에요? 신약시대를 말하는 거죠? 성령 시대를 말하는 거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새로운 시대를 말하는 건데 그때는 어떻게 됩니까? 초등교사는 필요가 없어요. 율법은 필요가 없어요. 율법 아래에 있던 우리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 안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예수의 영이신 성령 안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율법 아래에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있다는 거예요. 내가 이걸 안 해서 하나님이 벌을 주셨나? 내가 그러면 이걸 잘해서 복을 주신 겁니까? 그럼 나만 못 받습니까? 그런 게 어딨어요? 여러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잘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 사랑하기로 작정하셨으니까 이 못난 자를 처음에 선택하시면 끝까지 버리지 않기로 작정하셨으니까 그 신실함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구나! 우리가 믿고 나가는 거잖아요. 그죠? 자꾸 자기에게 몰두하는 거예요. 내가 뭘 해야 되는 거예요! 자꾸 내 믿음을 입증하려고 하는 거죠. 이게 잘못된 신앙입니다. 이게 실패로 돌아가면 좌절하고 낙심하고요. 성공하게 되면 교회 안에서 엄청난 교만이 일어납니다. 왜? 내가 믿음 좋은 사람처럼 보이거든요. 한번 새벽 기도 100일 작정에서 100일 딱 지켜내 보세요. 처음에 들어오는 생각이 뭔지? 대견하다! 말이죠. 그런 거 자꾸 반복하시면 복음에서 점점 멀어져 갑니다. 그 자체가 감사하고 그 자체가 감격이셔야 돼요. 아니! 100일 작정했다가 99일 하면 어때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걸 세고 있다가 너 하루 빠졌네! 왜 하나님을 유치한 분으로 만드십니까? 그건 여러분이 작정한 거잖아요. 기도하라고 하나님 감동하시면 언제든지 기도하시면 됩니다. 기도가 우리의 힘으로 가능합니까? 기도하고 싶으면 막 기도하고 기도하기 싫으면 안 하고 그런 거예요? 기도가 그런 거 아니에요? 기도하는 마음을 내 안에 하나님이 부어주십니다. 말씀에 착념하게 만드시고 성령 충만하게 만드시고 하나님의 일을 억지로라도 하게 하셔서 내 자랑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 되도록 역사하신다는 것. 새 언약 시대가 열리면서 이제 더 이상 율법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행위는 아무 의미도 없어져 버렸어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에베소서 2:8~9)
자랑할 수가 있어요? 없어요? 나 믿음 좋다! 나는 믿음 있다! 나는 오래 믿었다! 자랑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왜? 하나님의 선물이니까! 공짜니까! 내가 만약 잘해서 그걸 받았다면 나는 누군가에게 자랑해야겠죠! 나 이렇게 열심히 했으니까! 이런 걸 받았다고!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자랑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도대체 어떻게 이런 논리가 가능한가 하는 거예요? 사실은 우리는 이게 믿어지고 오랫동안 믿었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는데 이건 굉장히 황당한 논리예요. 이 논리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오늘 바울은 창세기 15장을 근거로 하여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로마서 4:1~3)
우리 아브라함 이야기 주일마다 나누고 있죠? 아브라함이 잘한 거 있어요? 없어요? 하나도 없어요! 잘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잘한 것도 없어요. 그리고 15장까지 온 거예요. 그리고 15장에서 또 한 번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우리 집에서 길리운 종이나 상속자로 삼으시죠! 그랬던 그를 어떻게 하셨어요? 끌고 나와서 다시 한번 얘기할게. 저기 하늘의 별처럼 내 방법대로 네 몸에서 날 자로 내가 너의 상속자를 삼을 거야.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그제서야 뭐라고 그랬어요? “믿으니” 어떻게 해요?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 아브라함의 행위입니까? 믿음입니까? 그것도 행위라 그러면 행위예요. 그러나 자랑할 것이 없는 행위다. 믿음이다. 계속해서 성경을 읽어보죠.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로마서 4:9~12)
할례시 무할례시 이게 사실은 어려운 말이 아닌데 번역을 이렇게 하다 보니까 굉장히 어려워지는 건데 쉽게 생각하세요.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전에 의롭다 함을 받았어요? 할례받고 난 다음에 의롭다 함을 받았어요? 아브라함은 이미 의롭다함을 받고 할례를 받았어요. 그러면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냐? 아브라함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 거지만 앞으로 믿음으로 의롭게 될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했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아브라함 할례 받았어요? 안 받았어요? 아직 안 받았어요. 창세기 17장으로 넘어가야 그때 가서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미 15장에서 언약을 맺으며 의롭게 되는 길이 열렸다. 이게 복음이에요. 여러분! 의의 길은 믿음밖에 없어요. 믿음이 있기만 하면 무할례시의 할례를 받은 사람처럼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오게 하신 거죠. 그렇다면 왜 믿음인가? 아니 할례처럼 도장 딱 받으면 그걸로 인정해 주면 좋잖아요. 왜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있으면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신 걸까? 그것은 인간의 그 어떠한 행동도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헌금을 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요? 얼마나 기도를 해야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실까요? 얼마나 헌신하고 하나님 앞에 좋은 성품을 가져야만 ‘됐다! 너 그만큼이면 됐다’라고 인정을 해주실까요? 인간의 그 어떠한 모습과 행동으로도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킬 수가 없어요. 충족됐다고 생각하는 게 자기 자랑이에요. 그러면 그건 벌써부터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나게 돼버리는 거죠. 심각한 일이죠. 하나님은 인간이 죄 자체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는 없다는 것을 아셨어요. 로마서에서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죠.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로마서 3:10~15)
의인이 있다? 없다? 한 명도 없다! 그리고 그 한 명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의인이었던 순간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성경은 그렇게 선언하고 있어요. 인간들이 볼 때는 착한 성품이고 인간들이 볼 때는 착한 말을 하는 것 같고 선한 일을 행하는 것 같지만 그 어느 한순간도 하나님 없이 의로운 순간이 없다. 착한 척하지만 악을 도모하고 남들에게 유익한 것 같지만, 결국 자기 실속을 차리고 자기 인생마저도 무덤으로 끌고 가는 그런 어리석은 인생이 바로 인간이다. 이렇게 선언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런 인생을 이미 알고 계신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신의 어떤 삶으로도 성품으로도 그 어떠한 것으로도 의를 행할 수가 없어요. 없다는 것을 아시고 그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겠다고 하는 은혜의 길을 열어놓으셨어요.
여러분! 하나님 사랑하십니까? 하나님 사랑하고 싶습니다. 나는 돈을 사랑하지만 나는 여전히 세상에 묶여서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세상을 사랑하지만 그래도 나를 찾아오시고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걸 보고 너 그거밖에 안 돼? 이러지 않으시고 어떻게 해요? 내가 그거 옳다고 인정해 줄게. 그거면 됐어. 호세아에서 나오는 것처럼 돌아왔다가 다시 세상으로 나가도 나는 너를 끝까지 다시 붙잡아다가 내 사람 삼을 거니까 너는 의로운 자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거야.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이렇게 감시하는 건 아니에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그 작은 마음, 작은 믿음이라도 기뻐하시고 인정해 주신다 하는 것이죠.
아브라함이 믿으니 의로 여겨주셨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전부입니다. 여기에 더 보탤 게 없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가는 겁니다. 그러나 믿음은 인간의 신념이나 자기 확신은 아닙니다. 믿음이 신념으로 바뀌면 굉장히 위험해져요. 그래 하나님이 날 사랑해 주신다고 그랬지. 그럼 나가서 죄지어도 되겠네. 이게 신념이에요. 성경이 가르쳐주지도 않은 신념을 보태는 거예요. 그래 나는 어차피 그냥 대충 살아도 천국 갈 거야. 성경에 어디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거를 자기 신념화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을 아주 싸구려 복음으로 전락시켜버리는 거예요. 기독교 복음이 다 그렇게 싸구려로 전락 됐어요.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복음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신 그 어떠한 가치로도 되바꿀 수 없는 엄청난 가치의 사건이 이 기독교 복음의 사건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신앙인들이 하찮은 것으로 전락시켜버린 거예요. 왜요? 자기 신념으로 믿고 있는 거예요. 주님을 사랑하셔야죠. 사랑하기를 애쓰셔야죠. 어제보다는 오늘 더 사랑해야 하고, 내일 오늘보다 더 사랑해야 하겠죠. 그 사랑으로 변화돼야겠죠.
이 원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근거하고 있어요. 여러분! 이 구속 사역에 근거 되지 않은 믿음은 다 자기 신념입니다. 잘못된 믿음이고 자기 공로로 빠질 가능성이 커요. 이미 죄인으로서 받아야 할 모든 죗값은 예수님께서 다 대신 치러주신 줄로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죽고 살아나심이 우리가 의인 될 수 있는 모든 근거를 충족시키셨어요. 다 됐어요. 그럼 우리는 뭐만 하면 된다고요? 믿기만 하면 된다고요. 그것이 날 위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의인으로서 자유롭게 살아가게 되는 줄로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최종 결론적으로 하는 말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로마서 4:23~25)
여러분! 이것보다 더 명확한 복음이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만을 위한 게 아니다. 오늘 우리를 위한 것인데 어떤 우리냐?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우리! 이 불가능한 역사가 예수 안에서 일어났고, 또한 우리의 인생 가운데도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사건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사건임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더 이상 의인 되기 위하여 애쓸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여러분의 부모님에게 자식이 되기 위하여 애쓸 필요가 있어요? 물론 아들 값은 해야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도 원하지 않아요. 왜냐? 이미 아들이니까! 그런데 자꾸 내가 아들이 되려고 애를 쓴단 말이에요. 큰아들처럼 자꾸 일만 하고 자기가 아들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계속 일하고 또 그 일에 대한 대가를 안 해주시면 원망을 하고 그렇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죄인에서 의인으로 본질이 완전히 변화돼 버렸어요. 우리에게는 이제 의인으로서 어깨를 쫙 펴고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유와 기쁨의 삶만이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줄로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의인의 삶은 어떤 것인가? 거기에 비밀이 있죠. 이제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하는 신비한 비밀이 우리에게 남겨져 있어요. 이제 그 안에 들어가서 사셔야 됩니다. 자꾸 뭔가를 하고 수고하고 하나님 마음에 들려고 애쓰지 말고 이제는 영으로 임하시는 예수와 연합할 수가 있잖아요. 왜냐? 의인이니까! 죄인은 의인과 함께할 수 없어요. 근데 우리는 이미 의인이니까 의인이신 예수와 하나 되고 성령으로 하나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놀라운 역사를 지금부터 경험하면서 얼마든지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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