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25.(주일예배). 끝까지 남김없이. 창세기 16:1~3
노량진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창세기 16:1~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에겐 자식이 전혀 없었죠. 친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부르신 그 순간부터 큰 민족을 이루어주겠다. 셀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자손을 허락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어요. 창세기 12장 2절에 보면 처음 만났을 때 하셨던 말씀이에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세기 12:2)
아무런 조건도 없고 아무런 자격도 없는 그런 사람을 불러서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겁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몇 살입니까? 성경이 75세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창세기 12:4)
몇 세였어요? 75세였습니다. 75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거예요. 약속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약속의 땅에 기근이 일어나서 자기 마음대로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이집트 왕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했죠. 그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아주십니다. 바로에게 나타나서 경고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바로가 말하죠.
“네가 어찌하여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창세기 12:19)
자칫 잘못하면 이집트 왕에게 빼앗길 아내를 하나님께서 이렇게 구출하셔서 아브라함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런 약속이 아브라함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하여 중단되지 않고 계속됐어요. ‘너 하는 거 보니까 안 되겠다. 너 아무래도 내 약속은 너한테 너무 과분한 것 같아. 이제 약속 끝.’ 이러지 않으시고 실수를 했지만 그 실수에서 건져주셨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약속을 허락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믿음이라는 게 생겨나기 시작해요. 하나님께서 내가 이렇게 실수를 해도 용서해 주시고 또 거기다가 물질까지 허락해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구나 하는 믿음이 생겨서 그 믿음 때문에 조카 롯과의 땅 분쟁에서 과감하게 대담하게 땅을 양보하는 사건을 일으키게 됩니다. 대단한 일이죠. 그죠? 근데 하나님께서 그때에도 역시나 아브라함에게 땅의 티끌과 같이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또 약속을 해주세요.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에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데 네 자손도 세리라.” (창세기 13:15~16)
그러니까 어떤 상황이 생길 때마다 아주 귀찮을 정도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기가 하셨던 약속을 계속 반복하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도 성경을 읽다 보면 약속이 또 나왔네. 12장에서 약속하셔놓고 또 여기서 얘기하시네. 다소 지겨울 수가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도 이유가 있는 거죠. 어떤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이 약속만큼은 잃어버리지 말아라. 어떤 실수를 해도 이 약속만큼은 잃지 말아라. 잘한 일도 있었죠. 갑자기 전쟁에 나가서 승리를 거두기도 하고 포로로 끌려갔던 그 생명을 구출하는 그런 대담한 일도 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사건 뒤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상기시켜준다 하는 겁니다. 지난번에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함께 나누었죠. 족장 언약이라고 그랬습니다. 기억나세요? 동물을 둘로 쪼개서 불 지나가게 하는 그 언약식 있지 않습니까? 그때도 보면 하나님께서 또 얘기하세요. 땅과 함께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뭐라고 말하죠? 종들 중에 입양한 엘리에셀이라고 하는 사람을 상속자로 삼고자 제안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네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될 거라고 확언을 시켜주세요. 우리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의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세기 15:2~5)
아멘! 보세요. 또 믿음 없는 소리 하니까 그 말을 정정해주시죠. ‘아니야! 양자가 아니야. 종의 자식이 아니야. 분명히 너의 씨로부터 날 자식이 될 거야.’ 그러면서 마치 아이의 손을 붙잡고 밖으로 나가듯이 끌고 나가서 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면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또 약속을 말씀하신단 말이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반복하시는 거예요? 잊어버릴까 봐! 약속을 잊어버릴까 봐! 자기의 행동 때문에 자기의 어리석은 생각과 행동 방식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그 언약의 말씀을 잊어버릴까 봐! 계속해서 하나님은 반복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이 다양한 상황 속에서도 약속은 계속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어요.
그러나 나이가 점점 들어가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그 약속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당장에 아들 하나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 이후에 거대한 그런 놀라운 기적적인 약속을 믿을 수 있겠는데 지금 당장에는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있어요? 없어요? 아직도 없단 말이에요. 그렇게 10년이라고 하는 세월이 흘렀어요. 이제 1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아내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드디어 자신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아들을 낳으라 제안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제안을 받아들여요. 더 정확히 말하면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창세기 16:2) 이 들었다는 말은 부엌에서 아내가 뭐라고 얘기하니까 남편이 쇼파에서 신문 보다가 ‘알았어’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말이 아니고 ‘청종하다’, ‘순종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아내가 하는 말에 아무런 이의 제기를 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했다 그런 말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사라가 이해되십니까? 아브라함이 이해되세요? 10년이라는 세월을 생각해 보면 그 제안을 했던 사라의 마음도 우리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고 또 그 아내의 말을 듣는 그리고 아무런 이의 제기 없이 수용하는 그 아브라함의 입장도 우리는 얼마든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죠. 그러나 성경은 조금의 인간적 이해나 동정도 없이 아주 냉정하게 이 상황을 평가하고 있어요. 이들의 행위가 죄의 본질인 원죄를 범한 상황과 똑같다라고 기술하고 있다고 하는 점이 우리가 성경을 그냥 대충 읽어보면 이 집안에 이런 일이 있었구나! 얼마든지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겠구나! 지금은 없지만 우리나라에도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뭐 그런 일이 있었나 보다! 이렇게 읽고 성경을 넘어갈 수가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이 16장의 사건은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굉장히 생뚱맞기도 하고 이게 전체적 아브라함의 이야기 흐름 속에서 어울리지가 않는 이야기예요.
오늘 특별히 원문에 나타난 본문의 동사들을 자세히 살펴보게 되면 ‘말하다’ ‘듣다’ ‘취하다’ ‘주다’라고 하는 동사로 배열이 되어 있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그리고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을 어떻게 해요? “들으니라” 그리고 나중에 가보면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창세기 16:3)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했고(אָמַר), 아브라함은 그 말을 들었다(שִׁמְע). 그리고 사라가 하갈을 데려다가(לָקַח) 아브라함에게 주었다(נָתַן).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는 거죠. 이러한 단어의 배열이 창세기 3장에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던 상황에서 나온 전형적 패턴이라고 하는 것이죠. 뱀이 여자에게 또한 여자가 뱀에게 말했고(אָמַר) 또 아내의 말을 아담이 들었다(שִׁמְע). 여자가 먹지 말라고 하는 실과를 가져다가 (לָקַח) 남편에게도 그것을 주었다(נָתַן) 하는 이 동사의 반복을 이 본문에서도 더 또 정확하게 하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3장 1절에 보면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창세기 3:1) 이렇게 나오고요, 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창세기 3:2) 서로 대화를 해요. 그리고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Take’ ‘취하다’ 그 말입니다.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창세기 3:6). 이 과정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셨던 그 약속의 말씀을 망각하고 사탄의 말에 넘어가 자신의 생각과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인간의 전형적인 패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하는 거죠.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던 그 아담과 하와의 원죄 문제가 오늘 이 아브라함과 사라라고 하는 부부의 관계 안에 언약의 원초적 출발점에 다시 드러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에요. 잠자고 있던 문제가 다시 한번 또 드러나고 있다고 하는 것이죠. 창세기 저자는 의도적으로 창세기 16장을 창세기 3장과 연결하면서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똑같은 비중으로 사라와 아브라함의 죄를 고발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또 사라는 지금 스스로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그 아담의 범죄를 반복하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냥 성경을 읽으면 이거는 일상의 이야기예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요. 흔한 일입니다. 사람들 중에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마치 사극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만 그러나 성경 저자의 관점,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하는 것이에요. 이 두 사건의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탓을 한다는 거예요. 누구 탓을 한다고요? 하나님 탓을 해요. 아담이 죄를 지은 이후에 하나님한테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이 나타나셨는데 아담 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너한테 이렇게 가르쳐준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그러니까 아담이 뭐라고 말합니까?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세기 3:12)
참 기가 막힌 말 아닙니까? 그렇죠? 뭐라고 말하는 거예요? ‘당신이 나에게 준 그 여자가 나한테 그거 먹게 해서 내가 먹었어요.’ 지금 누구를 탓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을 탓하는 거 아니에요? ‘그 여자가 나한테 줘서 먹었어요. 내가 잘못한 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 여자는 하나님이 주셨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잘못이지. 그런 말이죠? 정말 정말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이런 말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가 있을까요? AI도 아닌데! 사탄이 벌써 들어가 있는 거죠. 오늘 사라가 본문에서도 똑같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데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창세기 16:2)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셨다면 뭐 이런 일을 내가 하겠느냐! 그 말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한테 약속을 해놓고 자식을 안 주셨으니까! 내가 내 마음대로 내 계획대로 하는 겁니다. 다 당신 탓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마치도 15장에서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제언(提言)했을 때 아브라함이 했던 말과 똑같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시므로 내 상속자는 엘리에셀이 될 겁니다. 똑같은 말이에요. 과거의 아담이나 지금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아브라함이나 오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속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이렇게 스스로 하나님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시작해서 망한 이후, 항상 그 탓을 자기에게 찾지 않고 하나님께로 모든 책임을 돌린다는 특징이 있다.’
자기 마음대로 해놓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다 잊어버리고 자아가 하는 말, 그 자아를 부추기는 그 사단의 말에 넘어가 마음대로 행동하고 망해놓고 나서는 나중에 그 핑계를 누구한테 대는 거예요? 하나님께로 돌리는 거예요. 이게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여러분! 정말 우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습니까? 우리 기도할 때 그러잖아요.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는데 하나님이 살라고 해서 그렇게 살았는데 하나님 이렇게 하십니까? 이렇게 원망하잖아요. 근데 진짜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았습니까? 내가 망치는 인생 아니에요? 내 마음대로 하다가 내 마음대로 하다가 망치는 인생 아닙니까? 그래놓고 마음 한구석에는 하나님을 핑계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섭섭하다고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게 굴뚝 같아요. 그래서 언제 기회가 되면 이게 터져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의 문맥을 살펴보면 어이없게도 이런 일이 하필이면 아브라함 언약식 뒤에 일어났다고 하는 거예요. 16장은 15장 다음에 등장하잖아요. 15장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언약식이 있었어요. 짐승을 쪼개며 하나님이 불로 임해서 스스로 내가 다 책임지겠다 내가 죽겠다 했던 언약식 뒤에 하필이면 하갈 사건이 곧바로 일어난다고 하는 거예요. 12장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하나님의 전적 부르심 그 은혜의 부르심 사건 직후에 곧바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도망갑니다. 도표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2장 | 부르심 | 심한 기근 | 이집트 피신 |
16장 | 언약 | 오랜 기다림 | 이집트 여인 하갈 |
12장 보시면 불러주셨는데 심한 기근이 일어났어요. 그러니까 어디로 곧바로 갑니까? 이집트로 갑니다. 피신하는 저기서부터 이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해요. 16장에 보면 언약식 앞에 있었어요. 오랜 기다림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집트 여인 하갈을 제시하게 되는 거 패턴이 똑같습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믿음에 대한 시험, 믿음에 대한 테스트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믿음은 반드시 테스트가 있어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 뒤에는 믿음의 시험이 등장하고 있는데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부르심 뒤에 기근이 있었고 언약식 뒤에 기다림의 시간이 있었다고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이 계속된 하나님 은혜 뒤에 있는 믿음의 테스트에서 합격했습니까? 불합격했습니까? 불합격이에요. 물론 그사이에 믿음도 좀 생겨서 양보도 하기도 하고 전쟁에 나가 승리도 하기도 하고 생명도 구출하기도 하고 또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고백까지도 하게 되지만 오늘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 삶의 패턴을 보면 믿음의 시험, 기근과 기다림이라고 하는 결핍의 시간에 과연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하는 거예요. 실패죠. 불합격이죠.
도대체 믿음이라고 하는 게 뭘까 하는 거예요. 도대체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하는 게 뭘까! 아브라함을 위시한 계속해서 그 이후에 따라오는 그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알려진 그 수많은 사람들의 믿음이라고 하는 게 과연 뭐냐 하는 거예요.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까지를 요구하시는가 하는 거죠. 도대체 어디까지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될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의 과정을 보면 답이 등장하고 있어요. 언제까지냐 하면 한번 읽어봅시다.
‘아브라함의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는 데까지’
아무 생각 없어야 돼요. 좀 극단적인 말이지만 생각이 너무 많아요. 신앙생활을 하는데 생각이 너무 많아요. 자기 생각에 온통 빠져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할 여지가 없어요. 인간의 방법과 그 방편이라고 하는 것이 아브라함 안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변화가 없는 거예요. 왜요? 자기 생각에 빠져 있어요.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 10년 전에 자기 생각이나 지금 생각이나 바뀌었는지 하나도 안 바뀌었어요. 바뀔 리가 없어요. 생각은 그렇게 쉽게 안 바뀌거든요. 하나님을 이용할 뿐이에요. 그냥 하나님이 어느 날 내 생각에 보탬을 줄 뿐이에요. 합리화하고 정당화할 뿐이지 내 생각을 걷어내고 거기에다가 하나님의 생각, 성령의 생각, 하나님의 말씀을 집어넣을 결단이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계속 실패하는 거예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10년을 기다렸다고 그랬잖아요. 10년이란 세월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러나, 여러분 신앙생활에 있어서 얼마를 기다렸느냐 그 자체는 중요하지가 않아요. 내가 신앙생활 10년, 교회 생활 20년, 50년 했다. 그거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10년을 믿음으로 기다렸으나 아직 하나님의 약속을 문자 그대로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없다고 하면 10년이라는 세월 의미 없습니다. 자기 공로일 뿐이고 자기 자랑일 뿐이고, 또 실패하면 자기 낙심, 불평, 불만, 좌절로 이어질 뿐이에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믿음을 요구하고 계세요. 이 뒤섞인 믿음 말고 각색된 믿음 말고 과거가 완전히 단절되고 잘라지고 끊어지고 완전히 새롭게 채워지는 ‘완전한 믿음’ 그래서 믿음의 인내라고 하는 것은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끝까지’ 그런 믿음을 가지셔야 돼요.
또 한 가지 우리가 짚고 넘어야 할 문제는 하갈이 이집트 여인이라고 하는 사실이에요. 성경이 거듭 1절과 3절에 걸쳐 애굽 사람이다, 애굽 여자다. 이것을 강조하고 있어요. 1절에 보면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창세기 16:1) 3절에 가보면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창세기 16:3) 그러니까 성경 저자는 지금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이 여자가 애굽 여자다, 애굽 사람이다라는 걸 강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아브라함과 사라로 하여금 성경을 읽는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애굽 사건을 떠올리게 만드는 거죠.
이 여자는 다른 여자가 아니라 애굽으로 피신 갔을 때 애굽 왕 바로에게 선물로 받았던 그 여인이다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거죠. 결과론적인 말이지만 이집트에 갔기 때문에 하갈을 얻었고 하갈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갈을 취하게 된 것이죠. 반대로 말하면 이집트에 가지 않았더라면 하갈을 얻을 리도 없었고 하갈이 없었다면 앞으로 있을 아들 이스마엘도 없었을 겁니다. 맞죠? 그럼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참 희한한 일 아닙니까? 기근을 피해서 생계를 위해서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내려갔다가 선물로 주는 거 냉큼 받아서 왔는데 그게 나중에 인류 역사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는 씨앗이 되었다 하는 거죠. 무엇을 말합니까? 죄의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라고 하는 것은 우연이 없어요. 죄의 어떤 그 논리 메카니즘을 따져보면 죄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그다음에 또 다른 죄를 낳게 돼 있어요. 우연도 없고요. 반드시 필연적입니다. 왜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내가 운이 없어 죄를 짓게 됐다. 내 원래 팔자가 그래서 죄를 많이 짓는 팔자다! 다 틀린 말이에요. 여러분! 죄는 내가 선택해요. 죄는 더 심각한 건 뭐냐! 내가 그때 별것도 아닌 거라고 택하였던 그 죄가 나중에 엄청난 결과를 갖고 오게 된다고 하는 거예요. 죄는 또 다른 죄의 빌미를 제공하게 돼 있어요. 죄의 씨가 뿌려졌을 때 그래서 그것을 남김없이 정리해내지 않으면 그것은 반드시 나중에 열매를 맺게 돼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농사지어보신 분들 계시죠? 어때요? 여러분! 뭔가 씨앗이 떨어졌어요.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이상하게 필요 없는 게 더 왕성하게 일어나요. 가만히 놔두면 그때 그거 발견하고 뿌리째 뽑아버리거나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저게 뭐 별거겠느냐고 놔두면 나중에 엄청나게 번성합니다. 그게 죄라고 하는 거예요. 마치 소돔 왕 베라 앞에서 나는 네가 제공하는 실 한오라기라도 받지 않겠다고 하는 자세로 이 여인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사라의 여종이 되지 않았더라면 인류의 역사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죄의 씨를 남김없이 제거하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에요.
물론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삶에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 안에 남겨져 있는 그 독초 같은 씨앗을 제거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길이에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되지 않으면 그런 정결한 마음이 되지 않으면 절대 죄는 사라지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영적 공간이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될 수가 없어요. 이 문제 역시도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죠.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10)
마치도 무에서 유로 세상을 창조하듯이 나의 그 마음을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바꿔 주시옵소서! 이게 다윗의 평생 기도였어요. 마음을 바꾸는 거, 영을 바꾸는 거, 그래야 말투도 바뀌고 보는 것도 바뀌고 행동 방식도 바뀌고 저주까지도 복이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믿음은 그냥 하나님 말씀에 대한 단순한 동의가 아니에요. 옳습니다. 그거 진리입니다. 그러면 그렇죠! 그런 게 아니에요. 두 가지로 정리합시다.
첫째, 죄의 원인을 모두 제거하는 것
둘째, 내 생각을 완전히 비우는 것
그런 믿음을 가지셔야 하나님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과 이 세상에서 약속하신 그 언약의 말씀이 온전하게 뿌리 내리고 열매 맺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 은혜가 여러분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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