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31.(주일설교). 예수께서 살아나셨다. 마가복음 16:1~13
노량진 강남교회 (고문산 목사)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마가복음 16:1~13)
현대인들은 부활을 믿기가 참 어렵습니다. 동정녀 탄생 이야기처럼 예수님께서 남자 없이 그냥 스스로 임신을 해서 애를 낳았다고 하는 그 이야기만큼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부활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활에 대해서 어떤 가설을 만들어냈어요? 그러니까 예수가 역사적으로 이 땅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장사되었다라는 사실까지는 믿는데 그다음에 시체가 없어졌어요.
이것을 두고 크게 세 가지 정도의 가설을 사람들이 만들어냈는데 첫 번째 가설이 대세입니다. 뭐죠? 도적설이라고 하는 건데요. 그동안 예수님을 추종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몰래 훔쳐갔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27장 62절 이하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를 찾아가서 부탁을 합니다. 혹시나 제자들이 도둑질해 갈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삼일 만에 예수가 부활한다라고 떠벌리고 다녔기 때문에, 소문이 온 동네에 다 퍼져 있기 때문에, 아마 그 소문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제자들은 예수의 시신을 훔쳐 갈지도 모르니 경비병을 강화시키시옵소서. 그래서 빌라도는 그 말을 듣고 원래 때보다도 훨씬 많은 경비병을 세우고 무덤의 입구를 평소보다도 더 큰 돌로 세워놨던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쳤다고 하는 것이 과연 가능이나 하냐 하는 것이죠. 마태복음 28장 11절 이하에 보면 실제로 시신이 없어진 것을 보고 장로들이 그때 경비를 섰던 군인들을 돈으로 매수합니다. 사라졌다고 말하지 말고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말해라. 그래서 그 말이 유대 사회에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렇게 성경이 기록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이 훔쳐갔다는 가설에 동의합니다. 가설일 뿐이에요. 입증이 되지 않았어요.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세요.
두 번째 가설이 뭐냐면 기절설입니다. 예수님이 죽지 않으시고 어떻게 됐다는 거예요? 네, 잠깐 기절했다가 깨어나서 스스로 도망갔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예수님은 엄청나게 많은 매를 맞으셨어요.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달려서 6시간 이상을 계셨어요. 피와 물이 흘렀고 나중에 병사들이 옆구리를 찔러서 죽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피를 다 쏟아내고 죽었어요. 병사들만 본 것이 아니라 주위의 제자들, 거기 사람들 모두가 둘러서 예수가 죽어가는 것을 구경했고,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은 빌라도에게 시체를 받아서 향을, 향품을 바르고 장례 치르는 것까지도 사람들이 목격하였다. 성경에 기록돼 있습니다. 의학적으로 완전히 사망하신 거죠. 그런데 그런 분이 과연 기절했다? 이 주장이 과연 타당하냐 하는 것이죠.
세 번째 가설은 환상설이라는 게 있습니다. 스승을 잃어버리고 너무 슬픈 제자들이 정신이 나가서 예수님이 부활한 것으로 착각했다는 겁니다. 착각해서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거죠. 그리고 착각해서 복음 전하다가 붙잡혀서 순교를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가 착각한 사실에 근거해서 과연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고 순교까지 각오할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오늘 마가는 제자들이 도무지 믿지 않았다. 보고도 믿지 않았고 듣고도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어요. 우리는 또 이게 이해되지 않죠. 우리 같으면 믿을 텐데 어떻게 제자들은 그거를 못 믿었을까! 믿지 못하였다를 복음서는 강조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제자들이 착각해서 일부러 의도적으로 남은 인생을 부활하지도 않은 예수를 위해 바쳤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상의 가설들이 아니라 성경이 전하는 말씀대로 부활의 진리를 믿을 수 있는 우리가 복된 줄 믿습니다. 우리 믿어지잖아요. 이게 믿어지잖아요. 예수님이 인간적으로 완전히 죽으시고 삼일 만에 완전하게 부활하셨다 하는 성경의 말씀대로 믿고 또 내가 믿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전할 수 있는 우리가 참으로 복된 줄로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오늘은 마가가 전하는 부활 소식을 함께 나눌 겁니다.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에요. 오늘 16장이 시작되기 직전에 마가복음 15장 4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마가복음 15:47)
그러니까 장사 된 그곳을 바라봤다는 것이죠. 장소를 확인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그 여인들이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새벽에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무덤을 방문합니다. 그런데 무덤 문이 이미 열려져 있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는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서 있는 겁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너희가 예수를 찾느냐 그 예수는 여기에 없다. 부활했다. 그러니 이 사실을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알려주어라. 근데 그 말을 듣고도 너무 충격적이어서 벌벌 떱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처음의 목격자인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이 부활의 소식을 알리는데 제자들은 그 소식을 믿지 않았다 하는 내용을 마가는 우리에게 부활 소식으로 알려주고 있어요. 이러한 이야기 속에는 세 가지의 이상한 점이 발견됩니다.
첫 번째 이상한 점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여러분! 이거 정말 이상한 일 아닙니까? 오늘 1절에도 보면 그 사실이 나오는데,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마가복음 16:1)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될 것을 예상한 거예요? 다시 살아날 것을 예상한 거예요? 영원히 죽을 것을 예상한 거예요? 죽을 걸 예상했다는 거예요. 반드시 예수님은 죽을 것이다. 다시는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죽은 사람으로서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향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는 걸 보았어요. 또 6절에 나오는 것처럼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찾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에요? 모두가 예수님을 끝까지 가까이에서 따랐던 사람이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들이에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 (마가복음 9:31)
이 말을 세 번이나 하셨어요. 실제로 예수님께서 사람의 손에 넘겨져서 죽으셨어요. 그런데 여기까지는 이 말씀을 믿는데 그다음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어요.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 예수님이 실제로 말씀하신 대로 죽지 않아도 되는 그분께서 죽었다면 그분은 반드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도 믿어야 하는데, 가장 가까이에서 따랐던 제자들조차도 이 부활의 사실을 믿지 않았다는 겁니다. 또한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을 이들은 체험했어요. 성경에 보면 나사로는 이미 죽은 지가 나흘이 지나서 몸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난다고 그랬어요. 그 시체가 썩어가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 완전히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을 체험했던 것이 제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부활을 기대하거나 정작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도무지 믿지 않았다. 이렇게 마가는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11절과 13절에 보면 제자들이 듣고도 믿지 않았다. 도무지 믿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네! 이런 게 아니라 도무지 믿지 않았다. 우리는 어떻게 믿게 된 거예요? 여러분! 참 신기한 일 아닙니까? 부활을 사전에 준비한 사람도 없었고요. 더구나 부활을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유도한 사람도 없었음을 마가는 우리에게 지금 알려주고 있는 거죠. 도적질해 갔다! 왜요? 뭐 하려고요? 착각을 했다! 이 말이 됩니까? 왜 착각을 합니까? 이렇게 죽은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겼던 제자들인데 뭐 한다고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가고 착각에 빠져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겠느냐 하는 것이죠. 마가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가 다 예외 없이 부활을 놓쳤던 사람들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을 놓친 여인들에게서 마가는 다음과 같은 모습에 주목해서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마가복음 16:3)
여러분! 이 말씀을 우리가 그냥 읽으면 무덤으로 가는 길에 여자들이 걱정을 했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요 진술은 상당히 재미있는 진술입니다. 여러분! 누가 돌을 굴려줄 수 있을까요? 이 여자들이 향품을 가지고 벌써 아리마대 요셉이 다 장례를 치렀는데도 완전히 정신 나가서 어떻게 해서든지 경비병이 지키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도무지 자기들이 옮길 수 있는 돌도 아니라는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계속 머릿속에 무슨 생각만 있어요? 누가 그 돌을 굴려 주리요 하면서 간다는 거예요. 누가 그걸 굴려주겠어요? 없어요! 그 새벽에 이 사람들 대신에 돌을 굴려주냐고요! 그런데 정신이 나가서 서둘러서 계속 가는 거예요. 지금 마가는 죽은 예수를 믿는 공동체가 가질 수밖에 없는 정신 상태를 성경을 통해 지적하고 있는 거예요. 신앙생활을 하되 죽은 예수밖에는 믿을 수 없는 그 사람의 인생을 이 단면으로 그려주고 있는 거죠.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걱정하는 사람, 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자신의 정력과 에너지를 소비하며 인생을 낭비하는 개인과 공동체를 지금 마가는 지적하고 있는 거죠. 온통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그냥 무조건 어디론가로 달려가는 부질없는 짓만 하는 그런 개인과 공동체를 지금 마가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거죠. 반대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돌이 있으면 하나님이 치우실 것이다 하는 믿음으로 사는 거죠. 내가 할 수 없는 그것을 누가 하신다? 하나님이 하신다! 당연히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하여 미리 속단하지 말고 모두 하나님께 맡기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 살아계셔요. 아멘 이죠?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보고 계시고 여러분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며 응답하시는 그 주님께서 여러분의 인생길에 버티고 있는 모든 걱정과 근심의 장애물들을 다 제거할 줄로 믿으시고 전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이상한 점은 이겁니다. 부활의 증인들이 모두 사회적 약자다.
1절에 언급된 사람들이 모두 여자들이에요. 당시에 여자는 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이에요. 변두리에 있는 사람이에요. 여인을 법정에 증인으로 채택한다는 사실 자체가 문헌에 나오질 않아요. 희박한 경우입니다. 여자는 아버지나 남편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이고, 인구 통계에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아닌 여자를 더구나 천민 계층에 속한 여자들을 이 부활과 같은 중대한 사건의 증인으로 소개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왜 그렇게 했을까! 더욱 이상한 건 뭐냐 하면 9절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가복음 16:9)
부활의 첫 증인이 누구예요? ‘막달라 마리아’ 근데 막달라 마리아를 누구라고 소개하고 있어요. 전에 예수님이 일곱 귀신을 쫓아낸 여자예요. 쉽게 말하면 미쳤다가 예수님께 치료받은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동네 사람들한테 치료받았다는 것이 입증됐는지 안 됐는지 모르겠으나 하필이면 부활의 첫 증인이 누구냐? 미친 여자다! 그 말이에요. 귀신 들렸다가 귀신에 미쳤다가 치료받은 여자가 증인이 되고 있다. 여러분 같으면 이 여자가 전하는 소식을 믿겠어요? 저런 미친 여자가 있나? 아이고 저 정신 돌아온 줄 알았더니 또 미쳤네! 이러지 않겠어요? 왜 하필이면 이런 여인을 부활의 첫 증인이요. 목격자로 세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중대한 사건에 참 희한하죠. 여기에 부활에 대한 역설적 진리가 담겨져 있어요. 그것은 부활이 확실한 진리이기 때문에 그래요. 저 여자가 미쳤다라고 오해를 받아도 여자가 증거를 한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그 부활의 사실을 그 여인이 목격했다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성경은 그것을 굳이 고쳐서 기록할 필요가 없어요. 만들어서 기록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있는 그대로 일어난 그대로 적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까지 전해준 것입니다. 왜 그래요? ‘Fact’ 진리이기 때문이에요. 기독교 신앙은 이 부활의 사건, 분명하게 일어난 사건 위에 서 있음을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부활의 진리를 그대로 받아서 믿게 된 우리가 그래서 복된 사람들이죠. 그걸 또 다음 세대에 증언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두 가지 정도 기억할 것이 있는데요. 첫째는 하나님은 지금도 사회적 약자를 사용하신다는 거예요. 유난히도 사회적 약자들에게 집중하고 계세요. 그들을 통해 여전히 말씀하시고 일하신다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고 어떤 세상적인 기준이나 가치를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하거나 대우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대로 사회적 약자분들은 혼자의 힘으로 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님도 그런 사람들에게 울부짖는 사람, 고통받는 사람에게 유난히도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그냥 그 사람에게 해줘라. 그게 나한테 해주는 거다라고까지 말씀을 하시잖아요. 그런데 더 중요한 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약한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낸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이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분들, 외국인 노동자나 난민들, 이런 분들을 더욱더 관심을 가지고 잘 섬겨야 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이 결국에는 이 부활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 땅 가운데 능력의 부활의 증인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여자를 사용하신다. 뭐 당연한 소리를 하십니까? 저는 오늘 이걸 강조해야겠어요. 여러분! 하나님이 누구를 사용하신다고요? 여자를 사용하십니다. 한번 따라 합시다. 여자가 살아야 집안이 산다. 여자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아멘이십니까? 그럼 민족이 살려면요. 여자가 살아야 합니다. 왜 그렇게 여자는 낳아서는 안 되고 여자는 떠들면 안 되고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만 합니까? 남자는 되고 여자는 안 되고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만 합니까? 우리나라 초대교회 역사에도 보면 이 교회의 출발점에 항상 여자분들이 계셨어요. 어떤 분은 태어날 때 양반 규수(閨秀)로 태어났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자신의 계급을 다 버렸어요.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 학교를 세우는데 자신의 남은 생애를 다 바친 여인들이 상당히 등장합니다. 또 태어나서 배우지 못했어요. 한글도 몰라요. 기억력도 부족해요. 그런데 한글 배워보려는 욕심으로 성경을 배우다가 그 성경에 은혜받고 그 성경의 주인공이 과연 누구인가! 기도하다가 예수를 만나버려요. 그분이 일평생 복음 전도자들의 밥을 해먹이고 옷을 입히며 가난한 사람들, 문둥병자들을 치료하는 이 교회의 어머니가 되는 이야기들이 교회에 많이 나옵니다. 여러분! 멀리 쳐다볼 거 없잖아요. 우리 70주년을 맞이한 강남교회는 남편 예수 안 믿죠! 시어머니 불교 신자죠! 그런 집안에 혼자 와서 애 업고 교회 와서 기도하고 예수 믿고 시어머니 변화시키고 시아버지 변화시키고 남편도 예수 믿게 하는 역사 그 위에 우리 강남교회가 세워진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70주년 부활절을 맞이해서 우리 한국교회 안에 여성들에 대한 그 가치와 그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고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새로운 길이 우리 교회로부터 활짝 열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 이상한 건 이거예요. 시작. 부활의 장소가 아주 조용한 곳이었다. 오늘 2절 말씀에 보면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마가복음 16:2) 아직 해가 안 떴어요. 해 돋을 때쯤에 그 무덤으로 갔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미명에 혹은 새벽에 아직 어두울 때라고 밝히고 있어요.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곳에 도무지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 어두운 시간에 누가 무덤을 방문하겠습니까? 부활의 장소가 차라리 화려한 궁궐이었다면 어땠을까? 부활의 시간대가 한낮이었으면 어땠을까? 이왕이면 여자나 귀신 들렸던 여자가 아니라 빌라도나 헤롯과 같은 영향력 있는 권세자들 앞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어땠을까? 사람들이 오고 가는 시끌벅적한 시장통이나 광장 요즘에 막 유세하잖아요. 모두 다 들으라고 그러죠. 그렇게 부활의 소식을 알렸더라면 아니 그 유튜브로 생중계하면서 말이죠. 예수님의 부활! 지금 예수님 부활하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유튜브에 방영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효과적이었을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렇게 조용한 시간에 부활의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아무의 이목도 끌지 못하고 왜 부활은 이렇게 조용하게 진행이 되었을까! 하는 점이죠. 복음의 역사가 항상 이런 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시골의 초라한 목수의 아들로 출생하셨어요. 이왕이면 궁궐의 왕자로 나타나든가 재벌 집에 말이죠. 만수르 아들이라든가? 이런 거 좋잖아요. 세례받으신 후에도 유난히 사회적 약자들에 속한 어부나 세리 등을 제자로 불러내셨어요. 그들과 함께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의 틈으로 들어가셔서 결국에는 끝내 십자가에서 무능하게 돌아가시고 여인들을 통하여 부활을 알리도록 하셨다. 이런 성경의 내용을 읽어보면 너무 비효율적이에요. 저 같으면 이렇게 안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유난히도 부활은 아주 조용하게 비효율적으로 진전되고 있다는 것이죠. 오늘 7절에 언급된 것처럼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먼저 알려주세요.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마가복음 16:7)
예수님의 부활이 어두운 무덤가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1차적으로는 슬피 울며 실의에 빠져 있는 그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전해져서 그들이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어요. 그러니까 성경 복음서 저자의 관심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이 부활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지만 1차적으로는 예수님과 함께 살고 그 십자가를 떠났던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그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라고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부활의 증인! 이것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5:4~8)
이들은 도무지 부활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부활하셨다는 소식에 도무지 믿음도 없었던 제자들이 과연 어떻게 부활의 증인이 되었는가! 예수님께서 부활의 몸으로 이들에게 다시 나타나 보이셨어요. 몇 명이에요? 오백명이 넘죠? 지금 여기 앉아계신 숫자만큼이나 다 보여주셨다는 거죠. 이것을 누가 부인하겠어요? 더욱더 중요한 것 오늘 본문 읽지 않았지만 20절의 말씀입니다. 결론 말씀이죠.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느라.” (마가복음 16:20)
주님이 나타났는데도 말을 걸어오는데도 제자들은 그때도 믿지를 못했어요. 찾아오셔서 함께 말을 하고 있는데 그분이 예수님인 줄 몰랐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식사하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이분이 부활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데 복음을 전하다가 부활하신 주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셨어요. 이것이 환상이 아니라 내 눈의 착각이 아니라 실제로 몸으로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용기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다가 체험하여서 확실하게 증거하는 복음의 증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죠. 거부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죽어도 괜찮은 거예요. 왜? 예수가 살아 계시니까! 나와 함께 역사하시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물어볼게요.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믿으셨습니까?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되셨습니까? 예수님이 여러분께 나타나셨나요? 어떻게 믿을 수 있어요? 참 이게 신기한 일입니다. 요한복음 2장 29절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9)
도마에게 한 말입니다. “나는 말이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손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부활한다는 건 안 믿을 거야. 절대로 안 믿을 거야.” 했던 도마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십니다. “본 고로 믿느냐? 보았다고 믿을 수 있겠느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더 복되도다.” 그리고 그 베드로는 신도들에게 뭐라고 말했냐면 나중에 “당신들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는 보았어요. 자기는 보았는데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어요. 예수님을 떠났던 제자예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확인한 후에 그 길을 따랐던 제자 베드로가 그 베드로 공동체, 예수님을 전혀 만나보지 못한 실제로 경험해보지 못한 모든 신도들에게 서서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보지 않고도 그분을 사랑하니 여러분들이 참 복된 분들입니다.
부활의 복음을 우리는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는데 성령께서 믿게 하시는 거죠. 할렐루야! 보고도 못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지 않았으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본 것 이상으로 믿고 그것에 우리의 남은 생애를 걸 수 있게 되는 거죠. 이제 부활절을 맞이해서 주님이 여러분들을 다시 조용히 부르고 계십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생명의 소식을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와 이 세상 속에 증거하셔야 돼요. 만약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 들은 다 헛된 일입니다. ‘새 생명 작정’ 뭐하러 합니까? 교인들 모으려고요? 그런 거 안 합니다. ‘기도ON 300용사’ 뭐하러 모집합니까?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없는데 뭐 하러 기도합니까? 주님이 살아계셔서 기도를 듣고 우리가 지금 이름을 써서 작정하고 소리 질러 기도하고, 그러면 주님이 그 사람의 이름을 들으시고 우리보다 먼저 그곳으로 가셔서 영원히 예수 믿게 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부활을 믿으신다면 부활을 몰라 죽어가는 헛된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는 그런 모든 사람들을 작정하시고 기도하셔서 그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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